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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092
1월3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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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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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Pw0YNsh824
[서울대교구 은성제 요셉(가틀릭청소년이동쉼터 서울A지구 소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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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 두렵고 경외로운 이름, 절대 신성시되는 이름, 그래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공개적으로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변방 나자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쳤으니,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분노와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마디로 목숨을 건 증언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이 간략한 증언 한 마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운명에 대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이 세상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세례자 요한은 그분을 향한 표지이자 상징으로 ‘어린양’이란 호칭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의 상징조차 사자, 독수리, 황소등으로 표상되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칭호가, 공룡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고작 어린양이라니요!
양은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초식동물입니다. 힘없고 빽없는, 그래서 틈만 나면 맹수들에게 쉽사리 잡혀 먹히는 약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양들 가운데서도 갓 태어난 어린 양에다 예수님을 갖다 붙이니,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각하니, 어린양보다 더 잘 들어맞는 호칭은 다시 또 없는듯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여정을 쭉 따라 가보니, 단 한 마디로 표현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어린양의 삶을 철저히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도 고수하셨던 기본 노선은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치고 계십니다.
올라서지 말고 내려서라고!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라고! 이기려고 기를 쓰지 말고 한번 져보라고!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한번 죽어 보라고!...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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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k_lUYarg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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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세례 받는 법>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에 관해 말을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의 세례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요한이 불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바로 물의 세례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하얼빈’입니다. 주인공 현빈은 처음에 안중근 역을 맡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칫 현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서 그 인기를 잃게 될까 봐 거부하려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빈은 그런 이유 때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무게감을 자기가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근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혹시나 자신의 부족한 연기가 그분의 위대함을 저해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해 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영하의 추위에서 관객을 속이지 않는 현실감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인지, 현빈은 마지막 장면을 다 찍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그 무거운 압박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중근의 무게가 컸으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가 현빈처럼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요? 현빈은 그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고 실제로 추위와 전투 장면 속에서 그를 체험해냈습니다. 그만큼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인생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이 ‘불의 세례’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웅’이나 ‘하얼빈’과 같은 안중근 의사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뮤지컬이나 영화를 본다면
이는 물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분으로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알리려는 누군가에 의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것으로 그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의 세례를 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리려고 할 때 불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제가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건 불의 세례였습니다. 눈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제가 되어 그분의 증거가 되겠다는 물의 세례를 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다음에 온 것입니다. 불의 세례를 받아야 그분으로부터 직접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에서 유관순 역을 맡았던 고아성 배우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 배우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심장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불의 세례인 것입니다. 물의 세례를 주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 태어남의 축복입니다. 이 장면을 8호실 안에 있던 25명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낭독했고 컷이 되자마자 다들 약속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뜻깊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주연 짐 카비젤은 이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짐 카비젤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찍기 직전 의사로부터 심장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멜 깁슨 감독은 계속 찍을 것이냐고 짐에게 물어봅니다. 짐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저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는 자신에게서 탈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곧 물의 세례를 주려고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이에 관하여 짐 카비젤은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모두들 부활은 원하지만, 고통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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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를 읽고 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파에톤의 신화와 마법사의 빗자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파에톤은 자신의 욕망으로 태양을 끄는 마차를 움직이겠다고 합니다. 태양을 끄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성실해야 합니다. 파에톤은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지나치게 지구에 가까우면 화재가 발생했고, 지나치게 지구와 멀어지면 지독한 추위가 생겼습니다. 결국 제우스는 파에톤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끄는 마차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괴테는 마법사의 빗자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빗자루 마법을 하는 스승이 제자에게 항아리에 물을 담아 놓으라고 명령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제자는 꾀를 내서 빗자루에 마법을 걸었습니다. 빗자루는 강에서 물을 길어서 항아리에 옮겨 담았습니다. 마법을 걸 수는 있지만 푸는 방법을 몰랐던 제자는 겁이 났습니다. 빗자루가 계속 물을 길어오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이 빗자루를 둘로 잘랐습니다. 그런데 둘로 잘려진 빗자루는 더 많은 물을 길러왔습니다. 동네가 물바다가 될 즈음에 스승이 돌아왔습니다. 스승은 마법을 풀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파에톤은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며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그 결과는 세계적 파괴였습니다. 이는 리더가 자기의 능력과 권한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이 초래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지도자가 권력의 도구(마차)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음을 드러냅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위기를 명분으로 과도한 권력을 행사할 때, 이는 국민과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는 매우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마법사의 빗자루는 힘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혼란과 재앙을 상징합니다. 비상계엄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남용될 때, 경우 헌정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미 45년 전에 경험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삼청 교육대는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품위를 짓밟은 사건이었고, 그 이면에는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가 파에톤의 직무를 정지하였듯이, 대한민국의 국회는 탄핵을 통해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습니다.
