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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요약>
김남천은 소시민지식인이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사유의 중심에 놓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현실에 맞는 이론으로 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 출생 – 사망 : 1911. 3. 16. ~ 1953년
- 출생지 : 국내 평안남도 성천
- 데뷔 : 1931. 「공우신문」 발표
1911년 3월 16일 평남 성천 출생. 1929년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대에 입학하였으나 1931년 제적되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에 가입했으며 무산자사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로 평론활동을 시작한 그는 임화와 함께 문예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창하고, 「공우신문」(1931), 「공우회」(1932)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평양 제네스트 등의 노동쟁의에도 참여하였다.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출옥 후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의 문제로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물 논쟁」에서 자신을 소시민 지식인으로 규정한 김남천은 어떠한 방식으로 소시민지식인이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사유의 중심에 놓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현실에 맞는 이론으로 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는 바, 소시민 작가의 자기고발에서 시작, 관찰문학론에 이르는 창작방법론의 변화는 이러한 모색의 과정이었다. 결국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사적 운명과 ‘작가의 세계관 여하에도 불구하고 관철되는 리얼리즘’의 방법에 빠져들었지만, G. 루카치의 장편소설론을 수용, 「소설의 운명」(1940)에서 장편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역사철학적 탐구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장편 『대하』(1939)를 비롯하여 「처를 때리고」(1937), 「제퇴선」(1937), 「가애자(可愛者)」(1938), 「장날」(1939) 등 그가 창작한 대부분의 소설들은 자신의 창작방법론을 작품으로 실천해보려 한 것이지만, 오히려 방법론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갖고 있지 않은 「남매」(1937), 「경영」(1940), 「맥」(1941)과 같은 작품들이 더 높은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중 『대하』는 가족사, 연대기를 자신이 제창한 모랄론‧풍속론과 결합시켜 장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이며, 「경영」, 「맥」 연작은 1930년대 후반 전망이 불투명한 지식인의 고민을 사상사적인 과제로 제기한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직후 김남천은 조선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였고, K. 마르크스, F. 엥겔스, V. I. 레닌의 문학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7년경 임화와 함께 월북,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남로당 숙청 때 박헌영(朴憲永)‧임화(林和) 등과 함께 숙청되었다. 1953년 혹은 1955년 사형되었다고도 하고, 1977년까지 생존하였다고도 한다. 소설집으로 『소년행』(1938), 『삼일운동』(1947), 『맥』(1947)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대하』(1939), 『사랑의 수족관』(1940)이 있다.
<학력사항>
~ 192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일본 호세이대학교
<경력사항>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도쿄지부 가입, 무산자사 활동, 조선문학가동맹 활동,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
<작품목록>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
∙경제적 파업에 관한 멘세비키적 견해
∙공장신문
∙반 ‘카프’ 음모사건의 계급적 의의
∙공우회
∙나란구
∙남편, 그의 동지
∙문학시평
∙물!
∙잡지문제를 위한 각서
∙임화에 관하여
∙임화에게 주는 나의 항의
∙임화적 창작평과 자기비판
∙문학적 치기를 웃노라
∙생의 고민
∙문예구락부
∙당면과제의 인식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전환의 문제
∙어린 두 딸에게
∙창작과정에 관한 감상
∙지식계급전형의 창조와 ‘고향’ 주인공에 대한 감상
∙문예시감-문예가협회에 대하야
∙문단시감-이광수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
∙공식과 문학사
∙조선은 과연 누가 천대하는가?
