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순공주(義順公主)의 본명은 이애숙(李愛淑) 본관은 전주 이씨 성종의 6남인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의 손자 금림군 이개윤과 어머니 문화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 딸이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청나라의 구왕
(九王 : 청태조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이 조선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다.
사신의 일원으로 따라온 정명수(鄭命壽)는
조선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조선의 상황을 청나라에게 자세히 밀고해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은 인물로 조선에 도착하자 청나라의 구왕과 조선 공주와의 혼인을 하자고 요구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지 14년이 지난 상황에서 조선 왕실은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효종의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義順公主 : 15살)로 책봉을 하고 청나라로 시집을 보내면서 역관 5명,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 시녀 16명, 유모, 몸종, 수모, 의녀등과 함께 비단등 많은 호수품을 딸려서 보냈다.
당시 효종의 슬하에는 숙신공주(15살), 숙안공주 (14살), 숙명공주(10살), 숙휘공주(9살), 숙정공주 (6살), 숙경공주(3살) 등 6명의 공주가 있는데 효종은 자신의 딸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기 싫었다.
1650년 10월 1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출발을 하자 효종은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가서 송별을 하고 문무백관은 홍제원까지 따라 가고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을 호행사(護行使)로 삼고 대사성 이행진을 부사로 삼고 친 오빠 이준과 이수가 의순공주를 수행하고 청나라까지 따라갔다.
구왕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계실(繼室)로 맞이하기 위해서 군사 5만 명을 대동하고 산해관 연산까지 마중을 나와서 혼례를 올리고 신혼 초야를 치루었다.
구왕과 혼례를 올린 의순공주는 외모가 예쁘지 못해서 구왕으로 부터 큰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1651년 12월 구왕은 역모죄로 사살되고 구왕의 많은 부인들은 왕족과 장군들에게 분배되면서 의순공주도 도르곤의 조카이자 부하 장수였던 친왕 보로(博洛)에게 분배되고 재가했지만 보로 역시 1652년 2월 사망하자 의순공주는 과부가되고 홀로 지냈다.
1656년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은 사은사 겸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는데 딸 의순공주가 과부로 지내고 있자 청나라 세조 순치황제에게 딸을 돌려달라 고 청했다.순치황제는 의순공주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효종에게 보내는 칙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의순공주가 미망인으로 종친의 사저에 머물고 지내면서 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졌으니 측은하게 여긴지 오래 되었는데 아비인 이개윤이 딸을 돌려 달라고 주청하니 더욱 안쓰럽고 딱하게 여기며 조선의 사신과 함께 귀국시켜 일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니 조선 국왕은 이를 따르라.는 칙서를 내렸다.
효종은 청나라 순치황제의 칙서를 받고는 호조에 명을 내리기를 의순공주에게 매달 쌀을 내려서 평생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의순공주는 오랑캐에게 시집을 갔고 오랑캐인 남편이 죽은 후에도 수절하지 않고 바로 재가까지 했다고 비난을 하면서 귀국한지 몇일이 지난 5월 1일 사헌부는 무엄하게 순치황제 에게 의순공주를 돌려달라는 무례를 범하고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데려왔다고 금림군 이개윤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해 5월 10일 사간원에서 또 탄핵하기를 금림군 이개윤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 딸을 데리고 왔다고 탄핵을 했는데 파직으로는 부족하니 삭탈관직을 시키고 도성 밖으로 쫓아내라고 하자 효종은 몇번 거절을 하다가 이를 윤허하고 의순공주 친아버지 이개윤은 그날 도성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의순공주는 정식으로 공주로 책봉의 교지를 내린 것이 아니라 공주로 일컬어졌을 뿐으로 칭호를 삭탈시키고 이개윤의 딸 또는 환향녀
(還鄕女)로 격하시켰다.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돌아온지 6년 만인 1662년 8월 18일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리에서 28살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의순공주가 졸하자 현종은 의순공주를 불쌍히 여겨서 장례식을 치루는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하사하고 명복을 빌었다.
의순공주의 묘는 족두리 묘라고 하는데 묘는 그녀가 살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의 천보산 기슭에 있는데 의정부시 금오동 주민들은 정주당(定州堂) 놀이 보존회를 이어오면서 의순공주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안녕과 지역 주민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매년 음력 3월 길일을 잡아서 의숙공주의 대제를 지내고 정주당 놀이를 이어오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가던 도중에 평안도 정주에서 수행원들이 잠시 쉬고있을 때 병자호란 때 조선을 짖밟은 오랑캐에게 몸을 허락할수 없다고 벼랑에서 강물로 투신해서 죽자 의순공주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의순공주가 쓰고있던 족두리만 찾아서 족두리로 가묘를 쓰고 장사를 지냈다고 의순공주의 묘를 ''족두리 묘"라고 부른다.
정주당 놀이의 정주(定州)는 의순공주의 어머니가 딸이 죽은 정주를 바라보며서 딸의 명복을 빌은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