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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유스제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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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외국인도 감탄하는 세계유산 수원화성3-성벽 외벽의 자연미학
민지홍(8기) 추천 0 조회 120 12.03.17 13: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공미는 자연과 어우러질 때 위대하다

화성장대(서장대)에서 사방 5.74km에 달하는 화성 성내를 한 눈에 돌아보며

정조대왕의 신도시 개념과 지극한 효심을 의미있게 되새겨보고, 

다시 발길을 돌려 화성 성곽을 따라답사를 계속한다.

 

화성 답사는 화성 4대문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지만 굳이 내가 팔달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산성으로서의 성벽 외벽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장대에서 화서문 방향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서암문으로 내려간 후

처음 트레킹을 시작하여 올라왔던 코스 즉, 성벽 외벽을 따라난 산책로를 따라 서장대휴게소,

화양루, 서남암문, 남포루를 차례대로 지나치려고 한다.

 

수원 화성을 트레킹할 때 성곽 내부에서 걷노라면 자칫 수원 화성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남도석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과 같이 현존하는 읍성처럼 설계되어 있지 아니하고

수원 화성은 신도시 개념이 도입되어 있더라도 수성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데,

 

밖에서 성을 보면 건물 2,3층 높이(어떤 곳은 그 이상), 안에서보면 그 아파트 베란다 높이 밖에는

안되는 높이이다. 즉, 외벽으로는 성벽의 축대가 고스란히 보이고 높아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축대는 거의 하나도 안보이게 축조하여 적의 공격시 병졸들이 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사진1. 화성 내부. 이처럼 길이 두 가지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흙을 성의 내벽 쪽으로 쌓아 다진 후에 성곽 내부의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적의 입장에서보면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평균 4m 절벽 위의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야하고, 그것도 각종 치, 노대, 포루의 혈석을 통해 쏟아지는 포와 화살을 피해 성을 공략하기란

여간 요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사진2. 서암문 통해 성밖으로 나와 오른쪽 방향. 화서문 방향이다.)

 

(사진3. 왼쪽으로 조금 걸은 후 돌아서서 서장대 방향을 찍었다.)

 

(사진4. 순서 잘못되었지만 서암문 나와서 정면의 산책로. 팔달산은 어느 방향에서나 쉽게 오를 수 있다.

소나무 숲이 도시 생활에 지친 시민들을 미소짓게 할 것이다.)

 

(사진5. 서남문 왼쪽 사진. 왼쪽 까만 벽돌이 서암문 둘출부 둥근 외벽 끝부분이고 이처럼 성벽 외벽을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도록 길을 내었다. 당연히 산이므로 나무가 많은 데 대부분 소나무이다.)

 

사진6.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축대와 소나무. 평지로 다져놓은 흙길이지만 높낮이가 달라 성벽이

곡선미를 띄게 만들었다. 보수공사에 사용된 화강암도 최대한 인공미를 절제한 노력이 돋보인다.

 

언뜻보면 과연 이게 성으로서의 위압감을 주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쉽게 공략키 어려운 성벽 임은 가볍게 이해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건축이란 이렇게 커다란 감동을 주게 마련이다.

 

(사진7. 성 외벽과 소나무와 서포루 외관. 갈색의 성벽과 겨울색의 대지와 서포루의 위용이 한폭의 동양화같다.

시간적으로 촬영하기 좋은 시간 때가 아니고 내 촬영기술이 미흡한 것이 한스럽다.

 

수 십 년 된 소나무가 몸을 틀어 200살이 넘은 성벽으로 향하는 모습이 신비롭다. 성과 소나무 사이의 서포루는

벚꽃이 만발한 오사카 성이 부럽지 않은 듯하다. 아무리 새로운 축조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이처럼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화를 이루는 건축이야말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8. 화성 외벽을 가장 잘 설명하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팔달산 능선을 거의 평지화 할 때도 완전 평지를

만들지 않은 것도 희한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 삼아 그 위에 축대를 쌓은 지혜가 돋보인다.

가히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라 하지 않겠는가? 조선시대 정원양식을 그대로 녹아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사진 왼쪽 중간 쯤을 보면 갈색 축대가 아닌 거의 하얀색 화강암 두 세개가 눈에 거슬린다.

당연히 98년도 보수공사 때 사용한 것인데 잘 보면 기존의 화강암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분이 많은 화강암을 사용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처럼 오묘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해못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까 한다. 기계로 너무 반듯하게 깎아 놓은 듯한 차갑고 써늘한 느낌이다.

 

그나마 하나는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빈틈을 메우려는 듯 기하학적으로 잘라 공사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다.

 

저 바위 아래서 지친 다리를 잠시 쉬게하며 가져간 물을 마시면서 목을 추겨본다.

화성을 계획한 정조대왕과 다산 선생을 절로 떠올리며 그들의 사상과 인품을 생각해본다.

