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모를 슬픔
김인기
사회제도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은 늘어났다. 그렇더라도 나이 예순 살이 넘었으니, 곧 죽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자. 이게 내 지론이었다. 말이 씨가 되었나? 지난 6월 24일에 임파선암 진단을 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병의 성질이 사납지 않다. 그래도 암(癌)이어서 방치하면 죽는다. 치료 중에 방심하면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갖가지 변수들을 떠올리며 이러기로 했다.
‘살면 다행이고, 죽으면 운명이고.’
내가 달리 선택할 여지도 없다. 원래 생사란 게 대개 당사자의 뜻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자신의 태도 역시 이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 판정이 별스러우랴. 설마 내가 암에 걸리랴. 요런 근거 없는 믿음으로 살다가 어느 날 깨닫는 거지. 더러는 겁을 집어먹고 혼란에 빠지더라만, 그런다고 뭐가 나아질 것도 없잖아. 병자야 별별 주장으로 자기가 지금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라 우기지만, 기실은 그 이유만큼이나 조만간 죽어도 괜찮을 요인들도 수두룩하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횡설수설하며, 발버둥을 치고, 통곡이라도 할까 보냐.’
하기야 엄청난 고통이 닥치면 나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비명을 질러대겠으나, 아직은 이게 어디까지나 가정과 상상의 영역이다. 그런 만큼 나는 현재 상황에 맞게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지. 존엄이니 품위니 하는 미덕조차도 얼마쯤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니, 일단은 우스갯소리라도 해볼까? 아마도 이러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임파선암이 바로 림프종이고, ‘임파(淋巴)’란 용어조차도 라틴어에서 유래한 낱말 ‘림프(lymph)’의 음차(音借)이다. 임파선암이라고 다 같지도 않다. 소포성 림프종은 진행이 더디다. 그러나 이걸 느긋이 관찰할 게 아니라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면, 결국은 방사선이 어떻고 항암제가 어떻고 하게 되는데, 이러다 보면 환자의 면역력이 몹시 약해진다. 이때 환자가 폐렴에 걸리면 위험하다.
혈액종양내과 최 선생도 내게 앞으로 여섯 달 동안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당분간 나는 지난 코로나 팬데믹 시절과 거의 동일하게 생활해야 한다. 감염 우려 때문에 수박도 못 먹는다.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웃을 수도 없다. 마스크도 없이 서점을 들락거리며 책을 뒤적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간호사는 믹스커피도 삼가라고 했다. 나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셈이다.
본의 아니게 열외자가 되었다. 종종 구경꾼이거나 방외인이었을지언정 추방자나 열외자는 아니었던 내가 부지불식간에 그만 재분류를 당하고 말았다. 이래서 평소 내 언동도 남들한테는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그러면 나는 태도마저 바꿔서 우수 가득한 얼굴로 ‘중환자다움’을 드러내야 하나? 가끔은 이래야 할지도 몰라. 일전에 장 선생도 모처에서 내 설명을 가만히 듣다가 이렇게 반문했다.
“어떻게 그런 걸 그렇게나 명랑하게 이야기하세요?”
남들도 바보는 아니다. 누군들 어둠이 없으랴. 이들이 괜히 속사정을 숨기는 게 아니다. 다 그럴 만해서 그러는 거지. 속은 미어터져도 겉으로는 웃고, 더러는 이러느라 과도한 대가도 치른다. 아주 골병이 들어. 자기들은 이렇게라도 해서 뭔가를 지키고자 한다. 나야 워낙 얼빵한 인물이고, 이걸 숨길 의사도 그럴 능력도 없어서, 이렇게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지만. 그래, 이것도 체질이라 하자. 이런다고 범이라도 나타나나.
2026년 8월 8일 현재를 기준으로 보자면, 병원에서 암이라 확인한 게 달포쯤 전이었다. 병원을 오가며 틈틈이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다. 근래 한 친구가 빙부상(聘父喪)을 당했는데, 당장 이것부터가 마음에 덜컥 걸렸다. 조의금은 어떻게 하지? 자살 유가족들이 남들의 경조사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데, 혹시 나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아닐까? 이렇게 다소 생뚱맞은 생각도 했다. 그 친구도 좀 머쓱했으려나. 아마도 나였다면 십중팔구 이랬을 것이다.
