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설교”
{ 믿음과 사랑 }
(요한일서 4:7~12)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내 인생을 인도하실 때 왜 쉬운 길은 다 놔두시고 이렇게 힘들게 돌아가게 하시는지 푸념하며 자조하며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철없는 아이들의 물불 못 가리는 사랑이 아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며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만들어 내며 결실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무엇인가를 목적하고 계시는 사랑입니다.
항상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 사랑의 깊이와 높이 폭을 아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목적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가진 것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드렸기 때문에 우릴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내야지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세상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뼈 속까지 이해관계에 익숙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티격태격하다가 부모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해서 “나중에 다 갚으면 될거 아냐!” 이건 할 소리가 아닙니다.
이 말보다 무례하고, 부모를 욕 되게 하며, 부모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부모의 자녀사랑은 사랑의 관계인데 세상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들어온 겁니다.
부모와 자녀가 사는 동네는 여기는 세상과는 다른 동네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지나가다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았습니다.
대번에 “남의 발을 왜 밟어! 눈이 있어 없어! 상처났으니까 치료비청구!” 입니다.
여기는 법과 산술과 이해관계의 세상입니다.
여기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는 자녀가 부모의 발을 밟으면 “어쩌다가 눈치도 없이 내 발은 니 발밑에 있었대냐... 미안하다! 너 혹 발 삐지는 않았니!” 자기가 밟혀서 아픈 거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요즘은 하도 이상한 세상이 되어놔서 부모자녀사이도 다 세상의 이해관계가 들어와 있음을 보지만 본래 여기는 계산하고 따지고 정산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죗값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다 안고 가는 겁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책임을 다 자기가 떠 안는 겁니다.
사람은 만 3세 전에 모든 게 다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지능, 정서, 인지능력, 공감력 등등이 90% 이상이 이때 만들어 집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때 자기의 모든 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적으로도 목사가 하는 일이 성도들에게 이걸 알려줘야 하는 소임이 있다고 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고 새 생명이 부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리는 사역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죽으셔서 우리의 신분과 운명과 존재가 그때 다 결정됐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39편 16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벌써 내가 결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시간이 뒤로 흐른 겁니다. 이미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시고 오늘이란 시간 속으로 보내어졌습니다.
신비합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고 쫓을 수 없으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묘막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오기 전에 당신이 처음보터 마지막 까지 다 끝내놓으십니다.
이게 우리 장로교의 예정론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말씀처럼 모든 일은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든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그 분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떨어지고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찌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나하고는 상관없어”, “하나님이 아무개는 분명히 사랑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아닌 것 같애!”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와서 뭐라 유혹하냐면 “너 그거 먹으면 안 죽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너희들 몰래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다는 거예요.
뭔가를 감추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니들이 생각을 한 번 해봐라.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너희에게 이렇게 지상낙원의 에덴동산을 지어주시고 동서사방에 맛난 것으로 가득하게 하시겠냐! 지금 마귀가 뭘 유혹하는 거냐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를 세상의 이해관계로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대책을 세워야지 도망가든지 하나님 같이 되든지 ...
여름 한 철 강아지에게 왜 맛난 것 가득 주는 거죠? 강아지가 생각하길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제가 어릴 때 동네 공터에 아저씨들이 모여 매달아 놓은 것 멀리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땐 그랬지!” 라는 거 있습니다.
비약이 좀 심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속이 있거나 감추고 계시는 게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거나 유용성의 존재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이 모든 자리의 바탕에 사랑이 있지 유용성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해봤는데 안 되니까 예수라도 믿어보고 기도라도 해보자!” 라는 식의 내 필요를 쫓는 유용성으로 신앙과 기도를 가져가지 말고 모든 삶의 이런 시간, 저런 시간,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찾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뭔가 좀 격이 다르고 고급하고 질적이며 내용이 있는 신앙이 되어야지 “시간이든 돈이든 갖다 바치면 따따블로 주시고 안 바치면 안주시더라!”라는 샤머니즘식 신앙에만 머물러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갖다 바치고 안 바치고의 세상 이해관계의 법칙에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보다 더 우리 편이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정말 그렇구나!
살아보니 정말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내편이시더라!
나보다 더 날 사랑하시고 내 상각보다 더 가까이 계시더라!”
의 고백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ㅡ김주환 목사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