∙‘앙케이트’ 금년 조선문단 수확
∙건전한 사실주의 길
∙‘꼴키’에 관한 단상
∙춘원 이광수씨를 말함
∙꼴키를 곡함
∙비판하는 것과 합리화하는 것
∙제퇴선
∙춤추는 남편
∙남매
∙4월 창작평
∙문장‧허구‧기타
∙취향 독후감
∙사상‧작품‧문장-이기영 검토
∙인간수업 독후감
∙처(妻)를 때리고
∙고발의 정신과 작가
∙소년행
∙창작방법의 신국면
∙지식인의 자기분열과 불요불굴의 정신
∙고전에의 귀환
∙동인지의 임무와 그 동향
∙잡담은 잡담
∙최근 평단에서 느낀 바 몇 가지
∙조선적 장편소설의 일고찰
∙11월의 창작평
∙‘유다’적인 것과 문학-소시민 출신 작가의 최초 모랄
∙철령까지
∙자기 분열의 초극
∙요지경
∙비판초점의 시정
∙가애자
∙세기의 화문
∙도덕의 문학적 파악
∙생일전날
∙일신상 진리와 모랄
∙소재와 주제와 작가정신
∙태도‧풍속‧묘사‧기타
∙누나의 사건
∙미담
∙문단시감
∙일반문화
∙조선문학의 성격-모랄의 확립
∙비평적 정신은 건재-최재서 평론집 독후감
∙자작안내
∙장편소설에 대한 나의 이상
∙무자리
∙현대조선소설의 이념
∙세태와 풍속
∙포화
∙11월 창작평
∙명일의 조선문학-리얼리즘‧로맨티시즘‧휴머니즘 논의
∙이해에 마즈막 쓰는 결산 논문
∙작가의 생활
∙작금의 신문소설
∙희귀한 흥분-신인 단편집 독후감
∙단오
∙10년 전-작가생활의 회고
∙1월 창작평
∙고리오옹과 부성애‧기타-발작크연구 노오트
∙동시대인의 거리감-9월창작평
∙문학정신의 건립-문예발전책
∙비평가와 작가의 괴리
∙유진오 단편집
∙작가의 정조
∙박태원씨 저 ‘천변풍경’
∙창작여묵
∙녹성당
∙주말여행
∙내가 영향받은 극작가-청년 쇼로호프
∙이런 안해
∙문학과 모랄
∙시대와 문학의 정신-발자크적인 것에의 정열
∙5월
∙바다로 간다
∙‘비판’과 ‘나의 십년’
∙사실의 재편성
∙이리
∙장날
∙항민
∙권위에의 아첨
∙나의 창작노트-작품의 제작과정
∙소설의 당면과제
∙여류문학 저조의 문제
∙자부심 유감
∙길 우에서
∙양도류의 도장-내 작품을 해부함
∙풍속과 소설가
∙사랑의 수족관
∙살인작가
∙조선문학과 연애문제
∙어머니
∙T 일보사
∙영화 예술 완성에 따라-시나리오를 문학의 장으로 보나
∙이효석 저 ‘화분’의 ‘성모랄’
∙산문문학의 일년간
∙성격과 편집광의 문제
∙신세대론과 신인작품
∙토픽 중심으로 본 기묘년의 산문문학
∙대하
∙소년행
∙경영
∙속요
∙송년호 작품의 인상
∙신문과 문학
∙채만식 저 ‘탁류’의 매력
∙낭비
∙신진 소설가의 작품세계
∙문예시평
∙관찰소설론
∙체험적인 것과 관찰적인 것-속 관찰문학소론
∙성격의 피라밋드 설-전형창조의 이론과 실제
∙영화인에게 보내는 글-공수평론
∙노고지리 우지진다
∙아메리칸 리알리즘의 교훈
∙일지사변삼주년 기념-순직 [특집]
∙원리와 시무의 말
∙소설문학의 현상
∙어머니 삼제
∙소설의 운명
∙추수기의 작단-창작평
∙동태와 업적-창작계
∙사랑의 수족관
∙기행
∙전환기의 작가
∙그림
∙맥
∙소설의 장래와 인간성 문제
∙오디
∙한화수제
∙개화풍경
∙등불
∙구름이 말하기를
∙효석과 나
∙두 의사의 소설
∙惑る朝
∙목화
∙8‧15
∙문학의 교육적 임무
∙본격소설의 완성
∙해방과 문학건설-건국과 문화제언
∙해방과 문화건설
∙문학자의 성실성 문제
∙문학자대회의 의의
∙민족문화건설의 기본임무
∙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
∙3‧1운동
∙간판과 문화정책
∙덮어놓고 뭉치자의 이론적 의상
∙조선문학의 재건
∙꼴끼의 세계문학적 지위
∙논쟁유감
∙순수문학의 제태
∙동맥
∙원뢰
∙창조적 사업의 전진을 위하여
∙민족문화건설의 태도정비
∙시와 자유
∙대계의 초일보
∙문학평론의 제 과제
∙신 단계에 처한 문화운동
∙종합예술제를 앞두고
∙문화정책의 동향
∙남조선의 현 정세와 문화예술의 위기
∙대중투쟁과 창조적 실천의 과제
∙3‧1운동
∙대하
∙맥
∙사랑의 수족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남천 [金南天]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재편집: 오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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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 : 평론가
김남천은 1930년대 초부터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카프의 중추적인 작가 겸 평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해방 이후에는 문학가 동맹의 간부로서 활약하다가 남한정부 수립 이전에 월북한 수년 후 숙청되었다.
