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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왕권 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광종은 집권 후 7년동안을 정치적 기반 조성을 위한 모색기로 보낸다. 이 기간동안 그는
<정관정요> 등의 책을 통해 정치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한편, 대외정책과 국내 정책
에 있어 안정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한다. 또한 불교의 융성을 통하여 민심을 안정시키
고, 균여의 성상융화사상을 기반으로 대호족들의 불교적 기반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정국 안정책은 개혁을 위한 일종의 ‘터 다지기’ 차원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터 다지기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그는 새로운 정치적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대대적인
사회.제도적 개혁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켜 고려를 왕권 중심의 강
력한 중앙집권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광종의 정치개혁에대한 욕망을 뒷받침하고 현실화시킨 사람은 쌍기였다. 후주의 관료출신인
그는 광종에게 고려사회 전체가 일시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해 주
었다.
쌍기의 등용 이후 광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개혁작업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대호족들의 경
제적,무력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
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실시된 정책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였다.
그리고 노비안검법(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검사하여 원상태로 되돌려 줌)과 과거제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 광종은 백관의 관복을 제정하여 왕의 위엄을 되살리고, 신하들간의 서
열관계를 분명히 한다.
노비안검법과 개혁바람
노비안검법이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민이었던 사람을 노비에서 해방시켜주는 일
종의 노비해방볍이다. 광종 7년(956년)에 실시된 이 법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
으켰는데,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지만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호족들
은 이의 시행을 막기 위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노비안검법에 대한 호족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호족들에게 노비는 곧 경제력의 상징
이자 힘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족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광종을 압박하였고, 심
지어는 전대 왕들의 처족들은 물론이고 광종의왕후인 대목왕후까지 이 일에 가세하였다.
하지만 광종은 결코 의지를 꺾지 않았다. 32세의 혈기왕성한 그는 왕권 확립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비안검법의 실시는 미룰 수 없는 대과제였다.
노비의 역사와 그들의 이용 현황을 살펴보면 광종이 이처럼 노비의 수를 대폭 줄이려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비제도의 역사는 매우 길다, 노비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우리민족의 가장 오랜 국가로서 평양을 중심
으로 요동지역까지 뻩힌 나라)의 팔조금법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년경에는 중국인 1천5백 명이 벌목하러 왔다가 잡혀서 노비가 되었다
는 기록도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범법자,채무자,국빈자, 등이 노비가 되었다.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이 기간에는 특히 전쟁포로가 주된 노비 공급원이었다.
이들 노비는 주로 국가기관에 배속되거나 참전하여 공을 세운 장수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따라 노비는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로 분류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도 삼국시대와 다름없이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으며, 통일신라 말기의
어수선함 때문에 고려초에는 공노비는 대폭 줄고 사노비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
다.
고려 건국의 핵심세력인 지방호족들은 전쟁에서 세운 공이나 건국에 힘을 보탠 공로로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이들 노비들은 대개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거나, 채무자나 극빈자
들이었다. 호족들은 이들을 농사 및 가사에 동원하였으며, 때론 사병(私兵)으로 이용하기도 했
다. 특히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호족들은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
에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노비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던 까닭에 노비의 증가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
다. 게다가 호족들은 사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장정 노비와 양인 여자의 결혼을 강요하
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는 양천교혼(양인과 천민이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만약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그 자녀들은 노비로 전락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
성 노비와 양인 여자를 결혼시키면 노비의 숫자는 늘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노린 고려초의 호족들은 고의적으로 양천교혼을 강요하여 노비의 수를 늘렸고,
이는 곧 양인의 숫자를 현저하게 줄임으로써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노비는 호족들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사노비의 증가는 반란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광종에게는 사노비의 수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노비안검법(노비들을 어루만져주고 풀어줌)은 노비의 증가에 의해 발생하는 이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이와 비슷한 정책이 태조대에도 마련된
적이 있었지만 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중도에 정책을 변경해야만 했다. 이는 태조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광종은 달랐다. 광종은 이미 7년동안의 민심안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호족들과 싸울 만한 정치적 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이다.
