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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희] 내시의 딸 - 사촌동생 영윤이 2
나는 그래도 저녁이면 괜히 작은 아버지네를 갔다.
영윤이는 방에 없었다.
보니 작은아버지네 사랑채에 세 들은 집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이 신기하기도 하고 좀은 어색하게 바깥에 선 채로 그 텔레비전을 함께 보았다.
배삼룡과 이기동 그리고 깔끔이 김희자가 나오는 코미디 프로였다.
사랑방의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나도 차츰 재미가 들려 어정쩡하게 선 채로 그 텔레비전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윤이가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를 흘깃 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켜면서 긴 하품을 했다.
"아, 졸려.
난 이제 자러 가야지."
그러면서 방에서 나오자 내가 아직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도 그 사랑채 사람들은 방문을 탁 닫았다.
나는 사람이 서있는데 방문을 탁 닫는 그 사람들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 사람들은 왜 하나도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없을까?
작은아버지네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세 집이나 되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은 가난한 사람들만 세를 들어왔다.
나는 그 날 늦도록 엄마에게 텔레비전을 사자고 졸랐다.
나는 이제 아침이면 작은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다.
달걀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침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부리나케 빨래를 다하고는 밭으로 나갔다.
배추 모종을 내었고 밭에 있는 호박넝쿨 사이로 자라는 밤미콩 밭을 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밭에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점심이 되자 벌써 멀쩡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다소 못마땅한 듯 한번 쳐다보긴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영윤이가 왔다.
나는 아이들하고 놀러 밖으로 나왔다.
문숙이와 미숙이가 공기를 하다가 우리를 불렀다.
"공기하니?"
"니네들도 할래?"
"응."
"난 못 해."
영윤이가 말했다.
"괜찮아.
넌 나랑 편 먹으면 돼."
나는 금방 영윤이 편이 되어있었다.
"승화야, 뒤집어라 엎어라 하자."
"그런 게 어디 있어?"
문숙이가 말했다.
나는 공기를 못하더라도 기왕이면 영윤이와 같은 편이 되고 싶었다.
같은 여자들끼리도 이상하게 예쁘고 깔끔한 아이가 눈길을 끄는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영윤이가 이제 내 동생이라고 하니 이상한 질투심을 느끼다가도 아이들과 놀 때는 왠지 영윤이에게 정이 갔다.
"싫어.
손이 더러워지잖아."
그러면서 우리들의 손을 보았다.
공기를 하면서 흙바닥에 긁히고 그 긁힌 자국으로 흙이 들어가
손은 여자아이들 손이라기보다는 선머슴아들의 손처럼 거무튀튀했다.
"싫음 관둬."
문숙이가 말했다.
나는 공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영윤이와 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럼 나도 안 해."
내가 말했다.
문숙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영윤이가 먼저 놀자고 했으니까."
영윤이가 더 예뻐서 영윤이랑 논다는 속마음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그만 가 봐."
문숙이의 말에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바이올린을 들은 노진이가 걸어왔다.
나는 노진이가 반가워 부르려는데 영윤이가 먼저 나폴거리는 레이스의 원피스 끈을 내보이며 앞으로 나갔다.
"와, 김노진 오빠."
영윤이는 오빠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오빠네 집에서 환등기 보여줘."
"어, 나 지금 바이올린 가는 중이라 안 돼."
"어, 나도 피아노 가야 하는데.
기다려 줘. 응?"
영윤이는 금방 붙임성 있게 노진이를 따라나섰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서있었다.
영윤이는 하얀 원피스를 나폴거리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금방 피아노 가방을 들은 영윤이가 나오고 하얀 손수건을 들은 영윤이는 어느 사이 분홍색 샌들로 갈아 신고 있었다.
양말은 흰 레이스의 눈부신 흰 색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울적해 졌다.
그리고 이상하고 허전한 그런 마음이 몰려왔다.
"야! 공기나 하자."
내 마음을 아는지 사람 좋은 문숙이가 말했다.
"나 지금은 하기 싫어."
그리고 나는 감나무 밑으로 갔다.
아버지가 감나무 밑의 평상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걸어오는 것을 보더니 팔을 벌렸다.
나도 시원한 감나무 밑을 떠나기가 싫어서 아버지 팔을 베고 같이 평상에 누웠다.
"아버지.
우리 감나무는 얼마나 된 거예요?"
"한 이 백년은 되었다는구나."
"그렇게나 오래요?"
"그렇지.
말을 못하는 나무이기에 그렇지.
