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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후의 아시아와 일본(3) '빈곤의 아시아'에 대한 질문 / 7/17(수) / nippon.com
일본의 아시아 인식, 아시아와의 관계성의 변천에 대해서, 역대의 아시아 정경 학회 이사장에게 되돌아 보는 인터뷰 기획. 제3회는 와타나베 토시오·토공대 명예 교수에게, 1990년대 전반의 아시아의 정세, 일본의 아시아 연구의 동향 등을 되돌아 보았다.
(질문자:사토 유리·국제교류기금 이사)
◇ 세계화의 시대와 아시아
- 사토 유리
와타나베 선생님은 1993년부터 95년까지 아시아 정경 학회의 이사장으로 계셨습니다. 90년대 전반의 시대의 아시아 정세, 인식, 그것을 토대로 한 아시아 연구의 동향에 대해, 먼저 묻고 싶습니다.
- 와타나베 토시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시아 전체가 활력이 넘쳤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이 지역을 공부해 볼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빈곤'과 '정체'가 아시아를 말하는 키워드였습니다. 인구가 과잉하고 경작 가능한 면적이 한정되어 있어 식량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극히 낮다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고, 기아선상의 나라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절대적 빈곤(Absolute Poverty)이라는 말이 개발론의 세계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회자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사장이던 1993년부터 95년, 아시아는 엄청난 활황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메시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린 레볼루션(녹색혁명)의 결과로 순식간에 아시아 전역이 쌀 개량 품종을 도입, 이를 보급하고 확대함으로써 아시아에는 쌀 순수입국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은 아마도 정치적인 안정으로도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게다가 공업화가 대단한 기세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 사토
1970년대에서 80년대네요.
- 와타나베
맞아요. 그리고 아시아가, 세계 전체에 있어서의 존재감을 크게 해 나간다. 무역 파트너로서 아시아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해도 수익이 오르는 지역이 아시아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여기에 외자가 집중되어 아시아가 급속히 발전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중국 또한 개혁개방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사장을 했던 얼마 전 시기에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을 NICS라고 했죠. 「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です. 그 중, 이것은 「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NIES)」라고 바꾸어 말했습니다. 그때는 바로 'Emerging Country'라는 느낌이었던 거죠. 신흥, 그야말로 불타오르는 느낌이었어요. 「Industrializing」은 「산업화」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공업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조업의 생산기지라고 합니다. 이 NICS, NIES에는 바로 뒤에 인도네시아가 들어왔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국가들의 발전이 일본인들의 상상보다 더 빠르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NICS, NIES, ASEAN, 그리고 개혁개방 노선에 들어간 덩샤오핑의 중국이 나온 것입니다.
이 시기의 아시아 국가의 공업화에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의 힘으로 그린 레볼루션을 일으킨 것. 둘째는 무역투자를 통해 그야말로 세계화의 물결에 씻겨 엄청난 발전을 한 것. 이때부터 세계화라는 표현이 유행어가 됐다. 그 세계화의 물결에 씻기고, 거기서 큰 장점을 얻어 발전한 것이 아시아였습니다.
◇ 아시아 외환위기
- 사토
하지만 그 세계화에도 위험이 있었다는 거죠?
