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3
1월4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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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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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IR5BYYyZEk
[서울대교구 김형균 스테파노(경찰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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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떠나보내고,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평생토록 자녀를 꼭 붙들고 놓지 못하는 부모들을 만납니다. 정말이지 답이 없습니다. 물론 자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극진한 사랑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을 넘어 과도한 집착의 결과는 비참함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자녀가 무럭무럭 성장해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오로지 그 자녀만 바라보며, 그 자녀에게 올인하다보니 그 모습이 너무나 어색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호 성장입니다.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의 마음 또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진리 한 가지,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 안아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때가 되어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 사랑이 각별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공들여 교육시켜왔던 애제자들,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왔던 제자들이었지만,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자, 칼같이 떠나보냅니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된 세례자 요한의 선언입니다. ‘제자들아! 드디어 때가 왔다. 내가 너희들을 내 제자로 양성시킨 최종 목표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바로 저분이다. 따라가거라. 나는 괜찮으니 내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저분을 따라가라. 앞으로 저분을 스승으로 모시거라.’
애써 양성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모든 사명을 120% 완수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구세사의 주인공으로 점점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스스로 쇠락시키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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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AbUM2PLG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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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의 만남이 천국이나 지옥이 되는 이유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겸손히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고 응답하신 장면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 준비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줍니다. 이를 통해 모든 관계가 계약에 기반하며,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상 그 만남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의 뜻을 잘 따를 때, 부모를 만날 용기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느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는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아 그분께 나아갈 용기를 잃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장면이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후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고된 삶을 살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에사우의 은총을 빼앗은 것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에게 돌려주기 위해 수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하며 축복을 구했습니다.(창세 32,24-31)
야곱은 이러한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낮추고 에사우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야곱을 용서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야곱은 우리 자신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의 힘으로 얻으려 하지만, 결국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사우가 야곱에게 준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막상 그분을 만나는 상황이 되면 ‘양심’상 우리는 그분을 만나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에 진짜 지옥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성사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은 평화를 잃고 만남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의 무게로 인해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없다.”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은 단순히 형제간의 화해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깨끗이 하고 평화를 되찾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 덕분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낮췄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총을 감사히 여기고,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매년 1월 1일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을 모시고 미사를 드리며 떡국을 대접합니다. 하지만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부담을 느낍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유학의 기회를 주셨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저를 보호해 주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그 은혜에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한 마음이 오히려 불안과 긴장을 낳아 실수하게 만듭니다.
올해가 지난해보다 조금 덜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본당에서 1년 동안 좋은 성과를 내고 그 결과를 주교님께 보여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깨닫습니다. 주교님을 맞이할 준비는 그날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언젠가 나아가야 할 빚진 자들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그 빚을 갚아나가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날을 맞이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빛 앞에서 어둠이 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매일 충실히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은혜를 갚아나가는 삶을 시작합시다.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날, 그 만남이 지옥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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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14일 새벽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채택되면서 직무가 정지되었습니다.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8표로 가결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대통령의 직무 정지는 찬성표를 택한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부당하다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들고 시위의 현장에 참석한 젊은 세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응원봉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응원봉은 젊은 세대가 콘서트에 들고 가는 응원 도구라고 합니다. 응원봉의 종류도 좋아하는 가수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저희 세대는 ‘촛불’을 들고 시위 현장엘 갔습니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기도 하고, 촛불은 촛농이 떨어지기에 불편했다고 합니다. 초는 꺼지듯이, 시위의 함성도 꺼질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세대는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소녀시대의 ‘다만세’라는 노래와 백기완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 어우러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통령의 직무 정지는 깨어 있는 시민들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온 젊은 세대의 물결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부산의 딸’이라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지금 막 걸음마를 뗀 사촌 동생들과 남동생이 먼 훗날 역사책에 쓰인 이 순간을 배우며 제게 물었을 때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나가 말했다고 알려 주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현 정권을 보고 5개월 전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던 저와 제 친구들은 분노했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고3보다 삼권분립을 모르면 어떡하냐고 말했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비상 계엄령이 책 밖으로 튀어나온 지금 우리는 역사의 한순간에 서 있다며, 이 자리에서 우리 정부에게 '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5·16군사정변을 겪지 않았으나 2014년 세월호를 겪었으며 5·18민주화운동을 겪지 않았으나 2022년 이태원 참사를 지켜봤다며, 함께 역사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그 길이 우리의 미래이자 우리의 이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학생의 동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2000년 