“이 화상도, 참! 제 앞가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이런 걸 왜 보냈어?”
누군가는 내게 신앙을 권유했다. 평소의 삶이야 어떻든 나도 이참에 신도로 확 변신을 해봐? 그러나 이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내가 하느님이더라도 느닷없이 아첨하며 천국행을 도모하는 자를 오히려 더 미워할 것이다. 에이, 귀신들도 인간 아무개를 두고 너그럽게 묵과하겠지. 설마 당사자인 나도 싹 잊어버린 잘잘못들을 이들이 기어이 하나하나 들추며 들들 볶아대기야 하랴.
또 모모는 내게 ‘금융 치료’를 행했다. 돈? 사람은 자기 수중에 현금이 얼마쯤 있어야 힘이 난다는 것인데, 나는 일단 받아두기로 했다. 이 ‘금융치료설’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내 인정머리 없이 굴던 오라버니가 누이들의 돈을 얼렁뚱땅 챙겨서 뭘 어쩐다고? 하, 때가 오면 슬쩍 돌려줘야지. 혹여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면, 돈에도 팔자가 있으니까, 이거야 어쩔 수 없고.
지금까지 이어온 내 삶이 꼭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정말로 미련이나 후회가 없는가? 이것도 아니다. 그렇기로 억장이 막혀 주먹으로 앙가슴 두드릴 일도 없다. 과거사를 돌아보면, 나는 곳곳에서 저지른 소행들에 비해 입은 은덕이 더 많았다. 어찌 민망스럽고 고맙지 않으랴. 물론 악연이라 할 관계도 있었다. 재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이런 걸로 인생 전체가 억울할 정도는 아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무엇보다 내가 수긍할 수 있어야지. 성향이 평생 이랬다. 이 때문에 종종 고달프기도 했다. 좌절도 겪었다. 못난 것들일수록 꼭 위세로 허위를 강제하려 들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이런 작태들이 혐오스럽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문인들을 좋아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횡행하는 이 와중에 과분하게도 귀한 분들과 함께 세월을 보냈으니, 나로선 유감이 없다.
의술의 발달이 경이롭다. 그래도 인간은 죽겠으나, ‘카티(CAR-T) 치료법’의 방식과 가능성을 알아보면, 인간들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의사는 완치를 장담했다. 비록 그 수준이 내 기대와 다르다고 해도, 이게 허풍은 아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살기를 바라나? 이렇게 자문해 보면, 이것은 명백하다. 의료제도 또한 놀랍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피땀과 눈물을 흘렸으리라. 누구라도 생각이 이에 이르면, 필경 이 나라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몇몇 분들은 내게 전화를 걸려다가 망설이나 보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위로의 뜻이라도 전해야 하겠는데, 막상 나서서 뭐라고 하자니, 만사가 어색해서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렵다. 이게 바로 이런 것인데, 딴은 그렇기도 해. 생명 있는 것들에게는 깊이 모를 슬픔이 있다. 그래서 미물들도 저마다 번식하고자 하지 않나. 나 홀로 가만히 두 눈을 감아본다. 물안개 드리운 산모퉁이 절간에서 북소리가 울려와 그 여운으로 골짜기마저 그윽하다. 작금의 우리들도 이와 같이 서로서로 공명하는 중이다.
나는 몇 차례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항암제를 맞다 보면 ‘케모브레인(chemobrain)’이라는 인지 기능 장애도 일어난다는데, 혹시 나도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내가 걸린 병은 거의 완치가 되었다가도 곧잘 재발하기도 한다잖아. 언젠가 나도 한두 번쯤은 서럽게 울며 비천하게 굴지나 않을까. 침대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걱정이나 하노라니, 이웃 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가만가만 전해왔다.
‘의사는 퇴원하는 게 더 낫다고 하지만, 나는 두려워서 싫다.’
환자의 뜻은 바로 이런데, 핵심을 벗어난 언설들이 난무하다가 뒤엉킨다. 자신의 내심을 오롯이 그대로 말하자니 아무래도 터무니없고, 누가 곁에서 눈치껏 챙겨줬으면 좋겠는데, 이것도 여의치가 않다. 하기야, 뭐, 예전에 누구는 이러기도 하더라만.