- 와타나베
세계화로부터 메리트를 얻으면서도 동시에 세계화의 리스크에도 격렬하게 흔들린 것이 아시아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97년 여름에 태국을 진원지로 하는 경제 위기가 아시아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보기에도 무참하게 그 진원지인 태국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IMF(국제통화기금) 에서 굴욕적인 조건을 붙인 대출을 받아 어떻게든 다시 일어섰습니다. 고성장의 아시아를 예상하고 대량의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그 투자의 상당 부분이 단기 대출이었습니다. 주식이라든가 부동산이라든가 오피스 빌딩이라든가, 그런 것에 투자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아시아의 경제가 버블화되어 있었는데, 버블은 버블이기 때문에 붕괴되어 아시아의 지붕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아시아 연구자들은 일본인을 포함하여 아시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연고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된다는 등의 어정쩡한 의견을 아시아 연구를 해 온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Crony Capitalism'이라는, 그런 빅 워드로 버블 붕괴를 이야기하는 학설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는 당시의 저에게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어떻게 보면 각각의 정책으로 이만큼 발전했으니 외환위기에 대해서도 각각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 제일 먼저 개혁을 라디칼에 차례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은 97년에 경제위기가 있었지만 98년부터 성장률은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 사토
V자 회복이라고 하더군요. 한국과 태국은 V자 회복했지만 인도네시아는 98년 수하르토 체제가 붕괴되어 회복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 와타나베
국가에 따라서 그 회복에는 편차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오히려 이 시련으로 인해 아시아 경제는 더욱 강인해진 것이 아닐까요. 현재 성장률은 그 시절에 비하면 높지 않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터프한 경제가 되었구나 하는 인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IMF가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 IMF 개혁을 하려고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는 IMF 전무이사와의 굴욕적인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실렸지만 한국의 김대중은 스스로 지극히 적극적으로 구조조정, 재벌 해체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개혁에 의해 체력이 충실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장률은 떨어져도 그만큼 근육질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의 한국 경제에 대해 일본인에게는 '한국 혐오'가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저는 일본 저널리즘이 전할 만큼 취약한 경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빈곤과 침체의 아시아
- 사토
1990년대에 글로벌리즘의 시대가 되었고, 처음에는 그것을 탄 아시아의 경제발전이 있어서 『동아시아의 기적(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World Bank Research Report, 1993)』이라는 세계은행의 리포트도 나왔습니다만, 글로벌리즘의 부정적인 측면이 나오자 손바닥 뒤집듯 아시아의 레퓨테이션이 내려갔습니다. 그에 반해 선생님은 제도 개혁을 통해 단련된 부분을 평가하고 계시는군요.
- 와타나베
크게 평가할 수 있겠네요. 통계 수치는 아시아의 기적, 아시아의 미라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한국에서 그 분석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아시아 개발 모델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모델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일본의 모델이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생각하고 싶습니다.
- 사토
한국의 성장부터 시작해 중국이 그 뒤로 눈에 띄자 선생님은 라이징 차이나로 시야를 넓혀 가셨습니다. 그게 1990년대에서 2000년대예요.
- 와타나베
그 무렵, 스스로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좋은 일을 했구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중국이 자오 시대에 수출 지향형 발전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하고 싶었다. 연해지역경제발전전략이죠. 그래서 성공하고 있는 한국을 모델로 하고 싶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당시 거의 한국 연구자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수출 지향 공업화 모델이 새로운 개발 모델이라고 추천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백우의 화살이 서서, 자주 중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 상하이의 푸단 대학, 베이징의 현대 국제 관계 연구소 등에서 각각 오랫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노트에 기록하고, 저의 한국 경제 연구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등 꽤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 자신이 중국의 변화에 손가락 정도는 파고들었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1990년대 말인데요. 저로서는 한국 연구를 중국에 들여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저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런 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 성장의 아시아 정체의 아시아
- 사토
1990년대, 이사장을 맡으신 시절부터 2000년대에 걸쳐 아시아 경제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그것을 연구로도 확장할 수 있었고, 아시아 외환 위기는 무엇이었는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군요.
- 와타나베
저에게는 「성장의 아시아 정체의 아시아」(동양 경제 신보사, 1985년·고단샤 학술 문고, 2002년)라고 하는 젊은 시절에 쓴 저작이 있습니다.
- 사토
1985년에 나온 책이네요. 이것은 이제 아시아 연구, 개발 경제학의 학도들은 거의 모두 손에 들고 있습니다.