그는 1911년에 평남 성천(成川)의 전통적인 가풍을 지닌 중농(中農) 집안 출신으로서 본명은 김효식(金孝植)인데 그후 남천(南天)을 필명으로 썼다. 1929년에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동경에 건너가 호세이(法政) 대학 유학생활 중 반제국주의 지원동맹 등의 프로문학 조직에 가담하였다. 같은 고향출신인 한재덕(韓載德)과는 소ㆍ중학교 동창생이요 일본에서는 같이 하숙생활을 했던 사이다. 그는 한재덕과 함께 카프의 동경지부가 발행하던 기관지 《무산자(無産者)》 모임에 참여하여 임화, 안막, 리북만 등과 국내의 카프 개혁을 부르짖었다. 방학 중에는 고향에서 청년동맹을 조직하고 평양고무공장 직공파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0년 여름에는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중외일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1931년에는 호세이 대학에서 제적되어 귀국한 후에 자신이 직접 평양의 공장파업에 가담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 「공장신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것과 함께 카프의 극좌파로서 프로문학 운동에도 앞장섰다. 같은 해 카프의 제1차 검거 때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된 바 있다.
옥살이를 마치고 나와서는 한때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자전적(自傳的)인 소설 「남편 그의 동지(同志)」와 「물」 등을 발표했다. 특히 자신의 옥중 체험을 주로 해서 쓴 「물」로써 임화와 심한 논쟁을 벌여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러나 논쟁을 벌이고 난 이듬해인 1934년 5월에는 임화와 함께 예의 카프 해체계를 경기도 경찰국에 제출하여 훗날에 비해소파인 한설야나 리기영 등과 반목이 심화되게 된다.
카프 해체계를 내던 무렵에는 뜻밖에 본처(김진해)와 사별하여 삼년 동안은 창작이 별무한 대신에 일련의 창작방법론이나 「빠르뷰스를 추도함」, 「고리끼를 곡(哭)함」 등의 문예시론적인 평론을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던 중 후처(박복실)와 재혼한 다음에는 보다 새롭게 왕성한 작품성과를 보이고 있다. 재혼을 계기로 잦은 투옥과 오랜 방황을 마감하고 한결 안정된 처지에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임한 것이다. 소설만 하더라도 1937년에는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소년행(少年行)」을 비롯해서 「처(妻)를 때리고」 등 6편을, 1938년에는 「요지경」, 「무자리」, 「생일 전날」 등 9편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39년에는 장편인 『대하(大河)』를 비롯하여 『사랑의 수족관』을 장편으로 신문에 연재하며 단편소설인 「장날」, 「단오」 등 모두 14편을 활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소설에 비해 평균 갑절의 편수를 보이는 평론을 참고하면 그 왕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는 창작이나 평론 등이 반감(半減)된 소강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일제 말엽에 임한 시대상과 함께 일종의 사상범으로서 감시 대상인 작가 자신의 처지에서 문학의 행동반경이 좁은 규제조건과도 상관된다. 작품 내용에서도 다분히 전향자적이거나 자성적(自省的)인 면이 짙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940년에 발표된 미완(未完)의 장편인 『낭비(浪費)』와 역작 중편인 「경영」 및 단편 「어머니 삼제(三題)」, 1941년에 발표된 중편 「맥(麥)」이나 단편 「그림」, 「오디」 등이 그것이다. 또한 1942년에 들어서는 단편 「등불」과 중편인 「구름이 말하기를」 연재가 고작이고 1943년이나 1944년에 와서는 평론 발표마저 중단된 상태였다.