네게는 할아버지지."
사실 아버지의 나이는 많았다.
육십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나는 늦은 편이었다.
엄마는 이제 마흔도 안 되었으니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아버지의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사실 그 때문일까.
아버지는 나를 야단 한 번을 안치고 키웠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하게 우리가 뭐 잘못하는 것도 없었지만 거의가 엄마에게 일을 일임한 편이었고
엄마 역시도 무엇이던지 아버지와 상의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정말 싸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여러 가구가 살고 남의 싸우는 것을 하도 자주 보아서 왜 우리 부모는 싸움을 안 할까라는 이상한 생각도 했다.
엄마는 밭에서 땀을 흘리는데 우리는 감나무 밑 평상에 앉아 낮잠을 청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다른 집 같으면
싸움 거리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으로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나는 누워 있는 아버지의 흰 머리칼을 하나씩 뽑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잡아뜯는 내가 아프지도 않은지 얼굴만 계속 찡그렸다.
우리는 누가 봐도 정말 사이 좋은 부녀간이었다.
엄마를 따라 흥국사를 갔다.
조선시대 선조가 몽진을 하기도 했다는 흥국사는 덕능고개 너머에 있었다.
집을 나서서 덕성여객 버스 종점까지를 걸어 올라가고 나서도 고개를 하나 넘어야 흥국사였다.
덕능고개가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과 상계동의 접경이니 흥국사는 경기도에 위치한 절이었다.
상계동에도 절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하고 큰 절로 치기에는 역시 흥국사였고
엄마는 사월초파일이나 칠석이면 여지없이 나를 데리고 흥국사로 갔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소 먹이꾼이던 견우와 옥황상제의 딸인 직녀가 둘만의 사랑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하여
벌을 받아 생이별한 후 인간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재앙이 닥쳤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하루만을 만나도록 허락한 때문이었다.
은하수의 강을 건널 수 없는 그들은 서로 얼굴만 멀리 바라본 채 눈물을 흘렸고
두 사람의 눈물 때문에 지상에는 연일 홍수가 나고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자 까막까치들의 칠석 하루만이라도 그 정인들의 사랑을 도와주고 싶었고
기꺼이 그들의 몸으로 은하수의 강이 되어 주어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글자 한자를 알지 못하면서도 이상하게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엄마가 밭고랑에서 혹은 머리맡에서 간간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덕능 고개를 접어서자 간간이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벌써 엄마는 하얀 양산을 펴 들었다.
엄마는 나를 양산 안으로 들어오라고 끌어 들였지만 나는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앞서갔다.
내가 고개를 향해 한참을 가다보면 이내 엄마는 저 아래에서 힘겹게 고갯길을 올라오고
나는 그러면 또 겅중거리면서 아래로 치달아 엄마 옆에서 앞서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랑 십 리 길 덕능고개를 넘는 길이 나에게는 이십 리 길이었으리라.
엄마 뒤에 오던 노인이 엄마에게 물었다.
"아이가 몇 살이오?"
"여섯 살이에요."
"꽤 숙성한 편이구랴.
그래 슬하에 자녀를 몇 분 두셨오?"
이렇게 묻기라도 하면 엄마는 나를 손끝으로 가리키고는 그냥 끝이었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왠지 우리 집안의 내력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탓이었는지
엄마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히려 뒤쳐지게 걸어서 그들을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개를 넘어서고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앞세워야 했다. 이제 고개로는 막파른 길이었다.
가파른 고개 굽이 하나면 돌아서면 정상이었고 그 곳에는 보초병이 서 있었다.
우리는 최후의 힘이라도 낼 것처럼 가파른 고갯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고개의 최정상이 보였다.
양옆으로 파아란 숲을 사이에 두고 황토 빛의 흙이 정상의 파아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지평선이 저런 거던가?
하늘과 닿아있는 고갯길을 걸으면서 겅중거리던 나조차도 마지막 가파른 숨을 몰아 쉴 때였다.
우리를 앞서가던 노인들이 보초병의 검문을 받고 있었다.
대개가 남자들은 검문을 하지만 여자들은 검문을 하지 않는 것은 상례였다.
우리는 그 고갯길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라 한결 걷기가 수월한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늘 이 고갯길까지가 고비였다.
엄마는 느리게 걷던 걸음을 빨리 재촉했고 그것 역시 빨리 고개를 넘으려는 엄마의 의도로 알 때이었으리라.
우리는 단숨에 보초병을 통과하여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저, 아주머니."
