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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탄핵안 가결 후 간담회장 들어서는
朴대통령과 黃권한대행/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9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박 대통령의 모든 권한은 정지됐고
헌법에 따라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헌정 사상 두 번째다.
그동안 "탄핵안이 통과되더라도
'즉시 퇴진'을 계속 요구하겠다"고 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황교안 대행 체제에 대해서도 "지켜보겠다"
고 했다. 국회는 이날 오후 3시 본회의를
열고 재적 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탄핵안을 가결했다.
야당과 무소속 의원 172명이 탄핵 찬성
의사를 밝힌 점을 감안하면 새누리당에서
최소 62명이 찬성표를 던진 셈이다.
유일하게 투표에 불참한 새누리당 친박계
최경환 의원은 본회의장에 입장했다가
투표 시작 전 퇴장했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헌법 위반 및 직권남용·뇌물죄 등이
적시됐다.
박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 직후인 오후 5시
국무위원 간담회를 갖고 "저의 부덕과 불찰로
국가적 혼란을 겪게 돼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과 특검의 수사에
차분하고 담담한 마음가짐으로 대응해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2010년‘금융 외길’ 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주 별세
▶2010년롯데마트 저가치킨(‘통큰치킨’) 판매 논란
2010년 12월 13일 롯데마트가 역마진 논란에 저가치킨('통큰치킨')의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롯데마트가 2010년 12월 9일 전국 82개 매장에서 프라이드치킨 1마리를 일반 치킨 전문점의 1/3가격인 5000원에 판매하며 SSM과 프랜차이즈업체, 영세 사업자 사이에 역마진 판매 논란 및 제품원가·판매가 논란이 발생했다.
롯데마트는 9일부터 매장당 일일 최대 400마리까지 저가치킨('통큰치킨')을 판매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프랜차이즈협회는 롯데마트를 부당 염매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기로 결정하고,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자신의 트위터에 롯데마트의 판매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등록하는 등 논란이 확대되자, 롯데마트 측이 16일부터 '5000원 치킨'의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롯데마트의 저가치킨 판매 중단 선언 이후 기업형 수퍼마켓(SSM)과 소규모 영세 사업자 간의 역마진 논란은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소비자들의 저가치킨 재판매 요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치킨 프랜차이즈업체 판매가격 담합조사 등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로 논란이 확산되었다.
▶2008년소설가 박연희 예술원 회원 별세
▶ 2003년 아동문학가 윤석중 사망
윤석중 [尹石重, 1911.5.25~2003.12.9]
아동문학계의 거목 석동(石童) 윤석중(새싹회 회장·사진) 옹이 9일 오전 0시5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 옹은 1924년 ‘신소년’지에 동요 ‘봄’으로 등단, 1933년에는 국내 첫 동시집인 ‘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했다. 윤 옹은 소파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지를 이끌었으며 소파상, 장한 어머니상, 새싹 문학상 등을 제정했다.
그는 평생을 동요짓기와 글짓기에 바쳐 대표작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 ‘새나라의 어린이’ 등을 남겼다. 저서로는 ‘윤석중 동요집’을 비롯, ‘어린이와 한평생’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30권)’ 등이 있다. 윤 옹은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2),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 등을 수상했다.
▶2000년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사임
▶2000년나와즈 샤리프 전(前) 파키스탄 총리,
사면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
▶1997년4자회담 1차 본회담 제네바서 개최
▶1996년북한을 탈출해 홍콩을 경유
우리나라에 망명을 신청한 김경호씨
일가족 17명이 김포공항 도착
▶1994년김영삼 대통령,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미군 해병대,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소말리아에 첫 상륙
▶1991년서울방송(SBS) TV 개국
▶1991년한국, 국제노동기구(ILO)에
▶15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0년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당선
폴란드의 노동운동가, 정치가인 레흐 바웬사는, 사회주의국가인 폴란드에서 1980년 파업을 주도했으며,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0년~1995년 폴란드 초대 직선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정계은퇴 후에 레닌조선소에 전기기사로 복직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버마, 두 아웅산테러범에 사형 선고
▶1982년소련 두 우주인.
