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이로써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려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그러나 옹졸하고 편협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찾는다(복음)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반드시 이 두 범주 안에 속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아이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압니다.
그런데 왜 많이 배운 사람들이 그 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까요?
그들의 의도와 감정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욕구는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눈이 멀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질문해 봅시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오로지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리려는 마음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하신 질문을 다시한번 기억하며,
판단의 어려움을 겪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죽이는 일인지,
내가 일상 속에서 내린 결정이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려는 것인지,
내가 살려고 이웃을 죽이려는 것인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이 두 개의 범주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죽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라면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회후원회의 한민 신부님께서는
도저히 답을 내리지 못하는 갈등상황에서 이렇게 화살기도 하신답니다.
"주님, 제 선택(결정)이 ’저의 영혼구원’ 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