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서의 하루하루가 숨이 차듯이 감동적이다. 가을의 연화산을 보면서 포근한 마음이 들고, 황혼에 함백산을 오르면 편안한 마음이 든다. 10일장이 열리는 통리란 곳을 찾았을 때 옛날 광주의 장터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통리를 지나 도계를 바라보면서는 마음이 울컥해진다. 장성이란 곳을 지나 구문소공원에 갈때도 내 마음이 쿵쿵거렸다. 사실 어디가나 삶이란 비슷하지만 그런데도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서 그리워하던 삶, 어린시절 광주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떠나지 않았다. 태백에서 도계로 가려면 해발 720m되는 통리재를 넘어간다. 통리재에서 환하게 내려다 보이는데, 심포리와 도계읍을 바라다 보는 순간에 감동에 젖는다. 마치 70년대 대관령정상에서 멀리 강릉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아래 사진은 통리재에서 내려다본 심포리 마을이다. 드문드문 있었던 집들과 미루나무들은 사라지고 지금은 테마공원이 들어섰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과 어깨를 서로 기대고 있는 듯이 촘촘히 들어선 집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산바람이 차가운 겨울에 추위는 어떻게 견디었을까? 이곳에서 어린이들은 어떻게 학교를 다녔을까? 아이들은 어디에서 뛰어놀았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다니던 광주국민학교때를 뒤돌아본다. 여름이면 큰개울 작은개울에서 놀고 가을이면 근처 산을 오르고 겨울이면 얼음이 있는 논에서 살았었는데...
통리재에서 조금 내려가니 추추파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이 유명한 심포리이다. 눈을 더 먼 곳으로 둔다면 삼척이 보일 것이다.
심포리에서 더 내려가면 도계읍이 나온다. 옛날 철길엎에는 사택들이 줄서서 늘어서 있다. 벽화가 그려진 집들이 광부들의 안식처였다. 왁자지껄하였던 때, 개도 100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전성기가 지난지 30여년이 넘었다.
위 사진의 철도는 어디가 종착역일까? 광부들이 캐낸 석탄은 바로바로 묵호항으로 날랐다. 수송이 불가능한 동해안과 남해안 연안 그리고 제주도 등에 대한 석탄 공급은 묵호항에서 해상으로 이루어졌다. 대한석탄공사는 1943년에 건조한 선박을 1953년 9월에 구입해 도계호라 명명하였다. 이 배는 대한석탄공사가 미국에 66만 달러를 주고 세 척의 선박을 구입하면서 1척을 도계호로 명명한 것이다. 도계호는 도계탄 수송에 나서면서 국내에서 운항되다가 영암선개통으로 육상수송이 늘자, 한일수교가 이뤄진 1960년대에는 일본까지 항해에 나섰다. 묵호항은 집들이 세워지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과 돈이 넘쳐나니 술집이 생겨났고 광부들의 주머니를 터는 쓰리꾼들이 넘쳐났다. 뻔히 돈을 빼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말도 못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 때면 읍내 전두시장이 인파로 체증을 빚을 정도로 도계 경제는 호황을 구가했다. 하지만 에너지 정책이 바뀔 때마다 도계의 살림살이는 점점 궁핍해졌고 사람들도 이곳을 떠나갔다.
도계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도계유리마을.
아니 석탄을 캐는 마을에 웬 유리공장이 있을까?
석탄을 걸러내고 남은 경석에서 뽑아낸 도계의 유리는 유해물질이 포함되는 않은 양질의 유리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지역폐자원의 개발을 통하여 고부가가치 산업이자 친환경적인 사업으로의 전환을 꾀한 끝에 탄생한 것이 도계우리마을이다. 폐석을 이용하여 유리공예품과 글라스 아트 타일, 트로피 및 상패 등을 제작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도 도계유리마을이 유일한 곳이다(때문에 이 마을에서 생산된 유리 제품은 ‘도계 글라스’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리공예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삼척시로 들어가는 도계는 태백시와 삼척시의 경계 지역에 있다. 그리고 통리재는 태백과 도계를 갈라놓고 있다. 예전엔 서울, 대구 등에서 강릉으로 가는 열차들이 통리재를 넘어 내리막길로 도계로 갔다. 그런데 강릉에서 태백으로 오는 열차와 화물은 높은 통리재를 어떻게 넘었을까? 바로 스위치백과 인클라인이란 기술덕분이다. 갈지(之)자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는 방식인데, 기관차가 한 번에 치고 오르기 벅찬 구간을 운행하기 위해 고안됐다.