211일간의 우주 체공 기록을 세우고 귀환
▶1981년나토 국방상회의,
최초로 공동성명 없이 폐막
▶1981년북한군, 중부전선 아군초소에 총격
▶1981년미국, 폴란드사태로 전군에 비상경계령
▶1981년소련 사하로프 박사 18일 만에 단식 중단
▶1976년정부, 미국의 청와대 도청 비난
▶1975년대법원, 염재만의 소설 ‘반노’에 무죄판결
▶1974년유엔총회, 남북대화 촉진 결의
▶1971년파월(派越) 국군
첫 철수부대 부산항에 도착
▶1968년이승복군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
▶1964년한국 최초의 TV일일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 매일 저녁 7시 40분에 20분씩 방영.
▶1963년UN정치위원회, 한국단독초청안 가결
▶1961년탄자니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1년콜롬비아, 쿠바와 단교
▶1960년라오스 퓨마 수상 망명
▶1957년서울대 문리대학보 논문 필화 사건
1958년 4월 1일, 서울대 문리과 대학
필화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유근일군(가운데)
▶1954년공군 첫 제트기 조종훈련 시작
▶1954년자유당 12의원 탈당
▶1952년영남지방 50년 만에 대폭설
▶1948년제3차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협약 채택
▶1946년국립대학설립안 반대, 동맹휴학 시작
▶1945년아놀드 군정장관 해임.
후임에 러치 소장
▶1941년임시정부,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다.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자주독립의 굳건한 의지를 전 세계에 선포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78주년!
1941년 12월 7일 오늘,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을 향해 총구를 들이댄 것과 다름없었고 이 도발 행위로 인해 다음날 8일, 미국이 일본에 대한 대일 선전 포고를 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에 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즉각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준비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고,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자주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쳤던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약을 자세히 알아볼까요?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과 활동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의 감시로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이 어려워지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확산하여 애국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이끄는 일에 힘썼습니다. 특히 1941년 2월에 간행된 「광복(光復)」은 현지 중국인도 읽을 수 있도록 한국어와 중국어로 발간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활동은 독립을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기 위해 훈련과 교육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최후의 승리를 위한 대일 선전 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다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성명서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 내용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리아 및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에 특히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낸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고, 일개 전투 단위가 되어 축심국에 대하여 선전 포고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이 무효임을 거듭 선포한다. 아울러 반침략 국가들이 한국 내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왜구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
4. 맹세코 일본이 비호하여 조성된 창춘 및 난징 정권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나구선언(羅邱宣言) 각 조를 단호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용하며 이것으로 인해 특히 민주 전선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년(1941) 12월 10일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백범김구전집』 제5권, 서울신문사, 1999, 102~103쪽(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8에 재수록)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외무부장 조소앙 선생이 대표로 대일 선전 포고 성명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알리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한국광복군(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그리하여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했고, 버마(미얀마), 인도 전선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한국광복군 대일 항전의 가장 큰 목표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전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총사령관 지청천, 지대장 이범석 선생 등을 중심으로 광복군이 직접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우리 힘으로 국권을 되찾으려고 한 시도였던 것입니다.
▲ 훈련 중인 한국광복군(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 계획은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연합하여 추진되었으나, 아쉽게도 실행에 옮길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광복군은 9월에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죠.
▲중경 청사에서 촬영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12월 10일, 대일 선전 성명서가 발표된 지 77주년을 기념하여 이날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기념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비록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통해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최후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날이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12월 10일 일제를 향해 당당히 선전 포고했던 그날을 기리며, 나라를 되찾는 최후의 순간까지 몸바쳤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선전포고문!
