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탕!” 1517년 10월 31일 독일 작센주의 신학교가 있는 소도시 비텐베르크에서 아침 공기를 가르는 난데없는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비텐베르크 신학대학 부속교회 입구였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의 한 인물이 결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분기점
그는 바로 대학에서 성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였다.
그는 당일 교회 출입문에 독일 중북부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던 가톨릭교회의 면벌부(免罰符) 판매를 무려 95개 항목으로 비판하는 글을 못질해 놓았다. 그런데 루터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사태가 그의 이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초래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로마가톨릭으로 단일화돼 있던 유럽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교파인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개신교)이 탄생했음은 물론, 세속적인 측면에서도 서양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Reformation(종교개혁)이란 단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독일 중북부 태생의 시골뜨기 신학자 루터의 도전은 유럽 사회의 판을 새롭게 짜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이런 결단을 내렸을까? 당대 유럽의 무수한 개혁가 중 왜 하필이면 독일의 루터일까? 이로 인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이후 유럽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세속 세계와 너무 근접했던 중세 교회
중세 말 이래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 및 타락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나 십자군 원정 등 중세를 관통한 역사적 흐름의 이면에서 황제권과 겨루면서 중세사회를 주름잡아온 로마가톨릭 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세속 세계와 근접해 왔다. 종교가 세상사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보니 당연히 부패가 뒤따랐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의 중심에는 예나 지금이나 물질과의 관계 설정 실패가 있었다. 중세 말에 이르면 성직 매매가 다반사로 자행됐다. 심지어 문맹자가 있을 정도로 무자격 성직자 및 평소 자신의 교구엔 얼씬조차 하지 않는 부재 성직자도 계속 늘어났다.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도 일정 금액을 교회에 납부하기만 하면 허가해주는 특면장도 거리낌 없이 남발됐다.
또 다른 문제는 만연한 유물 참배였다. 돈 많은 개인이나 권력자는 예수나 성인 관련 유물 수집에 혈안이 됐다. 일반인은 유럽 각지에 산재해 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느라 경제적으로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회의 요구사항들이 신앙의 본질을 벗어날 정도로 오용되고 있었다. 그리스도와 성인의 유물로부터 신비한 치유력이 나온다고 믿어 유물에 대한 참배가 성황을 이뤘다. 이름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의 경우,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 인파로 항시 북적댔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은 성인마다 치유 능력을 발휘하는 전문영역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안질에는 성 클레르, 치통에는 성 아폴린, 그리고 수두에는 성 욥 등이 신통하다는 낭설이 진실인 양 퍼졌다.
하지만 당시 가장 문제가 많았던 항목은 바로 ‘면벌부(indulgence)’ 판매였다. 가톨릭 신학에서 면벌이란 고해성사에 의해 죄를 용서받은 후 교황의 권위에 의해 그 죗값으로 이승과 연옥에서 받을 벌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면하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면벌부는 중세 말이나 루터 시대에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11세기 말에 십자군 원정 참여를 독려할 목적으로 시작됐다. 교황은 ‘은혜의 보물창고’(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여분의 선행을 모아놓은 창고)에서 저장된 은혜를 꺼내어 이를 필요한 신자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단 빗장이 풀리면서 그 적용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얼마 후에는 교황이 이승에서는 물론이고 연옥에서 받을 형벌의 기간마저 단축할 수 있다는 선까지 나아갔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면벌부가 점차 돈으로 거래됐다는 점이다. 14세기경부터 교황들은 성당이나 자선병원 건립 등 의미 있는 과업으로 인정되기만 하면 비용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면벌부를 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 연옥에 간 사람에게도 면벌부의 은사가 효력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승에 있는 가족들은 죽어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부모·형제의 벌을 경감 또는 면제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현세에서 돈을 지불해야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교회 대분열
이토록 극단적인 단계까지 나아간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세력 약화가 놓여 있었다. 11세기 말부터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시도된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래 중세 가톨릭교회는 서서히 그 힘이 빠져 왔다. 쇠퇴기에 접어든 가톨릭교회의 위상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5~1377)’와 이로 인해 발생한 가톨릭교회의 대분열(1377~1417)이었다. 전자는 강력한 프랑스 국왕의 후원으로 프랑스인 주교로서는 드물게 로마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당시 이탈리아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핑계로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눌러앉은 사건이었다. 이는 기원전 6세기에 유대민족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그곳에 억류된 구약의 사건에 빗대어 통상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 불린다. 설상가상으로 이후의 교황들마저 로마의 지속적인 귀환 요청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아비뇽에 머물자 이에 반감이 쌓인 로마에서는 독자적으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아비뇽 지지파와 로마 지지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다행히 1417년에 대분열 사태는 끝났으나 일단 시동이 걸린 교회의 위상 하락은 되돌리기가 어려웠다. 어떤 면에서는 1417년부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1세기 동안은 바로 로마교황청이 교회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교황들은 교황령의 확대·유지를 위해 세속 군주들과 전쟁을 벌인다든가, 무엇보다도 성 베드로 성당을 장대하게 재건축하고 화려하게 장식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과업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를 충당할 목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액을 받고 주교직을 임명하거나 급기야는 독일 지역에서 면벌부를 판매하기에 이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