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령이 하시는 일
성령은 중생시키고 살리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조명하고 확신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위로하고 이끄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신다
성령은 내주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깨끗이 씻고 인도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확신케하며 증거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인치시고 도우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간구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보호하고 보증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열매를 맺고 은사를 주는 일을 하신다
성령의 하시는 일
성령의 사역의 본질과 종류는 그 자신의 뜻과 목적에 의해 정해진다. 어떤 일은 그의 손가락으로(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행하시고, 또 어떤 일은 그의 손을 뻗어서 행하시고, 또 어떤 일(오순절 날의 일 등)은 팔까지 걷어붙이고 행하신다. 그는 그의 본성의 필요성 때문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행하시는 것이다.
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성령의 사역은, 그것이 비록 완전하며 그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행하여지며,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은혜로운 성령의 내주하심의 면에서 성령은 성령이 함께 계신다고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
마7:22,23「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히6:4,5「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은 각기 그 본질 면에서나 그 정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성령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임하신다.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제한된 은혜만으로 역사하신다. 그런데 이 제한된 은혜는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버림받는 자들이 범하는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기에는 충분하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속에 선한 욕망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시면서도,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은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그 어느 것도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주목하라. 만약 구원을 가져온다면 이러한 감정들이 계속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라도 구원의 역사를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깨닫지 못하므로 인해 그가 받으셔야 할 영광을 없애버렸다. 그 복된 사역이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한정되었다고 결론내림으로서, 그들은 그에게 돌려야 할 찬양을 돌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귀의 자녀를 이기게 하시고, 그들로 이 땅의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악인을 지배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구절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적 경륜가운데서 만물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있으며,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다는 것이 일단 분명하므로, 그 하나님은 각기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고유한, 그리고 별개의 위치를 점유하고 계신다.
성령의 사역은 크게 구속함을 받은 자들 속에서 행하시는 그의 “특별하고도 우월한 사역”과 택함 받지 못한 자들 속에서 행하시는 그의“일반적이고도 열등한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이고도 열등한 활동의 예(例)
1) 악을 억제하는 일.
2) 선한 행동을 장려하는 일.
3) 죄를 깨닫게 하는 일.
4) 조명하게 하는 일이다.
특별한 구원 사역
택한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그들 마음속에 죄를 죄로 미워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거룩함을 거룩함으로써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면 이 필연성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설교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성경을 배포하거나 읽는 일로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은혜의 이적과 신적인 기사(wonder)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만 부패했다면(사실 오늘날 하나님에게 자신의 부패성을 배워본 일이 없는 대다수의 설교자들과 청중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들이 쉽사리 설득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선한 기질을 소유하고 있다면, 굳이 성령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발휘하셔서 그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는 것’이 그저 내가 버려진 죄인으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데 있거나, 또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거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거나, 또는 내가‘그를 나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완성된 사역에 의지하는’단 한 가지 조건만으로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내가 그 조건을 이루는 데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 없이 나의 이기심이 그 조건을 이루게 할 것이며, 나의 의지적인 결단만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반역을 굴복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그의 변화시키는 활동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성령에 의하여)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자기 보존의 본능은 너무도 강해서, 대중들로 하여금 지옥을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고행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신적 계시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은 반드시 심판의 날, 곧 그들을 만드신 분 앞에 나아가서 그들의 모든 욕망과 사상, 언행들을 낱낱이 고하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며, 그들의 마음 또한 더욱 진지해지고 냉정해진다.
이제 양심이 지금까지의 그들의 삶이 허황된 것이었음을 깨닫게만 해준다면, 그들은 기꺼이 마음을 고쳐먹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니 그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불을 피하는 길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라.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 상태를 주장하며, 그러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을’ 준비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참된 성격을 아직도 미워하며 그의 주시는 구원을 전심으로 거부하는 수많은 무리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과 죄에서 구원받기를 사모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값 주고 사신 그 거룩함을 얻기를 사모하는 중생치 못한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면서도 주이신 그에게 굴복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그의 평화를 좋아하나, 그의 ‘멍에’는 거부한다. 그러나 그 멍에가 없이는 평화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들은 그의 약속은 사모하면서도 그의 명령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제사장적인 사역에는 의지하면서 그의 왕권에는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패한 취향과 감상적인 꿈에 알 맞는 ‘그리스도’는 믿을지 모르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멸시하고 거부한다.
옛날 예수님 시대의 수많은 무리들처럼, 그들은 그가 주시는 떡과 물고기는 원하지만, 마음을 꿰뚫고, 육을 죽이고, 죄를 지적하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그들의 육신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인정하나, 그 분이 타락한 영혼의 치유자이심은 거부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혼의 삐뚫어지고 어그러진 상태를 올바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이적적인 능력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이 이다지도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현대의 기독교가 인류의 타락으로 빗어진 무시무시하고도 우주적인 결과들을 그만큼 잘못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의 어느 곳에서나, 인기 있는 전도자와 매력적인 가수를 기용하기만 하면 그 사회의 절반은 구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그만큼 널리 퍼져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해 있으며, 육적인 마음이 얼마나 무서우리 만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적은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말씀이 강단에서 거의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예레미야가 그 당시 타락한 세대를 향하여 행했던 것처럼, 심지어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처럼, 그와 같은 형태의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청중들이 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설교에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편이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령을 구하라”라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구하라는 뜻이다. 성령은 생명에 관한 일만 하신다. 따라서 생명에 관한 것만 구하면 된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중생시키고, 살리는 일을 하신다
중생시키시는 일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거룩한 행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올바른 기질이나 성향이 조금도 없다. 타락한 인간은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올바로 마음을 쓰는 것이 없고 그의 모든 의지 활동은 부패하고 죄 된 것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만일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한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이 없이도 그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참으로 완전히 타락 가운데 빠져 있으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망이 조금도 없이 오히려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롬8: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 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타락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한다(엡2:1).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엡2: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1:12,13「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담의 타락한 자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이유는?
첫째,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은혜가 혈통을 통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거룩함이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경건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도 본성적으로는 악인의 자식과 똑같이 부패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자연적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란 말은 자연적이고 부패한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어떤 본능이나 선택이나 노력으로 중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거듭나는 일에 대해서 무언가를 공헌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노력으로도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를 중생시키시는 동인(動因)과 협력하여 중생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의 마음의 경향이나 그의 의지적인 활동은 오히려 중생하는 일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셋째로, 새로운 탄생은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거듭나게 못한다. 목회자나 설교자나 기타 어떠한 사역자들의 설득이나 노력의 결과로 죄인이 거듭나게 되는 예는 결코 없다.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지혜롭다 할지라도,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거룩한 자들로 만들기 위해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코 그들이 그런 결과를 산출해내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 그리고 이 땅 위의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뜻과 노력을 합하여 죄인 한 사람을 중생시키는 데 온 정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일한 지혜와 유일한 능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다”
고전3:6,7「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새로운 탄생은 완전히 수동적이다. 곧 그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탄생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모든 마음의 거룩한 행사들-예컨대 죄에 대한 슬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 등-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 위대한 변화는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이 위대한 변화는 점진적이거나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이다. 즉 일순간에 택한 자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중생시에 성령은 참되고 새로우며 영원히 멸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하신다. 곧 ‘산 영’이었던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에게서 비롯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고전15: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새로운 창조는 최초의 창조와 똑같이 실제적인 것이면서도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최초의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원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창조였으나, 반면에 이 새로운 창조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합리적이며 책임질 줄 알면서도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로 중생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새 사람’이 된다. 그러나 똑 같은 사람이 단지 ‘새로와졌을’ 뿐이다.
“중생이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새롭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원리나 은혜의 성질이 영혼이나, 마음, 의지, 또는 사랑에 부어져서 그것을 가진 자로 하여금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활동과 영적인 순종을 실행할 마음이 일어나서 그렇게 하게 하는 새로운 기능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혼의 능력들이 영적으로 변모되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와 교제를 유지하게 되는 것뿐이다”.
중생이란 마음의 급진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거룩한 영들을 도모하고자 하는 새로운 성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곧 마음이 새롭게 되고 사랑이 고양되며, 의지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듭난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을 순수하게 영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사물들을 모두 새로운 빛 속에서 보게 되며, 또한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심령이 작용한다. 이제 하나님은 무한히 우수한 존재로 보여지게 된다.
그의 율법에 대하여는 지당함과 영적인 면을 지각하게 되어서 중심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또한 죄가 무한히 악하다는 사실을 분별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이 오래 전에 지옥에 가지 않은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러한 버려진 자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났는지 그렇지 못한 지를 판정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그를 마음의 행사와 그것이 그들의 행실에 미치는 영향 및 결과로서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 시에 생기는 궁극적인 주요 요소는 바로 마음의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엡1:4) 그 이후로 우리를 언제나 돌보시는(히12;10) 그 은혜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소유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 거룩함이 없이는“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히12:14)이기 때문이다.
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으니」
히12: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12:14「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전가시킨다든지, 변형시킨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유한한 피조물이 도저히 하나님 속에 있는 본질적인 거룩함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은 것 외에는 거룩함에 참예할 방도가 전연 없다-
“하나님을 따라(하나님을 원형으로 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으라”(엡4:24).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으라”(골3:10).
엡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3: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최초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외부로 표현하게 된다(딛3:,5).
딛3:4,5「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궁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사랑은 그의 마음속을 통하여 은밀히 흘러내렸고, 그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의 이름을 등에 지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회심할 때에 그 사랑은 드디어 겉으로 솟아나며, 사람들 속에 나타나며, 또한 그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중생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에 결코 못지않은 “지극히 크신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엡1:19,20).
엡1:19,20「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런데 그 중생의 일이 자주 반복되며, 또한 죽어가던 강도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순식간에 일어나며, 또한 연약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어 줌으로서 이루어지는 예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생의 역사 속에 있는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을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정말로 성령께서는 부드러운 회유적인 동기와 따뜻한 권유의 방법-‘사랑의 줄’(호11:4)로 끄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크나큰 위대함을 숨기시기 때문에 그의 권능이 잘못 인식되고 잘못 숭배되는 것이다.
중생의 놀라운 면은 영혼을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 생명으로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것은 무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새로운 창조이다.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 옛 창조 시에는 아무 것도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없었으나, 이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는 죄와 사단의 모든 권세가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며, 오히려 어떤 것을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겔36:26), 이리를 어린 양으로(사11:6)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어떠한 이적보다도 더 위대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그들이 그가 행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요14:12)고 말씀하셨다.
겔36: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사11: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성령께서 한 심령을 중생시키실 때에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행해질 뿐 아니라, 그의 복된 사랑도 함께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향하여 그의 은혜로운 직임을 수행하시며,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가운데,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말로 다할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곧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을 향하여 살리며, 우리로 영원하신 언약 가운데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그와 함께 지내기에 알맞도록 영적 원리들을 부어주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내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역이 우리들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하기가 쉬우며, 또한 분명히 그에게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일에 소홀하기가 쉬우며, 또한 대단히 슬프게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은혜로운 일에 대해서 그에게 감사와 존귀를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살전5:9,10「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아들의 구속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기한이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그리스도인들은 전에 타락한 죄 된 상태 속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허물과 죄로 죽어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며, 죄의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의의 생명으로 살리는 일은 바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위대하고도 숭고한 일이며, 이 일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드러난다.
성부와 성자께서 이 위대한 구원을 모든 택한 자들에게 계시하고 적용시키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므로, 성령께서는 자신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의 풍성함으로 적절한 시기에 모든 영광의 상속자들 속에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죽으신 것처럼-그의 죽으심은 단 한번만으로도 그것을 통하여 이루실 모든 계획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성령께서도 단 한 번의 활동으로 심령을 거듭나게 하며, 상태를 완전히 변화시키시므로, 중생한 사람은 그 일회적인 사역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탄생이 없이는 우리는 영적 사물과 하늘의 축복을 참되게 볼 수가 없다.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효과는 곧 거듭난 사람이 영적 사물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을 그 영적인 면으로서 귀중히 여기게 되는 일이다.
생명 샘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그의 모든 영적 삶의 샘이며, 그의 모든 은혜의 뿌리이며, 그의 속에 있는 모든 신적 원리들의 영원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새물이 되라”(요4:14).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영적 세계에만 있는 것들을 즐길 능력을 얻게 되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상태가 영원히 있게 될 상태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맞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은 중생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골1:12,13).
중생이란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며, 단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증가시킨다거나 감소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은혜와 거룩함이 그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단지 그 은혜와 거룩함을 이끌어 내어 실행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골1:12,13「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중생(重生) :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어 주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 용어가 성경에 두 번 나오나(마19:28. 딛3:5), 이와 유사한 많은 표현들이 있다(요3:3,5,7. 1:13). 중생은 인간의 죄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의 조명과 의지의 변화와 성격의 갱신을 일으킨다. 중생은 인간이 죄인 된 신분과 상태에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데 기인된다. 따라서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요1:13. 행16:14).
그리고 중생은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간이 직접 이것을 지각할 수 없고, 나타난 결과로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근본적 변화이다. 또한 중생은 즉각적 순간적으로 완성된다는 데서 성화와 구분된다. 그리고 성경은 중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한 성령의 역사로 언급한다(약1:18. 벧전1:20).
성령은 살리는 일을 하신다
사람들마다 ‘중생’이란 낱말의 적용 범위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한 가지 단순한 행위에 국한시키고, 또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이 의식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그 속에 다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정확한 사고를 하기가 어려워졌고, 또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별개의 일들을 혼동하여 상당한 혼란이 야기되어 왔다.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함으로써 사상의 혼란이 생겼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도 야기되었다. 우리는 이전에는 요한복음6:63절에서 지적된 것과 베드로전서1:23절에서 가리키는 것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요6:63절은 영적으로 죽은 심령을 ‘살리시는’ 성령의 첫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고 벧전1:23절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벧전1: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물론 ‘새로운 피조물’의 기원이 꿰뚫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되는 바이지만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곧 거듭나는 것보다 생명이 먼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적 탄생과 영적 탄생은 서로 매우 흡사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탄생을 다 지으신 분이시고, 또한 그가 육적 탄생이 영적 탄생을 예상하게 해놓으셨기 때문이다.
낳는 것은 생명의 원인도, 생명 그 자체의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다. 어린아이가 모태에서 나오기 이전에 이미 신적 ‘살리심’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심령을 살리시며 그에게 영적 생명을 주신 후에 그 생명을 가진 자가 ‘낳음을 얻으며’(약1:18),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벧전1:23).