“아이고야, 효자 열 명보다 악처 한 명이 더 낫다더니!”
그래도 이 환자가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또 어느 환자와 보호자는 병원의 시스템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진료실의 의사와 병실의 간호사와 원무과 직원 등등 숱한 인원들이 직능에 따라 착착 움직이는데도 노부부는 뭐가 뭔지를 몰랐어. 그래서 본인들이 아는 사람들만 줄곧 찾았다.
병실에는 일종의 마(魔)라고 할 만한 것도 끼어든다.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작자가 어디서 소식을 듣고 나타나 훈수를 뒀나 보다. 팔십 평생 내내 입에 대지도 않았던 개고기를 환자는 꼭 먹겠다며 수소문했다. 이게 몸보신에는 그만이라는데, 간병인도 이 환자를 두둔했다. 비록 불교를 믿더라도 병자는 괜찮다나 뭐라나. 그러나 개고기는 위생 상태가 의심스럽다. 간호사가 애써 어르신을 말렸다.
사람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타성도 무섭다. 심지어는 자신을 속이는 게 다반사이다. 나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고령층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질환에 걸렸으면, 자신도 실상을 깨달아 생사의 경계에서도 활달하고 자재로워야 할 터이다. 이러니까 오늘따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선시(禪詩) 「견앵화유감(見櫻花有感)」도 이렇게나 절절하게 읽히나 보다.
지난겨울 내린 눈은 꽃과 같더니(昨冬雪如花)
올봄에 피는 꽃은 눈과 같구나.(今春花如雪)
눈이나 꽃이나 다 허망한 것일 텐데(雪花共非眞)
어이하여 이 마음은 이렇게나 찢어지나.(如何心欲裂)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온다. 자신이 탁월한 인물이어도 후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할 연령인데, 하물며 그렇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탐착과 구실이 이리도 많아? 이게 내 또래의 처지이다. 그나마 문인들은 그냥 그대로 글을 읽고 쓰는 게 귀감일 수 있겠으나, 여기에도 나름의 고민거리는 있다. 인연 때문에 차마 버리지도 못한 증정본 책들은 어쩌지? 일기장이나 앨범과 같이 언젠가 짐이 될 것들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나는 미처 쓰지 못한 글들이 있다. 이미 쓴 것들도 제법 있고. 내 원고이기는 하지만, 뒤죽박죽 쌓인 것들을 보노라니, 숨이 턱 막힌다. 이것들을 언제 어떻게 엮어 책으로 내나? 한때는 나도 ‘불후의 명작’이니 ‘필생의 역작’이니 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이런 것들이 세세연년 우리들 사이에 의연히 빛나리라. 어쩌면 이게 오랜 염원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이건 너무나 유치한 발상이었어. 글도 홀로 완전할 수 없다.
수필은 건축이 아니지만 건축과 닮았다. 아무리 훌륭한 설계와 시공으로 주택을 지었더라도 사람들이 외면하면, 그곳은 이내 흉가로 변한다. 결국 그 완벽성이란 것조차도 인간들이 생기를 불어넣어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여백(餘白)이 넉넉히 있어야 사람도 숨을 쉰다. 그러므로 광대무변한 무용(無用)이야말로 지극한 경지의 유용(有用)이야. 어이쿠, 지금도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당한 학대에 시달리고 있으려나. 정치와 종교 등등 여타 분야라 한들 이와 다를 게 뭐 있으랴.
요즘 내 근심의 무게는 얼마쯤일까? 가느다란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참새 한 마리가 앉자마자 풍경이 덩달아 출렁이며 아래로 기우는 그 정도! 나는 중환자인데, 주위는 평온하다. 내가 뭐라고 떠들어도 이웃집 멍멍이가 하품하는 소리에 묻힐 거야. 그래서, 뭐가, 아쉬워? 아니야. 이런 일상사들이 태평스러워서 좋아. 이 정경에 나도 조용히 묻혀 시원한 맥주라도 마실까? 날씨도 더우니까. 아, 의사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 했다. 그래도 맥주야 두어 잔 이상을 마셔야 술이지 겨우 한 잔쯤 마시는 거야 음료수로 봐야 하지 않을까? 아하. 케, 케, 케모-브레인!
[202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