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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때늦은 절규 “하늘이시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2025년 2월 서울학교는 <남한산성, 속속들이 일주>
겨울 정취 깊어가는 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8강(제7기 제4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조정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끈질기게 항전하다가 결국은 삼전도로 내려와 인조는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갖추는데, 그 역사의 회한이 서린 남한산성을 속속들이 둘러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남한산성 내성과 이어져 있는 신지옹성의 호젓한 모습Ⓒ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8강은 2025년 2월 9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남한산성 로터리주차장(버스종점)에서 모여주세요.
*찾아가는 길은 아래, 경기도남한산성세계문화유산센터 홈페이지 중 <오시는 길>의 <대중교통>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 후 2번 출구로 나와 52, 9-1(휴일), 9(우회)번 버스 승차(26-43분 소요), 남한산성(종점) 하차 바랍니다. 문의 : 경기도 콜센터(031-120).
*집합장소가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행궁-침괘정-숭렬전-연주봉옹성-우익문-청량당-수어장대-매바위-지화문-점심식사-전승문-옥정사터-외성문-봉암성-동장대터-신지옹성-장경사-좌익문-수구문-지수당-연무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남한산성 전도Ⓒ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남한산성, 속속들이 일주>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격변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당한 대전란
16세기 말 동북아 질서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가 국력이 소모되어 쇠퇴한 틈을 타서 여진은 만주를 장악하고 중원을 넘볼 정도로 강대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 행태는 ‘어버이의 나라’로 받들 정도로 극에 이르러 마침내 한 시대를 지배하는 명분이요 이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 망상의 폐해는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청에 대한 멸시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로 들어선 명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재편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여진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조선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훗날 청(淸)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後金)과 ‘형제의 나라’로 맹약을 하였으나 후금이 명을 친다는 명분으로 지나친 요구를 해오던 중, 마침내 국호를 청이라 정하고 왕(王)을 제(帝)라 칭하며 사신이 와서 이를 통보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들을 만나주지 않자 청 태종이 직접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1636년 12월 12일 조정에서 청의 2차 침공 사실을 알고는 13일에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하고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과 종실은 강화로 피난하였고, 14일 임금의 수레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홍제원에 이미 적들이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禮)로서 굴욕적으로 항복을 하고 한양의 궁궐로 돌아가기까지 청과 맞서 전쟁을 치렀던 회한이 서린 곳이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산성이란 도성이나 읍성과는 달리 전란과 같은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임금을 비롯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여 적과 대치하며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그곳에는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러운 삶이 어우러진 많은 회한의 사연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회한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서울학교
“그 험한 형세는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을 수 없는 땅”
남한산성의 입지적 특성에 대하여 심상규가 쓴 <좌승당기>에는 “한산의 성은 예부터 백제 온조의 도읍지로 일컬어져 왔는데 서북쪽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과 한수로 막혀 있고 동남쪽은 영, 호남을 제어하고 경사를 막아낼 정도로 하늘이 만들어낸 산은 장자의 기상이요, 잔도와 검각과 같이 험한 형세는 앉아서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을 수 없는 땅”이라고 하였듯이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식량이 고갈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처럼 성 자체는 최적의 방어요건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의 남쪽 외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백제를, 온조는 한강 유역에 한성백제의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비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나라가 없어져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한성백제로 합쳐졌습니다.
삼국의 초기 도읍의 형태는 고구려가 그랬듯이 ‘이성 도읍’ 체제였는데 한성백제도 그 방식을 따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두 개의 도성으로 삼고 동서남북에 도성을 외호하는 산성을 두어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아차산성, 서쪽으로는 수도산에 삼성리토성, 동쪽으로는 광주에 이성산성,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을 구축하였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 개로왕이 아차산성에서 전사하자 백제는 남쪽으로 공주까지 내려가 도읍을 정하여 웅진백제를 열었고 이후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 일대는 60여 년간 고구려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무찌르고 성왕까지 죽인 진흥왕의 영토 확장정책으로 한강 유역이 신라의 땅이 되어 한산주라 하였습니다. 특히 북쪽을 ‘북한산주’, 남쪽을 ‘남한산주’라 불렀고 당나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지금의 남한산성 동봉에 산성을 구축하여 일장성(日長城) 또는 주장성(晝長城)이라 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은 남한산(460m)의 고원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지에 쌓은 평균 높이 7.5m 둘레 약 9.5km에 이르는 산성입니다. 2000년대 행궁 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시대 주거지 8기와 수혈유구(竪穴遺構)가 확인되었고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가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쌓았다는 주장성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이 길항(拮抗)하던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을 차지하는 나라가 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최종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그 이전의 주인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려시대에는 1231년과 1232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입 때 광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남한산성이 속해 있는 광주는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12목 중 하나인 광주목으로 승격하였고 이후 12목을 8목으로 줄일 때도 광주목은 그대로 남았을 정도로 남한산성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읍지 한양을 외호하기 위하여 사방에 보를 두었는데 이른바 근기사진(近畿四鎭)이 그것으로 광주가 좌보, 원주가 우보, 수원이 전보, 양주가 후보로서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행주산성과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일본군에 승리하자 조정에서는 산성의 효능에 대해 크게 고무되면서 고성이나 옛 성터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 수원 독성산성은 수축하였고 파주의 마산고성, 양주의 검암산고루, 여주의 파사성, 죽산의 죽주고성은 개축하였습니다.