심포리에서 통리까지 이어지는 것이 인클라인 철길인데, 급경사 구간에 레일을 깔고 기차를 전기모터와 연결된 줄에 매달아서 케이블카를 운행하듯이 끌어올리고 내리는 방식으로 운행되는 것이다. 기차가 심포리역에 도착하면 승객들은 모두 열차에서 내려서 걸어서 1시간 거리의 통리역까지 올라 가서 통리역에 대기 중인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기관차를 제외한 화차는 쇠줄로 끌어올리거나 내렸고 승객들은 걸어서 오르내렸다. 철길 왼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1시간을 걸어서 가파른 산을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름에는 땀이 비오듯 할 것이고, 겨울에는 살을 에이는 듯할 것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냉차장사들이 신이 났고 겨울에는 신발을 새끼줄로 감고 올라가야 하였기에 새끼줄 장사꾼들이 신이 났다. 역에는 봇짐이나 가방을 운반해 주기 위해 지게꾼이 있었고, 까까머리 학생들도 달음박질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자리를 잡아주고 수고비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 혼잡한 틈을 타서 쓰리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지역 출신으로 29년간 역무원생활을 해온 홍성태(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씨는 "60년대 통리역으로 오르는 길목엔 냉차집이 번창했고 승객의 호주머니를노리는 야바위꾼들도 몰려들어 무법천지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심포리에서 통리로 올라오는 화차의 무게는 내려가는 화차의 무게보다 가벼워야 한다. 통리역에 설치한 6백마력짜리의 모터가 작동하면 화차가 내려가게 되며 그 힘으로 심포리역에 있던 화차가 올라온다. 통리와 나한정, 이 두 역을 잇는 가파른 산악은 이렇듯 인클라인과 스위치백, 두 시스템으로 연결(1940년)됐다. 우선 스위치백 구간에 도착하면 열차를 정지해야 하기 때문에, 고속운전에 방해가 되고, 선로가 끊어진 곳까지 열차를 가까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기관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된다. 역원들이나 기관사들이 신경을 엄청 썼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1940년에 개통된 곳으로, 그동안 지반약화로 안전성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우려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인클라인 철도는 우회철도 개통으로 1963년도에 사라졌다.
도계역에서 나한정까지 3.2km. 나한정역에서 흥전역까지 1.5km, 흥전역에서 심포리역까지 4.06km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쉬엄쉬엄 올라간다. 앞만 보고 달리던 기차도 흥전―나한정역 1.5km의 ‘스위치백’ 구간에 들어서면 더는 가지 못하고 뒤로 달려간다. 해발 680m의 통리역과 해발 245m의 도계역은 험준한 산악지형 때문에 고도 차이가 435m나 된다. 이 구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사가 심하고, 굴곡도 가장 심한 노선이다. 직선 1.1km에 불과한 거리지만 급경사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Z자 형태로 설치하면서 7배에 달하는 7.7km의 철로가 놓였다. 통리―도계역의 직선거리는 6km지만 철로는 산속을 휘저으며 16km나 에둘러간다. 16km를 가는 동안 무려 14개의 터널을 만난다.
2012년 6월 27일에 솔안터널이 개통되면서 스위치백 철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백시 동백산―도계역 간 19.6km 구간을 대신할 총연장 17.774㎞ 중 16.240㎞의 솔안터널은 이미 2006년에 관통되었다. 이 터널은 390m의 구간 높이 차를 극복하기 위해 나선형 철로인 루프터널(Loop Tunnel), 일명 똬리굴이 시설됐다. 태백시 동백산―도계 간 열차운행 시간은 36분에서 16분으로 단축되었다. 시내 남쪽에 자리잡은 연화산이 그 품안에 철도를 품고있다. 스위치백 구간은 2014년부터 ‘하이원 추추파크’라는 기차테마파크를 운영하여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던 곳이 쓸쓸히 풀만 우거져 있고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하던 사람들과 같이 살던 집을 나중에 혼자 찾아가면 참 눈물이 난다
동네사람들이 드나들던 간이역은 거의 문이 잠가져 있고
대합실 벽에는 근무자이름들이 적힌 근무상황지가 아직도 붙어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혼자서 생각해 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이들어 지난 날을 돌이켜보려는 우리의 삶이 자식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 또한 북한의 고향마을 그림을 걸어놓고 내게 한참 설명하시던 아버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으니까
내 말을 듣고 공감하는 사람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동창님들 오래 건강하게 살아 기쁜 소식 주고 받읍시다
첫댓글
도토리님 추워도 여행잘하시는군요.
십여년전 박영호 동창 내외와 집사람과 양평역에서 무궁화호인가 타고 정동진 까지 여행했 지요ㅡ기차가 꺼꾸로가다가 다시올라가던곳이
나한정역이구나 무박2일여행,술때문에 고생을했던 기억,추억.
이거 있잖아요
여행한 것이라기 보다 고철을 모으다보니 돌아다니게 되었고
마침 폐쇄된 간이역에 고철이 있다보니 역에 여러번 들렀던거지요
역장님이 잘 아는 분이라 도움을 받았고요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했는데 불우이웃이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러저러 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별로 관심없는 이야기이지만 저한테는 마음에 남는 글입니다
글이라기 보다 시간순서로 편집한 겁니다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소개해줘서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