전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과 극기의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갔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죄를 용서받았던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절망과 어둠에서 희망과 빛으로 이끌어 줄 새로운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례를 받고, 금욕과 극기의 삶을 사는 건 분명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롭게 등장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칭찬하였고,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고, 새로운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금욕과 극기보다는 세상으로 들어가셔서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병든 이, 이방인, 세리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혈통과 능력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으로 주어지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 참된 행복을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러 다니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 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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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5-42: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 세례자는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면서,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는(참조: 1,31.47-49)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하느님께서 메시아에게 주신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된다.(참조: 3,27.29) 두 제자가 따른다는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며, 여기에 함께 지내는 일이 이어지는데, 단지 그날만이 아니라(39절), 그분과의 계속된 친교 안에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 제자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도가 담겨있다.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함께 지내면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오후, 네 시쯤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말한다.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예수님과의 친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40절)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절) 하면서 시몬을 예수께 데려간다. 예수께서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1-42절) 시몬도 그 친교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께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만남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만남은 그것이 짧은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는 체험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분 안에 함께 머무르는 삶이 되고 그분을 구체적으로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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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요한 복음서는 “무엇을 찾느냐?”(1,38)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누구를 찾느냐?”(20,15)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물음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지신 물음이 바로 “누구를 찾느냐?”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신앙의 여정은 ‘무엇’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동반자인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랑을 키워 가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며 환희의 신비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개 이 신비를 묵상하노라면 아들을 잃고 애태웠을 부모의 심경과, 마침내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시는 성모님의 원망 섞인 말씀, 그리고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조금은 배짱 좋은 대답만 떠오르지요. 그리고 순명하시는 예수님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비껴간 묵상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환희의 신비 5단입니다. ‘환희’란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자신들의 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이신 그분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부모의 감격과 탄성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요?
우리 마음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한 탓인지 우리는 삶에서 예수님을 쉽게 놓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놓쳐 버린 예수님을 다시, 거듭거듭, 새롭게 되찾고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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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과 삶은 하나이고, 믿음과 증언도 하나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35-42)
1)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요한의 증언을 믿었음을,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나에게서 무엇을 찾느냐?”인데, 전후 상황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너희가 인생에서 찾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냐?”입니다.
2) 이 질문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 두 제자는 “저희는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또는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예수님의 숙소가 어디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동문서답 같지만, 사실 이 대답은 그들의 믿음과 심정을 나타냅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희는 스승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고,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찾고 있고, 그것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두 제자의 요청을 받아들이신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그 두 사람을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의식했든지 아니든지 간에...... <종교를 선택한 것도, 또 신앙을 갖기로 결정한 것도 자기가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 생각은 아주 오만한 생각이고, 교리에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3)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가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삶’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확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자들의 변화 과정은 모든 신앙인이 거치게 되는 변화 과정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신앙인이 먼저 된 사람들의 증언과 인도를 받아서 신앙의 길로 들어서고, 그 다음에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게 되고, 준비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는데,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의 믿음이 오락가락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안드레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4) 제자들의 믿음이 확신으로 바뀐 다음에 첫 번째로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는 일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사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믿음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 실제 상황에서는 기쁨에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확신하는 순간 기뻐하면서 자기 형에게 달려갔을 것이고, 형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단순한 증언이 아니라 ‘큰 기쁨’을 전하는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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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을 듣고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 있던 어부들이었다는 공관 복음의 내용과 달리 오늘의 말씀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요한 복음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요한 복음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다르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는 모든 이를 향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업적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초대를 받은 모든 이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된 “묵었다”의 본뜻은 ‘머물다’입니다. 그리고 머문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서 믿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믿음에 대한 표현이고, 이것으로 두 제자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안드레아는 형인 시몬, 곧 베드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안드레아는 다시 베드로에게 증언합니다. 요한 복음의 부르심은 이렇게 증언을 통하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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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노사연의 '만남'을 좋아하시나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무수한 만남을 가집니다.
