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의 새 역사를 쓴 ‘보석’, 울산 문수 경기장
부산에서 울산으로 들어오는 국도 7호선. 울산의 시가지 입구인 무거동에 다다르면 차창 밖으로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모습의 건물을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첨탑이 모여 하늘을 향하는 듯한 경기장 지붕의 모습은 유난히도 인상적이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울산문수축구경기장은 울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울산 시가지의 초입구에서 바라보는 문수경기장의 모습은 마치 울산이라는 도시의 개선문과 같은 느낌을 준다.
문수축구경기장은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울산시의 상징 중 하나다. 간결하고 역동적인 느낌의 경기장 외형은 산업수도 울산의 힘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의 현장으로서 울산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문수 경기장을 칭하는 애칭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별명은 ‘빅 크라운’이다. 문수경기장 개장에 맞추어 경기장 애칭 공모를 통해 지어낸 별칭이다. ‘거대한 왕관’이라는 뜻의 이 별칭은 수십개의 지지대구조물이 하늘로 향해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특히 야간경기를 맞아 경기장 지붕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조명장식을 본다면 ‘빅 크라운’이라는 별칭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또 하나의 별명은 ‘호랑이 굴’이다. 울산현대를 상징하는 맹수, 호랑이의 집이라는 뜻으로 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별칭이다. 분명 외형상의 연관성은 높지 않지만 울산현대의 홈구장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는 역시 최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울산을 응원하는 이가 아닐지라도 K-리그의 많은 팬들은 국내 최고의 경기장으로 울산 문수 경기장을 꼽는다. 축구 전용구장으로 가지는 시야도 일품이고 사방향 빈틈이 없는 관중석의 구조도 경기에 집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평이다.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이 바로 경기장 주변 체육공원의 환경이다. 경기장 바로 옆에 위치한 옥동저수지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 환경학습 체험장과 각종 공연을 펼칠 수 있는 호반광장 등은 문수경기장 자체 못지않게 매력적인 요소. 문수 경기장의 가치 역시 주변의 자연환경이 있기에 더욱 빛날 수 있다.
역사적인 개장. 월드컵 경기장의 첫 테이프를 끊다.
“정말 떨렸습니다. 1년 뒤 월드컵 경기가 치러질 이 웅장한 축구경기장에 첫 발을 디딜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것 같은 관중석, 그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꿈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울산현대의 전설로 자리매김한 역사의 증인, 김현석은 문수구장 개장경기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2001년 4월 28일. 새천년의 첫 월드컵 개최를 약 14개월 앞둔 그 날, 대한민국 땅의 모든 시선은 공업수도 울산을 집중했다. 대한민국 최초 월드컵 개최 경기장 개장. 이른바 ‘빅 크라운’이라 불리는 울산 문수 월드컵 경기장은 ‘세계축구계의 보석’이 되어 환하게 빛났다.
의미 깊은 첫 시작을 앞둔 경기장 주변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들떠보였다. 스산하기만 했던 경기장의 안팎에는 각종 기념 장식과 플랜카드가 어지러이 나부꼈고 여러 개막 행사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들의 발걸음은 쉴 새 없이 분주했다. 새로이 울산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빅 크라운’의 장관을 보기 위해 모여든 많은 이들의 표정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선물을 바라보는 것 마냥 기대감이 가득했다.
충분히 그럴 필요가 있었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최고의 스포츠 축제 월드컵, 그 화려한 ‘꿈의 향연’이 펼쳐질 축구 전용구장. 대한민국 10개의 개최도시 중 가장 먼저 그 화려한 무대의 장막을 걷어 올린 곳, 바로 ‘울산 문수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경기 전, 본부석 출입문 외곽에서 열린 공식 개장식에는 김대중 前대통령을 비롯해 김한길 前문화관광부 장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피터 벨라판 AFC 사무총장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 참석해 이 날 행사의 비중을 입증했다. 외부 행사가 끝난 뒤 경기장 VIP석에 자리한 김대중 前대통령은 “문수경기장이 제일 먼저 개장함으로써 울산의 월드컵은 이미 시작됐다”며 “감동이 가득 찬 이 경기장은 전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될 것”이라며 문수구장 시대의 막을 올렸다.
