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서귀포시 서귀동 758-4번지(칠십리로72번길 14) 일대
시대 ; 조선
유형 ; 항포구
제주도 지역은 5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내 고대국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고려 때인 숙종10년(1105)에 탐라군으로 편제되어 고려의 직할군이 되었다. 한때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어 원나라의 목마장이 설치되기도 했던 제주도 지역에 충렬왕26년(1300) 동도현·서도현이 한라산 남쪽에 설치되어 동도현에는 고아현·홍로현·토산현 등이, 서도현에는 예래현·산방현·차귀현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홍로현과 예래현이 지금의 서귀포시 洞지역에 있었다.
조선 초기인 태종2년(1402)에 성주·왕자의 칭호를 없애고, 태종16년(1416)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 남쪽의 동부에 정의현, 서부에 대정현을 두었다. 서귀포시 동부는 옛 정의현 지역에, 서귀포시 서부는 옛 대정현 지역에 해당한다. 고종1년(1864)에 정의현·대정현이 군으로 승격했으며,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제주부, 1896년에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정의군·대정군과 완도군 추자면이 제주군에 폐합되었다. 이때 정의군 좌면이 정의면으로, 대정군 우면이 대정면으로 개칭되었다. 1915년 군제가 도제로 바뀌어 전라남도 제주도가 되었다. 1935년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동중면이 표선면으로, 서중면이 남원면으로, 우면이 서귀면으로, 좌면이 중문면으로, 중면이 안덕면으로, 신좌면이 조천면으로, 신우면이 애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제주도가 전라남도로부터 분리되어 도(道)로 승격되면서 남제주군이 설치되었다.
1935년에 우면이 서귀면으로, 좌면이 중문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도(道)로 승격되면서 남제주군 서귀면·중문면이 되었다. 1956년 서귀면이 읍으로,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이 합쳐져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한편 남제주군은 조선시대의 정의현·대정현이 있던 곳이다. 성산읍·표선면·남원읍 및 서귀포시 동부는 옛 정의현 지역에, 대정읍·안덕면 및 서귀포시 서부는 옛 대정현 지역에 해당한다. 2006년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로 바뀌면서 남제주군과 통합하여 서귀포시가 되었다.
구한말 제주 지방에는 제주·정의·대정군 등 3군이 있었다. 정의군에는 좌면, 동중면, 서중면, 우면 이렇게 4개의 면으로 나뉘었다. 서귀포는 상효·중효·신효·하효·보목·토평·동홍·서홍·호근·풍덕(서귀리)·법환리 등 11개의 마을로 구성된 우면右面에 속했다. 풍덕리가 이후 서귀리로 이름이 변경된다. 광무8년(1904년) 1월 조선 정부가 조사한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摠冊』에 따르면 풍덕리(서귀리)는 92호에 남자 187명, 여자 223명 모두 410명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 100호가 못 되는 가옥수로서 이는 우면에서 상효와 중효 다음으로 가옥과 인구 면에서 적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항만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다. 이전까지 조선은 중국에 깊이 예속됐고, 육로를 이용해 중국과 교류하는 게 거의 유일한 국제교류였다. 그런데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그 결과로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강제로 개항하게 했다.
일제는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에서 각각 승리하면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시모노세키에 항구를 개설하고, 시모노세키-부산을 연결하는 정기 여객선을 취항했다. 그리고 부산-서울(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서울-신의주, 신의주-만주 등의 철도를 개설했다. 부산의 일본 거류민이 주체가 되어 조선 정부로부터 매축권을 허가받아 1902년 북항매축을 시작으로 항만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비용을 투입해 조선 각처의 항만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모국 일본과의 정치·경제적 연결, 대륙침략에 필요한 교통로 건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해 각 지역별로 항만을 건설했다.
한일병합을 전후로 일제는 한반도 해안의 도서 및 하천, 수산 등에 대한 실상을 조사해 1911년에 ‘한국수산지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제주도에 관한 내용도 상세히 실렸다. 멸치잡이, 자리돔잡이, 상어잡이, 도미잡이, 잠수업, 제염업 등 제주의 어로 기법과 가공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별 어장의 규모, 지세, 조류, 호구 등은 물론이고 행정과 교통, 금융 등도 자세히 담았다.