956년 왕명으로 노비안검법이 공포되자 고려의 통일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이 모두 양인으로 회복되었다.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노비 스스
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기만 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양인으로 회복하는 길이 간단하였던 만큼 삼국시대부터 노비로 살아온 사람들을 제
외하고는 대다수가 노비에서 해방되어 양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대호족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공신전을 경작하는 대가로 노비로부터 받던 세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고, 사병의 수도 격감하였다.
호족의 입지가 약해진 반면,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병졸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집권적 체제 확립의기반이 마련되었다.
일종의 노비해방법인 노비안검법의 공포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극빈한 양인들 역시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고, 신진관료나 무
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대호족들만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시대적 대세와 광종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노비안검법의 시행이 가져온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노비로 있던 자가 자신의 옛주인
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 또한 광종 근위세력과
호족세력간의 충돌로 인해 정계의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노비안
검법이 가져다 준 국가적 이익에 비하면 개혁의 과도기에 흔히 뒤따르는 ‘옥의 티’에 불과했
다. 하지만 이 ‘옥의 티’를 빌미로 호족들은 노비안검법 철폐를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경종대
에 다시 비대해진 그들의 힘에 밀려 제6대 왕 성종은 노비환천법(노비로 다시 되돌리는 법)으
로 양인으로 회복된 대부분의 사람들을 노비로 환천시키고 만다.
쌍기의 등용과 과거제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지 2년 만에 광종은 또 하나의 개혁정책을 공포한다. 두 번째 개혁정
책은 ‘과거제’ 실시였다. 노비안검법이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과거제는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정치구조 개혁안이었다. 즉, 고려
건국 이후 호족 중심의 공신들에 의해 주도되던 조정에 과거를 거친 신진관료들을 등장시킴으
로써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려는 혁명적 시도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쌍기의 건의로 이뤄졌다. 쌍기는 후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후주의 태조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대리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이기 때문
에 쌍기는 과거제도에 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당시 후주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려가 처해 있는 입장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후주의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
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쌍기는 그 개혁과정에서 과거에 관한 실무를 맡았던 인
물이다.
광종은 후주의 개혁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도 후주를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에는 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
주의 2대 왕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 연호를 사
용하자 후주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국왕에 봉하는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검교태사로
봉하여 고려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를 보내왔다.
당시 책봉사는 장작감 설문우였고, 쌍기는 그를 따라 함께 왔다,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온
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광종 쪽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955년에 대상 왕륭이 주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마 이때 광종은 주나라의 인재를 초빙하라는 밀명을 내린 듯하다. 왕
륭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의 이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했을 것이다.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
쩌면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와병을 핑계하여 환국하지 않고 있
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과 대면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에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드디어 광종과 대면하게 된다. 쌍기
를 만난 광종은 그의 계획적인 성향과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후주 사람 쌍기는 고려조정에 전격 등용한다.묘하게도 쌍기가 등용된 956
년(광종 7년)에 첫 번째 개혁안인 노비안검법이 공포된다.노비안검법 마련에 쌍기가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다. 따라서 고려의 개혁작업은 쌍기의 등용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쌍기는 등용 당시 전격적으로 원보의 관직에 오른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광종은 오히려 그들 다시 한림학사로 승격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
무를 관장하게 한다.그리고 958년(광종 9년)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주관하는
관직)로 임명하고 시, 부(賦),송(頌), 책(茦)으로써 진사 갑과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卜業)
과에 2명을 선발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역사상 가장 최초로 실시한 과거시험이었으며, 최초로
진사 갑과에 합격한 사람은 최섬 외 1인이었다.
이때 실시한 과거는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한 것이다. 과거에는 문과에 제술(製述,글짓는
것)과 명경(明經),유학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 있었고, 그 외에 잡과로 의복(醫卜.