▶1937년스웨덴의 발명가 달렌 사망.
달렌 [Dalén, Nils Gustaf, 1869.11.30~1937.12.9]
스웨덴의 발명가.
자동태양 밸브 장치(솔벤틸)를 발명하여 그 공로로 191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솔벤틸은 햇빛의 작용에 따라 새벽에는 꺼지고 저녁이나 어두울 때는 자동적으로 켜지는 편리한 발명품이다. 이후 이 장치는 급속도로 전세계에 퍼져서 바다에 띄우는 부표(浮標)나 무인 등대에 널리 이용되었다. 1906년에 아세틸렌 가스를 판매하는 가스용기회사(Gas Accumulator Company)의 수석기사가 되었고, 가스와 터빈을 연구하면서 열공기 터빈 기관과 드 라발(de Laval) 증기 터빈을 편리하게 개량했다. 1909년에 그 회사의 전무이사가 되었고 그해 아세틸렌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아가마산(Agamassan)을 발명해서 폭발위험 없이 가스를 농축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13년 실험중에 폭발사고로 장님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1912년 솔벤틸 발명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30년조선총독부, 국세조사결과 발표.
10월1일 현재 한국인구 2105만 7969명
▶ 1907년 오늘, 미국 동부 델라웨어주에 있는 도시 윌밍턴 우체국에서 최초 크리스마스 씰 판매함
▶1905년프랑스 정교(政敎)분리법 제정
▶1868년일본 천황제 수립
▶1868년노벨화학상(1918년) 수상한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출생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독일어: Fritz Haber) 독일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가정 에서 출생(~1934년 1월 29일 스위스 바 젤 에서 사망)
비료와 폭발물의 주원료인 암모니아의 합성법을 개발하여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화학자이다. 그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
클로린(chlorine)을 비롯한 여러 독가스를 개발 및 합성했던 일로 인해 " 화학 무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하버가 화학 무기 개발에 앞장선 것이 그의 부인을 자살하게 만든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934년 나치당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 시민권을 따지만, 바로 독일로 후송된다. 또한 그의 친척 중
여러 사람이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때 하버가
만든 독가스인 치클론 B(Zyklon B)가 사용되었다.
하버는 스위스로 이민을 갔으며, 바젤에서 사망했다.
독일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업적으로 1918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하버가 이 방법을 찾아낸 뒤에 사람들은 합성된 암모니아를 화학 비료의 원료로 사용함으로써 식량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화학 비료의 발명은 인류의 식량 생산을 놀랄 정도로 늘렸고, 인류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은 질소 비료에 의해 생산된 식량을 먹고 있다.
그의 연구는 셀 수도 없는 인간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그렇지만 암모니아는 폭탄의 원료로도 사용되었고, 각국은 이렇게 합성된 암모니아를 사용해서 무기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하버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염소와 다른 독성 가스를 개발하고 무기화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소위 하버가 만든 ‘독가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전장에서 독일에 의해 연합군 병사에게 사용되어 연합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무수한 인명을 앗아 갔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연구를 기꺼이 수행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에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와 국가의 필요 때문에 비윤리적이거나 반인륜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가라는 연구의 윤리성의 문제가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얘기해 주고 있다.
1교육과 화학자로서의 초창기 시절
프리츠 하버는 1868년 12월 9일, 현재 폴란드의 도시 브로츨라프(Wroclaw)에서 아버지 지그프리트 하버(Sigfried Harber)와 어머니 파울라 하버(Paula Haber)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복한 유태인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도시에서 잘 알려진 상인으로 염색약과 페인트, 그리고 제약 사업을 스스로 설립해서 재산을 많이 모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어렵게 낳았고, 그가 태어난 지 3주 후에 사망했다. 그는 어릴 때 고모들의 손에 의해서 길러졌다.