나는 그 소리에 흘깃 고개를 돌려 보초병을 보았다.
엄마는 그 소리를 못 들었는지 부리나케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보초는 다시 한 번 엄마를 불렀다.
"저, 양산 쓴 아주머니."
엄마가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마치 빈혈을 심하게 앓는 사람처럼 엄마는 휘청거릴 듯이 그 보초병을 바라보았다.
"저 말이에요?"
엄마의 말에 "저 아래 뭐가 떨어져 있는데..."
보초병이 가리킨 것은 양산 집이었다.
"저것 가져 가시라구요."
엄마 대신 내가 먼저 몸을 날려 양산 집을 집어들고 엄마에게로 뛰어왔다.
엄마는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도 가슴을 들먹거리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고
나는 그것이 엄마가 키는 너무 크고 살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길을 다 내려가서 우리는 왼쪽의 마을로 접어들었다. 이 마을은 근 사오십 호의 집들이 마당마다
큰 감나무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여기 살면 나는 감나무집 아이로는 불리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감나무 집의 아이란 소리가 나는 좋았다.
감나무집 아이라는 것은 가장 풍요한 상징 같은 의미가 있다.
농사를 지어 필요한 것들은 모두 조달하고 집주인이라는 의미로도 사람들은 우리 집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 섰다가 엄마만 지나가면 "내시의 처들이 미색이란 말 진짜야."
이런저런 말들로 우리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나는 담담하다고 했지만 나를 내시의 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왠지 유심히 보곤 했다.
남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난 나는 늘 진리 같은 대답을 발견하곤 했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얼굴은 좀 비뚤어지고 못 생기고 착하게 생기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 위안이 되었다.
만일에 가장 잘 생기고 부자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마을을 지나 고갯길을 잠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만난 곳은 연못이었다.
흥국사의 연못 그리고 화려하게 핀 수련.
연꽃.
나는 엄마의 불공에 참가하여 따라 절하고 머위나물과 튀각으로 된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당에서 아이들이 앉아 공기를 하고 있었다.
공기라면 내가 선수였지만 내가 빠진 공기의 선수는 문숙이리라.
아이들은 내가 다가온 지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승화네 아부지 내시 맞지?"
"근데 내시가 뭐야?"
아이들의 말에 미숙이가 자신 없게 말했다.
"뭐긴 뭐야. 고자지."
"고자가 뭔데?"
아이들이 다시 묻고 미숙이가 다시 말했다.
"꼬추가 없는 사람이 고자래."
"그럼 오줌은 뭘루 눠?"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아이들의 말에 머리끝이 쭈삣서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나에게 기꺼이 충성을 바치던 친구들이자 가장 친한 동무이던 그 아이들이 내가 자리에 없을 때는
내 흉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의 화제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들을 해내기라도 할 듯
그들을 굽어보고 있을 때였다.
미숙이가 말했다.
"그래서 승화를 내시의 딸이라고 하잖아."
"그래그래, 내시의 딸이래."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고 나는 그들을 사이로 한판 싸움을 벌일 판이었다.
"승화는 내시의 딸이 아니야."
문숙이가 말했다.
"승화는 그냥 감나무집 딸이야."
"그것도 맞지.
그렇지만 내시의 딸은 내시의 딸인 거지 뭐."
아이들이 말하자 문숙이가 말했다.
"진짜 내시면 어떻게 딸이 있냐?"
"너 아직도 몰라.
승화는 이 집 친딸이 아닌 거야."
이미 초등학생인 현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는 투로 말했다.
문숙이가 되받아 말했다.
"이 집에 내가 제일 오래 살은 거 알지?
그래서 난 알아.
승화는 여기서 태어났고 감나무 집 딸 맞아."
나는 문숙이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처음으로 이상한 절망을 느끼었다.
그 속에 내가 서 있을 만한 용기도 배짱도 없는 나는 뒷걸음질을 쳐서 집밖으로 나갔다.
나는 누구의 딸일까?
내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면 내 진짜 아버지는 누구일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나는 혼자서 당고개까지 걸어갔다.
대광극장이 보이고 "아이스케끼"를 외치고 다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 아이들은 아버지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이제 내 정체를 다 안다.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시의 딸인 것이다.
어른들뿐이 아닌 아이들마저 내 가장 친한 동무들마저 나를 내시의 딸이라고 하는 그런 지금이 나는 무척 싫었다.
그때 였다.