의학과 역학), 지리((음양풍수설), 율학,서학,산학,삼례(三禮, 주례,의례.예기를 시험과목으로 하
는 것), 삼전(三傳,춘추의 주해서인 좌전.공양전.곡량전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과거), 하론(何論,
제목으로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등이 있었다. 과거 응시자 중 이 과목들에서 등위에 든 자들
에게 출신(出身,벼슬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가 실시된 지 2년 뒤인 960년에 시,부,송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964년
에 또 시.부,송 및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쳤다. 이때 특이한 것은 시무책을 삽입한 점인데,
이는 하론의 한 형태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론에 대해 기술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사실을 통해 개혁에 걸맞는 인사에 대한 광종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966년,972년 973년에도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았다.
광종은 과거제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워지고 학풍이 일어나 문치적 관료체제가 갖춰지
길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시험으로 고려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
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늘어나고, 충과 효를 최고의 행동 윤리로 생각하는 유교적 관료
들이 조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 바탕은 단순히 광종의 과거제 도입에 의해서 형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신분제 제약이 많던 신라시대에도 최치원 등의 육두품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신문왕이 국학을 설립하고(682년)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788) 유학을 진작시켜 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광종에 의해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
았다면 시험에 의해서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국학-통일신라시대의 고등교유기관이다.신라 삼국통일후 국학을 세워서 오경(서경,시경,역경,
예기 춘추)과 그 중에서도 논어(공자 말씀을 제자들이 역음)와 효경(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효
도에 관해서 기록한 책)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교육을 실시했다.
*독서삼품과-원성왕 때 9년간의 국학을 마친 자에게 시험을 보아 3등급의 나눠 관등을 매기
고 그에 따라 관직에 임용하는 제도.다만,이때의 시험은 전적으로 시험결과에 따라 관리를 등
용하는 것이 아니라,관리등용에 성적은 단지 참고하는 형식이었기에 본격적으로 과거제도를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과거제 시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쌍기는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다. 과거제가 실시된 이듬해인 957년에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들였고, 광종은 쌍철을 좌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
또한 쌍씨 부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용하였다.
최승로는 이 일에 대하여 강력하게 광종을 비판하고 있다.광종의 지나친 귀화인 임용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
국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광종이 귀화인들을 중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내
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데 조정은 거의 그들에 의해 장악당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호족들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
를 메웠다.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은 내국 신하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
기로 했다. 내국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이었다. 후에 거란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찾아오는 서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그래서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뺏길 바에야 미리 집을 바치는 것
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이에 광종은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
을 깨닫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특별한 대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광종은 집권
내내 귀화인들을 위주로 정치를 펼쳤으며, 이에 호족들이 반발하자 가혹한 숙청작업을 벌여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광종의 공포정치는 그의 빛나는 업적인 과거제 실시마저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말았다.
‘재주 없는 자가 부당하게 등용되고, 차례도 없이 벼슬에 뛰어올라 1년도 못되어 재상이 되곤
하였다’는 최승로의 악평이 당시 호족들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순간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선발해서 일정수준이상의 관직에 등용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고위관직에 올라가기는 쉽다. 그러나 그사람이 진정한 능력과 재주를 세밀히 안다고 할 수 없
다. 만약 그가 별 자격미달인 인물이거나 잘못된 국가관으로 정치를 그르친다면, 국가에 크나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마치 서필이 주장하는 이유도 일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상황과 똑 같다.
공복의 제정과 절대왕권
과거제 실시 2년 후인 960년 광종은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한다. 956년에 설문우가 고려
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광종이 960년에 관복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의 일련의 개혁정책으로 호족들
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엔 중국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다.조광윤이 송을 일으켜 맹위를 떨치는 반
면 후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959년에 후주의 시어로 있던 쌍철이 갑자기 고려로 내
왕하여 고려 신하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맹주가 사라지고 혼란이 가속화하자 광종은 스스로 황제로 군립하기를 원했다. 말
하자면 중원에만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에도 황제가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자 했
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후 과거제를 도입하여 호족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궁극적인
목적도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959년에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인 다음. 이듬해 3
월 지체없이 관복제도를 확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호족들의 반발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
만 호족들은 광종에 대항할 만큼 힘이 강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의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은 확정되지 못했다.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흩뜨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 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
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했다.