이때 남한산성은 한양을 방어하고 유사시 거점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에 서애 유성룡이 남한산성 수어책을 주장하였고 그로부터 3년 뒤 사명대사의 승군 60여 명으로 산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며 광해군 때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조의 집권 2년 만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재개하여 공사 개시 2년 만에 남한산성의 개축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624년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남한산성 축성공사를 진행할 때 조정에서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에 이어 판선교도총섭에 올라 봉은사에 머무는 벽암 각성선사에게 공사 책임을 맡겼습니다만 동원된 승려들이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명분과 실리, 또는 화친과 척화,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다시금 성찰할 기회를 주는 화두인 것 같습니다.
행궁 터에서는 백제시대의 주거지와 8기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고 하궐 동쪽에는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세 곳의 사당 :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으로 처음에는 ‘온조왕 묘(廟)’로 건립되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직산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남한산성에 몽진 온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적의 침입을 알려줘 무찌르자 남한산성으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은 이전 시대의 왕조의 시조 왕의 사당을 지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단군과 기자 그리고 동명왕을 함께 모신 숭령전을 평양에, 수로왕의 숭선전을 김해에, 온조의 숭렬전을 남한산성에, 박혁거세의 숭덕전을 경주에, 왕건의 숭의전을 연천에 세웠습니다.
청량당(淸涼堂)은 산성을 쌓은 팔도 도총섭 벽암 각성, 동남쪽의 공사 책임을 맡았으나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처형된 이회와 남편을 따라 강물에 투신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의 위패를 함께 모셨습니다.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았다가 날아가기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회가 공사를 한 부분을 다시 조사해 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고였음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현절사(顯節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계속 항쟁할 것을 주장한 주전파로서 인조의 항복 이후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심양에 끌려가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처형당한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삼학사를 모셔 오다가 이후에 좌의정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셨는데 삼학사란 명칭은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지으면서 이들에게 붙여졌습니다.
침괘정(枕戈亭)은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증할만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산성을 수축할 당시 수어사인 이서가 건물터를 발견하였는데 1751년(영조 27) 광주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침괘정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오른쪽에 군기고가 있어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 부근에 무기고 또는 무기 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무관(演武館)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인데 그중에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한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연병관’이란 편액을 내렸으며 정조 때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릅니다. 전면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주련을 새겼는데 군사훈련 하는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만길 높은 산에 옥처럼 단단한 보루와 철벽같은 산성(玉壘金城萬인山)
바람과 구름, 용과 호랑이 기이한 힘을 발한다.(風雲龍虎生奇力)
각우궁상 음악소리 계림(연무관)에 진동하고(角羽宮商動界林)
은밀히 파뿌리를 전하자 삼본이 텅 비었네.(密傳蔥本公三本)
지수당(池水堂)은 1672년(현종 13) 광주 부윤 이세화가 엄고개에 주정소를 새로 지으면서 폐목재를 옮겨와서 건립하였습니다. 정자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연못이 3개가 있었으나 정자와 연못 2개는 남아 있고 연못 하나는 밭으로 변했으며 남학명이 지은 <지수당기>에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 마스크, 신분증(경로자), 모자, 장갑, 버프(얼굴가리개),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2025년 2월 서울학교 참가비는 6만7천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경기도민, 만 65세 이상자, 국가유공자 중 신분증 지참자는 6만5천원
▷참가비 송금은 국민은행 016701-04-183936 이근성(인문학습원)
▷참가신청은 여기 <참가신청 바로가기>를 눌러서 해주세요. 비회원의 참가신청은 동시에 회원가입으로도 처리됩니다.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일 안에 보내드립니다.
▷참가문의는 050-5609-5609 / 010-9794-8494 (월∼금요일 14:00∼18:00시. 공휴일은 제외), 또는 이메일 huschool@naver.com을 이용해주세요.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huschool.com 또는 https://cafe.naver.com/huschool 을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가입 해주시고 <회원가입 바로가기>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 있습니다.
* 이 답사는 모든 일정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참가취소 시에는 다음과 같은 환불규정이 적용됩니다.
- 출발 7일전 취소시 100% 환불
- 출발 5~6일전 취소시 80% 환불
- 출발 3-4일전 취소시 60% 환불
- 출발 1~2일전 취소시 50% 환불
- 출발 당일 취소시 환불 불가
* 학교별 최소 인원 미달 시에는 휴강될 수 있으며 휴강 시에는 참가비가 전액 환불됩니다.
<공지>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는 2024년 10월 제104강으로 제6기를 마감하고, 11월 제105강으로 제7기를 시작했습니다. 제7기는 모두 12강으로 진행되며, 열두 번의 강의가 끝나면 아쉽지만 2012년 4월 문 열었던 서울학교는 13년여의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려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이 준비 중인 열두 번의 ‘마지막 강의’는 이렇습니다.
2024년
11월 - 조선의 법궁 경복궁 톺아보기
12월 -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2025년
1월 – 사대의 상징 중국 사신맞이 길
☛2월 – 병자호란, 남한산성 회한의 47일
3월 – 기미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4월 - 진달래 능선엔 독립과 민주의 넋이 잠들고
5월 - 아차산 군에 깃든 문화유적들
6월 -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시설
7월 –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서
8월 – 북한산 이야기
9월 - 한성백제의 자취를 찾아서
10월 – 동궐과 후원 그리고 종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