야고보서1:18절과 베드로전서1:23절과 그 밖의 병행 구절들은 심령에게 처음으로 영적 생명을 부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생명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약1: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비추시는 일이나 깨닫게 하시는 일, 회심케 하는 일, 성화의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살리시는’ 처음 일에 있어서는 전혀 어떤 수단을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직접 활동하신다. 먼저 ‘새로운 창조’(고후5:17. 엡2:10)가 있고, 그 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게 된다.
믿음과 모든 다른 은혜들은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에게 부어지지만, 이 은혜들이 산출되는 그 생명의 원리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엡2: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살리시는 일은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이루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다. 말씀은 이때에 전해진 생명을 실제로 효력을 발생케 하기 위해서 그 후에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성령의 활동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이며, 그 활동을 통하여 영적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다. 회오, 회심, 성화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 되지만 중생의 수단은 아니다.
수단이나 도구가 하는 일은 고작 기정사실화 된 생명의 원리를 자극시키거나 또는 고무시키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더욱 명백해진다. 물질적인 음식은 육체적 성장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 생명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일 몸이 죽었다면, 빵은 수단도 도구도 될 수 없다. 지적인 진리는 지적 성장의 수단은 되나, 그것은 지적 생명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일 백치라면, 그에게는 세속적인 지식이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 영적 진리는 영적 성장의 도구가 되나, 이 경우에도 영적 생명력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에 대해서 죽어있을 경우라면, 영적 진리는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교화되지 못한 지식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중생되지 못한 의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주요 요인들 속에는 본질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생명과 힘 그 자체이다. 결국, 영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께서 아무런 수단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직접적으로 활동하셔서 죽은 자에게서 영적 생명과 능력을 주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지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중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생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오늘날 그렇게도 널리 퍼져 있는 그 이론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뿌려진‘씨’는 말씀이다. 그 씨는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씨가 순수하고 생명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이 맞지 않는 곳에서는 자라지 못했다. 땅이 좋아지기 전에는 씨가 자랄 수 없는 것이다. 비가 자주 와서 물이 풍성하고, 따사로운 햇빛으로 공급해도, 땅이 나쁘면 수확을 거둘 수 없다. 수확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먼저 토질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토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씨가 아니다.
‘이 씨를 심으면 토질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할 농부가 어디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 착오 없기 바란다.
성령께서 먼저 죽은 성령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 놓으신 후에야 비로소 말씀이 그에게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시키심으로 사람에게 생명이 전해진다고 말하고 나서, 또 한편으로 말씀이 효력을 발생케 되는 것이 바로 생명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저 추리가 맴도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말씀이 ‘믿음과 화합’(히4:2)하기 전에는 그에게 영적인 유익을 줄 수가 없다. 또한 믿음이 생명과 은혜의 원리로부터 나오지 않고서는 그것이 생길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생명의 원리가 결코 믿음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장님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에게 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하나님은 내적인 원리를 산출하시며 말씀까지도 표용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지금까지 위에서 지적한 것이 사실인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말씀의 음성 그 자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말씀 그 자체 속에 본래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실(말씀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예(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내 방의 창문 앞에 쇠로 된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늘 방이 어둡다. 태양열이 아무리 강하게 내리 쪼여도 그 벽은 그대로 서 있다. 만일 얼음 벽이면 금방 없어지고 말겠지만, 쇠는 열에 의해서 녹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태양열이 내 방을 환히 비추도록 할 방법은 없는가? 그 벽을 없애면 된다. 즉, 그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힘을 가해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하여 치명적인 죄성(罪性)이 제거되어야만 비로소 말씀이 그에게 들어가서 그를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2,23).
여기서 ‘눈’은 마음(mind)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마음(heart)의 성향도 포함하는 것이다(막7:22참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의 어두움이라는 것으로 그 마음의 악한 성향을 말씀하시며, 또한 그 어두움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성하게 하는 것,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마치 태양 광선을 비춘다고 해서 그것이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 시력을 되찿게 해줄 수 없는 것처럼, 단순히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 ‘나쁜 눈’을 고치거나, 어두움을 제거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이 고침을 받아서 ‘성하게’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하는 말씀을 청종하게 하셨다고 한다(행16:14).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의 마음을 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매우 불합리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은 성령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어떠한 매개체나 수단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 일은 말씀의 빛에 의해서 되여 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생명을 주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적 조명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성령의 첫 사역이 절대 적으로 필요하다. 마음을 어두움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의 부패와 타락성이며, 또한 그 마음이 스스로 중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서 사람들이 ‘살리심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말씀을 받고 깨닫기 위해서 먼저 살리심을 얻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24: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그를 체험적으로 아는 일이, ‘새로운 마음’이나 영적 생명이 주어지기 전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위의 말씀은 전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1:7).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마음에 전해진 신적 은혜(마음에 부여된 영적 생명)만이 영적 지식과 영적 활동에 대한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이다.“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요5;21).“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 63).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모든 신적 활동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며,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령에 의하여 시행되는 것이다. 살리심은 택한 자들 속에서 그가 하시는 첫 사역이다.
성령께서 그들을 영적 죽음의 무덤으로부터 지상의 부활로 이끄시는 것은 바로 그 초자연적인 활동에 의하여 하시는 것이다. 그 활동에 의하여 그는 은혜의 원리와 거룩함의 습관을 부어주신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심령에게 전해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 행위이다(고후5:17). 그것은 신적인 ‘솜씨’이다(엡2;10). 이 모든 용어들은 전능자의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을 창출해 낸다는 것은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피조물은 생명을 받고, 그것을 먹이고, 그것을 사용하며 발휘할 수 있으나,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는 일은 실로 놀라운 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아무런 공적도 없이 거저 받는 사랑이다. 육적 상태와 영적 상태 사이에는 어떤 중간적인 상태란 없다.
육적인 상태는 우리의 본성적인 상태요, 영적인 상태는 우리가 은혜, 즉 전능하신 성령의 순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역에 의하여 얻은 상태인 것이다. 이 살리시는 첫 사역을 우리는 전혀 지각할 수 없다. 그 일은 인간의 의식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살리시는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성령의 첫 사역은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의 자의적이며 주권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며, 그 은혜에 의하여 그 사람의 모든 기능들이 초자연적으로 혁신된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은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쥐어진 진흙과도 같이 전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살리실 때 부어주시는 생명은 그러한 사랑을 입은 자들 모두에게 언제나 동일하다. 앞으로 나올 모든 것들, 즉 잎이나 줄기나 이삭 또는 곡식알 등이 사실상 씨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열매나 결과, 행실 등으로 이후에 나타날 그 모든 은혜가 비록 초보적인 상태이긴 하지만, 마음에 심어진 은혜의 첫 원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급진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며, 또한 그 변화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심령에 찍혀 진다.“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또한 ‘새 사람’의 모든 구성 요소를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믿음의 분량이 각기 다르므로 어떤 사람들은 중생 할 때에 더 활기 있고 더 열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지각하고 깨닫는 면에 있어서는 사람들마다 상당히 차이가 있으나 그 첫 활동 자체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새로운 피조물’을 성장시키며 이 활동을 완전케 하는 면에 있어서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많으나-어떤 이들은 빨리 성장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천히 애쓰며 성장하고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한다-새로운 피조물 그 자체는 모두 동일하다.
이제 결론적으로, 성령의 살리시는 활동은 단지 심령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의 시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활동은 심령을 한 순간에 완전히 새롭게 하지는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고후4:16)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시작으로부터 그 활동은 계속되며-하나님께서 ‘때마다’(사27: 3) 물을 주시므로-완전을 향해 나아간다. 즉 마음이 완전히 깨끗하고 거룩해 지기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은 죽기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 속에서 일하시며“그의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살리심을 받은 이후에도 그 때와 똑같이 모든 올바른 뜻을 행하시는 일에 대해 성령의 권세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조명하고 확신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조명하는 일을 하신다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흑암의 상태에 있다. 자연적인 사물에 대해서 아무리 지혜롭고 박식하며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소경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심령을 새롭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영적 어두움에는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 두 가지가 있다. 외적인 어두움이란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경우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외부적인 은혜의 수단을 보내시기 전까지 존재하는 어두움을 말한다.‘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마4:16).
내적인 어두움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경우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심령 속에 은혜의 이적을 행하셔서 죽은 심령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시기 전까지 존재하는 어두움이다. 자연인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이 내적 어두움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무지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무지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적 ‘어두움’은 긍정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있는 원리인 것이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있는 ‘어두움’은 마음을 악으로 향하게 하며, 거룩함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며, 의지에 착고를 채워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을 ‘흑암의 권세‘(골1:13)이라고 한다. 그 권세는 대단히 힘있는 것이어서 그것에 속한 자들은 하나같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이다(요3:19).자연인은 그의 전 심령 속에서 안주하며 주장하는 어두움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을 영적인 방법으로 알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찬양할 수도, 섬길 수도 없다.
마음의 성향이 온통 신적 완전을 증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으로 볼 수도 없고 또 보여지지도 않는다. 육적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며, 또한 자기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 자기 사랑은 모든 애정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생명에로 살려주시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옛 마음이 없어지고 새 마음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올바른 빛으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타락한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는 성령의 살리시는 첫 역사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세상이 창조될 때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자연의 빛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영적 빛인 것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이 하나님의 빛이 마음에 비취어서, 그 앞에 전개되는 바를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그의 눈으로 주를 보게 된 것이다(욥42:5).
그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탁월하심과 그분의 절대적인 필연성, 그 분의 완전하신 충족성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
바로 이것이 영적 조명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을 일깨우거나 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의 실재와 그 본성을 체험적으로, 효과적으로 의식케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능력을 부여하여 죄의 끔찍스러움과 흉악함을 볼 수 있게 하며, “거룩한 아름다움”(시96:9)을 지각하도록 함으로서, 전심으로 그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고유한 관념들에다 영적 빛을 첨가하는 것인데, 그 빛은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므로 자연인의 능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적인 마음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것인데,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그것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고전2:9, 10).
성령께서는 일단 원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지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살리시고 난 후 그에게 조명하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이제 그에게 비추이며, 따라서 이전에 소경이었던 자가 신적으로 시력을 얻어서 그 빛을 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살리신 이후 바로 시작되어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통해 계속되며 영광 가운데서 완성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잠4:18).
이 영적 조명은 단순히 정신을 깨우치거나 영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체험적으로 효과적으로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일서2:20, 27절에서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 조명하심으로 그는 자기 파악을 하게 되며 또한 자신이 도덕적으로 문둥병자이며, 자신의 존재 중심에서부터 전적으로 타락해 있고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조명하심으로 그는, 이전에 그로 하여금 쓴 것을 단 것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믿게 했던 사단의 속임수를 간파하게 된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는다. 곧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모든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무한히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조명하심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배우게 된다. 곧 실천적인 경건의 길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모든 선한 것에 대한 그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채워야 할 텅 빈 그릇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빛이 살리심을 받은 심령 속에 비추인다. 전에는 그가 ‘어두움’이었으나, 이제 그는 “주 안에서 빛”이 된 것이다(엡5:8).
이제 그는 전에는 한때 쾌락을 느꼈던 것들이 이제는 싫어지고 지긋지긋해졌음을 느낀다. 그가 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욕망과 쾌락에 대한 호의가 잘못된 것이며, 악으로 미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들 속에서는 전혀 참된 행복과 만족을 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가 자부심을 가졌고, 또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업적이라고 여겼던 도덕적, 종교적 행위가 이제는 더러운 걸레 조각처럼 여겨진다. 전에는 참으로 부러워했던 자들이 이제는 동정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전에는 즐겁게 어울렸던 친구들이 이제는 그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 그의 전 시야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조명이란 성령께서 살리심을 받은 심령에게 신적인 것들에 대한 정확한 영적 견해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듣고 깨닫는 것은 ‘좋은 땅’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마13:23). 참된 ‘제자’ 외에는 아무도 진리를 알 수 없다(요8:31,32). 복음도 버리운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다(고후4:3).
그러나 살리심을 받은 심령에게 성령께서 조명하시면, 그는 신적 성격의 탁월함, 하나님의 율법의 영성, 그리고 전반적인 죄의 악함과 자기 자신의 악행을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게 하며,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누리고, 그것들로 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이루어져 가는”것이다(갈4:19). 신적 조명의 특징은, 첫째로, 심령에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 조명을 받은 자들은“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사단이 아무리 그의 마음에 불신앙적 사상과 무신론적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애쓴다 해도,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그리스도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든지, 성경이 단지 인간적인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생각들에 대해서도 살리심을 받고 조명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사단이 설득시키기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살아있는 실체가 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탁월하심을 나타내실수록 그는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 신적 조명은 변화시키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도 지성적으로 얻을 수 있으나 그들의 심령에 참되고 영구한 인상은 남기지 못한다. 이와 같이 신적 조명은 신적인 일들을 자연적인 지식을 갖고 탐구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신적인 것들에 대한 영적 이해는 그것들의 형상을 마음에 심어주고, 그것들을 닮아가게 하는 그런 효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이렇게 이 영적 조명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개념적 무활동적 지식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영적 조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벧전2:9)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신적 조명은 영적 보호제이다. 이 사실은 요한일서2:20절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성령의 조명은 성도들이 사단의 사자들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배교자들은 결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받은 심령들은“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않는다”(요10;5).
하나님의 택한 자는 치명적으로 ‘미혹하게’할 수 없는 것이다(마24:24). 이 귀중한 진리는 요한일서2;27절에서도 볼 수 있다. 성령께서 ‘영원토록’ 그리스도인과 함께 거하시므로(요14:16), 그가 받은 ‘기름부음’이 그의 속에 ‘거하며’, 따라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리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성령은 죄를 확신시키는 일을 하신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어서 그에게서 참된 거룩함의 기미를 조금도 찿아 볼 수 없으나 그러면서도 그는 이성적인 존재이며, 또한 그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선과 악의 차이를 지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를 분별하여 느낄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롬1:32, 2:15).
성령의 일반적 활동 아래서,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상태로부터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보통 “죄를 통회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비록 그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분명하고도 강한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 생각과 느낌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날에, 즉 그들 자신의 양심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될 그날에 겪게 될 생각과 느낌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종류 상으로는 차이가 없다(롬3:19).