생각같아선 시원한 냉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싶지만 화성 내에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 )

 

 

사진9. 이 사진을 보면 더욱 확연하다. 성벽 축대 상단부에 기계를 너무 잘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글쎄 왜 일까? IMF시절이라 그런 것일까? 한정된 예산에 빠른 공기단축을 위한 것일까?

 

이를 바라보는 소나무가 애처롭기만 하다. 이를 바라보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무겁다.

 

사진10. 사진9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다르다. 보수공사 때 사용된 화강암들인데 이처럼 인공미를 제대로 살렸다.

 

사진11, 12. 서포루. 화강암 축대를 보면 정교하기 그지없는 인공미가 돋보이고 그 위의 벽돌은 무쇠만큼

단단할 듯 보인다. 새롭게 선보인 벽돌 성벽은 조화미의 극치인 화강암 성벽 위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모자이크라는 것이 이처럼 아름답다. 수성을 목적으로 하는 성도 조화를 이루면 이토록 감동을 준다. 

 

 

사진13. 서남치 안에서 봤을 때도 이런 수로가 있었는데 어떤 역할인지 모르겠다.

분명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니 많은 화강암을 깎아 둥그렇게 하향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향하고 있다.

 

사진14. 화성 외벽과 성 내부를 조금 비교해 보았다. 서장대 휴게소 가기 직전이다.

화강암 축대 가장 윗쪽이 성 내부의 성곽길이라고 보면 된다.

 

사진15.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화강암 축대 위로 벌써 검은 벽돌이 빠지거나 부러졌다.

축대 위의 성벽은 대부분 98년 보수공사 때 공사한 것이니 아무리 현대 건축기술이 좋다고 해도

성을 쌓는 기술은 옛날만 못한 것인가 보다. 

 

사견을 덮붙인다면 이는 공사를 하는 마음이 다른 것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현대 건축은 노력봉사가 아니다. 이익을 내야하는 사업체에서 시행한다.

 

하지만 옛날에 이 성을 지을 때는 정조가 국가재정을 사용하지 않고 왕실 재정을 사용했으며

200여 년 전의 건축사업은 이익을 내기 위한 사업의 개념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도록 튼튼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그리하여 화성 내에 사는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짓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지었을 것이다. 

 

저 진천의 천 년된 농다리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바르면 그 건축도 오래갈 것이며 그것이 곧 건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대한의 봉사이자

결국은 그것이 곧 사업체로서 신용을 높이고 돈을 버는 지름길이며 장인정신이 아니겠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반드시 이런 고건축물들을 보고 듣고 느껴야하는 이유이다.

   

사진16.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희한한 것이 눈에 뜨인다. 무엇인고 궁금하여 확인해보니 돌이 아니다.

플라스틱인 것도 같고 FRP인 것도 같다. 성 외벽으로 보기 흉한 전선줄이나 호스를 내었는데 이를

감추기 위해 만든 것이다.

 

참으로 센스있다. 서포루에서 보면 검은 색 호스(아마도 전선줄이 아닐까 싶다)가 아래로 늘어뜨려

보기 흉하던데 이곳에는 적당한 크기의 가리개를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상이라도 주고 싶다.

 

사진17. 길을 계속 이어진다. 서장대 휴게소를 지나 서남암문, 화양루로 가는 소나무 숲길.

이곳은 평소 화성을 찾는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아주 호젓한 분위기이다.

숲길 중간에 바우들이 보인다. 성을 축조하던 당시에 저런 바위들을 적당하게 깍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웬지 뭔가 역사를 간직한 듯 보인다.

 

사진18, 19. 밖에서 본 서남암문.

유럽의 어느 고성 입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다산 선생은 화성 축조의 근원이 되는 '성설'에서

선을 연구할 때 유럽, 일본, 중국 등의 성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연구하여 자신만의 '성설'을 내세우고 화성을 축조하였는데 이 서남암문과 화양루 사이의

특이한 구조는(이곳부터 화양루까지의 성벽은 아주 낮다. .......)

 

그래서 조금 생각해 보니 외적이 쳐들어오면 화양루에서 관측하고 내부에 알린 후

서장대에 있는 장군에게 보고 되고 수성을 준비하는 동안 1차적인 방어까지 전담하되 성의 높이가 낮아

방어가 쉽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서남암문 안쪽에서 수성 준비가 다 되면 빨리 후퇴하여 수성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뭐 내가 군사전문가도 아니고 특히나 조선시대의 수성에 관한 전략전술도 모르니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정도 생각해 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어렵지 않으리라. 

 

다시말해서 화양루는 평시에는 관측 위주로 하고 유사시에는 빨리 서남암문으로 피한 후에 수성하도록

설계했지 않나 싶다.

 

 

사진20. 화양루 외벽 쪽에서 바라본 서남암문 방향. 바른 성벽과는 달리 화강암 축대가 2단 밖에 되지 않는다.

