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바다
정아
똑, 똑 똑.
누군가 등을 두드린다. 뒤돌아보니, 강릉이 서 있었다. 푸른 바다를 가득 안은 채.
사실, 나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강릉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 나기 때문이다. 마치 물가에 올린 비버의 집처럼, 무너질 듯 쌓여 있는 가지들에 나무토막 하나 더 댈 필요는 없었다. 잔가지 하나일지라도 더 얹는 것은 세상을 무겁게 하는 일일 테니. 하지만 짧은 글이라면, 보름 동안 나를 품어준 강릉에게 인사 한 마디 정도는 괜찮겠지.
12월 마지막 날 이곳에 왔다.
애당초 커피 여행이었다. 강릉에는 커피로 유명한 카페가 많으니까. 그 많은 카페들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아주 오래된 어느 커피숍 이었다.
욕심이 덩굴처럼 자라는 것을 봤다.
처음에는 뷰가 근사한 카페에 가고 싶었다. 연녹색 싹이 돋는다. 인테리어까지 멋진 곳이라면 더욱 좋겠어. 덩굴손들이 내 몸에 오른다. 달콤 하고 트렌디한 음료를 마실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거야. 무성한 잎들이 나를 감싼다. 창가 자리여야 해.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웨이팅이 길면 어떡하지. 갈 곳이 너무 많아. 시간이 부족해….
이런, 이제 나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욕심은 죄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하게 자라는 하나의 생명 처럼. 그저 자랄 뿐. 먹이를 주고 있는 내가 먹이가 되고 마는 아이러니. 그 속에서 나를 빼낸 건,
강릉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의 핸드드립 커피는 꼭 맛보고 가요. 그 정성스러움을.
토박이 문우님의 애정 어린 추천이었다.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큰길을 벗어나면 으레 그렇듯이.
네비는 농로로 가라 한다.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길을 가며 마음을 졸인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농로를 벗어나니, 육교처럼 허공에 뜬 높고 좁은 길을 기어오르라 한다. 정말 다른 길은 없는 걸까. 위태로운 외나무다리 같은 길을 무사히 건너자, 드디어 목적지가 보인다. 언덕 위에 작은 카페가. 그러나 안도할 수 없었다. 건물 뒤 가파른 비탈길 아래에 있는 주차장까지 가야 하기에. 나는 꼭대기에서 핸들을 잡고 심호흡을 두어 번 한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떨어지듯 내려간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 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급한 경사를 오르내리면 상처가 나기 마련이다. 차 밑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차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간다. 마음이 긁힐 때도 이런 소리가 났으면 좋겠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이처럼 난도 높은 길은 오랜만이다. 무난하지 않은 길. 움푹 파인 누군가의 인생처럼,
아담한 미색 건물 왼편에 작은 문이 있다. 초록색 문을 통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보인다. 밤색 격자무늬 문이.
그 문을 열자 30년을 거슬러 오른 듯한,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오전 9시. 가느다란 겨울 햇살 속에, 빈티지한 작은 테이블 예닐곱 개와 기우뚱한 의자, 하얀 커튼, 클래식한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 레이스 위에 놓인 나무 액자들, 색이 엷어진 작고 고운 앤티크 찻잔들과 천장에 달린 빛바랜 노란 샹들리에가 마치, 어느 오래된 공원의 커다란 나무 옆에 놓인 손때 묻은 벤치처럼, 한자리에서 긴 세월을 고스란히 지킨 그것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달콤한 커피향이 코 끝을 쓰다듬는다.
편한 곳에 앉으세요.
이곳의 환대는 숨 막히는 요란함과 다른 고요한 관심이다. 내가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와 그들과 함께 하나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물들 때까지 기다려준다.
창밖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경치라고 부를 수 없이 너무 멀고 희미한 바다. 수평선만 남아버린 바다가 얇고 긴 띠를 두르고 있다. 아스라하다.
마치 추억처럼.
백발이 성성한 바리스타가 직접 커피를 내리는 곳
30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시작한 사람. 강릉이 커피의 도시가 되는데 초석을 다진 사람. 그는 사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은 카페에 머문다.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직접 커피를 만들어 건네기 위해.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파나마 게이샤를 주문.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걸까. 행동에는 늘 목적이 따른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싶은 걸까. 아니, 느낄 수나 있을까. 커피에는 문외한인데,
작은 로스팅 기계가 있는 방에서 그가 나온다.
30년을 한결같이 걸었을 그 길을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고 원두를 갈아 종이필터에 조심스레 털어 넣은 후, 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린다. 뜨거운 물이 스테인리스 주전자에서 하얀 김을 내며 분쇄된 커피 속으로 낙하 한다. 물에 젖은 갈색 가루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다. 오른손은 주전자를 들고 왼손은 탁상에 올리고, 마치 드리퍼를 껴안듯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서는, 물줄기를 시계방향으로 둥글게 둥글게 서서히 말아나가며 붓는다. 보글보글한 거품들이 가루 위로 올라온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 같은, 그의 세심한 모습을 나는 숨죽여 지켜본다.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한겨울, 엄마가 다용도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손세탁을 하던 모습이 빨래판에 놓인 옷들은 엄마의 꼼꼼한 손질에 새하얘졌다. 보글보글 오르는 비누 거품과 하얀 연기. 쏴아~ 하는 물 뿌리는 소리. 거기서 뭐 해, 추워, 얼른 방에 들어가, 라고 하는 숨찬 목소리. 그리고 지금은 보지 못하는 젊고 예쁜 엄마의 얼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 옛날 생각이 난 이유는 왜일까.