관복을 네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과거
왕조시대에 임금이 임장하는,나라의 정치를 의논, 집행하는 곳)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
관복을 제정한 광종은 곧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개칭한다. 또한 ‘준풍’이라는 독자적
인 연호를 공포한다. 이는 곧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ㄹ 중국의
황제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권력자임을 모든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
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의 절대권력에 도전하게 되고,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한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간다. 광종 집권 후반기의
많은 호족들의 죽음은 절대왕권을 유지하려는 광종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4,광종의 무자비한 공포정치와 숙청되는 호족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광종은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960년(광종11년) 권신의 역모에 대한 고변으로부터 광종의 공포정치는 시작됐다. 평농서사
권신은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던 것이다.
당시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면서 스스로 황제
의 위상을 갖추고자 했다. 이는 곧 절대왕정(왕의 권한이 절대적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대신들 중에는 광종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은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의 고급관리였다. 준홍은 혜종원년
에 세워진 정토사의 법경대사 비문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충주의 호족이었다 또한 왕동은
왕씨 성을 가진 것으로 보아 태조와 의가족관계를 맺은 공신의 후손일 것이다. 따라서 왕동
과 준홍은 당시 조정의 핵심인물로 볼 수 있다.
광종은 쌍기의 등용 이래 중국 남북조 출신의 귀화인이나 후주의 관료출신들을 파격적인 대
우를 하며 끌어들였다. 노비안검법 실시 이후 호족들은 광종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때문에
광종은 귀화인들을 이용하여 호족들을 경계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광종
의 귀화인 중용정책과 개혁에 불만이 많았는데, 특히 대호족 출신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광종
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선대 왕의 처족이거나 광종의 외가였기 때문에 왕
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광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호족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평농서
사 권신의 고변은 바로 이때 일어났다. 고변의 내용은 준홍과 왕동이 중심이 된 일단의 무리
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은 왕동과 준홍이 내쫓긴 것으로 기
록하고 있다. 역모죄를 저지른 그들이 죽지 않고 쫓겨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이 사실이 왕동과 준홍의 배후세력이 막강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들은
쫓아낼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대 왕들의 처족세력
이자 호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모에 가담한 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내쫓겼을 것이라
는 결론이 가능하다, <고려사>에도 왕동과 준홍을 비롯한 역모자들을 내쫓았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동, 준홍과 함께 쫓겨난 관료들은 광종의 개혁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평농서사 권신은 과거제 도입 후 등용된 신진세력일 것으로 보인다. 평농서
사(評農書史)가 어떤 일을 하는 관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명칭으로 봐서는 농업과 관련된
소임을 맡고 있는 관리일 것이다.따라서 중앙의 고급관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조정의 권신
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것으로 봐서는 광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일 공산이 크다. 따라서
왕동과 준홍의 역모에 대한 고변은 광종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일 가능성이 높다.
광종은 이 일로 대부분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집과 노비,재산을 몰수하
는 등 정적에 대한 가혹한 행위와 귀화인들에 대한 우대책으로 인해 호족들의 불만은 더욱 높
아진다.
서필 등의 강직한 신하들과 조정에 남아있던 일부 호족들은 광종의 지나친 처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종은 남아있는 호족세력을 완전히 조정에서 몰아낼 마음을 먹게 되고,
964년 여름 고려 조정은 또 다시 피비린내에 휩싸인다.
태조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수경 일가를 몰락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박수경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태조의 충직한 부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 이후에는 서경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했
다. 그의 가문은 황해도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평산박씨를 대표하며 3명의 후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왕식렴과 더불어 정종의 집권을 후원했고,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원한 공로도 있
었다.
