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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월) 연판장 사태 번진‘김건희 문자’…“해킹했겠나”
결국 연판장까지 나왔다. 7월 7일 국민의힘 당권 경쟁이 김건희 여사 문자 논란으로 강 대 강으로 치달았다. 한동훈 당대표 후보는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구태로 규정하며 정면 대응했다. 경쟁 후보 측에서는 총선 책임론, ‘대통령을 흔드는 해당 행위’를 거론하며 후보 사퇴를 압박했다. 일각에서는 연판장에 김건희 여사가 사실상 당 선거에 개입했다는 논란이 겹쳐 오히려 역풍이 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한동훈 후보는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선거관리위원을 포함한 일부 정치인들이 제가 사적 통로가 아니라 공적으로 사과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연판장을 돌려 오늘 오후 후보 사퇴요구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며 “‘예스’냐 ‘노’냐를 묻는 협박성 전화도 돌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같은 이유로 윤리위를 통해 저의 후보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
한동훈 후보는 “여론 나쁘다고 놀라서 연판장 취소하지 마시고 지난 번처럼 그냥 하기 바란다”며 “국민들과 당원동지들께서 똑똑히 보시게 하자”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제가 연판장 구태를 극복하겠다. 당원동지들과 국민들과 함께 변화하겠다”고 했다. 복수의 정치권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 원외 당협위원장들은 지난 7월 6일부터 한동훈 후보가 비상대책위원장이던 지난 총선 당시 김건희 여사가 사과하겠다는 문자를 무시해 총선 패배의 원인이 됐다며 사퇴 요구에 동참해달라는 전화를 돌렸다.
이에 당내에서 과거 친윤석열계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특정인에 대한 비토를 연서명하는 연판장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단체 대화방에서는 10명 안팎의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연판장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경쟁 후보들은 한동훈 후보 압박 수위를 더욱 높였다. 원희룡 후보는 이날 SNS에서 “한동훈 후보가 김건희 여사 문자 논란을 전당대회 개입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그럴수록 한 후보에게 당대표를 맡기면 안 된다는 확신만 확산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대통령실을 전당대회에 끌어들이는 행태는 당을 분열시키고 대통령을 흔드는 해당 행위”라고 덧붙였다.
나경원 후보는 한동훈 후보와 원희룡 후보를 모두 비판했다. 그는 SNS에서 “어설프게 공식-비공식 따지다 우리 당원과 국민, 총선 후보가 그토록 바랐던 김건희 여사 사과의 기회마저 날린 무책임한 아마추어”, “이 와중에 지긋지긋한 줄 세우기나 하면서 오히려 역풍이나 불게 만드는 무모한 아바타”라며 각각 한동훈 후보와 원희룡 후보를 겨냥했다.
한동훈 후보 측 등 일각에서는 김건희 여사가 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 개입했다는 논란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원외 당협위원장은 이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이게 한동훈 후보를 쓰러뜨리는 비장의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역풍이 부는 방향으로 와버린 것 같다”며 “김건희 여사 문자 내용을 본인이 아니면 누가 깔(공개할) 수 있겠나. 이 자체가 이미 당무 개입”이라고 말했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지난 7월 6일 SNS에서 “내밀한 문자가 공개된 것은 김건희 여사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누가 해킹을 해 빼냈겠나”라며 “지난번엔 대통령실, 이번엔 아예 여사가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건희 여사 문자 논란은 지난 7월 4일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김규완 CBS 논설실장이 지난 1월 김건희 여사가 한동훈 후보에게 보낸 문자의 요약을 공개하면서 불거졌다. 김규완 논설실장이 공개한 문자에 따르면 당시 김건희 여사는 “몇 번이나 국민들께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사과를 했다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 망설였다.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월 17일 김경율 전 비대위원이 명품백 수수 의혹과 관련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거론하며 사과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전후로 김건희 여사는 한동훈 후보에게 총 5번 문자를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한동훈 후보는 1월 18일 “전후 과정에서 분명히 아쉬운 점이 있고 국민들께서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김규완 논설실장이 공개한 문자는 1월 19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훈 후보는 지난 7월 6일 SBS 유튜브에 출연해 “제가 공개적으로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외부적으로 그걸 이야기했고 그 이전에도 대통령실에다가 ‘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국민 눈높이에 맞는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해왔다”며 “(그런데) 대통령실에서는 좀 부정적인 입장을 저한테 이야기하시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상황에서 영부인께서 저한테 개인적인 방법으로 문자를 보낸다면 저는 거기서 답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며 “사과가 저한테 사과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제 허락이 필요한가”라고 말했다.
