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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노라마 같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노동·사회사 새 지평 열어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톰슨이 1980년 반핵시위에서 연설하고 있다. 톰슨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의 생산·저장·사용 금지를 주장한 반핵운동가이기도 했다.
2015년 영국 출판협회와 도서협회 등은 온라인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책 20권을 선정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해 플라톤의 <국가>,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전집,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선정된 책이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1924~1993)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English Working Class)이었다. 1963년에 발표된 학술 저작이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얼마나 문제적인 책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한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째, 톰슨은 방대한 사료 분석에 기반해 1780년에서 1832년에 이르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한 그는 노동사와 사회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둘째, 시인이기도 했던 톰슨은 당시 노동자들의 일과 여가, 의식과 종교, 기쁨과 고통을 생생히 재현함으로써 정지된 역사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를 선보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성공한 사람들만이 기억된다. 가망없는 일, 패배한 주의·주장, 그리고 패배자들은 잊혀지고 만다. 나는 가난한 양말제조공, 러다이트운동에 가담한 전모공, ‘시대에 뒤떨어진’ 수직공, ‘유토피아적’ 장인 등과 아울러, 심지어는 꼬임에 빠진 죠우애너 싸우스컷의 추종자까지도 후손들의 지나친 멸시에서 구해내려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구절을 읽은 다음 밑줄을 그어두거나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 까닭은 현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은 바로 패배한 이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주체는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이며, 이 민중의 삶과 경험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게 역사학의 본령이지 않을까?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바로 이런 질문에 당당하게 응답한 책이다.
■영국 노동계급 형성의 역사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3부로 이뤄져 있다.
제1부 ‘자유의 나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성장한 민중적 급진주의 운동을 다양한 갈래에서 추적하고,
제2부 ‘아담에 대한 저주’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착취와 억압 등 노동자들의 다양한 경험과 노동규율을 주목한다.
제3부 ‘노동계급의 등장’은 선거운동, 노동조합운동, 러다이트운동, 오웬주의운동, 선거법 개정 투쟁 등을 통해 노동자들이 같은 이들과의 동질성과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을 갖는 계급의식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톰슨이 파악한 ‘계급’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해 가는 역사적 집합체다. 그에게 계급이란 ‘구조’나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 현상’, 다시 말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문화적 구성체다. 이러한 계급 이해는 생산관계로부터 계급을 도출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계급의 기능적 속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성향의 이론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었다. 톰슨이 <이론의 빈곤>(1978)에서 인간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등한시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발표한 이후 톰슨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영국 민중에 대한 연구에 주력해 <휘그파와 사냥꾼들>(1975)이라는 저작을 내놓았다. 또 평화운동에 뛰어들어 반핵운동가로 활동했다. 초기 노동자 교육에서 후기 반핵운동에 이르기까지 톰슨은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보여준 진보적 역사학자였다.
■21세기 노동의 미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출간과 함께 서구 학계 안과 밖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노동계급 형성으로 나가는 역동적인 역사를 톰슨이 생생히 재구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톰슨 자신의 주장을 인용하면, 사료가 역사가를 통해 진실에 아주 가까운 사실을 말하는 경지에 도달한 저작이다. 이 책은 계급 형성에 대한 톰슨 특유의 이론적 주장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감성을 뒤흔드는 당대 노동계급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책의 내용에 대한 토론은 경험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에서 모두 진행됐다. 먼저 경험적 측면에서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시기를 1830년대로 본 것은 예외적인 견해다. 톰슨과 함께 전후 영국 역사학을 주도한 에릭 홉스봄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1880년대 이후 20년 동안에 이뤄졌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영국에서 자본주의 산업화가 본격화된 게 19세기 중반 이후라는 점에서 홉스봄의 주장이 더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론적 측면에서 톰슨의 계급 이해는 양면성을 갖는다. 구조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계급론에 맞서 톰슨이 제시한 자원주의적이고 의지론적인 계급론은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가 갖는 역동성을 고려할 때 정태적인 계급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톰슨의 과도한 자원주의적 이론화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구조적 강제를 과소평가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의 역사인 동시에 노동의 역사다. 21세기 현재의 시점에서 노동은 일대 전환에 놓여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볼 수 있듯, 노동 내부의 불평등은 증대해 왔다. 또 ‘알파고의 충격’에서 볼 수 있듯, 정보사회의 진전은 노동 없는 사회를 강화시킨다. 노동의 변화를 고려하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다소 낡은 책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 문제의 중심에 노동자의 구체적인 경험이 놓여 있다는 톰슨의 주장은 노동의 미래를 대처하는 데 무엇이 출발점이 돼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유보 없는 존중일 것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2000년에 나종일(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서양사학 전공 교수들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다. 원본에는 없는 ‘용어 해설’ ‘1750~1850년 연표’ ‘1800년 무렵의 브리튼’과 ‘1810년 무렵의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지도를 덧붙인 훌륭한 번역이다.
■한국의 공돌이·공순이는 어떻게 ‘노동자’란 이름으로 일어섰을까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한국사회 노동계급의 역사를 분석한 대표적인 저작은 구해근(미국 하와이대 사회학과 교수)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2001)이다.
구해근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들에 관한, 즉 피와 땀으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수백만명의 남녀 노동자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노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노동을 생산요소 또는 비교우위의 요소로만 파악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다. 이 점에 주목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한국의 제1세대 노동자들이 어떻게 근대적 노동세계에 적응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노동경험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를 분석한다.
이 책에서 구해근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공돌이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이다.
이에 구해근은 10여년간 공장 노동자, 노조 활동가, 노동문제 전문가들과의 비공식 면접과 국내외 자료 및 연구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역동적인 과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한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노동자들이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생산체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에 대한 분석이 하나라면, 그들이 노동자로서의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과 공유된 이해에 기초한 연대감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분석이 다른 하나다. 신광영(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진 이 저작은 2003년 미국사회학회가 수여하는 아시아 부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