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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혜종 연간의 세계 약사
먼저 동북아시아에 대하여 살펴보면,당나라는 안.사의 난(755-763)과 황소의 난(875-884)
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급기야 절도사의 한 사람인 주전충이 반란을 일으켜 당을 멸
망시키고 후량을 세우니(907년) 이후부터 중국은 5대 10국시대로 들어가고,거란족이 득세
하여 야율 아보기가 요를 건국(926)하여 그해에 발해를 멸망(926)시켰다.
두 번째로 서아시아는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기치로 삼아 정복을 벌여
가며, 우마미야 왕조(661-750)때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피레
네 산맥을 넘으려다, 투르 프와티에 전투(732년)에서 프랑크왕국 카알 마르텔에 패하고,캅
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와 동유럽 진출을 기도했으나,하자르칸국에 막혔다(7세기).아바스
칼리프 하(750-1258)에서는 이란인들은 사만왕조(819=999)와 부이 왕조(945-1055)를 이
루고 있는 중에, 7세기에서 10세기 까지 북쪽의 캅카스 산맥 북부와 러시아 남부인 우크
라이나,볼가강 하류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하자르 칸국이 북쪽에서 내려온 키예프 루스 공
국에 밀려 969년에 멸망하고,하자르 지배층 상당수는 셀주크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도망쳐
서아시아로 향해 아바스 칼리프 지역으로 가서 셀주크 투르크 왕조를 세운다.
세 번째로 서양 로마에서는, 훈족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의 이동이 시작(376)되면서 로마제
국이 혼란에빠지자,로마는 20년 후 동서로마로 분리된다.(395년), 그 뒤 서로마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멸망되고(476년),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프랑크 왕국(481-843)이
성립되어 명목상으로 서로마황제로 되었고,나중에는 베르됭 조약(843)에 의해서 서프랑크,
중프랑크,동프랑크로 분리되고,다시 메르센 조약(870)에 의해 지금의 프랑스,이탈리아,독일
의 윤곽이 생겨난다. 동프랑크는 동프랑크왕의 후사가 끊어지자 선제후들이 모여 왕을 선
출했는데,최초의 왕은 작센공의 하인리히1세가 전체 독일왕으로 등극한다.
끝으로 동로마 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7-565)때 과거 서로마제국인 이탈리아
일부를 획득하는 등, 일시 재흥했으나 다시 뺏기고,서아시아에서 ‘파르티아’(bc 247-ad
226)에 이어 일어난 사산조 페르시아‘와(224-651)치열한 싸움에 눈코뜰사이 없는 와중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이 솟아 올라,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651), 동로마
방면으로 쳐 올라온 이슬람세력과 격돌하게 된다.비록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뺏겼으나, 아
나톨리아방면을 굳게 지켰다.
그래도 불가리아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장인이자 공동황제인 로마노스의 치세를
거쳐 콘스탄티누스 7세(재위: 913년-959)는 이슬람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제2대 혜종실록
1.왕자 무의 태자 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태조 왕건은 호족 융합을 목적으로 실시한 혼인정책을 통해 29명의 후비에게서 25남 9녀의
자녀를 얻게 되었는데,이는 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왕건의 장남은 제2비 정화왕후 오씨 소생인 왕자 무(武)였다.그는 태조 4년(921년)에 정윤
(政胤:왕위를 이을 사람, 즉, 세자)에 책봉되었는데,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왕건은 당연히 장남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고 싶었으나,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그것은 왕자 무의 어머니 오씨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태자 태(泰)를 출산하면서부터 왕건은 세자를 세우
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차일피일 미뤄왔지만,더
이상 지체했다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호족들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건저(建儲:세자를 세우는 일)문제로 고민하던 왕건은, 장자를 세자로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사실에 실망할 장화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낡은 상자에 자황포(赭黃袍,왕이 입는
옷)를 넣어서 전했다.비록 장자를 왕으로 세우지 못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자황포를 받은 오씨는 대광(재상) 박술희를 은밀히 불러 왕의 뜻을 전했다.박술희는 궁예의
근위병 출신으로 강직하고 사심없는 성격이었다.왕건이 장화왕후로 하여금 박술희에게 자황포
를 보이게 한 것은 그의 힘을 빌리려는 하나의 계책이었을 것이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박술희는 마침내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여 왕
자 무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박술희의 주장이 있자,왕건은 장자 무를 정윤에 책봉하고,박술희를 은밀히 불러 세자를 보
필해 줄 것을 당부한다.
왕자 무의 태자 책봉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세력은 충주 유씨 가문이었다.신명순성왕후의
친정인 충주 유씨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충주 유씨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중원지방의 실력자였으며,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때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이 때문에 왕건은 즉위와 동시에 충주 유씨 가문의 유권설을 순군낭중에 임명하고,충주
유씨와 혼인관계를 맺어 신명순성왕후를 제3비로 받아들인다.