어떤 정성스러움이 닮아서 일까.
똑, 똑, 똑.
드리퍼를 통과한, 유리 서버 안으로 떨어지는 커피에서는 빗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얼굴 옆에 뚫린 검고 깊은 두 개의 구멍을, 귀를 열어젖힌다. 떨어지는 방울들은 마치 어린 짐승의 눈물처럼 맑은 동그라미다. 영그는 소리를 들으며 또 다른 생각에 잠긴다. 지구가 태어난 후로 물의 양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흘린 모든 눈물은 강에게로 흘러, 결국 바다에게로 간 것일까. 얼마쯤은 하늘로 올라 구름이 되어 다시 비로 내렸겠지. 운이 좋았다면 그리운 네 몸에 몇 방울쯤은 떨어져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운이 좋았다면 그대 마음에까지 가닿았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다시 너의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면, 한 번쯤이라도 그랬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비가 오는 날 네가 그리운 이유이다. 내가 슬픈 이유이다. 그리고 내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가 떠오른 걸까.
커피가 나온다.
오래된 잔에 담긴 커피는 향이 세월만큼 진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어눌한 후각세포와 혀 속 미뢰는 메뉴판에 쓰인 설명 같은, '꽃향기와 과일 향, 특이한 신맛'의 섬세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잔잔한 감동이 있다. 묵직한 것이 가슴을 채워 촉촉하게 눈으로 차오른다. 땅속에 있는 추억을 빨아올려 잎을 피우는 나무처럼 모두 다 떨어져 버렸다고 느꼈던 낙엽들이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떠나간 이별이 내 주머니 안에 고이 있음을 느낀다. 만지작거리자, 눈물 같은 것에 촉촉하게 적셔진다. 커피를 마시며, 그리운 사람들이 모두 떠올라 버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파나마 게이샤에 대한 내 마음의 메뉴판에 이런 글귀를 적어야 할 것 같다. '+ 어린 날의 비누 향, 첫사랑의 맛, 시간 너머 잊혀진 기억들'이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문 옆 작은 의자에 그가 앉아 있다. 커피를 내려준 바리스타가. 그는 스피커에서 흐르는 뉴에이지풍의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좌우로 흔든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그를 따라 시간도 흐른다.
하얀 머리와 주름진 얼굴, 노란색과 갈색이 섞인 부드러운 스웨터를 입고 흐르는 시간.
흔들흔들.
"나는 그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평생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의 모습.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 그 길에서 무던히도 흔들렸을 그가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든다. 그래. 흔들려도 좋아. 흔들려도 되는 거야. 흔들리며 걷다 보면 나중에는 이렇게 스스로 흔들 수도 있는 거야. 마치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험한 길은 그가 걸어온 시간에 대한 암시 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바라보는 내 모든 시간도 온화하게 흔들린다.
조급한 마음이 묘하게 누그러진다. 딱딱한 것이 갈려져 고운 가루가 되듯 내 안의 무엇인가 부서진다. 파도처럼, 혹은 빗물처럼. 무엇인가가 내게서 찬찬히 떨어져 나온다. 욕심 이런 것들이. 나의 첫날이 그렇게 내려지고 있었다.
보름 살기를 시작하면 언젠가 돌아가야 할 날이 온다. 마치 우리 삶처럼. 떠나야 할 시간에 도착한다. 만일 일 년이 하루라면, 나는 며칠 살기를 하러 이 별에 온 것일까. 그의 옆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한다.
문을 열자, 들어갈 때 보지 못한 글귀가 벽에 붙어 있다.
'커피 한잔은 150ml입니다. 그 작은 잔에 담는 것은 커피만은 아닙니다. 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떠오른 이유가. 그가 건넨 사랑에 내 추억이 공명했구나.
그러고 보니, 헤이, 카페 보헤미안. 나는 강릉의 모든 커피를 다 마신게로구나. 지난 30년 동안 내려진 모든 커피를.
그 후로 나의 보름이 얼마나 따뜻했을지, 얼마나 많은 파도와 속삭이고 많은 햇빛 속을 거닐었을지, 얼마나 많은 바람의 냄새를 맡고, 많은 별을 맛보았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오감이 내려지는 동안, 강릉은 나의 보름을 서걱 먹어버렸다. 나는 내년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또 눈물을 흘릴 테고, 그것은 다시 바다로 흘러갈 테니.
바다가 추억처럼 먼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리운 사람들을 온통 불러내 실컷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