속리산 말티재와 영동 영국사를 찾아
2020년 10월 19일,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 말티재와, 영동에 있는 천태산 영국사를 찾아 가을 여행을 떠났다.
네비에 보은 대추축제장을 치고 길을 찾아가는데,처음부터 길을 잘못들어 엄청 애를 먹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는 애로가 있기도 했다.
본래 계획은 보은에서 개최되는 보은 대추축제를 돌아보고,석비박물관이 있다기에 그곳을 한번 답사해볼 예정이었는데,대추축제는 코로나 관계로 온라인으로 실시된다기에 말짱 꽝이 되고 말았고,석비박물관은 어디 있는지 알길이 막연해 이역시 헛방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딜 가볼까 망설이던차,속리산 말티고개를 가보라는 추천을 받게된다.
속리산은 여러차례 가본 곳이라서,소개받은 말티고개만을 가보자고 현장을 찾아가는데,아짤하고 꼬불꼬불한 고갯길이 무척이나 스릴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말티고개 관문 스카이 전망대 누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취해 기념촬영의 시간을 보내고,속리산으로 향하는 길이 있어 정이품 소나무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렸다.
소나무를 찾아 인증 사진들을 찍고,인근 전주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서 천태산 영국사를 찾아가는데,이번에도 보은을 찾던 이상으로 말할수 없는 고생길이 펼쳐졌다.
영국사가 옥천에 있는줄 알았는데,영동땅에 있어 혼선을 빗기도 했고,가는 길이 예상보다 너무나도 멀었는가 하면,심지어는길을 잘못찾아 엉뚱한 산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예 포기하고 나오려던 차에 레미콘 기사를 만나 그 기사를 따라가니 우리가 거쳐온 바로 인근에 있지않는가!
어렵사리 찾았던 영국사였지만,우리가 정작 보고 싶었던 천년묵은 은행나무를 보고서는, 피곤했던 스트레스와 모든 피로가 말끔히 씻겨지게 되었다.
오늘 여행은 우여곡절의 많은 고생길이 펼쳐지기도 하였지만,예상치 않았던 말티고개의 멋진 경관과, 천년된 은행나무를 목격하고 돌아올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던 추억여행으로 간직될듯 싶다.
보은에 있는 술 취한듯한 멋진 다리
가로변 대추판매장에서
대추축제는 보지 못했지만,이곳에서 대추맛을 맛보며 대추를 사오기도 했다.
말티고개를 찾아가는 길목에...
말티고개 자연휴양림이 있어 찾아갔는데,식사시간이라며 문이 걸어 잠겨 있어 되돌아 나왔다.
말티고개 관문
말티고개 또는 말티재는 충북 보은군 장안면에 속해있는 고갯길로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올랐던 곳으로 알려진다.
말티고개라는 현재의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구경 오면서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엷은 박석 돌을 깐것이 시초가 되어 지금의 말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도의 형태로 존재하였지만 현대적인 형태의 등산로로 개설된 것은 충청북도 박중양지사가 1924년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하기 위해 현재의 포장도로가 닦아지게 되었단다.
오늘 차중에는 쓰리 박이 동행하였는데,우리 박씨 도지사께서 이런 훌륭한 일을 하셨다니 더욱 자랑스럽다는 으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국화꽃 전시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고....
산에는 코스모스와 구절초,들국화가 가득 피어 있기도.....
스카이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찔한 고갯길
정이품소나무와 기념촬영들을 마친후, 점심식사를 하고 옥천으로 향했다.
천태산 영국사를 치고 가는데,이때 고생을 무진장 치루는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엉뚱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되돌아 나오면서
그곳에는 보기드문 메밀밭도 있었다
영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천태산은 지륵산(智勒山) 또는 천주산(天柱山)이라고도 한다.
527년에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였고, 고려 문종 때 의천(義天)이 중창하여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 산 이름을 천주산이라 하였다. 뒤에 다시 공민왕에 의하여 영국사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홍건적들이 황해도를 건너서 개경까지 육박하자, 왕은 이 절로 피난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원(伊院) 마니산성에 근위병을 포진하여 놓았다.
이 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해놓고 옥새를 맡겨두었다.
그 뒤 마니산성의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함정에 빠뜨려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자, 공민왕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평군민안(平君民安)이 되었으니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라 하고 현판을 써준 뒤 떠났다 한다.
또한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洗師國師)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절 이름을 영국사로 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 뒤 1893년(고종 30) 춘계(春溪) 등이 삼축당(三祝堂)을 중수하였으며, 1934년 영동군수 이해용(李海用) 등이 힘을 모아 사찰을 중수하였다.
1942년에 옛 절터에 있던 삼층석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고, 1979년에는 법산(法山)이 대웅전과 요사 등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국사 만세루
극락보전
대웅전
범상치 않은 소나무
드디어 천살 먹은 은행나무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볼수 없기에 누군가에게 물어 차게 되었는데.....
찾고보니 사찰 입구 아래에 있어 우리가 미쳐 발견치 못했던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223호. 수령은 500년 내외로 추정되며, 높이 18m, 가슴높이둘레 6.4m이며, 가지는 동서로 14m, 남북으로 19m 정도 퍼져 있다.
첫째가지는 2m 정도에서 갈라졌으며, 서쪽으로 퍼진 가지 중의 1개는 밑으로 자라서 땅에 닿았다.
땅에 닿은 가지 끝에서 뿌리와 새순이 자란 것은 높이 3m 이상이며, 가슴높이지름이 20㎝에 달한다.
.이 은행나무는 바로 길 옆의 냇가에서 자라고 있는 독립수이며, 수령은 영국사의 창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각 부분의 상처가 커져서 작은 굴이 생겼으므로, 1979년 외과수술을 실시함과 동시에 약화된 가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1개의 지주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