그러나 위에 언급한 죄를 통회함은 결코 마음을 변화시킨다든지 마음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유죄 의식은 아무리 분명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성령에 의하여 살리심을 받은 자들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 가지 엄숙한 사실은 이 땅에 있을 때에 죄에 대해 뜨거운 통회가 있었고, 일깨워진 양심을 통하여 자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도 했으며, 영원한 불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느꼈었고, 또한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그의 법도를 짓밟는 자들에게 벌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느끼기도 했던 수많은 남녀들이 지금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
이 불쌍한 심령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그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며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는 자들의 먹이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불을 피하는 수단으로서만 바라보며, 그들은-그들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초자역적인 사역을 통하여-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테스트를 받고 점검 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정직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정직한 마음’은 진실을 알기를 소원한다. ‘정직한’ 마음은 가장(假裝)을 싫어한다. ‘정직한’ 마음은 속임 당하는 것을 혐오한다. ‘정직한’ 마음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가장 엄중한 진단을 환영한다. 정직한 마음은 겸손하며 순종하는 마음이요, 교만하거나 뻔뻔스러우며 자긍(自肯)하는 마음이 아니다.
이런 정직한 마음을 참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적은 것이다. 성령께서 특별하신 그의 구원케 하시는 통회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형벌보다는 오히려 죄 그 자체에 더 관여하도록 하신다. 타락한 인간들은 이런 식의 마음 씀씀이를 대단히 싫어한다. 성령께서 그의 참으로 놀라우신 능력으로서, 살리심 받은 사람의 마음에 죄에 대한 정당한 생각을 일으키시고, 그 생각을 계속하게 하신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체험한 자는,“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외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책망하시며, “그의 죄를 그 앞에 차례로 베푸시기”(시50:21) 때문이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돌이키든지, 그는 강제로 그 죄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서 거짓은 제거시킬 수 있을지언정, 마음에 박힌 하나님의 ‘살’(욥6:4)을 제거시킬 수는 없다.
이제 그는 자신의 죄가 머리카락 수자 보다 도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녕“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붊이라”(사40:7). 성령께서는 살리심을 받고 조명하심을 받은 심령에게 죄의 죄악성을 인식케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더러운 시냇물을 깨끗하게 해줄 순수한 밝은 샘물을 저버렸으며, 말할 수 없이 거룩하신 창조주보다 더러운 피조물을 더 사랑했고, 영광의 주님보다 천한 육욕을 더 좋아했다는 사실을 보고 느끼도록 하신다.
성령께서는 살리심을 받은 심령에게 자신의 죄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신다. 이제 그는 그의 모든 생각과 욕망, 그리고 상상들이 부패하고 사악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괴로움을 느껴본 일이 없는 수천 가지의 일들에 대해 이제 양심이 그를 추궁하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서 그는 자신이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발시킨 동기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움 자체도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확신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요구하시는 바를 제시하신다.
이제 성령을 통하여 죄가 드러나며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악하며 쓰라린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과 자신이 전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신은 악하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가장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반적인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확신과 중생한 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특별한 활동에서 나오는 확신 사이의 대조점들은 이것 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확신은 일반적으로 가볍고 불확실하며 지속기간도 짧다.
그 확신은 곧 가라앉고 마는 갑작스러운 공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후자의 확신은 깊고 신랄하며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일생을 통하여 자주 반복되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감정적인 것임에 반하여 후자는 판단에 의거한 것이다. 전자는 명료성과 효율성이 감퇴되지만, 후자는 그 강도(强度)와 힘이 날로 성장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가장 악한 것으로 여기나, 중생한 자들은 죄를 가장 악한 것으로 본다. 전자는 양심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을 예감하고 그것에 대해 신음하지만, 후자는 그들에게 거룩함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성령께서 이 확신케 하시는 특별하신 사역 가운데 사용하시는 위대한 도구는 곧 율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법도이며, 또한 확신이란 율법에 의하여 양심에 비취어진 죄에 대한 공식적인 인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다음의 구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모든 율법의 목적은 곧 행하여야 할 바를 가지고 오성에 인상을 주어서 결국 인간이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고”(롬7:7)고 외쳤다.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 속에서 심판하시니 죄인에게는 징벌이 요구될 것이다.엄숙한 심판이 이렇게 시작된다. 곧 율법이 선고하고, 양심은 그 죄악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선한 분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동시에 심하게 모욕을 당하신 분으로서 눈썹을 찌푸리고 계신다.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와 선을 대적하여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느끼게 되며, 또한 그의 악한 행위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에야말로 그는“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히4:12)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숨겨진 일들이 드러나며, 잊혀진 행위가 다시 기억난다. 눈으로 범한 죄와 입술로 범한 죄, 하나님에 대한 죄와 타인을 향한 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죄와 하여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죄, 무지로 범한 죄와 고범죄가 차례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 죄인은 어떠한 방법을 취하던지 모든 것이 그에게 불리하게 되어 버렸다.
그의 죄악성이 수없이 드러나 있으므로, 떨면서 그 밑으로 잠길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신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밖에 없다. 즉, 다시 말해서 자신을 선고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확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에 체험되는 것이냐(가끔 그렇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니면 그보다 나중에 체험되는 것이냐 하는 것은, 또한 죄인이 얼마 동안이나 종의 영으로 남아 있느냐(롬8:15)하는 것은, 또한 그가 자신의 처절함과 파멸을 어느 정도나 느끼며, 좌절의 수렁에 얼마나 깊이 빠지느냐 하는 것은 모두 경우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므로 여기서도 그는 자신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신다. 살리심을 받은 영혼은 바로 여기에까지 가게 된다. 곧 하나님의 율법의 영성을 보며, 그 선고를 듣고, 자신의 경우가 스스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소망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율법이라는 예리한 칼을 사용하여 양심을 찔러 쪼개며 죄의 극심한 죄악성을 선포하신다.
이러한 신적 활동을 통하여 굳은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의 사악함이 드러나며, 그 마음의 패역과 부패성이 나타나며,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참으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며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속을 살필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렘17:9).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위로하고, 이끄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위로하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구원사역은 점진적으로 진보적인 것이다. 곧 복음이라는 정당한 방법론과 순서를 통해서 심령을 한 단계 한 단계씩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자기 부정과 겸손이 없이는 구원 얻게 하는 믿음, 즉 주 예수에 대한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2)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구주를 맞아들이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는 것은 바로 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유죄 의식이 없이는 회개도 양심의 가책도 있을 수 없다. 유죄 의식이 없는 죄인의 눈에서는 한 번도 참된 회개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유죄의식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확신이란 다름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성과 지각에 비추어 주신 빛을 마음(heart)과 양심에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행2:37).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신적 살리심이 없었다면 조명하심도 있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순서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것이다. 곧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이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비추시며, 확신을 통하여 그 빛을 그들의 양심에 적용시키시고, 죄에 대한 통회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찢고 상하게 하시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의지를 갖게 하시는 것이다.
이 몇 가지 단계들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확실히 구분되기도 한다. 예컨대 성인이 되어 회심한 자들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에게서보다 이 단계들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또한 경건한 교육을 받은 자들보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리에서 이끌림을 받은 자들에게서 더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뚜렷이 잘 나타나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회심 이후에는-타락과 배반의 시기 이후에는-그에 따르는 마음의 행사가 일어나는 법이다. 각 사람마다 분명히 나타나는 정도가 다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통상적으로 그 누구에게나 이 순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죄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사람은 이 세상의 것들을 싫어하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깊은 흥미를 영원히 잃게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만큼 좋은 것이 없게 된다.
죄를 확신하게 된 자는 그 빛에 의하여 결국 자기 스스로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서 거룩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살리심을 얻은 영혼은 그 빛에 의해서, 그리스도라는 분과 그의 피 없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그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보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고통에 싸인 영혼은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방법을 알려주신다.
첫째로, 그는 ‘가시’로 죄인의 길을 막으시며(호2:6), 죄의 확신이라는 뾰죽한 살로 양심을 찌르신다.
둘째로, 그는 모든 슬픔을 잊고 전에 사모하던 것들에게서 또 다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모든 심사와 싸우신다(호2:7).
셋째로, 그는 사람의 영적인 벌거벗음을 드러내시고 그 모든 향락을 그치게 하신다(호2:10,11).
넷째로, 그는 그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사(호2:14),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가 완전히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나서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에, 즉 그 비참한 죄인이 자신에게 전혀 구원이 없다고 느낄 그 때에, 그를 위하여 비록 ‘아골 골짜기’ 나 ‘고통’ 가운데서라도 ‘소망의 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오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성령께서는 확신을 얻은 죄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생각을 심어 주심으로서 그의 쇠약해진 마음으로 비참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
성령께서는 가장 어두움에 처한 때에라도 죄를 통회하는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비밀리에 그를 지탱시키시며, 최소한 순간적이나마 쉴 틈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현실적으로 체험하기 이전에, 마음에 평안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 그의 의식적인 몫이 되기 전에, 사람은 먼저 자신이 구원을 향하여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달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소유케’ 해주는 그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죄의 확신을 가진 죄인은 자신의 죄악성에 짓눌리고 영원한 멸망에 대한 공포도 가득 찬 나머지, 복음이 계시하는 그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완전한 칭의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고서,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눈물과 기도로써 하나님께 열납 되도록 애쓴다.
그러나 율법의 높은 요구점들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부패성을 잘 알게 되면, 그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완전한 멸망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그의 고뇌에 찬 탄식이 된다.
빛과 도움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찿으면, 그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믿음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만일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 그저 요한복음 3:16절의 내용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누구나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스스로 참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성경의 어느 구절의 내용에 대해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보다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한 영혼이 신적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본성적인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되면, 그는 어떠한 피조물의 믿음의 행위로도,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으로도, 어느 본문의 글자에만 기대는 것으로도 용서와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그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지(엡2:8,9) 피조물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골2:12)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죄인 스스로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구원 얻도록 되어 있다면, 그를 하나님에게로 이끄신 그 하나님이(사45:22), 그에게 믿으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요일3:23) 반드시 그에게 믿음을 부어주시리라는 사실(엡6:23)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그 분명하고도 강력한 말씀,
곧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그의 성령으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는 말씀을 참으로 믿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진심으로 주를 신뢰하고, 어떤 것에도 근심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지만, 성령께서 그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전에는 그들이 선한 일을 어떻게 행할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롬7:18), 이와 마찬가지로 살리심을 받고 죄의 확신을 얻은 영혼들의 한 가지 지고한 소망은 곧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기까지 그들은 전혀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도, 복음에 계시되어 있는 바를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역사가 절반 밖에 행해지지 않은 때에라도 그 영혼을 그대로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성령’(롬8:2)이시며 무지한 자를 가르치시는 ‘진리의 영’(고후4:13)도 되시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통회하는 죄인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시는가?
그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충분하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심으로써, 또한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에게 오는 자는 주께서 기꺼이 맞아주신다는 사실을 확신케 함으로써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어떤 선한 자격을 추구하는 일도, 어떤 의로운 행위도, 어떠한 고행도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게 하는 데에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는 죄의 확신이나 깊은 회개,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에 대한 의식 등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믿으시는 요건이 아니라, 그것들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영적 비참성을 의식하는 것이며, 우리를 무조건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움직여서 우리를 구원케 하도록 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키는 수단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악하고 버림받고 멸망에 처한 우리의 상태 그대로를 사용하사 그것을 움직여서 그리스도에게 가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죄인들만을 받아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부터 마지막 끝맺음에 이르기까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은 것이다”(욘2:9). 그 구원을 작정하시는 성부와, 피로 값 주고 그 구원을 사시는 성자와,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이끄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서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성경에서 상당히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인데도-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두드러진다-슬프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은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고, 그 결과로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상태이다.
성령께서 영혼 속에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이고 특별하신 역사는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외형뿐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살아있다는 이름이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사색적인 개념을 조금 넘어서는 것이고, 그저 말씀을 문자로만 알고, 어떤 사람이나 파에 가입하는 것이며, 지식에 의거하지 않은 불타는 정열이며, 어떤 특정한 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투쟁하거나 그들 자신의 특정한 표어들에 함께 동조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다스리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지도 않는다-그들은 그것들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한 번도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의 대상이 되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이 단호하고도 사람을 겸손케 하는 사실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무시되고 있으며, 그래서 설교자들과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면, 그들은 즉시 이렇게 외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고, 그렇게 되면 설교가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 주님의 말씀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대의 사상에 빠져있고, 교만한 육신을 가지고 으르렁거리면서 그 말씀을 즉시 배척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렇게도 많은 곳에서 성령이 ‘억눌림을 당하며’, 그의 구원의 능력이 거의 증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관념들이나 현대의 상황을 볼 때에, 우리는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진리도 성경도 복음도 아니요,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그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깨끗한 지성과 올바른 마음이 있다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진리를 곧바로 분별하며, 또한 분별한 후에도 그대로 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들 가운데로 내려올 때에는 지지자들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불리한 가운데서 인간의 마음에 내려온다.
감정과 습관, 취향, 아니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오류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므로, 인
간이 판단을 통하여 진리를 수긍한다 하드라도(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인간의 장애 때문에 오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는 순수한 본성들 속에서는 힘이 있으나, 부패한 자들 속에서는 잘못인 것이다.
“성령은 물론 진리를, 죄인을 회심케 하고 신자를 성화시키는 도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고 해도 진리가 단순히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해 능력이 있다는 주장과는 좀 거리가 먼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진리를 넘어서서 진리의 원천이시며 진리를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복음을 위해 봉사하는 사도들이 있으나, 그 사역들이‘단지 말씀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성령과 그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 회개가 일어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니 누구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전에, “저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가서”(눅7:17)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은 저가(세례 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15)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령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단순히 전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림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아무리 신실하고 성경적인 설교에 의해서도 그런 일을 일으킬 수는 없다. 반드시 죄인의 마음을 열어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영혼을 얻고’, ‘개인적인 일’, 곧 설교를 하는 데만 열성적인 나머지, 주 앞에 엎드려서 성령께서 우리 앞에 임하셔서 씨앗을 위한 토양을 준비시켜 주시도록 단호하고도 끈질기게 부르짖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어 내는 회심자들은 ‘인공의’ 회심자들에 불과하게 되며, 따라서 그들의 그 이후의 삶은 성령께서 거하시지도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도 않는 삶이라는 것이 보는 눈이 있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게 된다.