파에톤은 자신의 자격과 책임에 대한 숙고 없이 태양 마차를 몰겠다는 자만으로 인해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책임 없이 사용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철저히 인식하고 겸손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역할을 제한했습니다. 마법사의 빗자루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무분별한 힘 사용의 상징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하며,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라는 고백으로 힘과 영향력을 욕망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비상계엄은 지도자의 권력 사용에 있어 신중함과 책임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를 무분별하게 실행한다면, 이는 파에톤처럼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권위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두었고,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책임감 있게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나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을 이루어 성장하듯이,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공동체는 어려운 공동체를 기쁜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굶주린 형제에게는 먹을 걸 나누어 주었습니다. 옷이 없는 형제에게는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회복지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체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분열과 갈등은 사라질 겁니다. 지금 교회에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 교회가 익숙함에 젖어있다면, 지금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늙어가고 있다면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지 알고 싶다면 역시 초대교회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과연 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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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으로 증언한다.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1요한 3,5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더는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없앤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다. 요한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주신 분이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항상 일치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물면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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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뒤로 하는 성탄 시기에 우리는 독서 말씀으로 요한의 첫째 서간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요한 서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완고한 세상에 휩쓸려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3)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라고 거듭해서 증언합니다. ‘전에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제게는 무엇보다 강렬한 증언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이 말이 ‘지금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신학교 입학을 위한 교리 시험을 치르는데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한참을 고민한 뒤 ‘진리의 길로 나를 부르시는 완고한 스승’이라는 요지로 답안을 적었습니다. 다행히 신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저는 분명히 압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와줄 이 예수님밖에 없노라 매달렸더니 그 비참에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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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4)
1) 31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줄을 몰랐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친척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서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만, 또는 하느님의 계시와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3-44)
이 증언만 놓고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고 기뻐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증언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을 때”(루카 3,2), 그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2) 33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몰랐다는 뜻인데, 이 말도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다시 정리하면, “나는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고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는, “나보다 높으신 분이 오시는데”입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는, 요한복음 1장 1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는 증언과 ‘같은 증언’입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내가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준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었다.”입니다.
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학문 연구 같은 방법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생활’이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도 없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생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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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아십니까?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하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안다고 고백하기는 힘듭니다. 세례자 요한조차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고 두 번씩이나 고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잘 모르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며 증언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1,34),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라고. 요한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러분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알고 싶지 않으세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분이 누구신지 잘 몰랐거든. 그런데 나보고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신 분이 이야기하더라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사람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될거야.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야. 내가 세례를 베푸는데 어떤 사람 위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더라고. 그래서 담박에 '아, 저분이시구나' 하고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내가 본 것을 증언하는거야."
