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방출하는 휘발성유기화합물이 주변 식물의 성장과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한 식물도 주변 식물이 내뿜는 냄새만으로 경쟁 상대의 성장 속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성장 전략을 조절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빠르게 자라는 이웃 옆에서는 성장에 더 힘을 쏟고, 상대적으로 느리게 자라는 식물 주변에서는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식이다.
벨레미르 닌코비치(Velemir Ninkovic) 스웨덴 농업과학대학교 연구팀은 28일(현지시각) 국제학술지 ‘실험 식물학 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Botany)’에 손상되지 않은 보리 식물이 방출하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주변 식물의 성장과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성장 속도가 서로 다른 보리 품종 3종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했다. 성장 속도가 느린 ‘페어리테일(Fairytale)’, 중간 수준인 ‘루카스(Luhkas)’, 빠른 ‘살로메(Salome)’를 서로 마주 배치한 뒤 공기 중 휘발성 물질만 오가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 결과 느리게 자라는 페어리테일은 빠르게 자라는 살로메의 VOCs에 노출됐을 때 생체량이 유의하게 증가했다. 반대로 빠르게 자라는 살로메는 느린 페어리테일의 VOCs에 노출되자 생체량이 감소했다.
연구팀은 식물이 주변 경쟁자의 성장 능력을 화학 신호로 미리 감지한 뒤 성장과 방어 사이에서 자원 배분 전략을 조절한 것으로 해석했다.
주변 식물의 성장 속도를 냄새로 감지해 성장과 방어 사이의 자원 배분 전략을 조절한다. 연구팀
유전자 분석에서도 이같은 변화가 확인됐다. 살로메가 느린 품종의 VOCs에 노출됐을 때는 스트레스 대응과 방어 관련 유전자들이 크게 활성화된 반면, 페어리테일이 빠른 품종의 VOCs에 노출됐을 때는 일부 방어 관련 유전자 활성이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연구팀은 “식물의 성장과 방어는 동시에 최대 수준으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자원을 선택적으로 배분한다”며 “주변 식물의 냄새를 통해 경쟁 강도를 미리 예측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분석 결과 세 품종은 서로 다른 VOCs 조성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빠르게 자라는 살로메와 느리게 자라는 페어리테일은 휘발성 물질 패턴 차이가 가장 뚜렷했다.
이번 연구는 식물 간 의사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해충 피해나 스트레스 상황에서만 화학 신호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식물끼리도 서로의 성장 상태를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품종별 VOCs 특성을 활용하면 농약이나 추가 자재 사용을 줄이면서도 작물 생산성과 병해충 저항성을 높이는 재배 전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