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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마태오 6,7-15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기도를 더 빨리 들어주실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 ”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청하는 어떤 것을 들어주시기 위한 준비작업처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며 주님의 기도만 바치면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며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미운 마음이 있는 상태로 기도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들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그것은 그 미워하는 마음을 긍정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암 그들은 이렇게 치유되었다”(Radical Remission: Surviving Cancer Against All Odds)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저자 캘리 터너는 의학 저널에 실린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가 자연치유 된 1,500건 이상의 근본적 치유 사례를 분석하는 한편, 전 세계 수백 명의 암 및 난치병 완치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이 포스터라는 여인은 유방암 4기, 살날이 12개월이었지만 365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자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암이 완전히 완치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자. 답을 알아낼 시간이 365일이나 남아 있어.’ 그리고 나는 매일 행복하기, 자연스러워지기, 감사하기 세 가지를 실천하자고 마음에 새겼고 매일 그것들을 연습했어요.
그 중에서 365일 동안 ‘행복하기’는 365일 동안 ‘그 순간에 존재하기’로 바뀌었네요.
이것은 화가 나거나 울고 싶거나 이불 속에 숨어 세상을 향해 나를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그냥 그렇게 했다는 걸 의미해요.
나는 정말로 그 순간에 존재했어요.”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과 영혼은 하나로 이어져있습니다.
영혼이 불안한데 몸이 건강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청하는 것은 병의 치유나 어떠한 일이 해결되는 등의 물질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은총은 영적인 세계를 통과해야 물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영적인 막힘을 뚫어주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한 환자도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요법 등을 시도하였지만, 암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용서의 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대학 교수님과 함께 용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해야 할 상대방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내재된 분노와 증오를 받아들이고 이를 떨쳐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슬픔과 아픔을 느꼈지만, 이를 극복하고, 용서의 힘으로 인해 건강한 마음과 몸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자 캘리 터너가 기적의 암 치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 ‘10가지 치유 요소’는 이러합니다.
① 식단의 근본적인 변화, ② 자신의 건강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기, ③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④ 허브와 보조제 사용, ⑤ 억눌린 감정 풀어주기, ⑥ 긍정적 감정 키우기, ⑦ 사회적 지지를 받아들이기, ⑧ 영적 연결을 강화하기, ⑨ 살아야 할 강력한 이유 찾기, 그리고 ⑩ 운동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 10가지 요소들 중에 신체와 관련된 것은 식이 요법, 보조제, 운동 세 가지뿐이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정신적⋅감정적⋅영적인 요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몸‒마음‒영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전인적 존재이며, 따라서 병의 치료에 전인적인 접근 방식이 실제로 큰 효과를 발휘함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청을 더 빨리 들어주실까요? 당연합니다.
분명 영과 물질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더 깊은 영적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세포도 호전됩니다.
이러한 감정을 갖게 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만약 내가 사면장을 주면 그 사람이 아직도 증오심이 남아서 나가서 또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라면 어떻게 그 사면장을 줄 수 있을까요? 먼저 감정의 평화가 우선입니다.
그 평화를 얻는 방법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큼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니 먼저 주님의 기도로 마음을 평화롭게 합시다.
아니 주님의 기도만 그 뜻을 마음으로 새기며 기도합시다.
그러면 청하지 않은 것도, 청했어야만 하는 것도 모두 알아서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를 좀 더 천천히 음미하며 바친다면 거기서 오는 은총이 참으로 클 것입니다!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이 오늘따라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얼마나 많은 빈말을 되풀이해왔는지 모릅니다.
따지고 보니 주제넘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의를 시작한 지가 25년이 다 되어갑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실천할 수 없는 말, 감당하기 힘든 말들을 너무나 많이 내뱉고 살아왔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구체적인 삶은 전혀 뒷받침되지 않는 제 이중적인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이토록 부끄러운 저를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작은 지침 하나를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짧고 간략하지만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한 신앙인이 어떤 지향을 갖고 기도하고, 어떤 청을 드릴 것이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 기도들 가운데 으뜸인 기도, 기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성인성녀들께서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요약입니다.” (테르툴리아노 교부)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종합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이렇게 기도하라!’고만 가르쳐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동시에 ‘이렇게 살아라!’고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제시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입술에서만 머무는 기도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적용되고 실현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 결부되고 병행되는 것이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마저 타성에 빠져 건성건성, 아무런 생각 없이 바친다면, 정말이지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기도도 좋지만, 우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좀 더 지극정성으로 바친다면, 좀 더 천천히 음미하며 바친다면 거기서 오는 은총이 참으로 클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화요일>
(2023. 2. 28. 화)(마태 6,7-15)
<기도, 주님의 기도>
우리는 ‘기도’를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만일에 그렇게만 생각하면,
주님은 늘 인간의 말에 응답만 하시는 분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가?” 라는 불평이 생깁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항상 주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셨고, 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일이 아니라 잘 듣고 응답하는 일입니다.
특히 기도는 우리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보다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응답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미신과 우상을 믿는 사람들도 간절하게,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그 ‘간절함’과 ‘정성’이 신앙인들보다 앞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면서 선행과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미신과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원을 비는 일은 잘하지만, 그냥 그것으로 그칩니다.
그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미신과 우상숭배의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을 ‘종으로 부리는 일’입니다.
미신과 우상숭배는 인간의 말을 잘 듣는 종을 찾는 헛된 일이고, ‘참 신앙’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하는 말이니 ‘빈말’이고, 자기 소원만 말하기 때문에 ‘빈말’이고,
많이 바치면 그만큼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헛된 기대를 하기 때문에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상숭배자들처럼 하느님께 ‘빈말’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이 아닌 기도, 즉 ‘참말’인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 라고 해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대로 바칠 때에만 ‘참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앙고백이고,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신앙인답게 살면서 충실하게 하느님만 섬기는 것이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7,27).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자녀의 자격을 버리는 것이고, 혹시라도 미신에 빠진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강아지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용서에 관한 기도는, 우리가 모두 하나로 일치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대한 응답이고, 하나가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셨는데, ‘용서’는 우리가 하나로 일치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기도는, 인류 구원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고 협력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에 관한 기도는 서로 사랑하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기만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유혹’과 ‘악’에 관한 기도는, 온갖 유혹과 악에서 우리를 지켜 달라는 청원기도인데,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온갖 유혹과 악에 맞서서 싸울 테니 도와달라는 청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