그러니 우리가 아직 그분이 누구신지 잘 모른다면 무엇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표징으로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아,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이시구나. 그분이 바로 양들의 문이시고 착한 목자이시구나. 그분이 바로 씨뿌리는 농부이시고 그분이 바로 바위시고 모퉁잇돌이시구나.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구나. 그분이 바로 나의 구세주이시구나!"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미 세례자 요한처럼 신앙의 간증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오늘 하느님께서 그분이 누구신지 더 잘 알도록 보여주시는 징표들을 눈여겨 찾아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1요한 2,29)
다시말해, 우리는 의로운 이들을 통해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평화를 위해 일하는 평화의 사람을 통해 평화의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임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이 어떠신 분이신지 그 자녀들의 실천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이 요한의 지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주는 도구요 표징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삶을 통해 서로 보여주지 않아서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것은 그 자녀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표징이 못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세 번에 걸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분 안에 머물자고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2) 이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구원과 해방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없애주시려 나타나셨습니다."(요한 3,5) 빛이요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기만 하면 된답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는 죄가 없어서"(요한 3,5)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요한 3,6) 요한이 정초부터 계속 우리더러 "그분 안에 머물러라"고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요!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딸', 이 얼마나 가슴벅찬 이름입니까? 사랑하는 벗님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이시니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통해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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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서간의 저자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닫고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진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요한 1서 3,1)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것은 없고 드러나는 것도 없지만 언젠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은 순결하신 그리스도처럼 순결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간 저자는 그분께서 죄를 없애시려 나타나신 사실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1요한 3,6)
요한복음은 서두의 말씀의 찬가를 마감하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증언하는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는 고유한 말이라 하겠습니다(요한 1,29.36)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말의 뿌리는 구약과 연결되어 있는데 ‘주님의 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그는 병고에 시달리게 하시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 놓으시는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53,10)
구약에 정통한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예언서의 의미를 재설명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로마서 8,3)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어린양’은 구약의 유월절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죽음의 천사를 지나치기 위해서 ‘어린양이나 염소의 피’를 두 문설주와 문인 방에 발랐습니다. 그들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지요.(탈출기 12,5-7) 그리고 매일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두 마리의 어린양을 바쳤는데, 이것이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과 연결되는 것입니다.(탈출기 29,38-42)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고된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처럼‘ (이사야 예언서 53,7; 예레미야 예언서 11,19) 온갖 수모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하며 그분께서 자기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시지만 사실은 자신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기에 ‘앞서신 분이시다.’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선 분이시지만 요한복음은 하느님의‘선재사상(先在思想)’에서 예수님이 ‘앞서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의 장면을 들어 주님께서 자신보다 먼저 이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그리고 자신은 죄 사함을 위해서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합니다.
미사 전례 중에 ‘하느님의 어린양’께 자비를 구하며 세 번이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심으로서 우리의 죄가 없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 죄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웃에게도 너그럽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하지요. 우리는 용서 못해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받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신앙의 신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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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정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유다교에서는 파스카 준비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을 잡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를 향하여 가셨다고 말합니다.(요한 19,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요한 19,36 참조)
이 말씀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을 피하고자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구워 먹어야 하였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치실 때 그 집을 지나가십니다. 이 사건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파스카의 어린양과 비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 사건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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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1.29)
양들은 무리를 지어 우두머리 양 한 마리를 따라 다닙니다. 가축으로 기르는 양의 우두머리는 때로는 사람이나 길들여진 개가 대신하기도 합니다. 우두머리를 믿고 따르는 양의 습성은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된 양은 쉽게 이리의 표적이 됩니다. 홀로 된 양이 이리의 공격을 받으면 멀리 도망을 못가고 곧 주저앉게 되어 쉽게 맹수의 먹잇감이 됩니다. 특히 연약한 어린양은 이리에게 더욱 쉬운 '희생양'이 됩니다.
“어린양”처럼 쉽게 '희생양'이 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사납게 만듭니다 삶을 보호하려는 우리의 본능 때문입니다. 착한 양처럼 살고 싶지만 때로 이리처럼 되어야 하는 것은 사람과 세상이 그만큼 두렵기 때문입니다.
양면성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사는 동안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도 됩니다. 선함을 간직하고 살지만, 때로 악하게 됩니다. 부드럽지만 때로 돌같이 굳어지고, 따뜻하지만 때로는 냉혹하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때로 이리처럼 되는 우리는 “어린양”의 정체성을 잊고 삽니다. 연약함을 지닌 인간임을 잊고 철인처럼 되고자 합니다. 연약함보다는 강인함을, 자비와 연민보다 무자비한 힘을 우리가 드러내는 것은, 세상에서 십자가의 연약함은 그저 두럽고 고통스러우며 쓸모없는 낭만적 환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되어 오신 주님은 연약하게 되기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현실의 힘 앞에 무력하고 연약한 인간이 되시어 희생양이 되심으로서, 나약한 우리의 인간성을 축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어린양"이 되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 있는 "어린양"을 일깨우십니다. 어린양을 알기 전에 우리는 연약한 어린양처럼 '희생양'이 되기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다른 '희생양'을 찾지 않고 기꺼이 "어린양"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늘 우리에게 걸어오십니다. 기꺼이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처럼 인간적인 연약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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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에 새영세자 첫 고해성사가 생각납니다. 세례받은 뒤 한 달이 지났을 때, 보통 첫 고백을 합니다. 열 분 넘는 분을 1시간에 걸쳐 고해소에서 만났습니다.