거룩하신 구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우리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그 몸에 지신 것을 생각하면 새로움을 입은 마음이 움직이고 녹아지게 된다. 그러나 그 일 못지않게, 성령께서 우리의 죄 된 상태에 역사하시며 우리의 눈으로 그것들을 보게 하시는 역사도 대단히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생각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바로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불결한 마음속을 헤치시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마음이 과연 무한히 깨끗하신 하나님에게 얼마나 악취를 풍기는가 하는 것을 의식하게 해주신다. 그는 숨겨져 있는 어두움에 속한 끔찍스러운 것들을 밝히 드러내사 보게 하시며, 또한 우리의 더럽고 버림받은 상태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먼저 문 앞에서 두드리지 아니하시면(계3:20), 죄인은 그 누구라도 성실하고 끈기 있는 기도를 통하여 그의 사랑의 문을 두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마7:7).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4:19) 이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를 찿았기 때문이다(눅19: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찿으시기 전엔, 우리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성령의 이끄시는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을 보는 데 어려움이 많은 이유는 자연인이 처해 있는 그 처참한 상태를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인은 완전히 죄에 종 노릇하고 있고 또한 사단에 매여 있으므로, 스스로는 먼저 그리스도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의 길에 빠져서 그 쪽으로 굽어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혐오를 느끼며,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고, 거룩함을 혐오하는 상태에 빠져있으므로, 전능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속에 급진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서 그로 하여금 본래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고, 본래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놓을 자가 없다.
성령의 ‘이끄심’이란 정신과 감정과 의지를 타락의 힘의 다스림에서 놓임을 얻게 하는 것이다. 곧, 죄와 사단의 지배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런 해방을 맞기 전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죄인에게 가해지면 그는 반드시 그 명령을 거부한다. 곧 그가 가장 좋아하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버리려고’(잠28;13. 사55:7)하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 주님이 하신 ‘큰 잔치’의 비유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종이 가서 사람들에게,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하자, 그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눅14:18). ‘사양’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설명한다. 그들은 다른 것들을 더 좋아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다른 경쟁적인 대상들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시간과 감각을 요하는 것들(밭, 소, 아내)에 대해 가장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택하심을 받은 자가 성령에 의하여 살리심을 받고 난 이후라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가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이 필요하게 된다. 믿음의 역사도 똑같이 성령의 역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믿음의 영을 받았으니”(고후4:13)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그 다음의 말씀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기타 구약의 성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영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6:5절에서 이것이 연결되는 것을 살펴보라. 거기서는 스데반에 대해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믿음에 충만했던 것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나바에 대해서도,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11;24)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영적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믿음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식하기를 바란다. 믿음이 생겨나고 우리 속에서 활동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끄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슥12:10)을 부어주신다. 은총의 심령이라고 한 것은 놀랍게도 그들의 찔린 양심과 괴로운 마음으로 하여금 회개하는 반역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발견하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며, 간구하는 심령이라고 한 것은 그들을 감동시켜서 마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니는 자처럼 행하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것이나 그것을 적용시키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오직 성령의 비밀스럽고 능력적인 역사밖에는 없으며, 오직 그 역사를 통해서만 당신이-방황하는 탕자가-전에는 ‘소멸하는 불’로 두렵게 여기던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줄로 당신을 이끄시고 당신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쳐주신(롬8:15)분은 다름이 아닌 바로 제3위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신다
성령은 믿음을 주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서로 연합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띠는 바로 성령이다. 그러나 그 연합은 상호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 무엇인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하는 것이다(엡3:17). 그러나 더 강조해서 말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영혼을 구원시키는 믿음은 마치 합당한 근거에 따라서 어떤 사실을 받아들일 때처럼 단순히 복음에 동의하는 어떤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활동이며, 동시에 구주에 관한 진리를 설득 받아서 그 대상에 합당한 행위를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살리심을 받은 영혼은 이제 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며, 믿음은 영혼의 생명이며, 그리스도는 믿음의 생명이다”. 성경의 용어들을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는 대로 좁은 의미로 정의하는 일은 크나큰 잘못이다. 우리의 통상적인 대화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곧 어떤 증거에 대한 신뢰나 정신적인 동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믿음은-즉, 구원을 위한 믿음을 의미한다-단순히 정신의 자연적인 활동으로서의 믿음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즉, 그 믿음은 의지와 작용과 사랑의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사람이 믿어서 의에 이르는 것은 ‘마음으로’하는 것이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롬10:10).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이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요,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전 성격 가운데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를 주로, 또한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그와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믿음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완성시키는 적절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연합은 이렇게 상호 일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믿음의 정확한 성격과 그 용어 속에 함축된 내용을 더 분명하게 안다면, 그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 즉 마음에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나 산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리스도께 가려면 반드시 그에게 반대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그 속에 구주를 영접하는 것뿐 아니라 육신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참된 믿음은 구주의 영광뿐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교훈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1:21).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성령을 통하여) 영혼의 각 부분-오성, 양심, 애정, 의지 등-을 ‘견고케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근거와 이유는 교회의 증거도, 교회의 권위도 아니고(로마교회는 교회의 권위가 근거가 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성령의 증거와 그의 능력에 있다.
옛날 경건한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또한 중생한 자들 속에 믿음을 주셔서 그 어떠한 것으로도 부술 수 없게 하셨다.
믿음에 의한 확실한 논증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으며,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그 능력을 통하여 성경 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신적인 위엄을 보고서 그것을 통하여 마음을 견고케 한다. 새롭게 된 영혼은 그 말씀 속에 능력을 받아 그것이 반드시 신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듭난 영혼에게는 구태여 성령의 신적 영감을 수긍시키려고 인간적으로 논증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자신 속에 이미 천상의 기원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속에 일어난 믿음은 곧 성경이 다름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 믿음을 가진 자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실 뿐 아니라-새롭게 된 마음을 성경의 신적인 정확성과 신적인 권위에 대해서 견고케 하실 뿐 아니라-인격적인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도 불어넣어 주신다. 영혼은, 신적으로 살리심을 받고 죄를 확신하게 되면 자신의 부패함과 악함, 자신의 무거운 죄과, 그리고 그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에 전적으로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영혼에는 자기 의로움과 자기 교만이 없어지고, 자기 비하와 자기 정죄의 상태에 있게 된다. 그 영혼의 위에 드리워져 있는 구름은 어둡기 그지없고, 소망도 완전히 사라지고, 절망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았으며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고통스러운 의식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입을 기대가 완전히 없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난 후에는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끌어올려서 반석 위에 세울 수가 없다. 이제 새롭게 된 죄인은 자신의 모든 과거의 행동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은 물론 바로 자신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악해져 있다-그의 기도와 회개의 눈물까지도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자신은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복음을 들으면서도, 그 복음은 자기와 같은 유기된 비참한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는 말씀을 읽으면서 그 무서운 질책과 저주의 내용만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마땅한 내용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경건한 친구들이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잃은 자를 찿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 그는 그들이 자기의 극심한 경우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에게, 믿고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에로 던져버리라고 강권하지만,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마치 태양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자기 도움,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무용지물인 것이다.
성령께서 자신이 믿음을 주시는 바로 그 사람들 속에서 먼저 인간적인 가장이라는 집을 격파하시며, 인간 자신의 의로움이라는 잘 이겨지지 않은 몰타르로 지어진 벽을 허물어버리시며, 자기 아첨과 자연적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위에 세워진 기초들을 허물어 버리심으로써, 그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잠기게 된다.
일단 각성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사람이라는 맹목적인 상상을 하는 대신, 내가 바로 영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에게도 나 자신을 구원시킬 힘이 있다고 결론짓기는커녕 오히려 나 자신이 ‘힘이 없으며’, 또한 내가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나의 주요 구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사실은 내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직 전능하신 성령께서만이 상한 심령을 절망의 심연에서 끌어올리시며, 그로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믿게 하실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신다
복음의 주된 목적, 또는 의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구속자 예수 안에 있는 은혜, 또는 축복들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축복들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제가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교제는 그분과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돈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명예로 내가 유명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 다른 사람이 나의 보증인이 되거나 나의 남편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그와 연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사이의 연합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곧 법적인 연합과 생명적인 연합 또는 율법적인 연합과 영적인 연합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맺는 생명적이고도 영적인 연합을 말하고자 한다. 주 예수의 사신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사실은 로마서10:14절과 고린도전서1:21절에서 잘 나타나며, 특히 고린도후서5:20절에서는 더욱 더 잘 볼 수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일만으로는-그 일이 아무리 신실하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단 한 사람의 죄인도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고,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충성할 수가 없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특별하신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아서 그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리들 앞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질 때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그 자신의 본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들의 의지를 억지로 그 본성과는 반대되도록 만들지만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이끄실’때에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즉각적인 활동으로 참된 효력을 발생케 하시며, 따라서 죄인은 싫어하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점은 에베소서1:19,20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은 외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하여, 그리고 내적으로는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함께 묶어주는 끈에 대해 주목해 보기로 하자.
이 끈은 두 가지인데, 그리스도 편에서의 성령님과, 우리 편에서의 믿음이다. 그리스도 편에서의 성령은 영적 생명으로 우리를 살리시며,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신다. 이렇게 살리심을 받으면, 우리 편에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잡으려면,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어야’한다(빌3:12).
생명의 원리가 먼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믿음의 생명 있는 행동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 속에 계시며, 신자들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내주하심을 통하여 신자들 가운데 계시고, 신자는 심기워 짐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롬6:3-5).
마치 머리가 몸에 붙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신자들 위에 계시며, 지체가 머리에 붙어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다”(고전6:17).
머리 속에 있는 영이 그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 속에도 계시므로, 그들 사이에 생명의 연합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으나, 편재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을 연결시켜 주신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이 보다 더 분명한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내주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내주하는 일을 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성령을 소유했다 함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이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서 모시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가시적 ‘교회’의 일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연합을 맛보지 않는 한, 우리는 명목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만다.
“성령께서는 중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찿아 가시지만, 그들은 반항하고 거부한다. 그러나 중생한 모든 자들 속에서는 그가 거하신다. 거기서 거주하시며 다스리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속해 있고(히1:9. 계3:1) 또한 그에게서 나온다(요1;23. 요15:26. 눅24:49). 성령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았다(행2:33).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신 결과로 성령이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갈3:13,14).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부터 얻은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에게는 즉각적으로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파생적으로 주어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본질로서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는 역사하심을 통하여 거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8: 9)으로, 또는 ‘그 아들의 영’(갈4:6)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갈2:20).
그리스도는 위대한 생수의 샘이심으로 그로부터 모든 은사와 은혜가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시며, 성화시키시고, 보존하시는 성령을 보내 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성령께서 선물,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함께 계시지 못함을 채워 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유산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복된 성품과 그의 사역을 참으로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마음에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에 대한 관심이 넘쳐흐르고 있을 때에, 그리고 그들에게 닥칠 상황과 그들이 하게 될 사역, 그리고 세상의 시험 등을 예견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자 하셨을 때에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분명하고도 명확하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 6).
성령이 거하신다고 한 구절들을 살펴보라. 오성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치명적인 과오를 범한다-마음에 거하신다고 한다. 그는 진리로 오성을 밝히 비추시기는 하지만 거기에 거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의 방법대로 역사하시며 새롭게 변화되고 성별 된 마음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신다. 거기서 그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도록 감동시키신다.
그리고 그 외침이 아주 미약하다 하더라도, 그 외침은 그 속에 거주하시는 성령의 숨결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서도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령한 은사와 은혜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말고-너무나 잠자기 쉽고 무기력해지기 쉽기 때문에-주님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거하시는 근거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구속의 근거이다. 이 점은 문둥병자-죄인의 상징-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기름’(성령을 상징함)을 ‘피 위에’(레14:14)발랐다는 것은 놀라운 예표가 아닐 수 없다-성령께서는 오로지 이미 완성된 속죄를 근거로 해서만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믿지 않는 반역자들과는 함께 거하시지 않으신다.
“너희가 믿을 때에(또는 믿은 후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리라”(고후6:16)는 하나님의 약속은“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구절이다.
모든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며 그의 희생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마음을 준비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와서 그 마음을 소유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게 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께 굴복시키면 그는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만드셔서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며, 또한 모든 사단의 궤케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한 것이 가장 엄숙한 호소와 가장 강력한 훈계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내 몸이 성령의 전인가? 그렇다면 그 몸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바쳐야 하겠는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의 가장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가장 따사로운 통치에 내 의지를 굴복시키며, 그의 거룩한 감화에 내 마음을 드려야 할까?
그의 음성을 무시하고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멸시를 당하게 되고 우리는 잃어버린 자들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가 소유한 가장 큰 축복은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요구하심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자. 성령의 ‘내주하심’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친밀함이다. 집안 식구끼리가 남보다 더욱 친밀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 역시 그러하다.
둘째는 지속성이다. ‘내주한다’는 것은 영원히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중생한 자들을 그저 잠정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감동시키거나, 아니면 어떤 특정한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임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옛 선지자들에게 그들의 평상시의 능력보다 훨씬 더한 능력을 주셨던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임하시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으신다.
셋째는 주권이다. ‘거한다’는 말 속에는 이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그저 집에서 일만 하는 일군이 아니라, 그 집의 소유주가 되시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성전’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있는 거룩한 처소이며 거기서는 그를 경배하며 경외하여야 하고, 따라서 반드시 우상이 제거되어야 한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신자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가 ‘주께 연합되었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실은,“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2,23)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광’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였다. ‘내가 저희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줄이 되시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신자는 행위 언약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는 확증을 갖게 된다.모든 비 기독교인들은 행위 언약의 지배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는 새 언약의 특별 은총이 있으니 이는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이외에는 무관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롬6:14). 성령의 내주하심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사람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섭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인도하였다’(렘3:13)-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적과 은혜를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갈3:13,14)로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와 개인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베드로전서1;2절에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우리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은 영원한 상속의 보증이 된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성령의 거하심의 증거와 그 열매는 무엇인가?
첫째로, 성령께서는 누구에게 거하시든지 그 거하시는 자의 영혼의 악함을 어느 정도 억제하시며 약화시키신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며”(갈5:17), 신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롬8:13).
이것은 그분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의 특수한 부분이다. 그는 산 자들 안에 있는 죄를 완전히 도말 시키지는 않으시지만 그것을 억제시키신다.
그는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억제하셔서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든지 더러워지는 일이 전연 있지 않도록 해주시지는 않지만, 다만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그 지배력을 제거시켜 주시는 것이다. 육체에서 완전히 자유 함을 받으려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누구에게 거하시든지 기도와 간구의 영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두 가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 있다. 즉 그는 은혜의 영으로 부어지는 동시에 간구의 영으로서도 부어진다(슥12:10).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 전에 그들에게 영적인 사랑과 거룩한 욕망을 일으키심으로 그들을 도우신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구하도록 그들을 도우신다.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도록 소망과 인내를 주심으로 그들을 도우시는 것이다.
