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번 보낸 내용 재발송>
1910년 2월 14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시던 안중근의사님께서 사형선고 된 날입니다.
연인들끼리 초콜렛을 주고받는것도 좋지만, 딱 5분만이라도 나라를 위해 몸바치신 선조분들을 생각해보는게 어떨까요?
이게 상술입니다......미국과 맞아떨어진 일제의.....
옳은 일을 짓밟는 것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을 보거든
구해줄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을 때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바로 잡는 데
힘쓰는 사람이 되라.
- 도마 안중근(1879~1910)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순간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군사장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쏜 정의의 총성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또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대한민국의 측에서는 최대의 원수로 볼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조선의 초대 통감부가 된 이토는
조선의 왕실을 모욕하였고 조선 지배 계획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이런 상황에 안중근 의사가 나서서 그를 처단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군에 의해 붙잡혀 일본으로 넘겨졌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괴로운 감옥생활 동안에도 '동양평화론'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또한 그의 곧은 의지는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마저 그를 존경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런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당시 만주 철도 이사였던 일본인 다나카 세이타로는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동을 받아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안중근 의사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결국 순국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셨던 안중근 의사.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저 시체 통 속에 안중근 의사의 통도 있을지...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찾기 위해
이 곳을 두 번 방문하였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爲國獻身軍人本分
見利思義見危授命
人無遠慮難成大業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 안중근-
<펌>
발렌타인데이 의미와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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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의 수호성인 발렌티노 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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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몠s Day)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날일까.
발렌타인데이가 가톨릭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월14일은 바로 발렌티노 성인의 축일. 거룩한 성인의 축일이 어떤 연유로 연인들의 사랑 고백일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이날을 축일로 하는 발렌티노 성인은 사실 두명이다. 한명은 서기 269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의해 처형된 사제이며 또 한명은 로마에서 순교한 발렌티노 주교이다. 사제 발렌티노는 교회를 박해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배교 권유를 무시함으로써 체포돼 아스데리오라는 법관에게 보내졌는데 발렌티노는 앞을 보지 못하던 아스데리오의 딸을 기도로 고쳐 주었다. 이를 목격한 아스데리오의 일가족 40여명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발렌티노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황제에 의해 발렌티노와 일가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또 한명인 발렌티노 주교는 로마에서 집정관 플라치도의 명령에 따라 고문을 받고 순교했으며 로마에서 10여㎞ 떨어진 테르니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학자들은 두 성인이 결국 같은 인물로 발렌티노 사제가 주교가 된 다음에 순교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발렌티노 성인이 연인들의 수호성인이 된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해답을 주는 일화는 이렇다.
당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의 결혼을 금했는데 발렌티노 성인이 이를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몰래 혼인시키다가 발각돼 2월14일 순교했다. 그는 감옥에서 간수의 딸에게 발렌티노의 사랑을! (love from Valentine)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냈고 이것이 발렌타인데이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도 있다. 로마 제국의 루퍼칼리아 라는 축제 중에는 도시의 젊은 여자들이 자기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항아리에 넣고 남자들이 항아리에서 이름표를 고르는 짝짓기 행사가 있었다. 또 이를 통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축제를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여긴 당시 교황은 서기 498년 2월14일을 발렌타인데이로 선포하고 남녀간 사랑을 표현하는 날로 삼았다고 한다. 영국인들이 2월14일을 새가 짝을 짓는 날로 믿고 또 봄을 연인을 위한 계절로 여겼던 데서 유래됐다는 속설도 있다.
결론적으로 발렌티노 성인의 축일 로마의 관습 서양의 속설 등이 결합해 생겨난 것이 오늘날의 발렌타인데이 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처럼 발렌타인데이 때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적불명의 풍습이다. 다만 1960년대 일본의 어느 초콜릿회사가 연인에게 편지를 대신해 초콜릿을 보내도록 만든 상업적 전략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선물한다는 화이트데이(3월14일)는 그나마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역사적 유래도 없다. 발렌타인데이 초콜릿과 함께 일본 제과회사의 판매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오늘날과 같은 발렌타인데이 풍습이 생긴 것이 일본 제과회사의 농간일 따름이라고 무시할 수 있겠지만 초콜릿에 사랑을 담아 연인에게 전하는 애틋함마저 애써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일생 동안 사랑을 실천하다 순교한 발렌티노 성인의 신앙까지 기억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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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주차장에서1
- 감시 카메라를 달며-
이봉래
시절이 수상하여
할아버지와 그 동료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매서운 추위를 떨치고
왜경(倭警)의 눈을 피해
두만과 압록을 넘나들며
큰 뜻을 펼쳤지
해방 59년-
알량한 독립유공자 연금으로
허기와 힘든 세월을 견뎌오더니
그들은 가고 자손은 남아
세월이 흐른다하여
그 뜻이 변할 리 없건만
생명 존중도
이웃의 배려도
콘크리트 문화에 막혀 격리된 채
나만 아는 세상에서는-
더 많이 배워 박사 되고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되고
재화(財貨)만 아는
허가 낸 날 강도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시절이 수상하니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지하 주차장 이곳, 저곳에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감시 카메라를 달고 있다
(월간 모던포엠 2004년 10월호 초대시 중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