버스에서 뛰어내리던 진봉이가 파란 교복을 입고 내게로 뛰어왔다.
"야. 승화야."
나를 보고 반색하는 진봉이 나도 반가웠다.
"진봉아."
여섯 살짜리 내가 이름을 불러도 진봉이는 별로 불쾌해 하지 않았다.
"야, 더운데 아이스케끼 먹자."
진봉이는 바지에서 오 원짜리 한 개를 꺼내어 아이스케끼를 두 개 샀다. 팥물이 들어간 시원한 아이스케끼는 딱딱했고
얼음에 소금을 더 넣어 냉장고가 아닌 얼음 통을 채우는 탓에 얼음 통의 짠맛이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무척 달았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얼떨결에 아이스케끼를 손에 들었다.
"쪼끄만 게 여기까지 혼자 뭐하러 왔어?"
"어, 그냥."
진봉이는 아이스케끼를 손에 쥐고도 그냥 집으로 가진 않았다.
도중에 왕거미 도서실에 갔고 만화책을 먼저 빌려 갖고는 집으로 향했다.
"느네 마루에서 보자.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봉이가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널리 호가 난 일인데 만화책만 본다고 집에서 야단을 치자 생각해 낸 것이
만화를 빌려 우리 마루에서 보고 갖다 주는 일이었다.
진봉이가 만화책을 읽으면 나도 만화책을 보았다.
나도 글씨는 모르지만 만화책 보는 것을 재미 붙인 것은 순전히 진봉의 덕이었다.
나는 만화책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자꾸 내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난 걸까? 엄마는 왜 우리 집에 시집을 왔을까?
엄마처럼 예쁜 여자가 왜 그런 기구한 운명을 가지게 된 것일까?
라디오 연속극을 매일 듣고 어른들의 틈에서 자라났던 나는 여자가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는 일이란 것쯤은 알고있었다.
엄마는 얼마나 잘난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걸까?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가 되는 그 사람은 그렇게 잘난 남자라는 말인가?
나는 그림만 보면서 만화책을 넘기는데 어느 사이 문숙이가 왔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의 사소한 입씨름에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는 목청껏 부른 것이다.
"승화야아~"
"왜?"
나는 아무 느낌도 없게 말했다.
"우리 소꿉놀이하러 노인정 공터에 가자."
문숙이가 말했다.
나도 뜻 모르는 만화책을 읽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어."
문숙이가 나를 끌자 미숙이도 우리를 따라왔다.
집에서 나랑 제일 친한 애는 역시 문숙이였다.
문숙이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유난히 정의감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미숙이는 좀 깍두기 같은 아이였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요리조리 붙는 형이었다.
나는 그대로 미숙이하고도 잘 놀고 문숙이 하고도 잘 놀았다.
우리들은 모이기만 하면 폭포수 공터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공기 돌을 줍기도 하고 소꿉놀이도 했다.
우리는 한참 소꿉을 벌려놓고 밭에 갔다 온다면서 공터로 풀을 뜯으러 갔다.
모래 언덕뿐인 폭포수 공터는 들풀들도 별로 없었다.
워낙에 척박한 땅이라 사람들은 그 땅에 무엇을 심을 엄두조차 내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개울가에 가까운 곳을 찾아가서 강아지풀도 뜯고 명아주도 뜯었다.
노오랗게 피는 애기똥나무는 잘못 잘라내면 애기 똥 같은 노란 진액이 묻어 나오므로 애기똥나무는 잘 뜯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풀이름들을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우리들 소꿉이라야 깨진 옹이 조각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바가지 정도여서 살림살이는 정말 형편없었다.
그래서 우리 셋이 풀을 뜯으러 나가도 소꿉을 잃어버릴 걱정은 애초에 없었다.
풀 숲을 뒤지던 우리들은 무엇인가 노오란 것을 보았다.
크기가 아이 주먹만 한게 넝쿨을 달고 무언가 파아란 것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참외다."
우리는 세 명이 동시에 외쳤다.
정말 그것은 참외였다. 개똥참외가 또 열려 있던 것이다.
이 근처는 인적이 드물어서 아이들은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이곳에서 용변을 보는 일이 흔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참외 싹이 자랐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자라난 것 같았다.
노진이와 왔을 때보다는 열매도 작고 개수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참외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보너스 같기만 했다.
우리는 우선 노란 참외를 두 개 땄다. 그리고 파란 참외는 두기로 했다.
