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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서구 중심 벗어난 인류학, 절망의 시대 ‘탈출구’를 보여주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사유 구조를 밝혀냈다.
19세기 이후 서양 사상을 이끈 양대 축은 독일의 관념론적 전통과 영미의 실용주의적 전통이다. 이 흐름 속에 프랑스 사상이 놓인 자리는 이채롭다. 오귀스트 콩트와 에밀 뒤르켐의 실증주의가 영미적 전통과 친화성이 높았다면,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 및 현상학은 독일적 전통과 맞닿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미와 독일의 전통에 대응해 프랑스 사상의 독자적인 전통을 구축한 게 구조주의였다.
구조주의는 인식론에서 사회이론에 이르기까지 주체보다 구조를 중시한 사상의 혁명이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의 구조주의 인류학,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롤랑 바르트의 구조주의 기호학, 그리고 구조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미셸 푸코의 포스트구조주의 사회이론은 1960~80년대 서구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에 더하여 구조주의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의 철학, 그리고 페르낭 브로델과 엠마뉘엘 라뒤리의 역사학까지를 고려하면 이 시기야말로 프랑스 사상의 전성 시대였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창시자가 레비-스트로스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H. 스튜어트 휴즈는 1930~60년의 프랑스 사회사상을 다룬 <막다른 길>을 통해 “마르크 블로크와 뤼시앵 페브르의 역사학에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이르는 절망의 시대에서 새로운 출구를 제공한 것의 하나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라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유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막다른 통로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했다.
<슬픈 열대>(1955), <구조 인류학>(1958), <야생의 사고>(La Pensee Sauvage, 1962), <오늘날의 토테미즘>(1962), <신화학>(1: 날것과 익힌 것, 2: 꿀에서 재까지, 3: 식사예절의 기원, 4: 벌거벗은 인간, 1964~71)은 이 막다른 길을 비춘 등불들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대표 저작 <야생의 사고>.
■야생의 사고와 서구 중심주의 비판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학문적 출발을 이룬 세 가지 사유로 지질학·정신분석학·마르크스주의를 꼽았다. 세 사유의 공통점은 표층이 아니라 심층을 주목했다는 데 있다. 개인적 삶이든 사회적 생활이든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변화하지 않는 법칙·원리·틀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통칭해 ‘구조’라고 부른다. 레비-스트로스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이 구조였다. 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로만 야콥슨의 언어학을 응용해 언어와 문화에 내재하는 ‘이항적 대립’을 분석함으로써 사회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발견하고 구조주의를 이론화했다.
<야생의 사고>는 구조주의자로서의 레비-스트로스의 문명론과 사회사상에 담긴 독창성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는 ‘문명의 사고’와 ‘미개의 사고’의 이분법을 거부했다. 미개의 사고는 문명의 사고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은 야생의 사고다. 이 야생의 사고는 일관된 질서가 존재하는 ‘구체의 과학’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인류학자들이 즐겨 다루는 토테미즘은 신화적 사고로서의 야생의 사고가 갖는 특징을 잘 드러낸다. 토테미즘에는 사물들의 분류체계와 위계질서의 기초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토테미즘은 미개인의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보편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야생의 사고에 대한 다양하고 치밀한 논증에 기초해 책의 결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검토했다. 그는 변증법적 이성을 분석적 이성의 우위에 두는 사르트르 철학이 ‘자기 중심주의’, ‘서유럽 중심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견해이지만, 1960년대 초반 당시 그의 이러한 비판은 서구 중심주의적 사유를 해체하는 중요한 사상적 거점을 제공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과학의 확립이었다.
■구조주의의 성취와 한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해선 프랑스 안과 밖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됐다. 프랑스 안에서 사르트르는 구조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고 비판했고, 앙리 르페브르는 레비-스트로스 이론에 내재된 반(反)정치적 성향을 비난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를 지지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당시 젊은 세대였던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등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새로운 이론적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 지식사회에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대신해 새로운 지적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증거했다.
프랑스 밖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뜨거운 감자’였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 방법론을 활용해 무의식의 정신 구조와 이와 연관된 문화를 분석한 것은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이론적 성취로 평가됐다. 하지만 정신의 심층 구조를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로 파악하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비판 또한 제기됐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자원주의적 해석에 맞서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전후 사상의 역사에서 구조주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고,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1970년대 이후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는 독일 비판이론과 함께 유럽 사회사상의 양대 축을 이뤄 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구조와 주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는 사회이론 및 사상의 핵심적인 질문이다. 누가 역사를 만드는가. 주체인가 아니면 구조인가. 과도한 구조결정론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지나친 자원주의도 승인하기 어렵다.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게 학문의 본령이라면,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의 중요성을 주목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작지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야생의 사고>는 안정남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져 한길사 그레이트북스로 나왔다. <슬픈 열대>, <신화학 1~2>는 한길사에서, <구조 인류학>은 종로서적에서, <오늘날의 토테미즘>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사회… 80년대 후반 포스트구조주의 관심 끌며 한때 열풍
국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는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81년 그가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문했을 때였다. 서구 석학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발표와 인터뷰를 마치고 이내 떠나게 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3주 정도 머물면서 한국 문화를 관찰했다. 그가 전통문화 탐방을 방문 조건으로 내건 것은 현지 조사를 중시한 인류학자다운 태도였다. 당시 레비-스트로스는 경주·안동·통도사를 방문했다. 두 번째는 2008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였다. 한국기호학회는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세 번째는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콘퍼런스를 열었을 때였다. 한국문화인류학회는 전북대에서 ‘현대문명과 우리 안의 슬픈 열대’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인류학자 이광규·강신표·임봉길 교수가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성과를 조명하는 발표를 맡았다.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레비-스트로스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진보 학계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로 이동하면서 그는 알튀세르, 푸코, 라캉, 들뢰즈와 함께 주목을 받았다. <야생의 사고>를 필두로 그의 저작들은 프랑스 사상을 공부하기 위한 필독서가 됐다.
하지만 알튀세르, 푸코, 라캉, 들뢰즈와 달리 레비-스트로스는 열렬한 옹호자들을 갖지는 못했다. 그 까닭은 레비-스트로스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인류학자이고, 그의 우선적 관심이 정치적 실천이 아닌 문화 분석에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신화학>을 포함해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열풍이 잦아들면서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관심 또한 줄어들었다.
<야생의 사고>가 보여주듯 레비-스트로스 이론은 서구 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착상과 이론 틀을 제공했다.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 한국사회 안에 존재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해명하는 것은 우리 인문·사회과학의 매우 중대한 과제다. 레비-스트로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