이어 현대무용 퍼포먼스, 어린이 매스게임, 성악공연과 교향악단 연주 등 개장을 기념하는 여러 문화행사가 펼쳐졌고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4만이 넘는 월드컵 경기장의 위용과 그라운드위에서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행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울산현대와 보타포고. 역사적인 첫 경기.
하지만 문수경기장은 무엇보다 축구전용경기장이었다. 여러 화려한 행사들 가운데서도 개장식의 메인이벤트는 다름 아닌 축구경기일 수밖에 없었다. 뜻 깊은 개장 기념경기의 주인공은 울산연고 축구클럽인 울산현대 호랑이. 오랜 시간동안 자신들의 홈구장이 될 경기장의 첫 테이프를 울산현대가 끊게 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개막 경기의 초대 손님은 브라질의 명문 클럽인 보타포고. 손쉽게 울산의 승리를 점치기에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가린샤, 베베토 등이 바로 이 클럽 출신이었고 울산에서 활약했던 도도, 활약 중인 레안드롱 역시 보타포고를 거쳤다.) 아니나 다를까? 브라질에서 건너온 곡예사들은 그네들 특유의 재능을 펼쳐 보이며 울산선수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울산 선수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비록 경기의 흐름은 상대에 내 주었지만 마지막 자물쇠만은 끝까지 사수하며 일격을 노렸다. 그리고 후반전,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골이 터졌다. 울산 황승주의 발끝에서 나온 페널티킥 골이었다. 황승주는 문수경기장 첫 골의 주인공이됐다.
“솔직히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만지 않은 상대가 분명했거든요. 하지만 경기를 하다 보니 그 팀들이 시차적응이 덜 되었는지, 아니면 본래 기량이 그 정도였는지 한 번 해 볼만 하더라구요. 이기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김현석 코치曰)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친선경기답지 않게 후반 이후에는 경기가 다소 거칠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보타포고의 플라비오는 거친 몸싸움 끝에 퇴장을 당했고 후반 종료직전 투입된 최철우는 투입과 동시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경기의 승자가 되기 위한 선수들의 욕심이 뜨거웠던 것이었을 뿐. 경기내용이 화목하지 못했다고 딱히 비난할 거리는 될 수 없었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했지만 경기 후 포타포고의 클레멘테감독은 “정말 최고의 경기장이다. 브라질에서도 이런 경기장은 흔치 않다. 이 경기장은 세계축구계의 보석 같은 존재다.”라며 문수경기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산의 김정남 감독 역시 “15년 만에 다시 월드컵에 출전한 기분이다. 이제 관중들의 최고의 시설에서 축구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뜻 깊다.”며 소감을 밝혔다.
시공, 컨페더레이션스컵
울산광역시가 월드컵 개최도시로 확정된 때는 1997년 12월 29일 이었다. 첫 번째로 발표한 7개 도시의 이름에 울산이 있을 정도로 울산의 월드컵 유치는 적극적이었고 그 가능성이 높았었다. 개최지로 선정된 지 1년 만인 1998년 12월 18일에 시공에 착수했다. 사실 부지조성공사는 그 이전에 진행되었다. 지금 울산 문수경기장이 자리 잡고 있는 자리는 당시 전혀 개발이 되지 않은 야산부지. 월드컵 개최 유무와 상관없이 체육시설건립을 목적으로 한 부지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고 월드컵 유치 확정 이후 발 빠르게 경기장 건설에 나선 것이었다.
사실 울산문수경기장의 당초 완공 예상날짜는 2001년 8월 17일이었다. 하지만 울산이 대구, 수원과 함께 2001컨페더레이션스컵의 개최도시로 선정되면서 공사기간을 4개월 단축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국내 월드컵 경기장 중 최초개장이라는 목표도 이와 함께 수립되었고 그렇게 치른 개장행사의 날짜가 2001년 4월 28일 이었다.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장경기를 치른 당일 일부 좌석에 빗물이 새며 경기장 지붕마감에 결함을 드러냈고 미디어석의 통제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곧 개장행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했고 약 한달 후에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완벽한 모습으로 치러냈다.
