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직업인들의 생활을 글을 통해 엿보는 것도 참 도전이 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도 글 속에서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접하게 되면 왠지 좁아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던 것처럼 학교 생활만 무려 25년 넘게 해 온 나로써는 예능 PD가 밝히는 PD의 일상과 직업인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게 시야를 넓히는 경험이 되었고 나와 전혀 다른 쪽의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임팩트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와 방송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감독이나 PD나 공통된 특징은 한 작품을 기획하고 마무리할 때까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다만 영화는 얼마든지 감독의 의지대로 수정이 가능하고 완벽한 작품을 위해서라면 작품이 마감되는 날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약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는 반면에 방송은 그렇지 않다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든 시청자들은 예정된 방송 일자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기 위해 화면 앞에 앉아 있을텐데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연기나 취소를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PD가 받는 중압감은 몇 배나 더하지 않을까 싶다.
PD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겠지만 더구나 변화무쌍한 현대에 변화가 없이 누구나 예상이 되는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게 되면 직장 동료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몰매를 맞기가 쉽상이다. 특히 방송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아야 하는 부담감과 더 빠른 시대 감각으로 시청자들을 선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감까지 갖고 있는 터라 방송 PD 스스로가 갖는 고민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예능 프로그램 자체가 시청자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고 편안하게 웃고 즐길 수 있도록 하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뭔가 강한 임팩트를 남겨야 하기에 PD의 기획안 안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창의성과 상상력이 빠져서는 안 될 항목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럼에도 PD라는 직업의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모든 것에 창의성을 갈아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시청자들은 새로움도 갈구하게 되지만 한 주간 지내오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가볍게 풀고자 하는 의도에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모르게 예능 프로그램을 켜고 멍한 느낌으로 진행자의 진행 흐름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고자 하는 부분이 크기에 새로운 뭔가의 포맷을 만들어 늘상 새로움을 안겨주는 프로그램 기획안보다는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시청률을 높이는데 큰 몫을 한다는 게 업계 비밀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할 일 많다는 것은 그게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콘텐츠라는 뜻이다" (139쪽)
나도 저자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올해 유독히 외부 강의가 많았다. 특히 교감들을 대상으로 한 메머드급 강의가 몇 차례 섭외가 들어왔고 당연히 용감히 거절하지 않고 수락해서 다녀왔던 경험이 있다. 장소만 다를 뿐이지 청중들은 교감 선생님들이었다. 주제도 겉으로 보았을 때 달랐지만 사실 알고 보면 거의 맥락이 비슷한 주제로 모아질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강의를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제에 따라 이런내용들을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을 해 온다. 나로써는 그 요청들을 무시할 수 없기에 강의안을 작성할 때는 정해진 형식과 안대로 흠결없이 작성하여 기한내에 송부한다. 그리고 난 뒤부터가 나에게 있어서는 전쟁터에 임한 장수의 입장이 된다. 나의 강력한 무기가 뭔지, 그 무기를 과연 언제 사용할 지, 새롭게 만나는 청중들의 상태는 어떤지를 미리 상상하며 PPT를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 재구성해 간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 강의하는 날에는 조금 일찍 강의 장소에 가서 미리 셋팅을 해 두고 심지어 연수에 들어오는 교감 선생님들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읽어내기 위해 강의 실 앞에서 인사를 하며 어색함의 벽을 무너뜨린다.
주제는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고 얘기했다. 다만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받아들이는 청중들의 반응이 신기하리만큼 다르다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나에게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듣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움과 신선함, 심지어 도전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염려보다는 자신감을 들기 시작했다. 강의를 반복해서 자는 자의 자신감이라고 할까. 아뭏든 작년, 올해 다양한 장소에서 교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았다라고 피드백을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PD에게 있어서도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그 바닥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억지로 만들기 보다 자신이 자주 말할 수 있고 생각해 오던 것들이 결국은 시청자들에게도 먹히게 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팀원들에게도 억지로 고생만 시키는 번거로운 작업으로 가는 길을 미리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알고보니 그 일상이 최고의 감사라는 말이 있듯이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니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그러한 내용들이지만 시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PD가 만드는 프로그램을 통해 평안함과 안락함을 느끼기에 자주 습관처럼 보게 되는 것 같다.
혹시나 나에게 교감이 일상과 학교 생활을 연계한 특별한 주제로 강의를 섭외해 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걱정하지 말고 내가 가진 중요한 콘텐츠가 이미 내재되어 있고 선 경험들이 있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그 노하우를 안전하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처음에도 이야기했듯이 동종 업계의 사람들만 만나면 생각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요소들이 많기에 책으로라도 이종 업계의 사람들의 삶을 정리한 책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