세째로, 성령은 그가 거하시는 자 속에 신령과 영적인 마음 바탕을 이루어 놓으신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모든 피조물의 행동은 그 본성의 경향을 따르게 마련이다. 만일 한 영혼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하늘나라 등에 대해 생각하고 애착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죽음과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영적 죽음은 중생하지 못한 자의 상태요,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수많은 중생한 자들이 겪는 질병이다.
다윗은 한편의 시119편에서 무려 아홉 번 이상이나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런 일이 자주 있지만,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당신의 마음을 깨뜨려서 당신의 사랑을 더욱 크게 하시고 당신의 영혼을 자유케 하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이 결코 보혜사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가르치는 일을 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이 말씀은 이 말씀을 직접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성취되었다.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였고 그의 장중에 안전히 붙들린바 되어서 그들의 복음 전파에는 흠이 없었고, 그들의 기록 역시 오류가 없었다.
최초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신들은 제3위이신 성령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두 번째, 주님의 이 약속이 성취된 것은 서력기원 전체를 통틀어서 그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에게서 였다.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계시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분량에 따라서, 그리고 그들에게 부과된 일의 종류에 따라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리를 신실하게 전파해 온 것이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사54:13. 요6:45)고 했다.
이것은 중생한 자의 가장 뚜렷한 표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 모두가 ‘여호와의 교훈을 받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능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그 진리의 구원시키는 능력은 체험해 본 일이 없는 이런 계층의 사람들을 바로잡기가 가장 어렵다.
전연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교훈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도록 설득시키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설교도 교리 공부도 성경 읽기도 성령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마음을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적용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전혀 영적인 결과를 거둘 수 없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보면,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나의 가르침이 성령에 의한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아주 간단하다. 일어나는 결과를 보아 알 수 있다.
첫째,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지식은 활동적인 지식이다. 그 지식은 우리의 정신적인 면을 늘려주는 단순한 정보의 조각들이 아니다. 영혼을 뒤흔들어서 행하게 하는 일종의 영감인 것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성령께서 비춰 주시는 빛은 마음에까지 이른다.
둘째, 성령이 가르치심으로 생기는 지식은 영혼을 겸손케 하는 지식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고전8:1). 이 지식은 사람이나 책 등을 통해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얻어진 개념적이고 이론적이며, 지능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지식은 인간의 텅 빈 교만과 그의 무지와 무가치함을 계시해 주며, 또한 그를 낮추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침은 우리의 죄악성과,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 우리의 불경건함을 계시해 주며 사람을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든다.
셋째, 성령의 가르침으로 일어난 지식은 세상을 멸시하게 하는 지식이다. 그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중생하지 못한 친구들(그리고 그의 옛사람)이 그렇게도 높이 여기던 그것들을 천하고 낫게 여기게 한다. 그 지식을 통하여 그는 눈을 떠서 이 땅의 명예와 부귀와 명성의 덧없음과 상대적인 무가치함을 보게 된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세상이란 아첨꾼이고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이고 살인자며, 필연적으로 수백만의 마음을 속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령께서 영원한 것들을 계시하시면 시간 세계의 것들은 멸시를 받고 만다. 한때 그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것이 이제는 쓰레기와 배설물(빌3:4-9)로 여겨지게 된다. 성령의 가르침은 이 보잘것없는 멸망할 세상에서 우리 마음을 훨씬 고상한 것으로 돌려놓는다. 이것 역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영적인 지식을 통해서 세속적인 것들을 시시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추구하는 물질들을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넷째, 성령의 가르침으로 일어나는 지식은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성령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부인하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딛2:12)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그러므로 이것 또한 기준이 된다. 빛이 더해 갈수록 더 부드러운 양심을 갖게 되고, 더 그리스도를 닮은 성격과 행실을 갖게 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 지식은 헛것이며, 무가치하며, 그저 나를 정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지식이 되고 말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우리는 얼마나 긴박하게 거룩한 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양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내가 영원히 버림받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만 가지고는 내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없다.
우리 주님 자신은 “복음을 전하려고 기름부음을 받았고”(눅4: 18),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열심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그 일을 행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들에게.“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5:40)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진리는 외적으로 증거 되는 것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곧, 의지가 발동하게 되기 위해서는 신적인 능력으로 그 진리를 마음에 내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의 가르침은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해서 그 말씀이 영혼 속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 중에 열매 없는 자들이 그렇게도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달마다 해마다 그들은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지만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지식은 날로 늘어가고, 진리에 대한 지능적인 지식은 매우 발전되어 가는데 삶의 변화되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며,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라는 좁은 길을 통해서 수욕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일도, 자기 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슬퍼하는 일도, 그 상태를 고치는 법도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사랑하는 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3:7). 즉 본질적이며 체험적이고 감화를 주며 변화시키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신적으로 부여된 지식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이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 주체가 되신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영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갖고 있는 빛이 그것들 자체에 대해 답변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그것들 자체의 빛을 통해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앞의 장들에서 얼마간 언급된 바 있다.
첫째로, 그는 “죄가 심히 죄 된 것”(롬7:13)을 드러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가득 차게 하며, 우리의 더러움과 뻔뻔스러움, 비열함에 대해 번민하게 하신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전혀 무익함을 가르쳐 주신다. 살리심을 받은 양심 속에 일어나는 확신의 가장 주요한 효과는 현재의 행동에서 잘 못된 모든 것을 수정하고자 노력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실을 수정하려고 부지런히 애쓰게 되고, 고통스러운 고행을 기꺼이 해나가고, 외적인 모든 종교적인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게 된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시기에 적절하시며 충분하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성령께서 살리시고 조명하시며 확신을 주신 자들에게 복음을 열어주는 것과, 또한 복음의 귀중한 내용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이해력을 공급하고 애착을 가지게 함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16:14). 이것은 그의 가장 최고의 기능이다. 곧 ‘그의 것’을 존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시지만 그의 최고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성령께서 중생한 자의 남은 여생 동안 계속적으로 가르치신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본질적인 타락성을 보다 충만히, 깊이 깨닫게 하시며, 육체 가운데는 도무지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하시며, 또한 그들에게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위해 애쓰고 그것을 더 크게 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게 하신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깨끗이 씻고, 인도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깨끗이 씻는 일을 하신다
우리 눈으로 죄의 무수함을 보고, 또한 우리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또한 죄와 불결함을 위해 있는 ‘샘’에 우리 자신을 던져 넣게 되는 것 역시 성령에 의한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가장 엄숙하고 몸에 스며드는 구절이 이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설교에서 거의 잊혀져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가운데 다섯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
둘째로, 그들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경고,
셋째로, 그들에게 부과된 의무,
넷째로, 보혜사가 주어졌다는 사실,
다섯째로, 주어진 약속.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전체의 문맥에서 분명하듯이 중생한 신자들,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형제들’(롬8:12)이라고 부르고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적으로 죽는 다는 말이며 영원히 죽는 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언제나 육신적인 생명과 죽음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를 육체적인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걸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음은 죄인이나 성도나 모두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곧 내적 부패의 성향과 유혹을 꾸준히 따라가는 것을 뜻하며, 또한 타락한 인간 본성의 부패함의 지배 아래 완전히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죄를 사랑한다는 것이요, 그것을 행하는 것이요, 사업에 만족하고 그것만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사악함과 악독함에만 제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순수함, 도덕성, 종교성도 그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참된 위치에 두지 않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은 예외가 없는 법칙이다. 당신의 체험이나 고백이 어떠하든, 당신의 회심이 아무리 확실하든, 또는 당신의 믿음이 아무리 정통적이든,“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육신이 만족을 누리면 영혼은 그 만큼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영혼은 짐승의 영혼만큼이나 낮은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 곧 자신의 육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과제는 그의 속에 있는 악을 향한 유혹를 ‘죽이는’ 것, 또는 없애는 것이다.
죄의 삶과 은혜의 삶은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상반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죄 속에는 삼중적인 능력이 있다.
첫째, 정죄하는 능력이 있는데, 죄는 그 능력을 통해서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둔다. 이 능력을 율법으로부터 가지고 왔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기”(고전15:56) 때문이다.
둘째, 죄는 지배하며 다스리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영혼을 비참한 종살이와 끊임없는 속박 속에 가둔다. 이 죄의 지배란 죄의 많음이나 그 지대함이 편만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것들은 은혜의 상태 가운데도 있으며, 또한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받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의 지배란 은혜의 원리로서 비길 바 못되지만 죄가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생하는 그 순간부터 죄의 지배는 능력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새로 거듭날 때에는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며, 그 원리는 육신을 억제하며 그 유혹을 반대하기 때문에 죄는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게 되고(갈5:17), 그렇게 되면 그 압제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는 것은 주로, 우리가 로마서6:11절을 순종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셋째, 죄는 속에 거주하며 마음을 빼앗은 능력이 있어서 영적 생명의 원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며 그리스도인의 변호를 무너뜨리며 그의 무기를 부숴 뜨리고, 그의 은혜를 앗아가고, 그가 그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그의 평안을 파괴시켜서 결국 그를 그 저주스런 속박의 상태에 붙잡아 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패는 그리스도인 속에서 가만히 잠자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패가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지만(은혜의 원리가 그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신자를 괴롭히며 때로는 상당한 정도까지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모든 힘을 바쳐서 그의 속에 있는 죄와 확실하고도 타협이 없는 끈질긴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가 부지런히 그 죄의 뿌리를 약화시키며, 그 움직임을 억제하고 그 외적인 분출과 활동을 없애려고 애쓰며, 또한 그 영혼 속에 있는 원수를 죽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께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의 죄를 짓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은혜가 동시에 한 영혼 속에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육신의 소욕이 영혼을 빨아들인다면 심령의 은혜는 발전할 수가 없다. 정신이 세상적인 생각과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거룩한 것을 묵상할 틈이 없게 된다.
죄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으면 거룩한 의무들에 대한 정신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스스로 만을 의지한다면 그때에는 어떤 희망도, 노력도 철저히 무가치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능력이 많으신 도와주실 분이 계신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 4).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성공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수 있는 것이다. 죄악 된 소욕이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란 없다. 죄를 한 번 허용하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멀어지게 하며, 사랑을 혼란시키며, 영혼을 불안하게 하며, 하나님을 노하시게 함으로 우리의 기도를 좌절시킨다(겔14; 3).
참된 ‘금욕’은 첫째로 죄의 뿌리와 그 원소를 약화시키는데 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도모하는 한’(롬13:14). 육신의 소욕을 약화시킬 수 없다.
둘째, 마음속에 부패한 사상들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그것들을 억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죄의 외적인 역사를 삼가는 일이다. 즉 “경건치 않은 일들을 그만두는 것”이다(딛2:12). 은혜가 중생한 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힘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은혜를 심어주신 그 분께서 그것을 새롭게 하시고 자극하시며 인도하셔야 하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첫째, 그는 죽여야 할 죄를 발견케 하시며 그것을 영혼에게 보여주시며 그 기만성을 벗기시며 그 추함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둘째, 그는 점차로 죄의 권능을 약화시키시며 ‘소멸하는 영’(사4:4)으로서 활동하시며 그 찌꺼기를 다 태워버리시는 분이다.
셋째,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계시하시며 또한 적용시키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죄를 죽이는 힘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넷째, 그는 우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은혜가-육신의 소욕의 반대 개념-힘을 얻게 되고 역사하게 하신다. 우리는“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후7:1)는 명령을 받고 있다. 우리는“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또한“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유20,21)는 훈계를 받고 있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을 효과적으로(어느 정도라도) 이루는 일은 ‘성령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서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 죄를 지은 사실에 대해서 슬퍼하게 하며, 그것에서 돌아서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요구를 가르치시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를 짓다가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죄와 싸우며’(히12:4), 그것을 고백(요일1:9)하고, 그것을 그만두는 것(잠28:13)-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셔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막으시며, 우리를 권고하사 번민을 이기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통하여 정복자보다 더 영광된 자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경건에 대한 우리의 열심을 더욱 깊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시51:10)이라고 외치게 하시며, 또한 우리를 움직이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게”(빌3;12)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채권자가 되시지 않는다. 그는 그를 부지런히 찿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11:6).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육신을 죽이고 성령과 함께 화합하면, 그리고 우리가 죄와 싸우며 경건을 위해 노력하면, 우리는 풍성한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복음에는 우리의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준다는 약속들이 있다. 행위에 대해 약속된 것이 아니라 행위자에 대한 약속이며, 행위자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에 맡겨진 행위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예컨대, 산다는 약속은 죽이는 일 그 자체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육신을 죽이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도 그 사람 자신을 죽이는 일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가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증표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행위에 대해 주어진 모든 약속들은 그 약속들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죽이는 일은 평생의 과제인 것이다. 정원을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꽃과 잔디를 잘 자라게 하려면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마음도 그 속에 부패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잠깐 동안의 노력과 기도로써 그것을 성령에게 복종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우며 기나긴 노력이 있어야 하며,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필요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실한 간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성령은 인도하는 일을 하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9:14).
이 구절은 성령이 하시는 여러 가지 사역 중 또 다른 일면을 제시해 준다. 그는 모든 다른 기능들 외에도 믿음이 깊은 경건한 자들에게 인도자의 직임을 수행하신다. 모세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할 수도, 길 없는 광야를 통과하게 할 수도 없었다.
단지 말씀에 의지하여 지팡이를 뻗쳤을 때 홍해의 물을 갈라지게 할 수 있었다. 모세는 단지 인간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유능한 행위자는 바로 성령이셨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본성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 앞에 보여졌을 때에도 그 길을 따라 걷기를 꺼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1:4)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찿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인도함 받기 전에는 ‘그를 따라 달려가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거룩함을 싫어한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적으로 될 수는 있으나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는 없다.
죄의 권세는 그것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힘에 의해 우리의 애정이 위의 것들로 향하도록 이끌려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의지는 완고하여서 초자연적인 은혜가 임할 때에만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것은 곧 그에 의해 내적으로 다스려지는 것, 그의 은밀하면서도 생생한 감동 내지 분투에 복종하는 것이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습관이 우리에게 ‘제2의 천성이’ 된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행로를 좇으면 좇을수록, 우리는 그 길에서 더욱 더 기쁨을 발견하게 되며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하여야 겨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애정이 세상적인 것들보다 거룩함을 습관적으로 더 좋아할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권세가 그것을 사랑하는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재하는 은혜도 역시 그것을 사랑하는 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여 열심 있는 의지와 힘있는 애정으로 그것들을 추구할 때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넘치게 된다. 우리의 열망과 열심의 방향이, 우리 영혼의 힘과 흐름이 거룩함을 향해 달려 나아 가고 있을 때, 그 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진 것이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36 :27).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힘과 부드러운 권유를 함께 사용하여 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본성과 본질을 그대로 보존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의지를 거슬리도록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며 달콤하게 우리를 이끄신다.