그런데 졸지에 철퇴를 맞은 것이다. 박수경의 세 아들이 한꺼번에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
했다. 그들은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로, 큰아들 승위는 좌승, 셋째 승례는 대
상의 위치에 올라 조정 내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세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참소를 당해 죽은 것으로 봐서 역모죄로
몰린 것이 분명하다. 준홍,왕동 등과 마찬가지로 박수경으 아들들 또한 광종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고 광종에겐 그들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공신 박수경은 화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박수경 일가의 몰락 이후에도 죽음의 행진은 계속된다.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진
광종은 눈에 거슬리거나 반항의 조짐이 있는 신하들을 대부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왕족들까
지도 눈밖에 나면 가차없이 목이 달아났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심지
어는 태자 주(경종)까지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만약 이때 세자를 대신할 왕자가 있었
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공포정치시대였다.
감옥마다 사람이 넘쳐나서 임시 감옥을 설치해야 했고, 역모에 대한 고변이 줄을 이어 수많
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듣은 대부분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었다.
광종은 그들의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그러나 광종
은 자신의 총신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대접을 했다. 귀화인들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을 위해
자주 연회를 베풀고,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개혁을 통해 광종이 절대권력을 움켜진 이면에는 귀화인들의 견인차 역할과 함께 호족들의
처참한 죽음과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65년 강직하고 신임이 두터웠던 서필의 죽음이후 광종은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 동안 자신의 칼날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러 가지 민심 안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승려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았다. 왕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내심으로 가책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 죄악을 덜기 위하여 법회를 광범위
하게 가지게 되니 많은 무뢰배들이 가짜로 중이 되어 배부르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모여들었
다. 떡.쌀, 시탄 등을 가지고 왕성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일반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수없이 많
았다. 또 방생소를 많이 설치하여 부근 사원에서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왕궁에서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였다.’
이외에도 972년(광종 23년) 가을에는 대사령을 내렸고, 조정에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
하기 위해 972년, 973년, 974년에 지속적으로 과거를 실시한다. 이것은 광종이 애초부터 귀
화인으로 조정을 이끌어갈 생각이 없었음을 대변한다. 귀화인들을 통해 개혁을 완성한 다음,
과거를 거친 새로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정을 메워 다시 귀화인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
다.
따라서 광종 11년 이후 약 10년 동안 실시된 공포정치는 짧은 기간내에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희생된 호족들은 원래 광종의 지지기반이었지만,
왕권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광종연간의 세계약사
광종시대의 중국은 5대 10국시대가 종결되고 5대의 최후 왕조인 후주의 근위사령관이었던 조
광윤이 세운 송이 일어나 중원을 통일하고 차례로 남쪽지역을 평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중
추국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북쪽에는 거란의 요나라(947-1125)가 강한국가로서 자리잡고 있
다.한편 유럽에서는 동프랑크왕국의 오토1세가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교황을 도와 이탈리아왕
베렝가르오를 물리치고 교황 요한12세로부터 962년 대관식을 거쳐 신성로마제국의 초대황제
로서 등극한다.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1세(재위 969-976)는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전과를 거
두었고,서유럽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의 조카인 ‘테오파노’를 다음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오토2세와 결혼하게 했다.
첫댓글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인간들의 욕심이 자신들만이
그것을 모르고 지나갈 뿐이지요
항상, 관심 가져주시는 보챙님의
부지런함을 찬양합니다.
글을 옮겨서 쓴다는 건
내글을 쓰기보다 더욱 힘든 작업입니다
그래서 추일슬풍님 대단 합니다
읽으면서 느끼거든요 더구나 역사의
연대까지 기록하는건 세심한 작업이죠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만큼만 쓰세요
다른 분들도 간단하게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이나 후배님들도 글이 길면
미리 포기하거든요 ㅎ
우리가 살고있는 나라의 역사는
국민들이면 알고있어야 하지않을까요
내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광종실록 범위가 많아서 좀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싸복싸복 옮겨 적겠습니다.
광종실록 사람의 욕심이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