라면의 재발견 '한 봉지 10원'… 발칵 뒤집어진 익산
라면이 처음 나온 것은 1963년이었다… 이 배고픈 시절에 나타난 라면의 맛은 경이로운 행복감을 싼값으로 대량공급했다. 그 맛의 놀라움은 장님의 눈뜸과도 같았고, '불의 발견'과 맞먹을 만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중) 1963년, 그해 처음 나온 라면은 '삼양라면'이었다. 춘궁기가 닥치면 2백만 명 이상이 굶주렸다던 그 시절, 일본에서 맛본 인스턴트 라면을 본떠 우리만의 라면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가 있었다. '삼양식품'을 세운 고 전중윤 회장이다. 그리고 이곳 익산은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이었다.
전중윤 전 회장은 일제강점기이던 1919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달전리에서 태어났다. 해방을 맞아 아내와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그는 안타깝게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다시 도망치듯 회사 동료의 고향인 익산으로 떠나야 했다. 그땐 기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익산에서 멈춰 섰던 피란민들이 적지 않았다. 익산은 그들 모두를 따뜻하게 품어준 도시이기도 하다.
전중윤 전 회장도 동료와 동네 이웃들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얻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십여 년 만에 삼양식품을 일군 그는 훗날 익산에 라면공장을 세웠다. 1971년 준공식을 맞아 오랜만에 이 도시를 찾은 그는 20년 전의 기억을 꺼냈다. "이곳 이리시는 본인이 6·25 동란 때 2년 동안 피난을 와서 보살핌을 받았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장입니다. 이곳에 호남공장이 건설되게 되었음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합니다." (<익산열린신문>(2021.9.17))
◆ 익산이 기억하는 '삼양라면'의 맛
옛 이리역 주변과 중앙동엔 연탄공장들이 많았다. 멀리 탄광에서 기차로 실어 온 석탄들을 역에 붙어있던 널찍한 야적장에 부려놓으면 가까운 연탄공장들이 가져다가 연탄을 찍어냈다.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가 터질 때까지 부모가 합동연탄공장을 운영했다는 문성록 원광대학교 의대 교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연탄 배달부들 틈에서 먹었던 삼양라면의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연탄을 리어카에 100장씩 실어서 배달했는데,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오면 새거리(새참)로 라면을 끓여줬다. 창고엔 삼양라면이 박스 채로 쌓여있었고, 커다란 연탄난로 위에 들통으로 물을 끓이다가 아저씨들이 돌아올 때쯤 양은냄비에 라면이랑 뜨거운 물을 붓고 계란 하나, 파를 넣어서 금방 끓여냈다. 나는 사장 아들이라 경리 누나들이 소시지도 넣어줬는데,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삼양라면의 맛을 기억하는 건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다. 한때 익산엔 멀리서 기차로 통학을 하거나 방을 얻어 살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도 라면은 없어선 안 될 먹거리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세운 이리농림학교와 해방 직후 문을 연 남성고등학교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세운 이리기계공업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익산은 한때 '교육의 도시'로 불릴 만큼 이름 난 학교들이 많았다.
아침 저녁이면 새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역 앞을 가득 메웠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까마귀떼' 같다고도 했다. 형편이 조금 나은 이들은 자취나 하숙을 하기도 했지만, 냉장고조차 없던 좁디좁은 자취방에서 배고픈 청춘들은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라면하고 같이 살았다. 밥을 해 먹기 싫은 게으른 자취생에게 라면은 부식이 아니라 훌륭한 주식이었다. 쌀은 떨어져도 라면 박스만 비어 있지 않으면 걱정이 없었다. (안도현의 '라면 예찬' 중)
'이리역 폭발 사고'에도 삼양라면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폭발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소라단 천막촌에서 급한 대로 라면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세창 상회에서 사 온 라면으로 저녁상을 차렸다. 빨간 봉지의 라면 하나에 밥 한 공기를 말면 한 끼 식사가 뚝딱이었지만 라면 값도 싼 편은 아니어서 자주 먹지는 못했다.