그는 유익한 이유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우리의 마음에 제기하심으로써 마침내 국면이 바뀌어 모든 것에 자신의 영에 의한 효과가 나타내게 하신다. 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영혼에 단 한 번 행하시는 것이 아니며, 종종 새로이 반복하신다. 이는 ‘육신’내지 죄 많은 본성이 거듭난 후에도 우리 안에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그 분에게로 향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내신 후, 스스로 저희의 머리가 되시고 저희 장래의 인도를 맡으시는 것은 구원의 약속에 있어서 성령이신 그 분 자신의 임무이다. 그는 천국에 이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을 아신다. 그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곤경과 위험을 아시며 인생 여정의 복잡하게 뒤얽힌 미로를, 사단이 영혼을 미혹하는 수많은 잘못된 길들과 악한 것을 좇는 인간 마음의 경향을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은 정경에 처해 있는 ‘나그네요 행인’인 자들을 무한하신 은혜 안에서 돌보시며 그들을 천국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복된 영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주관적으로 ‘인도하신다’.
즉 객관적으로는 말씀의 직접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써 우리의 행위가 통제될 수 있게 하시며, 주관적으로는 영혼 내부로부터 은밀한 감동을 주심으로써 좇아야 할 경로, 곧 피해야 할 악과 수행하여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신다.
성령은 새로워진 영혼 안에 있는 그 분 자신의 생명을 따라 역사하신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의무에 관해 마음이 올바른 의향을 갖게 되도록 역사하신다. 그는 믿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를 마음의 태세를 갖추게 하면서 저희에게 올바른 의향을 계속 유지시켜 주신다.
그는 양심에 효력 있게 말씀하시며 이해력을 밝게 하시고 욕망들을 통제하신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제안과 건의에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시하신다.“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며, 종종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게 하는 이상한 제안이나 억제 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림을 받는 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은 어떠한 사람도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충동을 판단하여 그 충동이 자기 자신의 불안정한 영, 곧 악한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안전하고도 확실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이 평가되어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결코 어떠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그의 권유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말씀의 사역자가 되도록 분명하게 부르심 받은 일도, 구별 되여 진 일도 없는, 그리고 그런 권한을 부여 받은 일도 없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강한 충동에서 비롯되었더라도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세 가지 뚜렷한 활동으로 인도자의 직임을 수행하신다.
첫째로, 그는 새로운 ‘성품’, 곧 생명과 은혜를 전하여 주신다.
둘째로, 그는 그 생명이 활동하시며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셋째로, 그는 행동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이끄신다.
생명, 활동, 그리고 행위는 자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은혜에 있어서도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첫째로, 성령은 영혼에 은혜로운 습관을 불어 넣으시면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소생시키신다.“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36:26).
둘째로, 그는 영혼을 감동시키시고 새 성품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은혜로운 습관과 원칙을 따라 행동하도록 도우신다. 즉 그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저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
셋째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게끔 우리의 이해력을 밝히시며 우리의 성향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감동시키심으로써, 우리 행동들을 지도하신다.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고 자 하는 것은 이 마지막 두 가지 사항이다. 하나님의 지도하심은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이었다.
곧“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일반적인 지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특별한 감동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사48;17),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크고도 필수적인 축복으로서 성도들이 열망한 것이었다. 만일 저희 임의대로 행하면 저희 자신의 타락이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고 지배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시119:133)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날마다 우리를 가르치시지 않으면 찿아 내기도 어렵거니와 그 길로 나아가기란 더한층 힘들다. 성경의 법칙들을 우리 생활의 여러 세부적인 상황들 모두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계속하여 필요하다.
성령이야말로 거룩함의 유일한 원천이며, 우리는 지도 받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지식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권고하여 맘에 내키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감동시키셔야 한다. 우리의 죄를 좋아하는 성향은 너무도 강하다.
육신적인 충동은 우리의 올바른 판단을 참으로 쉽게 무너뜨린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지극히 약하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감정들로 인하여 정반대의 방향으로 끌려간다. 바로 이때에 성령은 내부로부터 다스리신다.
첫째로, 그는 억제하시는 힘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피하고 이겨내게 하신다.
둘째로, 그의 격려하시는 힘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애쓰심에 복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것
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자기가 가는 길을 자주 주목하여 보도록, 그리고 자기의 육욕과 완고함을 슬퍼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자기가 복종할 수 있게 되는 은혜를 열심히 구하도록 감동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가 무엇이며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도록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더욱 복종해 나가도록 감동 받으며, 성령께서 저희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축복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법의 요구대로 행하는 능력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있다. 성령은 어느 한계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괴롭게 하신 후, 구세주와 우리의 연합에 대해 보다 깊이 깨닫도록 이끄신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거룩함의 대로를 따라 인도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헛된 것들에서 이끌어 내어 주님 안에 있는 만족스러운 기쁨으로 인도하신다. 그는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하고 보다 충실한 교제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는데 이것은 오직 그분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그의 목적은 우리로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곧 그에 대한 약속이시며 보증이시기 때문이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확신케하며, 증거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확신케 하는 일을 하신다
한 영혼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부여 받았을 때, 그는 죄의 극악함과 그 더러움을 깨달으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기능이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되었음을 알아차린다. 날 때부터 모든 인간에게 있는 율법을 중시하는 영은 즉시 일깨워지고 경각되어 지며,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밀한 의심과 의혹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율법에 속박된 상태, 두려움의 상태가 된다. 영혼이 처음 성령에 의해 일깨워졌을 때 그 영혼은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양심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실 때,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시대에는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당한 정도로 율법적인 종의 영에 속해있었다. 레위 제도에서 드리는 희생제물과 물로 씻는 의식으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율법의 가르침들은 그 조항이 너무도 많고 참으로 다양하며 지키기에 매우 무겁고 번거로운 것이어서 유대인들은 영속적인 종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의 계획과 그 충분한 능력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제 믿는 성도들을 모든 노예적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준비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그들은 저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증거되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 이 세상이 창조되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로”(엡1:5) 예정하셨다.
성령이 저희 마음에 임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자녀’로 불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여“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갈4:6)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거듭남에 의하여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죽으시기 이전부터 ‘자녀’이었다.“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1, 52).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 이미 ‘자녀’이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히2:14).따라서 양자됨과 거듭남을 혼동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그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이며 증거이다. 양자됨은 영원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 행사되는 것이며, 거듭남은 시간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다. 만일 양자됨이 없었다면 거듭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양자됨으로 인하여 선택된 자들은 자녀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듭남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 관계에 적합한 성품을 부여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는 명예는 너무도 높고 하나님을 우리의 우리 아버지로 갖는 특권은 너무도 놀라와서 그것들을 우리 마음에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은사가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게 될 때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성령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온 세상을 주시는 것보다 훨씬 귀하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 성육신하였을 때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주신 것과 엄밀하게 똑같은 방법으로, 즉 자신의 영이라는 초월적인 선물로써 교회의 지체되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음은 놀랍고도 복된 사실이다.
성령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그리고 또한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표시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오셨다. 하나님의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요3:34,35).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요17:26)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의 성취로써, 성령은 외아들에 대해서나 양자들에 대해서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일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속 받은 자들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거하심은 하나님의 부성애의 가장 확실한 정표이자 신자의 양자됨의 증거이다. 선택된 자들이 육신과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우신 사역에 위해서이다. 본래부터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그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시며 스스로 그들 안에 거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복음을 믿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준비되어 진 일이다. 양자의 영으로써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결과는 자유와 확신, 그리고 거룩한 기쁨이다.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복된 열매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와 같은 애정과 신뢰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사도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바’는 아람어이고 ‘아버지’는 헬라어이다. 전자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하며 후자는 이방인들에게 익숙하다.
이렇게 적음으로써 사도는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가족의 자녀이며, 저희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특권을 똑같이 부여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양자의 영으로써 성령은 소생한 영혼에게 자녀의 영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이 같은 자녀의 영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된다.
첫째로, 육신의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섬기듯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거룩히 경외함으로써이다.
둘째로, 육신의 자녀가 이 땅의 부모를 믿고 의존하듯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신뢰함으로써이다.
셋째로, 육신의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갖듯이 우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이다.
넷째로, 육신의 자녀가 그 부모에게 순종하듯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복종함으로써이다.
이 자녀의 영은 저로 하여금 영적인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아기와 같은 확신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평안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 자녀의 영이란 가장 가까운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그가 자신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을 저희 아버지로 항상 의지해야 한다(벧전5:7).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종(순종)함으로써 사랑을 입은 자녀(엡5:1)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을 때, 저희에게 은혜의 보좌에로 나아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도록 명하셨다.
그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막14:36)라고 외치셨다.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와 의존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는 것은 믿음을 북돋아 주며 소망을 굳게 해준다.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그 애정을 사랑 그 자체이신 그분께 두게 한다. 참된 겸양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확신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인데 이것은 항상 철저한 자기 부인을 수반한다.
자기 부인이란 자신의 결심, 최선의 노력, 믿음, 경건함 등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모든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참된 확신과 그릇된 겸양이 서로 어울려 있다. 이는 그들이 이 땅에 존속하는 한, 그들 안에 믿음의 뿌리와 의심의 뿌리가 함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한숨과 흐느낌과 탄식으로 기도 드리면서 아버지께 의지하는 것은 내재하시는 성령의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양자의 영을 의식하는 정도는 주로 그분의 다스림에 우리가 얼마나 복종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성령은 증거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첫째로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시는 분이며, 그 다음에 그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가 이루신 일의 효력에 대해 증거하시는 분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성령은 우리의 새로워진 마음에 증거하신다. 성령은 그에 관하여 성경에 계시되어 진 모든 것으로 주 예수를 위해 증거하는 증거자이시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지니는 영원히 변치 않는 효력에 대해 증거하신다. 즉 그로 말미암아 죄가 효력있게 제거되었다는 것, 아버지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것, 선택된 자들은 그로 인해 영원토록 온전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라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자가 되시는 성령의 효력은 -,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둘째로, 영원한 언약이 맺어졌을 때 그가 함께 계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며,
셋째로, 은혜로 택함을 받은 모든 지체를 아시는 그의 온전한 지식에서 나타난다.
정해진 때가 되어 각 사람들을 일깨우실 때, 그 는 그 영혼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비추사 새로워진 마음을 밝히신다. 그는 거듭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마음속에, 사랑하는 아들에 관한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며 그 말씀을 온전히 믿게 하신다.
그는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과 동등한 아들의 인격과 의와 내 속에 만족하고 저희의 전 소망과 구원을 거기에 두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기뻐하심을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저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저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진실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거듭남과 증거가 확실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거듭난 증거가 실제로 확실하지 않을 때, 정직하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자신의 증거들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은 죄이다. 하지만 그 증거들이 애매하다는 것을 조사하는 일은 죄가 아니다.
사람이 술 취함과 방탕함으로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자신이 병들었음을 느끼고 그럴 만한 근거가 있을 때 자신이 병에서 치유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우리의 죄는 외적인 재난과 더불어 내적인 재난들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죄라기보다는 응징이다.
의심의 소지를 그대로 놔두어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죄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니다. 자기 백성의 크고 영원한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또한 그의 신비한 몸의 모든 살아있는 지체들 안에도 거하신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분량대로 그를 따르고 그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생명과 은혜, 거룩함, 위로, 그리고 영광의 영으로써 저희 안에 거하시면서 저희 모든 소생한 영혼들을 소유하시는 분이다. 그는 그들로 주님 안에서 살게 하셨고,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살게 하신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를 알게 하시며, 그리스도와 저희와의 연합을 깨닫게 하신다. 그는 저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하도록 이끄시며 그의 모든 뜻을 기뻐하며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신다(살후1;11).
영혼 안에서 그의 ‘선한 역사’(거듭남에서 시작되고 주께로 회심함에 있어 명백히 나타나는)를 계속하시면서, 성령은 증거자의 임무를 수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증거자의 임무는 요구된 증언을 위하여 그 합당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증거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2:15절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번영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는 이방인에 관한 언급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실성은 그의 양심에 의해 증거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 혹은 양심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서 악을 근절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의 육신적인 본성을 정화 내지 개선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양심이 그러한 것을 증거하고 있다면, 거짓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요일1:8)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거하고 있는 한 “육체(죄의 원리)의 소욕은 성령(은혜의 원리)을 거스린다”(갈5:17). 더군다나 우리의 사고가 말씀을 따르면 따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자신들이 얼마나 속속들이 타락했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빛을 받게 되며, 어두움 안에 감추어진(있으리라 생각지도 않던) 것들이 우리의 눈앞에 두렵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확신을 갖는 다는 것은, 결코 자신이 내재하는 죄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점점 죽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의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사랑하게끔 하신 일이 없으시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워진 양심이 증거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악의 소굴-그것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의식하고 매일같이 탄식한다-과 나란히 그의 마음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 자녀의 영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그리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아는 기쁨을 열망하게 되고 그분과의 교제를 다른 어떠한 특권들보다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 자녀의 영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시며, 그리하여 신자로 하여금 그분의 약속을 간구하고 그분의 긍휼하심을 믿으며 그분의 선하심에 의지하게 하신다. 자녀의 영은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을 심어 준다.
그리하여 신자로 하여금 그분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을 공경하고 그분의 지고하신 권위를 존중하며 그분의 말씀 앞에서 떨게 하신다. 그 자녀의 영은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일에 있어 그분께 복종하기 원하게 되며 그의 계명과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자 진실로 애쓰게 된다.
“성령의 증거,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저희의 죄를 사하셨음을 증거하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인 음성, 암시, 혹은 계시인데 이에 대한 잘못되고 미혹된 견해로 말미암아 많은 해악이 발생하였다. 여기에는 때로는 성경의 본문 말씀이 따르며 때로는 따르지 않는다”.