- 와타나베
꽤 빨랐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책은 당시 일본에서 '정체의 아시아'가 주류였던 것에 대한 안티테제였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당시의 학자로 야노 노부 씨라고 하는 분이 계셔서, 그가 설정한 테마가 '아시아는 왜 정체를 계속하는가'이며, 바로 아시아의 정체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 아시아 연구의 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아니, 성장하고 있는 NICS도 있어요, 라고 전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중진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요. 즉, 정체의 아시아와 동시에 성장의 아시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의 아시아도 점점 성장의 아시아 쪽으로 옮겨간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빈곤과 정체의 아시아라는 이미지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아시아,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묻고 싶어졌습니다. 와타나베 씨, 그런 나라가 발전한다고 잘 말할 수 있었군요'라고, 말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심해지면 '와타나베 씨는 낙관주의적'이라는 등의 비아냥도 나왔습니다.
인터뷰는 2022년 12월 22일 nippon.com 에서 실시. 원고의 정리를 카와시마 마코토대학 대학원 교수가 담당했다. 『아시아 연구』(69권 3호, 2023년 7월)에 인터뷰 기록 전체가 실려 있다.
【Profile】
와타나베토시오 WATANABE Toshio
도쿄공업대학 명예교수, 다쿠쇼쿠대학 고문. 전문은 개발경제학, 현대아시아경제론. 1939년생. 도쿄 공업대학 교수, 척식대학 학장, 총장을 역임. 1993~1995년 아시아정경학회 이사장
https://news.yahoo.co.jp/articles/4dd93b142c42b70be7f406c5399bb5595cd06d33?page=1
冷戦終結後のアジアと日本(3) 「貧困のアジア」への問い:渡辺利夫・東工大名誉教授
7/17(水) 15:00配信
nippon.com
マレーシアで開催のアジア太平洋経済協力会議(APEC)首脳会議で記念撮影に臨む参加21カ国・地域の首脳ら=1998年11月18日、サイバージャヤ(AFP=時事)
日本のアジア認識、アジアとの関係性の変遷について、歴代の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に振り返ってもらうインタビュー企画。第3回は渡辺利夫・東工大名誉教授に、 1990年代前半のアジアの情勢、日本のアジア研究の動向などを振り返ってもらった。
(聞き手:佐藤百合・国際交流基金理事)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時代とアジア
渡辺氏(左)と聞き手の佐藤百合・国際交流基金理事
佐藤 百合 渡辺先生は1993年から95年までアジア政経学会の理事長でいらっしゃいました。90年代前半の時代のアジア情勢、認識、それを踏まえたアジア研究の動向について、まずお伺いしたいと思います。
渡辺 利夫 ひとことで言うと、アジア全体が活力に満ちていた時代だと思うのです。私がアジアに関心を持ち、この地域のことを勉強してみようかと思い始めた頃、「貧困」と「停滞」がアジアを語るキーワードでした。人口が過剰で耕作可能な面積が限られていて、食糧の単位面積当たりの収量は極めて低いというのが当時の実情でしたし、飢餓線上の国々がいくつかありました。絶対的貧困(Absolute Poverty)などという言葉が、開発論の世界の中でごく普通に語られていた時代でした。しかし、私が理事長だった1993年から95年、アジアは大変な活況の時期に入りました。メシが食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グリーンレボリューション(緑の革命)の結果、瞬く間にアジア全域が米の改良品種を導入、これを普及し拡大させることによって、アジアには米の純輸入国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このような農業の発展は、おそらく政治的な安定にもつながっていたと思うのですけれども、その上に、工業化が大変な勢いで進んだように思います。
佐藤 1970年代から80年代ですね。
渡辺 そうです。そしてアジアが、世界全体におけるプレゼンスを大きくしていく。貿易パートナーとしてアジアが大事だということになったのです。のみならず、先進国の多国籍企業を中心に、投資しても収益が上がる地域がアジアだと見なされるようになり、ここに外資が集中して、アジアが急速に発展していくことになりました。
この時期、中国もまた改革開放を図っていました。私が理事長をやった少し前の時期、韓国、台湾、香港、シンガポールなどをNICSと言っていましたよね。「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です。そのうち、これは「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NIES)」と言い換えられました。あの頃は、まさに「Emerging Country」という感じだったわけです。新興、まさに燃え上がってくる感じでした。「Industrializing」は「産業化」と訳すよりも「工業化」と訳した方がいいと思います。製造業の生産基地ということです。このNICS、NIESには、すぐ後にインドネシアが入ってきました。当時、インドネシアなどASEAN諸国の発展が日本人の想像よりもっと速いということが伝え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NICS、NIES、ASEAN、それに改革開放路線に入った鄧小平の中国が出てきたわけです。
この時期のアジアの国の工業化には特徴がありました。第一に、アジア諸国が自分の力でグリーンレボリューションを引き起こしたこと。第二には、貿易投資を通じて、まさに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波に洗われて大変な発展をしたこと。この頃から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という表現が、流行り言葉になった。その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波に洗われて、そこから大きなメリットを得て発展したのがアジアだったのです。
アジア通貨危機
佐藤 しかし、その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にもリスク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ね?