다음 날부터는 걱정 하나가 줄어들었다. 빨간 십자가 모자를 쓴 적십자 사람들이 와서 끼니 때마다 라면을 끓여 나눠 주었기 때문이었다. 송아지라도 목욕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솥 세 개가 공터에 걸렸다. 솥 하나에 라면 팔십 개를 한꺼번에 끓일 수 있었지만 줄을 선 사람들이 하도 많아 적십자 사람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김남중의 <기찻길 옆 동네> 중)
◆ 국민의 배고픔 달래주던 삼양라면
1960-70년대에 라면이 삼양라면밖에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삼양라면이 익산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시절 삼양라면엔 국민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싶었던 전중윤 전 회장의 바람도 담겨 있었다. 일본 인스턴트 라면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지만 삼양라면은 일본의 그것보다 더 넉넉하면서도 값은 더 쌌다. 삼양라면이 처음 세상에 나온 1963년, 라면 한 봉지의 무게는 100g, 가격은 10원이었는데, 우리보다 5년 앞서 나온 일본의 '치킨라면'은 대략 한 봉지 무게가 85g이었고, 가격은 35엔(우동 한 그릇이 60엔)이었다. 담배 한 갑이 25원, 자장면 한 그릇이 40원이었으니 삼양라면을 얼마나 싸게 내놓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라면값을 비싸게 받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제일생명의 전문경영인으로 일하던 전 전 회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허름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국 한 그릇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풍경을 보게 된다. '대체 무얼까', 궁금했던 그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5원을 내고 국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국을 떠먹었는데, 첫술에 무언가가 씹히길래 빼서 보니 깨진 단추조각이었고, 다시 한 번 휘저으니 이번엔 담배꽁초가 나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었던 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과 음식물쓰레기를 모아 끓여낸 이른바 '꿀꿀이죽'이었다. 버린 지 한참이 지난 음식물쓰레기를 섞어 끓여내는 통에 탈이 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30원어치면 여덟 식구가 아침을 먹고 점심을 굶을 수가 있어서…" 보채볼 맥조차 잃은 어린 것을 등에 메고 '꿀꿀이죽'을 한 통 사서 든 중년 아주머니의 기가 막힌 변이다.
담배꽁초, 휴지(무엇에 썼는지도 모름) 등 별의별 물건이 마구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 반액체를 갈구해야만 하는 이 대열! 그들은 돼지의 피가 섞여서가 아니다. 우리의 핏줄이요 가난한 이웃일 따름이다. (<경향신문>(1964.5.20.)) 그는 그 길로 제일생명을 나와 식용유 회사를 인수해 삼양제유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라면을 만들려면 면을 잘 튀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삼양공업주식회사를 거쳐 삼양식품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건 1965년의 일이었다.
◆ 삼양식품의 위기, 그리고 이어지는 익산과의 인연
1963년부터 20년 넘게 업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던 삼양식품에 큰 위기가 닥친 건 1980년대 말이었다. 1989년 10월 검찰에 '공업용 우지(소기름)로 라면을 튀긴다'는 투서가 날아든 것. 이 일로 미국에서 소기름을 들여와 쓰던 삼양식품, 오뚜기, 서울하인즈, 삼립유지, 부산유지 등 5개 기업 대표와 임원들이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 7년 9개월에 걸친 긴 재판 끝에 1997년 8월, 대법원은 삼양식품을 비롯한 이들 기업 모두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우지는 우리 사회의 식생활 관행과 사회 통념에 비추어 식용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미국에선 사골, 우족, 내장 등을 먹지 않아 버릴 뿐 결코 공업용이 아닐뿐더러 "(우지의) 안전성이 입증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삼양식품은 거의 문을 닫을 뻔했다. 1천 여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고, 1980년대 말부터 삼양식품과 업계 1위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다투던 농심에 오랫동안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박헌재 전 익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잘못 판단한 사안이고, 삼양라면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알리려고 상공회의소 차원에서 애를 많이 썼다"고 기억했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중앙정부에 건의도 하고, 전국 상공회의소들에도 공문을 보내 삼양식품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런 지역사회의 노력에도 익산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멀리 원주공장으로 파견을 가야했다. 다행히 익산공장에서 어렵게 개발한 쌀라면이 인기를 얻으면서 떠났던 직원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전영일 전 익산공장장은 "익산공장은 삼양식품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도약한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 익산하면 떠오르는 먹을거리 '삼양라면'
전중윤 전 회장은 2014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익산과 삼양라면은 지금도 끈끈하다. '불닭볶음면'을 개발한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도 창업자의 뜻을 잊지 않고 있다('삼양식품그룹'은 지난해 삼양라면 출시 60주년을 맞아 그룹 이름을 '삼양라운드스퀘어'로 바꿨다). 전영일 전 공장장은 "전중윤 전 회장의 며느리인 김정수 대표는 익산공장에 부임하는 공장장들에게 '선대들이 익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아꼈다.
공장운영뿐만 아니라 익산시민, 지역사회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각별히 당부한다"고 했다(<익산열린신문>(2021.9.17.)). 익산공장에선 지금도 260여 명의 임직원이 월 200여 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2021년 기준으로 삼양식품 전체매출의 약 30%에 달하는 규모다. 또 익산은 다른 지역에 견줘 삼양라면 소비량이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높은 도시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철은 갑작스레 살아나는 식욕으로, 그러나 아주 공손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 (이문열의 <변경> 중) 그래서다. 누군가 내게 익산하면 떠오르는 먹거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앞으로 '삼양라면'이라고 말할 생각이다.