다정하고 성실한 어린아이는 자기가 아버지와 특별하고 독특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증거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대해 자녀가 지니는 좋아하는 마음과 열망을 갖고 있음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이와 아울러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 복된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롬5:5).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거하심은 곧 그의 양자됨에 대한 확실한 징표이다. 그렇지만 성령의 본질을 우리는 식별할 수가 없다. 오직 그의 사역에 의해서만 그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사역을 식별함으로써 그 사역자를 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내적인 생명을 부지런히 검증하고 그것을 성경과 주의 깊게 대조해보지 않고 어떻게 달리 영혼 안에 있는 그의 사역을 확인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신 그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이 구절이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번번이 이렇게 잘못 인용되고 있다) 증거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영과 ‘더불어’ 증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음에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한다.“더불어 증거하시나니”, 이것은 헬라어에서는 한 단어이다(복합동사). 이러한 특성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성령의 증거는 나의 영에게 주어지는 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영 안에, 혹은 나의 영과 더불어 주어진 확증이다. 첫째로, 성령의 증거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말씀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판정할 수 있는 확실한 징표를 주셨다. 즉, 그는 우리로 스스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어떤 특징들을 말씀해 주셨다(요8:39. 롬4:12. 8;14. 요8:44. 엡2:2,3).
둘째로, 그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은혜로 역사하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우리의 유익을 증거하신다. 셋째로, 그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우리로 보다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양심이 그 한 역할을 담당하며 성령이 이를 확증하신다. 넷째로, 그는 은혜를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은혜가 진실하고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사단의 속임은 비록 종종 그럴듯하게 흉내 내긴 할지라도, 그 경향과 결과에 있어 항상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반대가 된다. 반면에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기록된 말씀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안에 역사하고 있는 것은 어떤 영인지 검사해볼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된다.
성경에서 우리와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진리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곧 본래부터 우리 인간은 타락했다는 것, 은혜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는 것,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의문은, 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저가 하나님의 양자라는 강하고 위안되는 확신을 항상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증거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괴로워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임무이다. 둘째로, 그의 확신을 주시는 위로는 종종 우리의 나태로 인하여 보류된다. 우리는“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그리고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1:10, 3:14)고 명해졌다. 성령의 위로는 게으른 영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 ;44).
즉, 저희가 불의의 길로 행하고 있었던 동안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증거는 거룩한 것이다. 그는 돼지 코에 금 고리를 걸지 않으실 것이다(잠11:22).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유21절). 그리하면 성령의 증거를 얻게 될 것이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인치시고, 도우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인치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의 인(印)치시는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사실은 고린도후서1:19-22절과 에베소서1:13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부요 함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그 위에 서지 않았다면 무가치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확실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그 위에 ‘굳게 세워져야’한다.
주초가 아무리 튼튼하다 할지라도(그 주초가 단단한 반석이라 할지라도) 집이 그 주초와 연결되어지지 않았다면, 즉 실제로 그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 집은 안전하지 못하다. 확신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그리고 그 약속 위에 굳게 세워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부요 함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 그의 믿음이 지니는 힘과 위로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여 세워진 것이다. 구약의 제도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 모두는 ‘기름부음’으로 저희의 맡은바 직무의 권위가 주어지고 승인되었다(레8:11. 삼하5:3. 왕상19:16). 또한 계약과 약정의 행위는 ‘인침’으로써 확증되었다(에8:8. 렘32:8-10). 그리고 ‘약조물’과 ‘보증물’은 협정이나 매매를 확실하게 하였다(창38:17,18. 신24: 10).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신분은 우선 ‘견고케 함’ 이라는 일반적인 말로써 표현되고, 그 다음에 ‘기름부음’, ‘인침’, ‘보증’, 이라는 비유적인 세 용어로써 부연 설명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과 지식은 종종 심하게 흔들린다.
내재하는 죄의 활동은 짙은 의혹의 구름을 불러일으키며 사단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헛것임을 말하고자 기회를 틈탄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따뜻하신 은혜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시시때때로 소생시키시고 위로하시는 그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인치시고’ 확증해 주신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 새로워지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사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우리가 그 안에서 인격적 권한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하신다. 동일한 복된 진리가 에베소서1:13절에서도 보여 진다.
거기에서 성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 순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곧 그들은 ‘듣고’, ‘믿어’, ‘인치심’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인침은 믿음과 뚜렷하게 구분되며, 믿음 후에 온다. ‘인침’의 주된 의도는 보증하고 증명하며 확증하는 것이다.
첫째로,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들의 진실성을 확증하신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식별력은 그 약속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어떠한 사람도 이성의 빛이나 동료 인간들의 설득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에 그 마음을 의지할 수 없다. 그 일을 위해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
‘인침’은 소유권, 신원증명, 확증, 비밀, 안전과 같은 용도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에베소서1:13절에 나오는 그 인침은 영원한 기업을 보증하는 인침이다. 인침이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그의 독특한 활동이다(고후1:22). 에베소서1:13절에서 말하는 것은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인치는 것이 아니다(많은 청교도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믿은 후(後)에가 아니라 믿기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진리의 순서는 아주 절대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즉, 복음에 구원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믿음은 구원을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그 제시를 받아들인다. 성령께서 구원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내 마음에 인치시고 확증시켜 주신다. 이같이 ‘인침’에 있어 성령은 보증하고 공인하고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일은 신자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알려진다.
첫째로, 추론에 의해서이다. 신자로 하여금 영혼 안에 있는 그분의 역사를 깨닫게 하시며, 그로부터 자신이 거듭났음을 결론짓게 하신다. 연기를 보면 불이 있음을 추론해 내는 것이 당연하듯 영적인 은혜(아무리 미약할지라도)를 깨닫게 되면 그 은혜를 주신 분에게로 생각이 미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타락과 싸우는 중에 어떤 능력을 느낄 때, 그리고 종종 육신의 욕망에 빠져들려는 자신의 경향이 제지되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이 곧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시는 성령(갈5:7)의 작용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직관에 의해서이다. 즉,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안에 어떤 소망을 지니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은 것이든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은혜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든,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이다(롬15:13).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거룩한 약속들을 가져다 주신다. 그는 그 약속들 가운데 있는 선한 것과 거기에 나타난 은혜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약속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온전함과 제한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그 은혜들을 인쳐 주시며 위로 하여금 거기에서 쉬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의 의심이 수그러드는 것, 그리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자기 속에 ‘착한 일’(빌1:6)을 시작하셨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성령은 도우시는 일을 하신다
로마서 8장은 혹심하게 고난을 당하는 신자의 절박한 문제에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 쓰여 졌다. 그 말씀을 기록함에 있어 사도는 ‘현재의 고난’(롬8:18)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내지 무한한 사랑과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 주고자 하는 감동을 받았다.
이는 첫째로, 그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개인적이며 체험적으로 참예하게 되기 때문이다(롬8:17. 빌3:10). 둘째로, 우리의 고난이 비록 혹심하고 오래 계속되는 것이긴 할지라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8:18-23). 셋째로, 우리의 현재의 고난, 그 자체가 소망의 연단과 인내를 증진시키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롬8:24,25). 넷째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원조가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베풀어지기 때문이다(롬8:26,27).
성령의 은혜로우신 도움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고 우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성령께서 동정하시고 그의 속사람 안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를 강하게 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분이 역사하시는 과정을 의식하지 못했다 해도 이 진리의 사실에 대한 산 증거자이다. “우리의 연약함(들)”, 복수로 쓰여졌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온통 연약 함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들은 덧없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40:6)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연약에 싸여’(히5:2)있다.
시험과 시련이 닥쳐올 때 우리는 종종 당황해 하고 그 아래서 나약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의 ‘연약 함들’은 저희가 각양각색인 만큼이나 그 종류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 약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바 저희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배움에 있어 부족하다. 그래서 사단의 속임에 대응할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종의 길로 나아감에 있어 그 속도가 느리다. 그로 인해 뒤편에서 지체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인 고통아래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염세주의의 상태로 몰아넣는 신경적인 기질로 괴롭힘 당하고 있다. 그래서 드리워진 구름의 어두운 측면만을 바라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인생에 대한 염려로 무겁게 마음이 짓눌려져서 계속하여 의기소침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악의에 찬 비방에 시달리고 헐 뜯겨지며 박해 당하고 배척되고 있는데 이것은 민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견딜 수 없는 일들이다.
‘우리의 연약 함들’에는 우리로 하여금 신음하게 하고 하나님의 동정심을 받게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성경으로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연약함을 홀로 감당하도록 버려지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조력자, 거룩한 조력자가 계시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아니 우리 안에 거하신다. 여기에 있는 ‘도우신다’라는 원문의 헬라어는 놀랄만한 말이다. 그 말은 ‘편들다’, 혹은 ‘하나가 되어 붙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 함들’을 제거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도 바울의 육신에 있는 가시를 없애 주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연약함을 견딜 수 있게 하신다. 성도들은 그분의 인격 그대로의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저희의 경배의 대상이심을 알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저희가 성령 안에서만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된다는 것(엡2:18)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갖가지 형편, 유혹, 방황들로 인하여 그들의 기분은 답답해지며 애정은 차갑게 식고,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저희 마음은 죽은 바 된다. 그리하여 그때 그들은 마땅히 빌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성령의 사랑과 은혜가 가장 거룩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그는 저희의 연약 함들을 도우시며 저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렇게 적혀 있는 고로 분명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의 도움을 구하는 것, 우리를 맡아 주시기를 명확하게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난의 압박이 우리에게 처음 가해졌을 때, 보통 구조를 울부짖는 것이 본성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영혼이 너무 낙심한 나머지 본성적인 기도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에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에 대해 너무도 많은 반항심이 종종 일어나서 그분의 얼굴을 찿는 것은 놀림감이 되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왜 그런가?
첫째로, 우리가 자기애로 말미암아 눈이 멀어서 무엇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될지, 무엇이 우리 형제들의 선을 가장 진척시킬지(우리에게서 쓸모 없는 불순물을 일소하여 깨끗케 됨을 통하여), 그리고 무엇이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진전시킬지 식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의 두 번째 이유로는, 우리의 마음이 시련과 그에 따른 고통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평정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의 세 번째 이유로는, 영혼이 메말라짐으로 인해 종종 우리의 혀가 들러붙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마련이다(마12:34).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골3:16) 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감히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 올바른 청원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는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그러나 그는 너무도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도
우시기 때문에 그가 일을 수행하실 때에 우리는 그의 도우심을 알지 못한다. 그 은혜로우신 효력 있는 도움은 그 도움이 우리 안에 가져온 결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된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간구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간구하는 일을 하신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이것은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바,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에 맞서 행동하시는 복된 보혜사께서 우리의 기도생활에 주시는 특별한 도움이다. 스가랴12:10절에서 그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으로 특별히 강조하여 일컬어졌는데, 이는 그가 모든 영적인 갈망과 모든 거룩한 열망,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모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신생한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한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호흡이 전적으로 그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주의 깊게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중보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감에 있어 우리가 갖는 모든 확신의 토대인 것처럼, 기도의 모든 영적인 활동은 성령의 역사와 중보의 열매이다.
첫째로, 신자가 외적인 시련으로 인해 심히 고통 받고 내적인 추악한 감정으로 인해 몹시 의기소침해 있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양손을 쥐어 틀고자 할 때, 혹은 자신의 영적 무감각 상태와 자기의 넘치는 죄로 표현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의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그의 내부 깊숙한 데서 그를 감동시키신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넘치는 죄와 마음의 타락을 볼 수 있도록 조명해 주는 분이 성령이신 것처럼, 또한 그것들에 대하여 탄식하게 하는 분도 성령이시다.
둘째로, 영혼이 아주 무겁게 짓 눌려지고 깊이 고통하고 있을 때 심령은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 마음에 깨우쳐 주신다. 그분은 혼란 상태를 잠잠케 하시며 내부에서 일어난 걱정을 어느 정도 가라 앉히신다. 마음을 정화시키시며 우리로 하여금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과 유순함, 복종, 용기, 그리고 그의 모든 것들이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셋째로, 성령께서 낙심한 성도들에게 저희의 갖가지 필요에 대한 은혜의 공급이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 모두 나타나 있음을 보여주신다.
그것은 기도의 표준이 되는 동시에 그 안에 기도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약속들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분이 약속해 주신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부족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이 되고 유익이 되는 그러한 방법과 범위 내에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도 우리가 곤궁에 처하게 되는 그런 일은 없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들로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채움 받게 되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믿음에 있다. 믿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존중한다.
넷째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간구를 올바른 목적으로 향하도록 도와주신다. 많은 기도가 바로 이 점에 있어 잘못되어 있는 까닭으로 응답 받지 못하고 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4:3). ‘잘못 구함’이란 그릇된 목적을 생각하여 어떤 것을 구함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자기 뜻대로 행하도록 홀로 남겨진다면 이러한 일이 항상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오직 세 가지 목적만이 허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 우리 영성이 고양되는 것, 우리 형제가 축복받게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욕망과 간청을 하나님의 영광 아래 복속시키게 하실 수 있다.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곧 저의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 그리고 그의 마음이 그분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담대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칙’이다.
곧“항상 기도하라”(눅18:1).“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빌4: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중의 효과를 주게끔 되어 있다. 곧 괴로움을 주는 것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게 되어야 하며, 그런 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달으므로 찬미로 가득 차게 되어야 한다.
기도는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는 성경을 손에 쥐고도 ‘알지를 못한다’. 그 성경이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지시해 주는 가르침들로 가득 차 있는 데도 빌 바를 모른다. 그 성경 안에는 우리를 인도해주기 위한 영감 받은 기도들이 그렇게도 많이 있는데도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가 따라 해야 할 기도의 모범을 은혜롭게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의 판단을 심히 왜곡시켰으며 자기에는 우리의 눈을 한 꺼플 덮어 흐려놓았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을 좇는 마음이 우리의 애정을 너무도 타락시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서를 손에 쥐고서도 우리의 빌 바가 무엇인지, 곧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줄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어떤 것인지 정녕(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방법에 있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우리의 간청하는 바를 제시할 수도 없다. 기도하는 가운데 활동하는 네 가지 ‘영’이 있다.
첫째로, 인간의 본성적인 영이다. 이 영은 자신의 행복과 보전을 구한다. 이것은 죄가 아니며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에게 찿아 볼 수 있었던 바이다.
둘째로, 육욕적인 죄 된 영이다.“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시리라”(사6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뜻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
셋째로, 신자 안에 있는 새로운 성품이다. 이것은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자체로서는 표현할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넷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며’(유20절), 곧 성령의 감동하심과 능력에 의한 기도이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본성적인 동기, 육신적인 갈망, 은혜의 열망, 그리고 성령으로 인해 일어난 열망을 분간하신다.