渡辺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からメリット得ていながら、同時に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リスクにも激しく揺さぶられたのがアジアだったとも言えます。1997年の夏に、タイを震源地とする経済危機がアジア全域を襲いました。インドネシアは見るも無残に、その震源地であるタイよりも大きな影響を受けました。そして、IMF(国際通貨基金) から屈辱的な条件を付した融資を受け、どうにか立ち直りました。高成長のアジアを見込んで大量の投資がなされていましたが、その投資の相当部分が短期融資でした。株式とか不動産とかオフィスビルとか、そういうものに投資してもうけた人たちが多くいたわけです。要するにアジアの経済がバブル化していたのですが、バブルはバブルであるがゆえに崩壊して、アジアの屋根がドスンという音を立てて落ちたわけです。そこから世界のアジア研究者たちは、日本人も含めて、アジアについて非常に悲観的な見方を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アジア諸国は縁故資本主義(Crony Capitalism)だからこのような結果になるのだ、などといういい加減な意見を、アジア研究をやってきた人が言い始めました。私は耳を疑いました。「Crony Capitalism」などという、そんなビッグワードでバブル崩壊のことを語るような学説が的を射ているとは当時の私には思えませんでした。
アジア諸国は、ある意味、それぞれの政策でこれだけ発展したのだから、通貨危機に対してもそれぞれ次の手を用意しているはずだと考えるべきでしょう。韓国が一番初めに、改革をラディカルに次々と行いました。それでアジアの国々は97年に経済危機があったものの、98年から成長率はポジティブになっていきました。
佐藤 V字回復と言われましたね。韓国とタイはV字回復しましたが、インドネシアは98 年にスハルト体制が崩壊して、回復まで少し時間がかかりました。
渡辺 国によってその回復にはばらつきがあるのは致し方ありませんが、むしろこの試練によって、アジア経済はより一層強靭(きょうじん)にな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現在の成長率は、あの頃に比べれば高くはありません。それでも随分タフな経済になってきたなという印象は持っています。
韓国でも、IMFが入る前に自らIMF改革をやろうとしました。インドネシアのスハルトは、IMFの専務理事との屈辱的な写真が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に載っていましたが、韓国の金大中は自ら極めて積極的にリストラクチャリング、財閥解体をやりました。これについてはさまざまな評価がありますが、改革によって体力が充実したことは事実です。成長率は下がっても、その分だけギュっと筋肉質になったように感じます。今の韓国経済について、日本人には「韓国嫌い」が多いので、いろいろなことを言う人がいますが、私は日本のジャーナリズムが伝えるほど脆弱な経済だとは思いません。
貧困と停滞のアジア
佐藤 1990年代にグローバリズムの時代になり、最初はそれに乗ったアジアの経済発展があって『東アジアの奇跡(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World Bank Research Report, 1993)』という世界銀行のレポートも出たのですが、グローバリズムの負の側面が出ると、手のひらを返したようにアジアのレピュテーションが下がりました。それに対して先生は、制度改革を通じて鍛えられた部分を評価しておられるのですね。