서귀포에 대해서는 ‘수심은 깊고 큰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제주도에서 몇 안 되는 좋은 항이지만 동·서풍을 피할 수는 없다. 만 안쪽이 협소해 풍랑이 몰아칠 때는 닻을 올려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선박 정박지로서 가장 안전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수산물 외에 쇠고기, 콩 등이 풍부해 일본어선 및 상선이 빈번히 출입한다. 부근에 산림이 있어 땔감을 생산한다. 인가가 126호 있고 순사주재소가 있다. 어민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주요 수산물은 돔, 상어, 자리, 전복, 해삼, 미역 등이고, 돔이 가장 많다. 연중 어획한다. 매년 일본 잠수기업자가 근거하는 곳으로 막사 두 채가 있다’고 설명한다. 참고로, 당시 법환리의 인가가 500호, 보목리의 인가가 180호, 위미리의 인가가 100호, 효돈리의 인가가 50호였다. 서귀포 주변에 쇠고기 콩 등 육산물이 풍부해 일본 상선이 빈번히 출입한다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제주섬은 말의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말 못지않게 소도 풍부하게 생산됐다. 드넓은 들판에 풀이 풍부하고, 맹수의 침입을 받지 않아 방목할 수 있는 여건이 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제주도에서 사육되고 있는 축우의 실제 두수는 7~8만 마리로 추정된다. 현재 도내에서 생산되는 한우 마릿수가 3만 마리 안팎이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다. 제주의 풍부한 소를 일본인들이 그만 놔둘 리 없다. 이들은 소를 사기 위해 서귀포를 드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1928년에는 일본의 주식회사 다케나까 제관소가 제주도 한림면 옹포리에 통조림 공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서귀포항은 소형 기선이나 어선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으나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 피난항이나 어항으로 역할은 가능했으나 무역항으로는 부적합했다. 일제가 방파제 공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이 같은 입지 조건의 한계 때문이었다. 산북지역이 산지항을 중심으로 내륙과의 교역이 발달했다면 산남의 중심인 서귀포항은 일본인과의 어선 및 활어의 수출이 50% 이상을 차지했으며 나머지는 기타 연안 무역이었다. 연안무역품 중 주요 출하품은 선어, 미역, 우뭇가사리 등이고 입하 품목은 잡화가 많았다.
매일신보(1912-02-01)에는 ‘濟州의 漁況 제주 근해에는 매년 겨울을 당하면 농어, 다랑어, 도미 등 많이 나는데 올해는 어황이 좋지 않아 일본인 어부들이 많이 돌아간다’는 기사가 있다. 또 매일신보(1913-01-13)에는 서귀포항 관련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濟州의 良港 發見 제주에 항만이 없어 성산포에 우편선 기항지를 정했는데 항로를 조사하던 이토 체신국 해사과장이 돌아가다 사람들이 모르던 좋은 항구를 발견했다. 현재 성산포는 50톤 이상 배들의 입항이 어려워 해운업자들이 운송을 꺼려 교통이 불편해졌다. '전남의 보고'라 입에 오르지만 개발도 더뎌 시찰한 결과 제주의 남해안 일본 쪽으로 향한 항구를 발견했는데 정의군에 위치하고 항구의 이름은 서귀포다. 항구로부터 약 6~700미터 거리에 일본의 찬농폭포(일본의 3대 폭포)와 같은 큰 폭포가 있고 폭포는 천천히 해안까지 흘러 서귀포 양항을 만든다. 이 항은 수심이 깊고 작은 섬(새섬)을 앞에 두고 있어 어떤 폭풍이라도 삼백 톤 내외의 선박이 피항할 수 있고 만조 때에는 100톤 내외의 배들은 천지연까지 올라 정박이 가능하다. 이번 조사 결과로 제주 근해 어선의 근거지로 적합하지만 제주 남쪽 해안에 위치해 조선 본토와 접촉이 불편함은 아쉬운 부분이다. 해운업자들이 서귀포항이 있음을 알면 걱정을 덜고 운항할 것이다. 현재 서귀포에는 일본인 어부가 3호 거주하고 조선 어부도 약간 있다. 파악해 볼수록 적막한 곳이다.(매일신보 1913년 1월 13일)
1890년 조일통어규칙이 체결된 이후 일본인 업자들은 어세(漁稅)만 내면 조선 바다에서 어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그즈음에 일본 언론은 제주도를 ‘조선의 보고(寶庫)’라 홍보하며 자국민에게 제주도로 이주할 것을 권장했다.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귤을 재배할 수 있으며 한라산은 표고 재배에 최적이라고 홍보했다. 게다가 목장에 말과 소가 많아 목축에도 장래성이 있다며 제주도를 개척하면 여러 방면에서 발전할 수 있다며 이주를 장려했다. 그래서 1900년대 초반에 많은 일본인이 제주도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제주항 주변에 정착했다. 1913년 기록에는 제주성내 거주 일본인이 414명이었는데, 서귀포 거주 일본인은 19명에 불과했는데 1931년에는 259명으로 증가했다.