아버지는 그가 6세에 재혼을 하고, 그 이후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개신교와 관련이 깊은 수녀원의 부속학교인 엘리자베스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이때부터 화학실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실험에서 나오는 냄새와 폭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고, 가족들은 그가 집에서 화학 실험을 한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했다. 아버지는 실험을 금지했지만, 엄마를 잃은 조카를 불쌍하게 여긴 외삼촌이 자기 사업장의 사무실 한편을 내주어 실험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하버는 1886년 겨울에 집을 떠나서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 대학교를 다녔다. 하버는 그의 베를린에서의 첫 겨울 학기(1886~1887)에 실망했고 1887년 여름학기를 위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입학을 준비했다.
베를린 대학교에는 저명한 화학자 호프만(Auguste Wilhelm von Hofmann, 1818~1892)과 물리학자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가 있었지만, 이들은 젊고 활력이 넘치는 하버를 매료시키기 힘든 노교수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는 철학자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았고, 나중에 베를린에 돌아와서 학위논문을 쓸 때도 그의 도움을 청해 받았다.
하버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갈 당시에 거기에는 분젠(Robert Bunsen, 1811-1899)이 재직하고 있었다. 분젠은 가열된 원소의 방출 스펙트럼을 분석해서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와 공동으로 세슘(Cs)과 루비듐(Rb)을 발견한 과학자였다.
하버는 1887년 여름학기를 분젠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이후 다시 베를린에 돌아와서 샤를로텐부르크 기술대학에서 리베르만(Carl Liebermann) 아래에서 공부를 하고 학위 논문을 썼다.
그런데 이 학교가 박사학위를 줄 수 없는 대학이어서 하버는 1891년에 「피페로날 유도체들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자신이 처음 들어갔던 베를린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아버지와 잘 맞지 않아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교에 직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후 하버는 예나 대학교와 취리히에 있는 기술학교에 무보수 연구조수로 취직해서 경험을 쌓고,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있던 유명한 화학자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 교수의 연구조수에 응모했다.
그렇지만 촉매, 평형, 반응속도를 연구했으며, 물리화학 분야를 개척한 오스트발트는 세 번에 걸친 하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구실에 받지 않았다. 이 무렵 하버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종교를 개종했다.
왜 개종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독일의 상류사회에 진입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한 행동일 수도 있고, 아버지에 대한 오랜 반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일 수도 있으며, 그 당시 많은 유대교들도 개신교로 종교를 변경했듯이 독일의 문화적 유행을 따른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버의 아버지는 아들의 개종 사실에 분개했다.
하버는 오랜 노력 끝에 카를스루에 대학교에 교수로 있던 분테(Hans Bunte)의 실험실에 조수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분테는 하버에게 탄화수소의 열분해 실험을 제안했다.
탄화수소에 열을 가해서 분해가 되면 분해 생성물로 무엇이 있고, 그 생성물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이었는데, 하버로서는 그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주제였다.
분테 교수는 그의 실험실을 거쳐 간 여러 연구자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던 주제를 던져 주었지만, 하버는 분석 방법을 면밀히 검토하고 개선한 결과 연구에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
조심스럽게 정량적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하버는 탄화수소의 열분해 연구에서 “탄소-탄소 결합이 방향족 화합물에서는 탄소-수소 결합보다 열에 대한 안정성이 강하며, 지방족 화합물에서는 약하다”는 사실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하버는 유기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전극을 이용해서 유기화합물을 환원시키는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독일 전기화학회 학회에서 발표했다. 이 발표는 많은 전기화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버는 1898년에 정식 교수가 되었고, 1901년에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카를스루에 대학이 공모한 물리화학 연구 소장 겸 물리화학-전기화학 교수직에 하버가 아닌 르블랑(Max Le Blanc, 1865-1943)이 임용되었고, 이는 하버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자신이 떨어진 오스트발트 실험실의 일원이었다.