渡辺 大いに評価できますね。統計数値はアジアの奇跡、アジアのミラクルを顕示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は韓国からその分析を始めたのですが、これがアジアの開発モデルの基本だと思います。ラテンアメリカやアフリカにモデル化できるものがあるとは思えないのです。時間があれば、日本のモデルがアジアにいかなる影響を与えたのかということも考えたいのですがね。
佐藤 韓国の成長から始まり、中国がその後で目立つようになると、先生はライジングチャイナへと視野を広げていかれました。それが1990年代から2000年代です。
渡辺 あの頃、自分で言うのも変ですけれども、「いい仕事をしたな」という感じがします。中国が趙紫陽の時代に、輸出志向型の発展という言葉は使ってはいませんけど、そうしたものをやりたかった。「沿海地域経済発展戦略」ですね。それで成功している韓国をモデルにしたい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す。ところが、中国には当時ほとんど韓国研究者がいなかったのです。韓国の輸出志向工業化モデルが新しい開発モデルだとして推奨している私のような者に白羽の矢が立って、たびたび中国に出かけることになりました。
上海の復旦大学、北京の現代国際関係研究所などでそれぞれ長いことレクチャーをしました。彼らは必死にノートに書き留め、私の韓国経済研究を中国語に訳すなど、ずいぶん熱心にやってくれました。そうした意味では、私自身、中国の変化に指くらいは突っ込んだっていう気持ちがあります。1990年代のことですが。自分としては、韓国研究を中国に持ち込んだという自負があります。私だけがやったわけじゃないでしょうけれども、気持ちとしてはそんな風に残っています。
成長のアジア 停滞のアジア
佐藤 1990年代、理事長を務められた時代から2000年代にかけ、アジア経済の変化を体感されながら、それを研究としても広げられ、アジア通貨危機とは何だったか、現在起きていることは何かということを分析の対象に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ね。
渡辺 私には『成長のアジア 停滞のアジア』(東洋経済新報社、1985年・講談社学術文庫、2002年)という若い時に書いた著作があります。
佐藤 1985年に出された本ですね。これはもうアジア研究、開発経済学の学徒はほとんど皆手にしています。
渡辺 ずいぶん早かったと思うのですが、この本は、当時日本で「停滞のアジア」が主流だったことへのアンチテーゼだったのです。例えば、有名な当時の学者に矢野暢さんという方がおられて、彼の設定したテーマが「アジアはなぜ停滞を続けるのか」であり、まさにアジアの停滞要因を究明することがアジア研究の肝だと考えていたようでした。私は、それに対して、いや、成長しているNICSだってありますよ、と伝えようとしました。
私は「中進国」という言葉を使いましたが。すなわち、停滞のアジアと同時に成長のアジア、というものがあるのだ、そして停滞のアジアもだんだん成長のアジアの方に移っていく、ということだと主張しました。貧困と停滞のアジアというイメージでしか語られないアジア、それでいいのかと物申したくなったのです。「渡辺さん、あのような国が発展するってよく言えたね」と、言われはしなくても、そのように思われていたでしょう。ちょっとひどくなると、「渡辺さんは楽観主義的」などという皮肉も出ました。
インタビューは、2022年12月22日、nippon.com において実施。原稿のまとめを川島真・東大大学院教授が担当した。『アジア研究』(69巻3号、2023年7月)にインタビュー記録の全体が掲載されている。
【Profile】
渡辺 利夫 WATANABE Toshio
東京工業大学名誉教授、拓殖大学顧問。専門は開発経済学、現代アジア経済論。1939年生まれ。東京工業大学教授、拓殖大学学長、総長を歴任。1993-1995年にアジア政経学会理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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