서귀포는 구한말까지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191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직원이 매일신보에 서귀포를 장래성 있는 양항(良港)이라 소개하면서 일본인의 서귀포 진출이 가속화됐다. 1916년 제주도청 서귀포지청이 설립됐고, 경관주재소와 법원 출장소, 우편국, 금융조합 등이 들어섰다. 그리고 1917년,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서귀포공립심상소학교가 문을 열었고, 서귀포항 축항 기성회가 결성됐다. 1930년대 서귀포 인구는 1000명 정도로 도내에서 제주성내 다음 가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1943년 11월, 서귀포 천지연폭포 상류에 서귀포 수력발전소가 건설됐다. 당시 200㎾급 수력발전설비 1기가 준공되어 1972년 7월까지 약 29년간 가동됐다. 천지연 상류에 수조를 설치하고 그 하부에 수차와 발전기를 설치해 수압관로를 통해 물을 흘러내려 수차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서귀포는 이렇게 일제가 자국민을 식민지로 이주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 변화에 힘입어 근대 행정기관과 금융회사, 근대 학교, 공장 등이 줄이어 들어섰다. 일본인이 진출한 지 2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서귀포는 제주도 제2의 근대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귀포의 풍경은 급속하게 달라졌는데, 해방 이후 과거 대중이 기억에 남았던 근대 유산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과거 서귀진이 있던 곳에 서귀포우편국, 경관주재소, 제주도청 서귀포지청, 공립심상소학교 등이 들어섰는데, 이런 근대시설은 해방 이후에 모두 헐리고 말았다. 이곳이 서귀진 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급급한 나머지, 근대도시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지금 자치경찰단 사무소로 이용되는 건물은 1943년 3월부터 1958년 7월까지 남제주군 서귀면사무소로 이용된 건물이다. 1958년 7월부터 1981년 7월까지 서귀읍사무소로 사용됐고, 1981년 이후에는 서귀포시청으로 사용됐다. 서귀포의 근대 민원행정이 시장된 곳인데, 1948년 9월 이후 국군 제2연대 1대대 중대본부가 제주4ㆍ3을 진압하기 위해 주둔하기도 했다.(서귀포신문 221102)
서귀포항은 1925년 서방파제(216m) 축조, 1958년 동방파제 완공, 1968년 2종 항만으로, 1971년 1종 지정항으로 승격되었으며, 1991년 항만법상 무역항으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남부지역의 화물수송 거점항이며 연근해로 출항하는 어선들의 모항으로서 어업전진기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주요 항만시설로는 안벽 1,410m, 방파제 1,831m, 물양장 817m 등이 있으며 잔교는 부설되지 않았다. 선박 접안능력은 모두 11척으로 5천톤급 2척, 3천톤급 7척, 1천톤급 2척이다. 연간 하역능력은 187만 8천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선뿐만 아니라 관광 항구로서도, 관광 잠수함, 유람선, 선상낚시, 제트보트, 스쿠버다이빙 등 다양한 레저시설이 함께 있는 곳이다. 서귀포항 주변에는 문섬과 새섬, 섶섬 등 아름다운 섬들이 펼쳐져 있어 해양 생태계 보전지역 및 해양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문섬 앞바다는 산호 풍경이 아름다워 다이버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작성 22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