유권설이 맡고 있던 정2품의 순군낭중은 각 호족들의 병권을 관할할 수 있는 중앙관료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다.이런 지위를 즉위시에 충주 유씨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건이 그들 집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게다가 충주 유씨는 박수경으로
대표되는 평산 박씨와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불교 사원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자 무의 외가인 나주 오씨의 세력은 미미했다.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군은
벼슬에 오른 적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고,주변세력도 없었다.이 때문에 왕건은 세자의 앞날
을 위해 여러 가지 안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왕건은 우선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선정하고,진천 임씨 집안에
서 세자빈을 맞아들였다.또한 경기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던 왕규의 딸을 세자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청주 김긍률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충주 유씨
세력을 견제하였다.
왕건의 이 같은 노력 덕분으로 세자를 보위하는 세력과 충주 유씨 세력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건의 생존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왕건의 세자 세력 확보에 뒤질세라 충주 유씨 역시 꾸준히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왕건은
즉위 직후 북진정책을 감행하기 위해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
는데,이 때문에 서경은 개경과 더불어 고려의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그러자 자연스
럽게 서경을 중심으로 일단의 세력이 형성되었다.이들 ‘서경세력’의 중심에 평산박씨와 왕식렴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평산 박씨가 서경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충주 유씨의 힘은 더욱 커졌다.
비록 세자가 결정된 이후였지만,충주 유씨 세력은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신명순성왕후 소생
왕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신명순성왕후 소생으로 테,요,
소를 비롯 5명의 아들이 있었고,유씨 세력은 왕건이 죽자 이들과 힘을 합쳐 혜종(惠宗)을 위
협하게 된다.
2.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
(912년-945년.재위기간:943년 5월-945년 9월,2년4개월)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武),자는 승
건(承乾)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
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 아이를 얻었으니,그가 바로 혜종이다.
921년 정식으로 정윤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936년 후백제 정벌전쟁에 참가하
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가 943년 5월 태조가 죽자 고려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비록 태자 무가 왕위를 이었지만 충주 유씨 일가를 비롯한 반발세력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혜종은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복동생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태자 무의 출생과 관련하여 <고려사>는 우스꽝스런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는데,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무였는데, 무가 세자가 되는 것에 불만세력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버젓이 실록에 나와
있다는 것에 놀랍다.‘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그것이다.이러한 별명은 단지 그의 얼굴에 주
름살이 많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의 친모 오씨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빗대
고,한편으론 이복 동생들의 왕권 위협에 시달려 고민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내
포하고 있을 것이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혜종은 2년 4개월간의 재위기간 내내 주름살 펼 날
없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낸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충주 유씨 세력과 요(정종),소(광종)등의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이 본격적인 권력팽창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
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
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또한 견훤
의 사위이자 왕요의 장인 박영규와 박수경,수문 형제 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혜종은 침실을 옮겨 가며 잠을 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혜종에게 왕요 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 세력을 엄단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
인으로 내주면서 화해 의사를 타진한다.비록 왕규와 박술희의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
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
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 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
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송악산 동쪽 기슭 순릉에 묻혔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병명도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
전까지 호위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점으로 미루어 항상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쓴 <고려사>는 혜종의 이 같은 행위와 당시 혼란에 대한 책임을 모
두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이를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해놓고 있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침입케 하여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간 박술희를 죽였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장치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왕의 침소에 자객들이 침입한 사실을 놓고 왕규의 소행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는데,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자객을 보낸 쪽은 왕요일 가능성이 더 크다.왕이 자객에 의해 급살되었을
경우, 왕위를 이을 사람은 세력이 가장 컸던 왕요였을 것이고, 또 실제로 혜종이 죽었을 때
왕요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따라서 혜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왕규의 기반 상실을 의미
하는 일이므로 왕규가 그런 어리석은 것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했는
데,당시 왕규의 사정은 이 같은 일을 추진할 입장이 아니었다. 왕규는 본래 함씨였다가 왕건
의 신임을 받아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명을
받든 몸이었다. 때문에 태조의 유명을 어긴다면 박술희와 등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다.하지만 왕규는 무장 출신이 아닌데다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무력 동원 능
력이 있는 박술희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혜종이 죽자 왕규가 왕요 일파에 의해 즉각 제거되었던 것으로 봐서도 왕규의 군사력은 미
약했거나 아예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규는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에 의해 보호받는 입
장이었다. 혜종이 왕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왕규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만약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면 혜종
이 끝까지 왕규를 보호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고려사>는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혜종을 협박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역모를 꾸몄다고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이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우선 광주원군을 앞세웠다
면 왕규가 제거될 때 필히 광주원군도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데,<고려사>는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는 단지 실록에 광주원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만 쓰고
있다. 역모가 일어났을 경우 반드시 역모자들이 추대하고자 했던 인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역모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 과정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비록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광주원군은 적통도 아닐 뿐 아니라,엄연히 차자(次子)인
왕요가 있었고, 그 이외에도 적자가 여섯 명이나 더 있는데 제16비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으
로 세우려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발상이다. 이는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나는 것으
로 왕규가 그런 발상을 했을 경우 왕후를 배출한 황주의 황보씨,정주(개풍)의 유씨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황해도,경기도 세력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경기도 세
력은 왕규를 추종하고 있었다.이는 왕규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
미한다. 때문에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는 왕요 세력이 정권을 장악
한 후 왕규를 죽이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혜종의 임종 직전에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이
것에 대하여 <고려사>는 왕규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
때 왕규를 체포하여 귀양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했다.하지만 <고려사>의 이 같은 서
술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만약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필시 군사를 일으켰을 것인데,<고려사>는 그런 내용
을 전혀 싣고 있지 않다.<고려사>는 단지 왕규가 반란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왕식렴 군
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다.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적어도 왕식렴의 서경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먼 곳에 있던 서경 군대
가 도성을 먼저 장악했고, 당시 대광 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
식렴에게 쉽게 붙잡혔다. 이는 왕규가 반란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되려 왕식렴이 반란군이었
음을 반증하고 있다.왕식렴의 서경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대신들과
개경 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쌌던
것이다.
