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수) 이사야 7:1-16 찬송 422장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개역 개정)
-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예루살렘 침공과 아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임마누엘 징조 -
남유대에 대한 전반적인 예언을 기록한 제 1-12장 중
이사야의 소명 기사를 기록한 일종의 삽입 단락인 제 6장을 기점으로 하여
전반부 제 1-5장은 남유다의 전반적인 죄상에 대한
심판 경고와 구원 약속에 대해 기록했다.
반면 후반부 제 7-12장은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침공(B.C.734년경)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의 남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러한 중대한 위기 상황을 어리석게 열국을 의지하여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행하라는 권면을 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른 심판 경고와 구원 약속 및
메시야와 그의 왕국의 도래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이사야는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끝까지 친앗수르 정책을 폄으로 인해 결국 심판받게 되었음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종국이 어떠함을 잘 보여준다.
또 이런 인간 통치자 아하스의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메시야를 보내셔서 한번 택한 백성을
궁극적으로 반드시 구원에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평화의 메시야 왕국을 이루실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구속사의 궁극적인 주체가
여호와이시라는 신학적 주제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련 기사의 도입 부분인 1-2절은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1차 침공했을 때는 간신히 막아내었으나(1절)
다시 2차 침공을 위하여 예루살렘 부근에 집결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하스와 온 유다 백성이 심히 두려워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2절)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여러 나라들은 북방에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앗수르 제국의 위협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이에 앗수르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하여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연합군을 형성하고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앗수르 저지 운동에 함께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남유다 왕 아하스는 오히려 친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이러한 연합 운동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보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3-16절은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침입(1,2절)으로 인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있던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그 대적들의 멸망 예언을 줌으로써 그를 위로하고(3-9절)
이어 그 예언의 신빙성을 보여주기 위해
임마누엘의 징조를 준 사실(10-16절)을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을 찾아간 때는 아하스가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당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B.C.745-727)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직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왕하16:7)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대적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위기 상황을 하나님이 아닌
이방 군대 곧 앗수르 군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하는
불신앙적인 마음의 생각을 하시고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대적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고
또 임마누엘의 징조를 받고도 그 예언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임마누엘의 징조에 따르면 그 멸망이 적어도
2, 3년 후의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므로 현재 닥친 위기 상황에서
그때까지 버텨서 이겨내는 것보다 당장, 이방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결하려 한 그의 인간적인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은
필연코 불신앙적인 생각과 행동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항상 세상의 대적들과 맞서 싸워
이기겠다는 담대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요16:33; 히10:38)
그리고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임도 명심해야 한다.(요일4:18)
한편 본문의 ‘임마누엘 징조’는
아하스가 구하였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다.
이는 이 징조 속에 나타난 바 두 나라 왕의 멸망의 예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역사의 궁극적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스스로 공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임마누엘 징조’는 일차적으로는 당시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이 멸망하고
남유다는 구원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 되신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사단의 나라에 대해 영원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처녀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을 징조로 당신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심으로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알도록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가 좋을 때만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계가 좋든 나쁘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
또 자기 백성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함께 하신다.
이것은 14절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볼 때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유다가 극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직전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타락한 유다를 징계하기로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더욱이 그들이 처하게 될 극도의 고통스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할만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에도,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그 현장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기쁨의 때는 물론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고난의 순간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중에 함께 계신다.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을 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셨다.
그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셨다.
유다 백성들의 포로됨으로 인하여 유다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우상숭배자들의 조롱과 멸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나눈 고통이었다.
이렇게 바벨론까지 가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본토로 귀환하셨다(40:3)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유다 백성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
진정한 부모는 자기 자녀를 징계할지언정 버리지는 않는다.
자기 자식이 아무리 못나도 늘 그와 함께한다.
또한 자식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같이 고통스러워하며
할 수만 있으면 그 고통을 자기가 짊어지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진정한 아버지이다.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당할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소망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임마누엘!
이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