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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예후
생몰연대: 재위 B.C. 841~813년.
주소: 북이스라엘 길르앗 라못, 즉위 후 사마리아 성.
직업: 장군, 국왕
가족관계: 아들 여호아하스
1. 예후의 행적
참 오랜만이다. 비느하스 편을 쓰고 딱 3개월 만이다. 성경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흔히 사람들은 내가 아주 믿음이 좋고 영성이 뛰어난 뭐 그런 사람이라고 더러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어찌하리요. 나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인 것을.
다윗이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 하였고 바울 사도께서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하였사온데 그간 내 행실을 볼작시면 이건 뭐 우상숭배만 안 한다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그 열조의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모든 이들과 별 다른 게 없다.
나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 애써 보겠다고 떨쳐 일어나 보건만 결국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행실은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인지라 하나님께 송구스러워 뵐 낯이 없다.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자면 이쪽을 선택하는 것이 맞건만 주변의 시선, 세상적인 갈등, 체면 등등 그런 것들이 발목을 잡게 되고 이럭저럭 내 딴에 쇼부(?)를 잘 쳤다고 생각하고 돌아서 보면 뭐? 결국은 이거다.
‘그 열조의 죄악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오호~ 통재라. 나는 정말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물경 3천여년 전에 지금의 나와 똑같은 갈등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이스라엘의 국왕이신 예후 임금님!!!
열왕기를 보면 가장 딱 부러지는 것이 바로 해당 왕들에 대한 사관(?)의 평이다. 물론 왕들이란 족속들이 대부분 개념들이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빙빙 도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유다의 경우 절반 정도는 ‘다윗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 앞에 정직하였다.’는 왕들이었고 꼭 그런 왕들이 오래 해먹어서 그나마 전체 역사 중에 성군들이 다스린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얄짤이 없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족속들인 것이다.
여로보암 왕조가 2대 만에 끊기고 수많은 쿠데타로 줄잡아 열 번 가까이 왕조가 바뀌건만 어떻게 단 한 명도 선한 왕이 없단 말인가? 라고 탄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어쩌면 북이스라엘의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던 한 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지금 소개드릴 예후 임금님이다.
김성일 장로님의 소설에 보면 예후 왕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성장 배경 이런 것들이 나오지만 각설하고 순전히 성경에 나온 대로만 보면 정말 뜬금없다.
어느 날 선지자 엘리사가 제자 하나를 불러 기름병 하나 주고 길르앗 라못으로 보내 거기 있는 예후에게 가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니가 왕이다!” 한 뒤에 냅다 튀어라(?)고 지시를 내린다.
뜬금없는 지시를 제자는 따랐고, 뜬금없이 기름을 받고 예언을 들은 예후는 뜬금없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다. 참 심플하면서도 공허한(?) 내용이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였다.
당시에 예후가 길르앗 라못 일대의 군대 장관 중의 하나였다는 것과 의외로 믿음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이스라엘에서도 선지자의 예언과 기름부음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서 구르다 온 지도 모르는 나그네가 와서 기름을 붓고 당신이 왕이다 하고 사라진 것이다.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던 그것을 길르앗 라못의 모든 지휘관들은 존중하였고 그 자리에서 ‘예후 폐하 만세!’를 부른다.
이는 바알 숭배로 이스라엘 왕실과 사회가 찌들고 있었을 때에도 변방의 군인들은 우직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후를 옹립하고 반기를 든 것은 그들도 이스라엘 국가를 좀먹는 두로 출신 왕비 이세벨과 바알 숭배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렇게 군사를 일으킨 예후는 지키던 전방 GP와 GOP 초소들을 모두 내버려 두고 (뭐?) 전군을 휘몰아 왕궁이 있는 이스르엘로 쳐들어온다.