생태계 교란 식물로 몸살 앓는… 수원 원천리천
최근 하천 생태계가 생태계 교란 식물의 침입으로 인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생태계교란 식물이란 인위적, 자연적 요인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식물 중 토종 동식물의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하거나 교란할 우려가 있는 식물을 말한다. 이 식물들은 토착 식물들을 밀어내고, 하천의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있다.
◆ 환삼덩굴
환삼덩굴은 동아시아 원산의 식물로 국내에 유입된 시기는 불분명하나 매우 빠른 성장 속도와 번식력으로 생태계를 망가트리고 있다. 환삼덩굴은 대표적인 생태 교란 식물이다. 주변 식물들을 얽어 매어 생장을 방해한다. 덩굴에 눌린 다른 식물의 잎은 시들어가고, 꽃은 힘을 잃는다. 환삼덩굴은 햇빛을 차단해 다른 식물들이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만든다.
◆ 미국실새삼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 전국의 밭, 들판, 또는 강가에 서식한다.다른 식물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자라는 미국실새삼. 뿌리와 잎은 없다. 미국실새삼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흡혈귀처럼, 노랗고 가느다란 줄기로 다른 식물의 줄기나 잎에 달라붙어 영양분을 빨아 먹는다. 다른 식물들은 점차 생명력을 잃고 시들어간다.
◆ 칡넝쿨
하천변 나무를 뒤덮은 칡넝쿨. 칡넝쿨은 다른 식물의 광합성을 막는다. 칡넝쿨 아래 모든 식물을 고사한다. 녹색 덩굴이 나무들을 감싸며 끝없이 뻗어나간다. 잡초는 물론 나무까지 휘감고 올라간다. 햇빛을 가로막고 짙은 그늘을 만든다. 폭염 속에서는 왕성한 성장세를 보이는데, 일주일에 1미터 넘게 자라기도 한다. 이렇게 칡넝쿨이 자라면 다른 식물은 고사해 결국 칡넝쿨만 남는다.
◆ 가시박
강가나 길가에 자라는 덩굴성 한해살이풀이다. 줄기는 길이 4-8m에 이르며, 각이 지며, 연한 털이 빽빽하게 난다. 3-4갈래로 갈라진 덩굴손이 다른 물체를 감으며 기어오른다. 잎은 어긋나며, 잎몸은 거의 원형으로 5-7갈래로 갈라지며, 폭 8-12cm이다. 꽃은 6-9월에 핀다. 수꽃은 누런 흰색,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총상꽃차례에 달리며, 화관은 5갈래로 갈라진다. 암꽃은 연한 녹색, 잎겨드랑이에서 머리 모양으로 달린다. 열매는 장과, 3-10개가 둥글게 모여 나며, 흰색 가시로 덮여 있다.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한다. 일본, 유럽, 호주에 귀화되었다.
◆ 단풍잎돼지풀
북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귀화식물이며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들이나 길가에서 자란다. 굵은 줄기는 높이 2~3m 정도이고 가지가 갈라지며 전체에 거센 털이 있다. 마주나는 잎의 잎몸은 길이가 10~30cm 정도인 장상엽으로 가장자리가 단풍잎처럼 3~5개로 깊게 갈라진다.‘돼지풀’과 달리 잎이 단풍잎처럼 3~5개의 장상으로 갈라지고 대생하며 수꽃의 총포는 편측에 3개의 검은 선이 있다. 초지나 도로변의 문제잡초로 화분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돼지풀’ 종류는 풍매화이다. 꽃가루를 흡수하면 알레르기성의 비염, 결막염, 기관지 천식 등의 화분병을 일으킨다. 최근에는 그 피해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 큰금계국
여름철 하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래종인 '큰금계국'이 왕성한 번식력으로 토속식물을 몰아내고 있다. 큰금계국은 이미 '생태계 위해성 2급' 식물로 지정돼 있다. 큰금계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로 국내에는 1920년대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관상 좋게 보이는 큰금계국은 어디서든 잘 자라고 여름철 노란빛 자태로 큰 인기를 끌며 전국으로 확산했다.
제주의 손주들..... 이유수 & 이로열
호우특보 속 장맛비 내리는..... 7월 아침의 원주 용화산 풍경길
단구 1차........
족두리꽃...... 풍접초
참나리........
명륜 현대 2차.......
한솔........
더샾 1차........
영진 3차........
더샾 2차.......
06:50 중앙공원에........
중앙공원 1교......
배부른산 - 감박산 - 봉화산........
중앙공원 2교........
더샾 4차.........
07:07 용화산 풍경길 데크........
4년생 오동나무.......
용화산 2봉을 돌아.......
희미한 백운산........
더샾 3차........
07:25 황소마을로 하산.......
또 오른 기름값..... 휘발유 1687원 / 경유 1517원
능소화
옥수수
명륜2동 행정복지센터
07:35 삼성으로 회귀........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