월드컵을 정확히 1년 앞둔 2001년 5월 30일 개막된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울산은 조별예선 두 경기와 3-4위전 등 총 세 경기를 치러냈다. 그 가운데 6월 1일 문수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의 일전은 울산축구팬들의 감동을 적신 명승부였다. 후반 11분 황선홍의 멋진 헤딩골에도 불구하고 후반 35분, 동점골을 내주며 승리가 사라지는 듯 했지만 후반 종료직전, 전반전에 입은 코뼈 부상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발휘하던 유상철이 결국 결승헤딩골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월드컵, 감동의 순간들.
아쉽게도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울산 문수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친 기록은 없다. 히딩크호가 2002년 월드컵에서 밟아나간 여러 개의 경기장들이 그야말로 ‘역사’와 ‘전설’의 장소로 남아있게 된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는 울산시민이나 문수경기장 입장에서 꽤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당시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마저 울산을 빗나가 버린 것은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 울산 문수경기장에서는 총 세 차례의 경기가 열렸다. 6월 1일과 3일에 각각 조별예선 A조 우루과이와 덴마크, C조 브라질과 터키의 일전이 펼쳐졌고 6월 21일에는 8강전 독일과 미국의 경기가 열렸다. (만약 대한민국이 D조 2위로 조별예선을 통과했다면 바로 문수경기장에서 8강전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당시 대표팀의 전력수준은 그 이상이었다.) 비록 많은 경기 수는 아니었지만 월드컵 기간 내내 그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물론 그 열기의 근원은 대표팀의 믿을 수 없는 선전이었다. 울산에 경기가 없더라도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문수구장 옆 호반광장은 붉은 옷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급기야 스페인과의 8강전에는 경기장을 개방해 뜨거운 월드컵 응원 열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없는 날에도 문수경기장 주변을 중심으로 각종 월드컵 문화행사를 개최해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공업도시의 특성상 외국인의 방문이 드문 울산에 있어서 외국과의 많은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월드컵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 경기가 있는 날에는 문수구장을 중심으로 많은 울산시민과 외국인 팬들이 섞어 서로의 모습과 문화, 열정을 공유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네들의 존재를, 그들은 울산의 존재를 새롭게 알 수 있었다.
K-리그의 호랑이 굴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해 국내에 새로이 지어진 10개의 월드컵 경기장 가운데 월드컵 이전에 K-리그 경기가 펼쳐진 곳은 울산과, 수원, 대전 단 세 곳뿐. 그 세 곳의 경기장 중에서도 가장 먼저 K-리그와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울산 문수경기장. 울산현대의 안방인 호랑이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7월 11일 울산과 포항과의 일전을 시작으로 월드컵 경기장의 K리그 시대는 시작되었다. 그 이후 2001년 8월 19일, 수원월드컵 경기장이 곧 문수경기장의 뒤를 이어 K-리그 경기를 치러냈고 대전 월드컵 경기장은 시험형식으로 10월 21일, 2001시즌 단 한 경기를 유치했다.
<사진출처 - 울산광역시>
울산현대가 이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동구 남외동의 공설운동장의 시설은 사실 문수경기장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울산현대의 오랜 역사가 스며들어 있는 장소였지만 굳이 새로이 개장한 ‘축구전용경기장’을 놔두고 공설운동장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사용할 맛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하지만 예상치 않았던 문제로 잠시 공설운동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잔디 양육에 문제가 생겨 잔디에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해졌고 2001년 9월과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는 다시 공설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러야 했다.
월드컵 이후, 문수경기장은 본격적으로 호랑이굴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2001시즌 김정남 감독의 영입과 함께 본격적인 팀 리빌딩의 작업을 해나가던 울산이었고 때 마침 새로운 구장과 함께 그 작업을 진행해나갈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2002년부터 다시 울산은 K-리그 강자의 면모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 가운데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흔적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유비 유상철이 J리그 가시와 레이솔과의 계약을 마치고 다시 울산으로 컴백했다. 당시 유상철은 (마지막 라운드 8경기를 앞두고) ‘매 경기 골을 넣어 팀을 우승시키겠다.’라는 다소 허구에 가까운 복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유상철의 그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부산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울산은 정말 8연승을 내달리며 선수 성남을 위협했다. 그 8경기에서 유상철은 9골을 터트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비록 승점 2점차이로 우승컵은 성남에 내주었지만 시즌 막바지에 보여준 울산의 놀라운 분전은 월드컵 이후 K-리그를 외면했던 많은 팬들이 다시금 문수구장으로 발길을 향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부산과의 2002시즌 마지막 경기, 문수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29,208명이었다.