 

사진22, 23(아래) 화양루 밖의 화성 최남서쪽 성벽. 다른 성벽에서는 볼 수 없는 축대를 쌓은 흔적이 있다.

화강암 축대 아래에 축대를 받친 돌들이 보인다. 마치 석탑의 기단석처럼 평지 위에 평평한 돌을

구들장 놓듯이 깔은 뒤에 성벽을 쌓은 것이다.

 

왜 이렇게 어렵게 하였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해답이 금방 나온다.

성벽에 사용된 돌의 무게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 무게를 지탱하려면 흙이 아무리 다져진들

오랜 시간이 지나면 풍화, 풍수로 인해 조금씩 뒤틀리고 이로인해 성벽도 뒤틀릴 것이다.

 

그래서 돌의 무게를 분산하면서 평지의 흙 위에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책임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가 이곳에 와서야 느낀 것인데 이곳을 지나 남포루 아래를 가니 더욱 쉽게 느낄 수 있다.

 

 

사진24. 화양루(사남각루). 성벽이 낮아도 쉽게 안을 들여다보기 힘들다.

서장대 현판은 정조의 글씨라는데 이곳 현판의 글씨는 누구의 것일까?

 

사진25. 화양루에서 사남암문 사이. 오른쪽 성 외곽길. (사남암문에서 보면 왼쪽길)심지어 이곳은 더욱 낮아서

화강암 축대가 1층이다.

 

사진26. 성 외벽을 따라 가는 길 곳곳에 팔달문 방향으로 내리막길이 있다. 소나무 숲이다.

산의 높이가 얼마 되지 않으니 저 아래 도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27. 서남암문 밖에서 남포루 방향. 아쉽게도 서남암문 밖에서나 화양루 밖에서는 성 내부로

다시 들어가는 문이 없다. 담치기를 하던지 아니면 서장대휴게소로 다시 가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성벽 안쪽 안쪽으로 올랐기에 이번에는 이 아래길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남포루

앞에서 잘 생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28. 사진에서 이처럼 사람을 소재로 삼는 경우에는 사물들의 크기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앞서가는 한 사람의 키로 인해 성벽의 높이와 남포루의 크기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사진29. 성벽 밑에 쌓여있는 낙엽들이 흐린 햇살을 받고 있다.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건만 화성은 여전히 말이없다.

 

지난 겨울 한파가 극성을 부린 때가 많았는데 그리도 몹시 추운 겨우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이 신기할 정도다. 화성을 향한 그리움이련가?

 

사진30. 드디어 남포루 앞까지 와보니 몇개의 화강암 축대 위에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되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형태의 안정감이 돋보인다.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포를 위한 혈석(穴石)들이 시꺼멓게 뚫려있고 지붕 처마는 상단의 성벽 바로 아래까지 내려있다.

상단의 성벽 또한 포나 화살을 쏘기 쉽도록 큰 열쇠구멍 모양의 혈석이 뚫려있는데 사이의 빈 공간은

평시에는 열어두지만 전시에는 닫도록 되어 있다.(서포루 참조)  

  

사진31, 32(아래) 남포루 바로 앞에서 본 사진. 아래의 내리막에는 계단식 화강암 축대를 사용하여 더욱 튼튼하게 했다.

모퉁이는 각이 지지않도록 둥그렇게 돌렸는데 이렇게 하면 풍화작용에도 강하고 모퉁이가 쉽게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화강암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벽돌이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퉁이를 각이 없는 둥근 형태를 띄게 하면 멀리서 봤을 때 안정감과 조형미가 뛰어나다.

그것은 첨성대를 생각해보면 된다.

 

첨성대를 사각형이나 육각형로 만들고 모서리마다 각지게 만들었다면 가까이서 보면 어떨지 몰라도

멀리서 보면 미학적으로 떨어질 것이다.

 

남포루는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모퉁이미다 각이 지지 않도록 하면서도 지붕 처마를 성벽 아래까지 늘어뜨려

확실하게 수성의 역할을 하는 누각의 위압감을 보여주는 화성만의 독특한 구조이자 그 하나로도 완벽한 예술이다. 

 

 

 

사진33. 처음 화성답사를 시작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 좌측 성벽을 따라 올랐다가

성 밖으로 돌아 내려왔다. 그런데 남포루에서 이 문(이름이 없어 안타깝다)까지는 길이 없다.

여기서 아스팔트 도로로 내려가려면 옆으로 조금 걸어서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야한다.

 

(이상 3편을 통해 팔달산의 화성을 설명하였는바 서장대에서 화서문 방향이 빠졌으나

이는 답사 일정상 다음 답사때 돌아보기로 하겠다. 화성은 5.74km밖에 안되는 성곽 길이지만

생각하고 걷는다면 하루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는 답사길이다.)

 

이제 일행은 정조가 화성에 오면 묵었던 화성행궁과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화홍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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