하지만 해방을 맞은 1940년대 후반부터는 문필활동이나 문단 활약상이 다시 활발해진 양상을 보인다. 광복의 감격과 원활해진 언론의 자유에 힘입어 1945년 말엽 들어 「8ㆍ15」란 장편을 연재하고 단편 「목화」, 「문학의 교육적 임무」, 「해방과 문화건설」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이어 1946년에는 새로 「3ㆍ1운동」이란 희곡을 연재하며 단편소설 「원뢰(遠雷)」와 가족사소설인 『대하(大河)』 후속편으로 「동맥」 등을 활자화시킨다. 평론으로도 「민족문화 건설의 기본 임무」, 「문학자 대회의 의의」 등 시사적인 글을 위시한 10편이 넘는 평론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월북하기 직전인 1947년의 상반기에도 평론만 「종합예술제를 앞두고」, 「현단계에 처한 문화운동」, 「현정세와 문화예술의 위기」 등 여러 편의 시사적인 글을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결행된 김남천의 월북은 작품활동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그의 문단운동에 연결된다. 사실 그는 해방 뒤 박헌영의 지원을 받아서 1946년에 이른바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무위원직을 맡아오다가 이듬해에는 문학가동맹부위원장까지 맡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대구폭동 사건 이후 공산당이 불법화된 나머지 1947년 봄에 열기로 했던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 개최가 실패로 돌아가고 여름에는 그들 회관마저 폐쇄되자 남로당 계열의 측근문인이던 림화, 리원조, 안회남 등과 더불어 북행(北行)한 것으로 파악된다.
월북한 뒤 1948년에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지낸 다음 박헌영 직계로 외무성에서 일하던 이강국 밑에서 정보업무를 맡던 김남천은 한때 문예총의 서기장 일까지 보았다고 전해진다. 6ㆍ25 전쟁 중에는 전선취재차 낙동강 가까운 곳까지 남하했다가 부상을 입고 인천상륙작전 직후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을 데리고 다시 월북하였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1953년의 박헌영 일파에 대한 숙청에 이어 거세되어 버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남천이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 중 거의 유일한 단편인 「꿀」에 대한 엄호석의 비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예총 서기장으로 있던 1951년에 발표했던 그 작품의 주인공인 정찰병이 전투 중 부상한 몸으로써 적진에 낙오되었다가 노파에 의한 꿀의 효험으로 구출된다는 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소설에서의 전형성’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식민지 시대부터 수 많은 수배와 옥고를 겪으면서 펼쳐온 좌익적 문예 활동에 앞장서서 싸워오다 맞게 된 분단시대 비극의 문인으로서 대표적인 모델이 된 격이다. 사실 그의 수 많은 문학은 초기의 「공장신문」, 「공제생산조합」, 「조정안」(희곡) 등은 물론이요 중기의 옥살이 체험을 쓴 「물」, 「남편, 그의 동지」, 「처를 때리고」, 「녹성당」 등 대다수의 작품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짙다. 시사적인 문제를 자주 논한 그의 평론도 이런 일상의 문학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김남천의 삶과 문학은 남북한 문학사 양쪽에서 모두 배제되어 오다가 근년에 겨우 남쪽에서만 해금(解禁)되었을 뿐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남천 (북한문학사전, 1995. 11. 20., 이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