하버는 분테 교수의 도움으로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산업에 필요한 기술과 연관된 전기화학과 가스 화학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가장 바라던 교수직을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버는 계속해서 전기화학의 연구를 수행하면서, 전기화학적 비가역적 환원과 가역적 환원에 대한 일반 이론과 개념을 처음 발표했다. 그는 산업체에 적용할 수 있는 화학 기술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자연스레 산업체의 자문을 맡게 되었다.
암모니아의 합성을 포함해 하버의 연구 결과는 산업에 적용되는 것이 많았다. 전기화학을 스스로 공부하여 연구한 하버는 그것을 화학 공정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가스 반응을 물리화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화학열역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가지고 연구도 계속했다.
하버는 어떤 주제에 빠져들어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매일 새벽 2시까지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하버는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노력과 정신력은 일반인들이 상상을 초월했다.
훗날 암모니아의 합성에 대한 연구도 열역학을 바탕으로 화학반응을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였다. 화학 산업이 발달하면서 화학 반응을 실험하는 것에 연구비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화학반응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화학반응에 따른 에너지의 방출과 흡수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출발한 열역학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화학의 한 분야로 등장했다.
하버는 화학 반응에서 평형을 다룰 때 사용되는 ‘르샤틀리에(Henry Louis Le Chatelier, 1850~1936) 원리(평형상태에 있는 화학반응이 압력, 온도,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 등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암모니아 합성 반응에 잘 적용시켰다.
1901년에 르샤틀리에 본인도 암모니아 합성에 도전을 했지만 실험실에서 기구가 폭발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버가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했던 암모니아의 합성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그가 과학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미리 갖추고 노력한 결과였다.
하버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르블랑 교수는 1906년에 오스트발트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카를스루에 대학교를 떠나고, 그의 후임에 하버가 임용되었다. 그는 정교수로 승진이 되었고, 물리화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버는 연구소의 책임을 맡으면서 뛰어난 젊은 과학자들을 연구진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이들 중에 암모니아 합성에 크게 기여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고압 장비 등을 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테크니션 키르헨바우어(Friedrich Kirchenbauer)였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암모니아에 대한 연구를 경험했던 영국 과학자 로시뇰(Robert Le Rossignol)이었다.
로시뇰은 하버와 함께 암모니아 합성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하버 공정의 특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암모니아의 합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연구소의 결과를 산업화 시키는 과정까지 다방면에 기여했다. 그가 1918년 노벨상에서 빠진 것은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했을 정도였다.
2암모니아 합성, 노벨상, 제1차 세계대전
1904년, 하버는 기체반응의 물리화학을 이용해서 질소기체와 수소기체를 서로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만드는 화학식은 간단하다.
N2(가스) + 3H2(가스) ↔ 2NH3(가스)
그러나 실제 과정에는 난관이 많았다. 우선 질소분자와 수소분자의 강한 원자 결합을 깨야했는데, 이것은 온도를 높임으로써 가능했다. 또 이 반응은 높은 압력에서 더 잘 일어났다.
그런데 온도를 높이면 만들어진 암모니아가 다시 질소와 수소로 분해되었다. 낮은 온도에서는 아예 암모니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버는 화학반응의 속도를 높이는 촉매를 사용해서 낮은 온도에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버는 오스뮴과 우라늄을 촉매로 쓰고 압력을 잘 조절하면서 실험을 한 결과 특정한 온도와 고압(대략 200기압)에서 암모니아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1904년이었다.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서의 프리츠 하버(오른쪽).
그렇지만 하버의 공정은 대량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촉매 오스뮴이 희귀 물질이었고, 압력을 더 올릴 경우에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버는 다른 방법을 고안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이 방법의 개발을 자신이 자문을 하던 BASF(Badische Anilin- & Soda-Fabrik)사에 넘겼다.