말하자면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으로 진주했을 땐 이미 혜종은 병사했거나 살해당한 이후였
고, 왕성 또한 왕요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왕요 일파는 왕요
의 왕위계승에 반발하던 왕규와 문무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박술희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난다.<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고, 또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것은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게다가 혜종에게 엄연히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도 그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죽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운
그야말로 성패론에 입각해서 작성된 날조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박술희는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왕요 일파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따라서
왕요가 박술희를 왕규보다 먼저 죽인 것은 바로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왕요는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의 무리 3백 명을 처형했다고 했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
무대신들일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
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왕요가 왕위를 계승하자 개경의 문무대신들의 반발이 일어났고,왕요
일파는 급한 마음에 이들을 역도로 몰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혜종이 끝까지 왕
요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지 않은 사실과 왕요가 측근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당시 사료를 통한 정황분석은 혜종이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을 가능성
이 있다는 것과,왕요 일파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규와 박술희를 비롯한 문무대
신들을 역도로 몰아 왕위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에 왕규가 역적으로 올라 있는 것은 정종,광종 등 왕위 찬탈세
력들의 철저한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에서 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였다,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
이 불타는 바람에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사관들이 기록해 놓은 사기(史記)의 초고(草稿). 실록
(實錄)의 원고(原稿)가 된다)도 함께 소실되었다. 실록 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
차원에서 이뤄진 일로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실록’편찬에 착수하게 된다.
왕명을 받고 실록 편찬을 주도한 인물은 황주량이다. 그는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 없
게 되자,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료 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 수집이 완료되자
그것들을 토대로 ‘7대실록’을 편찬하였다.
‘고려실록’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혜종, 정종대의 왕위 계승 다툼
에 대한 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 <고려사(조선초에 지금
은 없어진 고려실록을 다시 적요하여 기록한 사서)>의 평가 역시 신빙성 없는 자료와 정종,
광종조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혜종은 의화부인 임씨를 비롯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궁인 애이주 등 4명의 부
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와 혼인하였으
며,94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소생으로는 흥화군,경화궁부인,정헌공
주 등이 있다.생몰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사망 후에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는 대광 왕규의 딸이며, 청주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률의 딸로 두 사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궁인 애이주는 경주 사람이며 대간 연예의 딸이다.소생으로는 태자 제와 명혜부인이 있다.
첫댓글
제위기간 겨우 2년4개월을
살다간 혜종의 일생은 참으로
불행한 삶 이었네요 얼마나 불안했을지
짐작해 봅니다.
역대의 새로운 나라를 창건하여
왕이 된 사람들의 직계후손들은
치열한 정쟁과 모략으로 인하여
얼마나 힘들게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
했을까 역사의 기록들이 말해주네요
조선건국의 이성계도 왕자의난으로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이성계 스스로도
자식에게 모멸을 당하는 왕들의 최후.
태여나고 싶지 않은 왕의 후손들입니다
항상,관심을 가지고,축조독해의 결과로
좋은 말씀을 선사해 주시는 보챙님의
성의에 심심히 감사합니다.
연휴 잘 보내고요
다음글도 기대합니다~^^
역사나 세계사나 지난 과거가
현재와 별반 다를게 없는 현실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과거나 현재나 옷만 바뀌었을 뿐
인성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지난 역사나 실록들이
흥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조선사나 통일신라는 정사나 야사의 기록물 접할기회가 많았는데 고려사는 선배님땜시 재미 쏠쏠하게 읽어 내려 가네요~
카! 고것도 중독 ㅋ
오드리님의 말씀에 십분 격려를 받으니,
계속 게시할려는 의욕이 커집니다.
무관심이 세상사 가장 나쁜 상황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정이든,긍정이든 관심이 바람직합니다.
혜종의 제위기간 2년4개월
늘 암살에 시달리는 불행한 삶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