그 만남들 중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우연이 아닌 운명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만남이겠지요. 그것은 어떤 사건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벗님에게도 그런 만남이 있겠지요? 너무도 중요한 만남이었기에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지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처음 만나 제자로 받아들여진 사건은 그들에겐 결코 잊지 못할 중대사였나 봅니다. "오후 4시경이었다"고 그 시간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그중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고백하며 형에게까지 소개할 정도로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크고 의미심장한 만남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나중에 필립보도 나타나엘에게 비슷하게 말하고(요한 1,45 참조),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여인도 마을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말하지요.(요한 4,26 참조) “나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사실 그 어떤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그 만남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겠지요.
오늘 그 감동적이고 충격적이며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운명적인 만남의 추억으로 한번 돌아가 보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다시한번 내 가슴이 뛰지 않겠어요?
예수님과의 나의 운명적인 만남에는 그 만남을 주선해 준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스승인 요한이 직접 소개해 주었고, 베드로에게는 동생 안드레아가, 나타나엘에게는 필립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야곱의 우물가의 그 여인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준 사람은 누구였나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때에 그랬나요? 그때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말을 했었나요?
소개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냥 "와서 보시오"(요한 1,39. 46; 4,29)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지식을 총동원하지도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보고 느끼고 깨달았듯이 그냥 "와서 보기만 하라."고 겸손되이 초대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 사람과 친교를 맺으시도록 맡기는 것이지요.
저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 피정이나 방문을 오는 이들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중개자일 뿐입니다. 우리의 몫은 그들을 주님 앞에까지 데려다 놓는 일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니까요.
냉담자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섣부른 교리 지식으로 그를 설복시켜 회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냥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거나 수녀님을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면 성당에 한번 오도록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선교의 문제도 성소자 문제도 하느님께서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실 겁니다. 우리의 몫은 그렇게 기도하며 그를 주님과 교회에 소개시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어서 그분의 친구요 형제가 되게 해 준 내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을 기억합시다. 그에게 감사하며 주님께서 그를 특별히 강복해 주시도록 청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누군가에게 겸손하게 주님을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시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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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드레아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요한 1,41)
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은 많지만, 마음에 깊게 간직하며 죽기까지 가는 만남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만남보다 잊어버린 만남은 더 많습니다. 큰 감명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의미있는 만남은 그만큼 소중합니다.
구르는 낙엽을 보면서도 까르르 웃고, 바뀌는 계절마다 색다른 시인이 되며,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짊어진 듯 하던 “젊은 날의 초상”은 가장 강력한 만남 중 하나가 되어, 제각기 다른 "메시아"를 따라 결혼 성소, 수도자 성소, 혹은 사제 성소로 응답하고 살아왔습니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만남보다 잊혀지는 만남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감수성도 또한 무디어지고 의미없는 '너'는 점점 잊혀지더라도,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된 '너'는 좀 더 오래 기억됩니다.