BASF에는 하버보다 먼저 질소고정 연구를 시작했던 카를 보슈(Carl Bosch)가 있었는데, 보슈는 하버의 연구를 이어서 대량생산을 위한 촉매제를 찾는 연구를 수행해서 수만 번의 실험 끝에 1909년에 철과 특정 화합물로 이루어진 촉매를 찾았다.
이들은 당시 알려져 있던 거의 모든 원소에 대해 촉매활성을 조사했다. 이 성과(하버-보슈법 1))로 인해서 비료 같은 질소 화합물을 대기의 질소로부터 쉽게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농업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에도 세계 인구 절반을 위한 식량은 합성 암모니아를 사용한 비료를 써서 만들어진다. 하버는 이 업적이 부각되면서 1910년에 명예로운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물리화학-전기화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918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자신이 개발한 염소 독가스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하버. 손가락으로 가스통을 가리키는 이가 하버다.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전쟁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하사관으로 지원했지만, 곧 대위(captain) 계급장을 달고 전쟁부에 있는 화학부의 부장이 되었다. 그의 과업은 참호전(trench warfare)에서 사용하기 위한 염소 가스 같은 치명적인 독성 가스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버는 독성 가스의 농도와 흡입 시간의 곱이 일정하다는 규칙(하버의 규칙 2))을 발견해서, 이를 자신의 연구에 적용했다. 농도가 높으면 잠깐 흡입해도 독성이 나타나지만, 농도가 낮을 경우에는 오랫동안 흡입해야 독성이 나타났다.
그는 1915년 4월 22일에 수천 명의 병사가 사망했던 벨기에에서의 전투에서 자신이 개발한 염소가스를 연합군에게 사용하는 작전을 직접 이끌었다. 하버는 이어진 러시아에서의 화학전에도 직접 참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버는 독가스 외에도 독일군을 위해서 방독면을 개발하는 연구를 했으며, 다른 화학자들도 부대로 끌어들여 전쟁연구를 수행하게 했다. 하버는 프랑스의 화학자 그리냐르(Victor Grignard)가 개발하던 머스터드 가스(mustard gas)보다 더 먼저, 더 치명적인 독가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주력했다.
그는 “평화로운 시기에 과학자들은 세계에 속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그들은 그의 국가에 속한다.”고 했고,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건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과학자가 전쟁 중에 조국을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이 화약에 대한 연구이건 독가스에 대한 연구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정당화했다.
하버의 첫 부인. 클라라 하버.
하버는 1890년에 한 댄스 교육장에서 클라라라는 여성을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이들은 10년 뒤에 다시 만나서 1901년에 결혼했다.
1915년 남편이 독가스를 만들어서 전쟁에서 사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얘기하는 것을 듣고 부인 클라라 하버는 이런 일이 “과학의 이상의 타락”이고 “삶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학문을 오염시키는 야만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남편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버는 1915년 4월 22일에 벨기에에서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첫 독가스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가했는데, 클라라 하버는 남편과 계속 다투다가 남편이 러시아에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떠나는 5월 2일 아침에 남편의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죽어 가는 아내를 아들에게 맡긴 채, 하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날 러시아 전장으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하버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그는 재혼한 두 번째 부인과 1927년에 이혼을 했고, 특허로 인한 로열티 수입도 줄어든 상태에서 정신적인 공황 비슷한 것을 겪었다.
게다가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부상한 국가사회당(Nazi)은 대놓고 유태인을 차별했고,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독일을 위해 평생을 일했지만 유태인이었던 하버는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스라엘에 있는 과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스라엘로 가던 도중에 1934년 1월 19일에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1968년, 카를스루에 대학은 프리츠 하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을 열었는데, 학생들은 “살인자를 위한 행사. 하버는 가스전의 아버지다”는 피켓을 들고 이에 항의했다. 그는 자신의 전쟁연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버의 유산은 현대 과학의 딜레마가 되었다.
▶1636년병자호란 발발
▶1608년영국 시인 존 밀턴 출생
https://youtu.be/i0aWrqGSJ58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