예후가 오는 것을 본 이스라엘 왕 요람은 전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그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무슨 급보라도 생겼나 싶어 전령을 보내 ‘(전방 상황이) 평안한가?’를 물어보게 했고 전령들은 가자마자 예후의 군대에 합류한다.-_-;;;
그렇게 왕궁으로 치닫는 쿠데타 군을 보며 요람 왕에게 보고하는 파수꾼의 표현이 아스트랄한데 ‘병거 모는 것이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이다.
(아마 예후가 상당히 폭주족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나 보다.)
그제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챈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이 병거를 끌고 나가 나봇의 밭에서 예후와 대치하게 되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두 왕이 한날 한시에 예후의 손에 처형을 당하게 된다.
두 왕이 죽었건만 혁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왕궁으로 들어온 예후를 보며 최후를 직감한 이세벨은 죽어도 엣지 있게 죽자는 심정으로 메이크업을 하고 당당하게 예후를 성토하건만 자신의 시중을 들던 내시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내던져져 터져죽고 예후는 그녀의 시체를 밟고 궁으로 들어가 태연하게 회식을 한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라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아들 70명 - 바알 제사 의식에 따라 아합 왕이 여사제와 동침을 해서 낳은 서자들이다. - 을 술수를 써서 모두 참수하였고 아합 집안 식솔들과 귀족들, 심복들, 제사장들을 싹다 죽였다.-_-;;
그렇게 이스르엘에서 대청소를 끝내고 사마리아로 가는 중 길가에서 만난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을 다 죽였다.-_-;;;
그리고 사마리아에 도착한 후 거기 남아 있던 아합의 추종세력들을 다 죽였다.-_-;;;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바알을 빵빵하게 섬기겠다는 기만술로 전국의 바알 숭배자들을 다 모아서는 신당 안에 가둬놓고 다 죽였다.-_-;;;
(대략 3. 1 운동 때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보는 듯한)
그렇게 혁명은 끝났고 예후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까지 뽑아버렸으며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내가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했고, 잘 했으며,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안에 다 해주었으니 너의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4대를 지낼 것이다.’라는 포상을 하여 주신다.
이렇게 이스라엘 판 위화도 회군! 예후의 혁명은 - 성공한 쿠데타니까 혁명이라고 쓴다. - 성공하였고 그는 하나님께 극찬을 받는 주인공이 된다.
이런 그에게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2. 누구냐 넌?
내가 아비야 편을 쓰면서 한 얘기가 있다. 바로 폭군이라 해서 신앙이 없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
완전 다 썩어빠진 듯했던 북이스라엘도 신앙이 아주 사라진 동네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서슬이 퍼렇던 아합 왕도 엘리야의 비판에 회개했던 것. 훗날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엘리사의 임종을 지키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슬퍼했던 것, 선지자의 예언에 길르앗 라못의 지휘관들이 모두 복종했던 것.
이스르엘을 접수한 예후가 레갑의 지도자 여호나답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는 것.
과연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전국에서 바알 숭배자를 모았는데 대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인구가 얼마나 되길래 바알 신도가 성전 하나에 꽉 들어찰 만큼, 병사 80명으로 하루만에 다 죽일 수 있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일까?
태후 이세벨이 바알 숭배자라 바알 교도들의 세력은 컸을지언정 정작 교세 자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종교를 믿었을까?
바로.... 하나님이다.
그랬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왕들의 이름도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름으로 지었던 것이다.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 같은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뜻을 갖고 있다. 근데 전부 폭군이다.-_-;)
엘리야,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존경을 받고 그들의 말빨이 먹혀들어갔고 그들이 쉽사리 순교를 당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예후와 그의 추종자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떨쳐 일어나 그 모든 것을 해냈던 것이다. 다만.... 올바른,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었을 뿐이다.
백성들의 예루살렘 성전 참배를 막고 정권을 다지기 위해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세웠던 금송아지 우상. 그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섬겼고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해봐야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우상숭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이 어떤 열심을 갖고 있었든 간에 결국은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과 직접 면담까지 한 예후 왕이 어찌 그것을 몰랐으리요.