2003 시즌, 울산은 다시 한 번 8연승의 고공행진을 기록한다. 그 중심에는 현재진행형의 전설, 이천수가 있었다. 5월 21일 수원전을 시작으로 울산이 8연승을 하는 동안 이천수는 6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 사이에서 ‘K-리그 사기유닛’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천수의 득점행진이 더욱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매 경기 득점을 터트릴 때 마다 선보인 속옷 세레모니때문. 이천수의 연속골이 이어지자 팬들과 언론은 ‘이천수의 다음 메시지가 무엇일까?’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이천수는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연속득점행진을 이어가며 ‘K-리그 사랑’을 바라는 속옷 세레모니를 이어갔다. 그리고 울산현대의 연승행진과 자신의 연속득점이 마감된 7월 9일 포항전(0:0무승부)을 마지막으로 이천수는 한국인 1호 프리메라리가라는 칭호아래 레알 소시에다드로 화려한 이적을 했다.
문수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이후, 울산현대는 완벽한 팀 리빌딩에 성공하면서 K-리그 강팀의 면모를 되찾았다. 하지만 유난히도 우승컵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2002시즌과 2003시즌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고 2004시즌에는 통합순위 1위에도 불구하고 포항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며 다시금 우승문턱에서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하지만 2005년, 울산은 극적인 드라마를 쓰며 문수구장에서 화려한 우승의 팡파레를 울릴 수 있었다. 전북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3:2로 거둔 역전승을 통해 극적으로 플레이오프에 합류한 뒤, 성남을 꺽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그리고 2005년 12월 4일, 울산은 1차전 원정경기의 대승(5:1)을 바탕으로 인천을 떨쳐내며 바로 자신들의 안방인 ‘호랑이 굴’에서 9년만의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비극, 그러나...
2006년 10월 18일 저녁. 안타깝게도 문수경기장에서는 한편의 비극이 펼쳐졌다. 호랑이굴의 주인, 울산현대가 AFC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전북에 1:4로 완패를 당하며 아시아 챔피언의 꿈을 접게 된 것. 울산이 문수경기장에서 네 골을 실점한 것은 2001년 10월 20일 K-리그 부산전 이후 정확하게 5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사 항상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슬픈 비극 다음에 맞이하는 기쁨은 그 느낌이 배가되는 법이다. 아직 문수경기장은 지금껏 만들어 온 역사보다 앞으로 만들어나갈 역사가 더 많은 장소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 대부분의 주인공은 울산현대가 될 것이다. 언제가 될 지 확신할 수 없지만 문수경기장은 다시 한 번 울산 호랑이들이 외치는 포효의 장소로, 지울 수 없는 K-리그의 역사가 새겨지는 장소로 거듭날 것이다.
첫댓글 나~ 저 보타보고랑 할때 개장식때 있었소~!! 그때 관중 ㄷㄷㄷ 울산이 패널트킥으로 1:0 승리!!!ㅋㅋㅋㅋ
산토스 아니였나요..??? 아닌가..?
보타포고와의 사진 ㄷㄷㄷ
보타포고전사진 짱이다 !!! 여기서 보니까 또 색다르구나 !!!
울산문수구장 벌써 5살이 넘었네 2001년 보타포고전때 경기장보고 여기가 정말 한국인가 했는데 그땐 저렇게 큰 전용구장이 없었던때라;
역시..울산.. 넘 자랑스러워ㅠ
옥동 저수지 이름 나왔다! 옥동 제가 살았던 곳~ 신기하네요!!!! 문수경기장 짱!!!
외부는 모르겠지만.. 정말 내부는.... ㄷㄷㄷㄷ 멋지죠^^ 아...AFC4강... 수비집중력이 아쉬움..ㅜㅡ..
경기장이 카리스마가 있어요 문수경기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