이것은 우리들의 밭이었고 이 밭은 우리들의 것이므로 익을 때까지 기다려 참외를 따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참외를 가지고 집으로 소꿉놀이를 펼쳐 놓은 곳으로 가서 참외를 치마에 슥슥 닦았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한 입씩 먹어 보았다. 참외는 작았지만 과질이 얇고 여간 단 게 아니었다.
우리들은 아쉬움을 가지고 나머지를 끝까지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우리는 즐겁게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만의 밭 우리는 이제 밭이 생긴 것이다.
세 명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빨간 피아노 가방을 들은 영윤이가 걸어왔다.
나는 영윤이를 보자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영윤이 이름을 부르려는데 영윤이는 우리들을 쓱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숙이만 불렀다.
"미숙아, 초콜릿 먹을래?"
영윤이는 사촌인 내가 아니고 미숙이를 불렀다.
그리고 영윤이는 가방에서 커다란 초콜릿을 꺼내 미숙이에게 반을 선뜻 잘라 주었다.
"니네들 어디 갔다 오니?"
나는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저를 얼마나 생각하는데.
내가 아니고 미숙이를 불러 초콜릿을 주다니...
나는 너무 기분이 상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미숙이는 거기 영윤이곁에 서서 무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어, 너네들 어디 갔다 오니?"
노진이였다.
"폭포수 공터에."
우리는 의젓하게 대답했고 노진이가 말했다.
"너희들 또 참외 땄어?"
노진이도 그 개똥참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응."
"이야. 그래 너희들끼리만 갔었단 말이지?"
"하하하."
우리들은 노진이의 익살스러운 말투에 웃었다.
영윤이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다가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개똥참외가 어디 있는데?"
나는 순간 입을 꽉 다물었다.
문숙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을 그만 꽉 다물었고 노진이도 입을 열진 않았다.
영윤이는 우리들의 행동에 매우 언잖은 얼굴이었다.
그때 노진이가 "승화야 우리 환등기 보러가자."
문숙이가 나 대신 "환등기가 뭐야?"
"아, 그것은 영화처럼 사진을 보는 거야."
우리는 뭔지 신기한 것을 말하는 것 같아 신이 나서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때 저 쪽에서 영윤이와 미숙이가 걸어왔다.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미숙이가 호기심 있게 물어왔다.
우리는 대문 안으로 노진이를 따라 들어가면서 메롱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윤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리 뒤로 따라왔다.
그리고 얼굴을 조금 찡그리면서 아주 귀엽게 말했다.
"니네 거기 들어가니? 뭐 하러 가는데?"
문숙이는 말하지 않았고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문숙이는 한술 더 떠서 대문을 탁하고 닫아버렸다.
그때였다.
딩동하는 초인종이 바로 울린 것이다.
우리는 놀라서 밖을 보는데 노진이가 밖으로 나와 대문을 얼른 열었다.
대문밖에는 빨간 피아노 가방을 들은 영윤이와 미숙이가 서있었다.
"오빠, 우리도 들어가면 안 돼?"
영윤이가 서서 말하였다.
노진이는 우리들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영윤이는 "우리도 들어가고 싶어. 응. 오빠 들여보내 줘."
노진이는 거절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한 듯 말하였다.
"들어 와."
두 사람은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냉큼 집으로 들어왔다.
"나랑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녀."
노진이가 변명처럼 말했다.
"안녕하세요?"
영윤이는 노진이 엄마한테도 붙임성있게 인사를 했다.
노진이 엄마는 언제나처럼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예쁜 아가씨들이 이렇게 많이 놀러왔네?"
"안녕하세요?"
나도 새삼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승화구나. 그렇잖아도 기다렸지. 지난번에 새로 만든 인형을 주려고 말이야."
"어떤 거 줄건 대요?"
나보다 영윤이가 되물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인형인데..."
"어디요?"
아이들은 노진이 엄마를 따라 거실로 갔다.
지난 번 내가 받았던 인형보다 더 예쁜 하얀 드레스의 인형이 유리상자 속에서 아름답게 서 있는게 보였다.
나는 그 인형에 감탄하며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얼굴도 더 예쁘고 옷도 더 예쁜 인형이었다.
노진이 엄마의 재주는 정말 신기하기만 하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인형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도 갖고 싶다."
영윤이가 말했다.
그리고 노진이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저거 나 주시면 안돼요?"
영윤이는 나에게 주기로 한 인형을 가르쳤다.
"이것은 벌써 승화랑 약속을 했는 걸."
영윤이는 무척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세하게 인형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갖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