잊고 잊혀지는 슬픈 만남들일지라도, 늦게나마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고, 주님이신 '당신'과 맺은 만남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작은 위로의 울림이리라 믿어봅니다
천지 창조때부터 만난 참 '나'와 "메시아"의 관계는 영원한 만남입니다. 살면서 맺은 인간 관계들은 잊혀지더라도, 메시아와 만남은 영원히 잊거나 잊혀질 수 없고 끊을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월이 더 흐를수록 언젠가 우리는 잊고 살았던 '나'와 '우리'와 '메시아'를 더 깊게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비로소 안드레아가 시몬에게 오늘 외친 환희의 목소리를 우리도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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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 8월, 동창 신부들과 은경축을 맞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사제 생활 25년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해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 기간 중의 본당 미사를 다른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월요일 새벽(새벽 출발 비행기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 중인데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사에 오시기로 했던 신부님께서 새벽 미사에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얼른 그 신부에게 전화하니, 죄송하다면서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날 오후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새벽 미사에 늦은 신부의 아버지께서 선종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사 때문에 그 곁을 떠나 성당에 온 것이었습니다. 약간 늦었지만 말이지요. 그 신부에게 미안하기도(미사 부탁해서), 또 동시에 감사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급한 일, 불가피한 일이 생겨도 미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자리이고 힘든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받지만, 세상 기준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사제 부족으로 참 어렵습니다. 신학교 지원자도 줄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보좌신부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 이제 나이 70을 넘어도 2~3개 본당을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없으면 주님의 큰 은총을 얻는 미사도 없지요.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당연히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 부족은 우리의 신앙심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자기를 기다리는 목자가 있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자들이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 열심한 사제도 늘어나고 사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부족을 하느님께 채워달라고만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시면 우리로서는 너무나 편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직접 마음을 먹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서, 모든 것을 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시급한 사제 부족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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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세상>
요한 1,35-42 (첫 제자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사람 세상>
사람이
사람을
사람에게
나누고
사람으로부터
사람을
사람이
품으니
사람과
사람이
사람으로
이어지고
사람과
사람이
사람으로
어울리며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인
사람세상
날마다
새로 열리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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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한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대통령의 계엄선언과 탄핵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당당하지 못한 처신으로 말미암아 국격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야당이나 여당이나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태어나기는 너무 요원합니다.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부터 변해야 하는데 남 탓하기에 급급합니다. 소위 잘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아는 놈이 더해!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37)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것이 요한의 진심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을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주제를 알고 분수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으면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니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 2,15)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언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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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어제 복음에서는 요한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도록 이끌었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지요. 그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기에 자신들이 예수님의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바라봐야 할지, 그분을 믿고 따름으로써 자신들이 그분께 기대하고 바랄 수 있는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 곁에 머물러보기로 합니다. 그분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보다보면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찾아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나와 친밀한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곁을 내주는 건 너무나 불편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마치 감시를 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부담스럽고 싫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에게 당신 곁을 내어주십니다. 당신에 대해 더 알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이로부터 전해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대끼고 살아봄으로써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아셨기에 “와서 보아라”하고 그들을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아봄으로써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사람은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자기가 아끼는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본 안드레아는 형 시몬에게 자기가 본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전하며 그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이 때 안드레아가 시몬에게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하지요. 상대방을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듯 그의 겉모습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그치지만,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맺어졌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기에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고, 그 ‘봄’을 통해 마침내 그와 하나로 일치되는 겁니다. 그랬기에 안드레아는 당당하게 자기가 만난 분이 메시아라고 선포할 수 있었고 자신있게 자기 형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었지요.
주님 공현 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나는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봄이 그저 호기심으로 주님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분과 함께 머무르기 위해 나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얼마나 들이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주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의 참모습을 보기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그분이 나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아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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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웃 사랑의 최고의 길>
“그것은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사랑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분명 이 위기를 주님의 보호아래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욱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우뚝 설 것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아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외칠, 만세칠창 중 하나,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입니다.
어둠속에 빛을 찾는 사람들이요 참으로 강인한 민초(民草)들입니다. 국난때 마다 나라를 살린 무수한 민초들입니다. 거짓이 진리를,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궁극엔 진리의 승리요 빛의 승리입니다. 진리의 빛앞에 사라지는 거짓의 어둠임을 믿습니다.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뤄지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교황님의 홈페이지 기사가 어둠 속의 빛처럼 우리 마음을 밝힙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희망의 순례자들’인 너희들은 언제나 움직임중에 있어야 한다. 결코 가만히 서있지 말고, 결코 앞을 향한 움직임을 멈추지 마라. 사랑하는 희망의 순례자들인 친구들이여!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걸어온 친구들이여! 우리 모두 만나는 이들에게 희망의 작은 표지들이 되도록 하자!”
어제 교황청을 방문한 이탈리아 청소년 일행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순례 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어 말타 기사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섬기고 있다. 그리스도는 섬기러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성령이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함이 바로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요 하느님께 속한 사랑인지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요, 그의 제자들이었다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된 이들입니다. 영적지도자의 일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안내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일 둘이라 합니다.