수녀님께서 잘 준비시켰는지 자기 죄를 성실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도 의무감에 억지로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고백에는 당연히 어떤 감동도 없고 그냥 무미건조한 대화로 성사에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새영세자들은 달랐습니다. 긴장이 묻어나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모두 마치고 수녀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잘 주셨나 봐요?”
“왜요?”
“고해소에서 나오는 분들이 다들 눈물을 훔치면서 나와서요.”
수녀님의 이 말씀이 오랫동안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고해소에서 특별한 훈화를 한 것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꾸짖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성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에, 저는 성사 잘 주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는 고해성사를 잘 준비한 신자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해성사의 은총이 사제인 저에게도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곧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게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진심이 주님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임을, 사랑 그 자체인 분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담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거짓된 삶, 가식적인 삶, 위선의 삶을 통해 주님과도 연결되지 못하고, 나의 이웃들과도 연결되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사셨습니다. 진심을 담아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으로 주님과 우리의 연결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그의 힘찬 목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도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합니다.
진심을 담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닌, 진심을 담아 주님과 연결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과 주님이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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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다만 님께서 오로지>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우리는 다만 님께서 오로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우리는 다만
밝힐 뿐입니다
빛께서 오로지
비추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걸을 뿐입니다
길께서 오로지
이끄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외칠 뿐입니다
말씀께서 오로지
말씀하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믿을 뿐입니다
믿음께서 오로지
보듬으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께서 오로지
여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께서 오로지
북돋우시게 하려고
우리는 다만
살릴 뿐입니다
생명께서 오로지
가득하시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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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예수님의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며 예수님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 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백성의 악행 때문에 억울한 재판을 받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질 주님의 종입니다.(이사 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 7장17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또한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은 “어린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 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가 미사 때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좀 더 진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우리는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나으리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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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 112,1)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정파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참 자랑스런 세계적 정치 지도자가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입니다.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구입했습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 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분의 말씀에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분 삶은 1.학습, 2.고난, 3.아내, 4.기도, 5.꽃과 동물, 다섯 요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맨 먼저 “학습”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배움에 충실했던 분이었습니다. 평생 배움의 학인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평생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학인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진정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시 사람이 되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자의 자질일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 자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물이요, 세례 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제 수행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신학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교수 신부님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인간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이다. 예수님이, 성인들이 자녀답게의 삶의 모범이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위해 평생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 좌우명 시입니다. 불암산 배경의 수도원을 볼 때 마다 저절로 되뇌이는 제 소망을 반영한 기도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하느님과 우리간의 상호관계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기를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참 좋은 선물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서간도 하느님의 자녀됨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주님의 평생학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도 우리의 시선을 평생 보고 배워야 할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께 집중시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씀에 근거하는 영성체전 고백후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요한의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저분은 내 뒤에 한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 본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난히 '본다'라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뿐 아니라 주님을 잘 볼 수 있도록 늘 열린 눈을 지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요한의 시공을 초월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거듭된 당부가 큰 울림을 줍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원을 확인시키며 더욱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닮아 그분처럼 됨으로 참내가 되는 것,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완성은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끊임없는, 한결같은 수행의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의 결론 말씀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순결입니다. 죄가 없어 순결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순결한 삶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 “순결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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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29-34)은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한1,29ㄴ-30)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성경에서 '어린양'은 주로 '희생제물인 속죄제물로 바쳐졌던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희생제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은 그래서 성탄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성탄의 기쁨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영성체하기 바로 직전에 성체를 높이 들고 다음과 같이 외치는 사제의 음성을 듣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러면 신자들은 이렇게 응답하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기 위해서이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잘 받아 먹고 다시 부활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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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과연 나는 보았다."(요한 1, 34)
셀 수 없는
사랑을 보며
깨끗한
희망을
만나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없으시면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십니다.
우리는 모두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길을 내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가장 큰 사랑은
어린양
그 자신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람의 아들을
봅니다.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이
하시는 종이
되십니다.
종이 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은
자신을 바치며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어린양은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 인호를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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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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