그러나 정통 승계가 아닌 쿠데타로 정권을 뒤엎고 역성혁명을 한 그에게는 - 그런 왕조가 대개 그렇듯이 - 정통성이 취약했고 권좌가 안정되지 못했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의뢰하는 대신 시대의 조류와 타협하는 길을 택했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대가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악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다.
선택의 기로에 선 그가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문제를 의뢰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쉬움이 더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후라는 인간 자체가 참 인성이 덜 된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열왕기에 나오는 예후의 이야기 전체를 조감해 보아도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기도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세벨이 창밖으로 내던져져 피가 터져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시체를 밟고 들어가 태연자약하게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보면 이 예후는 정말 잔혹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이세벨이 악녀라는 이유로 마치 그를 가나안을 진멸한 여호수아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 후로도 그는 수차례 대량학살을 저지르는데 과연 그 가운데 무고한 사람이 없었을까?
그의 대학살이 단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또한 바알을 진멸한 공은 인정하되 그 방법이 굉장히 치졸하고 음모에 가까운 술수라는 점에 과연 이러한 예후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대학살은 하나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권력욕과 폭력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증거로 그는 바알을 멸하고 아합 집안을 숙청하면서도 자신의 권좌를 유지할 수단이 되는 금송아지와 제사장들은 없애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금송아지 숭배를 이어가고 있으니 그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그 자신부터 애초에 똑바로 된 신앙이 아닌 반쪽짜리 신앙이고, 그나마 혁명을 한 것도 실상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는 목적을 숨긴 채 시작한 것이었으니 그런 그에게 하나님도 다윗처럼 영원한 권좌 대신 4대의 왕위만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하신 잘 했다는 치하가 단순히 잘 했다 가 아니라 자~알~ 했다 일수도.....)
병거를 미치게 몰고, 수없이 죽여대는 잔인함을 용맹함처럼 보고 마치 예후가 굉장한 용장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후 시대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망조가 들어 나라가 착착 잘려나갔고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는 치욕적인 모습을 기록하기도 한다.
결국 나라를 지킬 군사적 재능조차 없는 그냥 그저 그런 독재자일 뿐이었다.
그의 아들도, 손자도 앞선 이스라엘 왕들처럼 악을 행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뭐 예후란 인간은 신앙적으로 더 봐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결국 등을 돌리셨고 마침내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그가 이스르엘에서 흘렸던 피에 대한 죄값을 치르고 그의 왕가를 멸하겠다는 선언을 하신다.
3. 총평
이스라엘 왕 예후는 사실 정말 아깝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바알 숭배 척결에 저만한 열의를 보인 왕은 없었고 이스라엘 왕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부터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고 진실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주변의 이목과 시선, 자신의 권좌에 대한 욕망으로 인하여 끝내 세상과 타협을 하고 말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했다. 우선 나 자신이 똑바로 신앙 안에 서 있어야 주변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건만 나 스스로가 똑바로 되지도 않았으면서 언감생신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일어서다가는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예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주의 종, 선지자, 영웅이 되기보다 기본에 충실한 한 사람의 성도가 되기를 더 바라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의 설명문에는 ‘오므리의 아들 예후의 조공’이라고 되어 있다. 결국 예후는 자신이 몰아낸 아합 집안의 치욕적인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과연 우리가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 지를 항상 되돌아보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믿음에 맞는 인격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더 살펴보자.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죄를 지을 지라도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될, ‘그것’만은 지키고 있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집필자 : 계시탐정
첫댓글 할렐루야. 마라나타. 감사합니다. 아멘.
반갑습니다. 아멘 혹시 계시탐정님도 네이버 청지기 카페 회원인이신가요? ^^
네? 거기가 어디입니까?;;;;
동일산 교회 평생 성경공부 카페고 원래 이름은 청지기 카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공부하는 지체 모임인데요. 비느하스 글을 거기 지체님이 올려주셨어요
그렇군요.^ 이곳저곳에서 스크랩을 한 모양입니다.ㅎㅎ 원작자는 접니다.
@계시탐정 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