2025년 1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은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입니다. “더욱 인간적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은 교육받을 그들의 권리가 언제나 존중받아져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소외된 이들의 교육을 강조한 교황입니다. 교육의 핵심은 구원자 예수님께 인도하여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겠습니다. 무지에 대한 최고의 유일한 처방은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최고의 길은 그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발광체인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제자들을 참 스승이자 주님인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멋진, 겸손하고 지혜로운 스승 세례자 요한입니다. 제자들을 지체없이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 인도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최고의 순수한 사랑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집착이나 예수님께 대한 질투심 전혀없이 때가 되자 자기 제자들을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 고스란히 인계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이 당신을 뒤따라 오는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이 물음이 참 심오합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찾습니다.” 대신 이 현명하고 절박한 요한의 두 제자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 물음 또한 한없이 심오합니다. 묵다(stay)를 뜻하는 희랍어 menein(메네인)은 ‘살다(abide)’, ‘머물다(remain)’를 뜻하는 말로 복음에서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이 물음의 의도안에는 주님이신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과 함께 머물러 살면서 구원의 진리를 보고 배우고 싶다는 깊은 원의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 말씀 또한 심오합니다. “와서 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신학을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물며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님의 섬김의 삶전체를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아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바로 눈만 열리면 어디나 주님이 머무르시는 곳이요, 참 좋은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 섬기는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두제자는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합니다. 둘중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야 였고, 그는 지체없이 형 시몬을 예수님께 안내하니 이 또한 형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새삼 나를 예수님께, 수도원에 인도한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루 내내 예수님을 만나 함께 묵으며 보고 배운 안드레아가 감격에 벅차 구원의 기쁜 소식을 형 시몬에게 전합니다. 동생 안드레아에 의해 메시아 예수님께 인도된 형 시몬을 반기는 예수님이요 이름도 ‘베드로’로 번역되는 ‘케파’입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참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참 자기를 살게 된, 장차 수제자가 될 시몬 베드로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찾아 만나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섬김의 사랑을 보고 배우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 형제자매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발광체(發光體) 예수님의 사랑을 잘 반사하는 주님의 참 좋은 반사체(反射體)로 사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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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대로 믿기>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는다고 함은 무엇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는다는 것이 실은 믿는 것입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고, 그렇기에 속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지 않거나 나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속지 말자는 것은 탁 느끼기에도 수세적이고 부정적이지요.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 모두를 의심하게 되겠지요. 좋은 것인데도 나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도 되고요. 그래서 좀처럼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의심이 심해져 불신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의처증이 중증이 되듯이 더 중증이 되고요.
그러므로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음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것? 첫째는 믿을 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은, 아무나 믿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물론 이 말은 불신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이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처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사람을 그 이상의 사람으로 믿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기에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또 하느님을 믿더라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웃기는 얘기할 때 많이 하던 얘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가 ‘아, 시원하다.’했고, 그래서 아들이 들어갔다가 너무 뜨겁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했다지요.
주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오라고,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또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짐을 안 지게 해주시고 고생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믿었다가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자식처럼 주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나 주님께 왔는데 주님께도 속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하느님을 믿으면 고통을 없애주실 거라고 믿음 때문에 믿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주님의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을 잘 지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꽃길 걷게 해주겠다고 귀를 간질이는 인간에게는 속지 말고,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매고 당신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오히려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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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요한 1,41)
<증언의 삶!>
오늘 복음(요한 1,35-42)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증언하면서, 그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2)
오늘 복음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예언직의 사명인 '복음화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화'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만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구세주'(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두고, '신성을 지니신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며 구세주'라고 증언(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첫 단계'는 '내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내가 먼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부활하는 것'이 복음화의 첫 단계입니다.
복음화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지금 여기에서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 부활합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를 증언의 삶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힘들지만 믿음 안에서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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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와서 보아라."(요한 1, 39)
우리의
삶이란
체험의 장이며
은총이 가득
펼쳐지는
거룩한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체험들을
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우리를
"와서 보아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좋은 초대
좋은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중심입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구원의 원천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생활입니다.
차오르는
기쁨을
주님 안에서
찾고
만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만이 있을
뿐입니다.
초대는
만남이 되고
만남은
우리의
확신이
됩니다.
주님을 믿는
확신은
새로운 생활이
됩니다.
새로운 기쁨
새로운
생활로
주님을 다시
만나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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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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