이것이 바로“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라는 말씀을 설명하는 것으로, 심령이란 곧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영’이라고 하겠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도 안에 있는 성령의 ‘탄식’을 이같이 구별하고 해석하실 수 있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찿아 볼 수 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삼상1:13).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룩한 열망을 창조하시며 독생자께서 그 열망들을 상달하시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이해하시며 승인하시나니, 그러므로 우리는“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이 말씀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혜들에서 나오게 되는 여러 빛들을 한 초점에 맞추고 있는데, 그것은 곧 그 가운데서 성도는 서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저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개심시키고 복종시키며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 역할과 다양한 측면들이 있다.
‘주의 영광’이란 그의 도덕적 완전성, 그의 성품의 탁월성을 의미한다. 그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리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의 눈이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거울’이란 곧 성경 말씀이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가는 우리의 존재란 체험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우리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그 구원이 단계적이고도 점진적인 작업임을 암시한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본래부터 우리의 타락한 마음을 뒤엎고 있던 어둠과 편견, 적의의 수건들이 벗겨짐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서 광명을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이 큰 변화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신다. 즉 영혼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약속된 수단을 사용하도록 축복하신다.
“주의 영광”, 우리는 이를 그의 도덕적 완전성, 그의 성품의 탁월성으로 정의하였다.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곧 전해줄 수 없는 것과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만 속하는 어떠한 특유의 완전한 속성이 있으며 이러한 것은 본질상 피조물들에게는 전달 될 수가 없다. 그의 영원하심, 그의 불변하심, 그의 전능하심, 그의 전지하심, 그의 편제하심 등이 이러한 것들에 속한다.
하나님께는 또 다른 완전한 속성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 중에서 구속된 자들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들이다. 그의 선하심, 그의 은혜, 그의 자비, 그의 거룩함, 그의 의, 그의 지혜 등이 이러한 것들에 속한다.
사도가 고린도후서3:18절에서 말한 바는 후자를 뜻함이 이제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주님의 전지하심 등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으며, 그렇게 변화될 것도 아니고 변화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 말씀과 비교해 보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드라”(요1: 14). 이는 곧 그의 도덕적 완전성을 말한다. 주의 영광이 나타나 있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되는 ‘거울’은 그의 기록된 말씀이다. 이 사실은 야고보서1:22-25절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해진다.
만일 누군가 주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울’의 의미를 우리가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거울이 첫째로 율법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지적하고자 한다. 즉 고린도후서3;18절, 그 문맥 자체가 이를 충분히 입증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 같은 견해를 어쩔 수 없이 갖게 한다고,
그 말씀에서 사도는 두 가지 큰 원리를 비교, 대조하고 있다. 곧 모세의 것과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탁월함은 전자가 외적인 직분(돌에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인 반면 후자는 내적인 직분(‘영’의 직분)으로서, 마음속에 있다는 점에서 보여 진다. 복음에는 놀라운 은혜와 무한한 자비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은혜가 의롭게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자비가 올바르게 베풀어지는지, 어떻게 범죄자가 공정히 용서받는지를 배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드려지는 희생제물 없이 주권자로서 죄인들을 용서하는 것은 그의 위엄 있는 영광에 합당치 않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명예롭게 하기 위하여 중보자를 정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그리고 죽음이라는 위대한 계획은,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명한 바, 사랑과 영광과 복종 그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죄는 위협적인 징벌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마땅한 커다란 악이라는 사실을 가장 공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성 전부가 온전히 드러난 것을 본다.
즉 예수의 죽음에서 율법이 높이 들려졌으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입증되었고 죄는 낮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죄인은 구원되었으며 은혜는 영화롭게 되었고 사단은 패배를 당하였다. 비록 주의 영광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의 거울을 통하여 그처럼 자명하게 나타나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성령은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령께서 선택된 자의 영혼에게 역사하실 때에, 그분은 처음에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직시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롬3:20) 때문이다. 그분은 신자에게 율법의 완전성, 곧 그 신성함, 그 불편함, 그 공의로움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그로 하여금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함”(롬7:12)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할 것을 명하심을 알게 하신다. 또한 율법은 생각에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완전하고도 계속적인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도 알게 하신다. 그분은 영혼에게 그러한 율법의 요구가 옳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 간섭하시고 있는 사람은 율법이라는 거울에 드러난 ‘주의 영광’. 곧 그분의 위엄,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공의를 본다. 오직 이렇게 하여 영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으로 이루신 또 다른 두 번째의 위대한 계시를 보고 깨닫기에 합당한 채비를 갖추게 된다. 그런 다음에, 성령께서는 그 영혼 앞에 귀중한 복음을 제시하신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자, 기꺼이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의 무한한 겸손을 신자의 놀라는 눈앞에 밝히 드러내신다.그리고 성령께서는 저희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십자가가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으며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을지라도 저희에게는 온 우주에서 가장 놀랍고 복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율법의 ‘거울’에 비취였고 다음에는 복음의 ‘거울’에 비취인 ‘주의 영광’을 보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게’ 하신다.
즉, 그분은 저희 안에 합당한 원리와 애정을 차례차례 불어넣어 주신다. 바꾸어 말해서, 저희의 마음이 율법을 준수하고 복음을 좇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저희로 하여금 복음을 즐거이 받아들이게 하시며 그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찬미하게 하신다. 율법과 복음은 ‘주의 영광’ 즉 하나님 그분의 여러 측면들을 나타내 보여준다.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눈이 그것을 볼 때 영혼은 그로 말미암아 빛을 발하게 되며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율법의 거울 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움의 영광이 빛나며, 복음의 거울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비의 영광이 빛난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신자는 그 영광을 바라본다. 그 영광에 대한 사랑이 그의 안에 일어나며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이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 약속하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 날마다 영적인 대상과 하늘의 것들에 전념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연구나 묵상,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마음에 진리를 적용시켜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작용하심과 축복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단, 방법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였다”라는 말씀 뒤에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라고 덧붙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이 부활의 날 아침에 그의 백성들의 몸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변화시키시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지금 성령께서는 그가 내주하시는 자의 성품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신다. 이제 도덕적 변화의 특징을 지적하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비교하여보자.
첫째로, 성령이 영혼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시면, 하나님의 율법을 진심으로 생활규범으로써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그 권고에 따라 시편119편의 말씀에 응답하기 시작한다. 이보다도 더 거짓과 참된 회심을 분명히 구분해 주는 것은 없다.
둘째로, 자기 혐오의 삶이 시작된다.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하고도 지속적인 복종은 그분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주신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여야 할 영원한 의무 아래 있게 하였음을 깨닫는다.
셋째로, 진정한 겸손이 있게 된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사항들을 생각해 보면, 왜 겸손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자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성경 전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대해 체험에 있어 무지한 까닭에, 결코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는다(롬7:9-11).
넷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소생한 영혼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보면 볼수록 그는 여전히 자기 안에는 하나님의 법과 상반되는 것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으며, 참으로 여러 측면에서 자신이 매일 그 법을 범하고 있음을 더욱 더 깨닫게 된다.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보호하고 보증하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보호하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 중 아무도 멸망 받지 않을 것임을 아주 적나라하게 제시하셨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파멸로부터 보호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제시해 주셨다. 만일 우리가, 그가 알려 주신 것을 무시하고 그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 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크나큰 손실이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도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1:17-20),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1:5).
그리고 우리가 그에 대해 영적으로 밝혀졌을 때에만 오직 우리는 그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 그 위대함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라는 말씀이나“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말씀이나, 그 구절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모두 성령이시다.
전적으로 성령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성령을 제시하고 있다. 구속의 역사에 있어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예정하심으로 부터 시작되며,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즉 그의 무궁한 공로로 인하여 신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체로 행해진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진행자이며 모든 구속사역에 있어 능동적인 행위자이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령에 의하여 소생 되어질 뿐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보호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성령을 보내신 주요한 목적은 배교로부터 저희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즉 영원한 불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 영벌에 이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저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성령께서는 방종의 길로 행할 때 보호해주지 않으시며 오직 거룩함의 길에 있을 때에만 보호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토해낸 것을 다시 먹으려 하는 개나 진창에서 뒹굴려고 다시 들어가는 돼지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약속한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도덕적 행위자로 대우하시며 ‘사랑의 줄’(호11:4)로 저희를 이끄신다. 저희의 책임을 주장하시며 이같이 명하신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할인 보호하심과 우리가 해야 할 거룩함 안에서 인내, 그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를 유지함으로써 성취된다. 자기 백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과 사랑의 보살핌, 변치 않는 성실성에 대해 배울 때 하늘에 있는 우리는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가 자신의 약속을 선으로 이루셨는지 그 자세한 내용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같이 약속하셨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그의 섭리가 우리에게 외적으로 작용하시며 그의 은혜가 내적으로 역사하신다. 즉, 삶의 혼란과 폭풍 가운데서 보호해 주시며 무서운 타락에서 회복시켜 주시고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부터 우리를 소생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변화무쌍한 인생 순례 여정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보호하심은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성취 되어 진다.
그는 신자를 주시하며 지켜보시는 분이시다. 저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저희를 구하시며 세상의 악의 소굴에서 살아가는 저희를 지켜 주신다. 그리고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사59:19) 원수가 다가올 때 저희를 들어 올리신다. 어떻게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구원을 성취하시는가?
저희 안에 새로운 성품을 지속시켜 주시고 그것이 활동하고 작동하게 하심으로 서이다. 또한 저희가 ‘견고케’되는 은혜를 저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서이다(고후1:21).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타락함으로써 참된 행복의 길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래로 인간은 헛되이 안식과 만족을 찿으며 이리저리 방황하여 왔다.
즉 그들은“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롬3:12).
어느 누구도 거룩함과 행복의 길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찿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가르침 받아야만 한다. 그러한 가르침을 거듭난 자는 열심히 갈망한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에 대한 보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즉 연단 받은 믿음의 힘을 통해서이다(요일5:4). 믿음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인 거룩함을 이루는 영적 의무들에 대한 경건한 애정, 성향, 수행도 포함된다. 믿음 없이는 어떠한 사람도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믿음을 행할 수 없다. 믿음이란 매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 있으신 사역들이 이루어지는 것-히브리서11장이 명백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은 원수들이 가득한 땅에서 안전하게 인도함을 받는다(요일5:19). 은혜 안에서 보호되고 거룩함 안에서 계속 거하는 일은 맹목적인 확신이나 계속적인 보증에 의하여 진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중히 행하고 성실히 노력하며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든지 사용하지 않든지 간에 신자들은 틀림없이 하늘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과는 달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아무리 방탕하게 살지라도, 어떠한 악한 습관으로 계속 행할지라도 멸망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방탕함과 사악함에 빠지지 않도록 저희를 보호해주실 것을 보증하셨다.
성령은 보증하는 일을 하신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그 안에서(너희가)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이 비유는 상업적인 매매나 계약을 매듭지음에 있어 사용된 고대의 관습적인 방법(오늘날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에서 비롯되었다. 상인은 어떤 합의된 날짜에 물품을 인도해 주기로 약속하며 이에 대한 담보로서 구매자는 ‘보증’을 받는다. 즉 견증서나 표, 계약된 물품 중 소량의 분할 분을 받는다.
그러므로 보증이란 양측이 합의한 어떤 계약이 전제함을 추측하게 하며 매매의 조건으로 지니게 되는 상대방의 신용의 표를 돌려줌으로써 약속된 물건을 궁극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사람이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신자들 편에서는 특정한 조건들(죄에 대한 용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동의하며 회개와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 드린다.
하나님 편에서는 신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며 믿음으로 성화된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보증’은 매매된 물건이 실제로 주어지기까지 얼마간의 유예기간이 있음을 암시한다. 신자가 참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즉시, 그는 영원한 기업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가 온전한 축복에 실제로 이르게 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는 그 순간에 즉각적으로 우리를 하늘나라에 데려가지 않으신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 신 후 단 몇 일 내에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행할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즉,“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딛2: 13) 믿음이다. 그 바라는 바 소망은 곧 이것이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보증’은 단지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 합의된 전체의 일부분이다. 성령
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사와 은혜들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저 영광의 작은 시작이자 그 한 부분일 뿐이다. 은혜는 곧 영광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어린 아이가 완전히 장성한 성인들과 다른 것과 같은 그러한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마음의 성결과 순결은 장차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죄 없는 상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대한 서약이다. 보증은 그것을 받는 편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 주는 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보증은 아직 약속 단계에 불과한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자 견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보증이라는 이 상징의 적절함과 그 정확함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받는 영적인 보증은 오로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되 물리실 어떠한 위험도 없기 때문이다. 보증과 서약은 다르다. 왜냐하면 서약은 서약서가 되돌려질 때 다시 철회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보증은 취소될 수도 양도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며”그의 마음은 변하시지 않는다(롬11;29).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인침과 보증 두 가지가 우리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와 임재는 하나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고“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또 저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는 장차 있을 수확을 미리 예기케 하며, 그 수확의 첫 열매이다.
보증은 계약의 완결을 보장한다. 그것은 다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택함 받은 자 안에 있는 성령의 첫 번째 역사는 계약의 성공적인 완결에 대한 보장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성령께서 신자에게 보증하시는 바 그 기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원한 분 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8:17).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 깃을 지키시나이다”(시16:5). <아더 핑크의 성령론>.
성령은 열매를 맺고 은사를 주는 일을 하신다
성령은 열매를 맺는 일을 하신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4:12-15).
‘동산’이란 다른 땅과 구별되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그 소유주의 즐거움과 이용을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도 택함과 구속과 중생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며 분리된다. 동산에는 온갖 다양한 초목들과 꽃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서로 다른 개개의 구성원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 안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들이 있다. 동산에 있는 초목과 꽃들은 저희 스스로 자연적으로 자라나지 않으며 자생적으로 땅에서 솟아나지도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씨가 뿌려지고 심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잡초들만이 스스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 구성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탁월함은 저희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역사하심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저희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죄와 타락이라는 잡초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생명과 거룩함을 전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영혼 안에서 유지시켜 주신다. 그는 하늘의 은혜들을 전달해 주실 뿐 아니라 그것들을 촉진시키고 진전시켜 주신다.
저 ‘의의 나무들’을 심으신 분이 또한 그 나무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움돋게 하심’에 틀림없다(사61:3.11). 새로운 성품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동안, 그 자신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지만 전적으로 창조자와 공급자를 의지하여 그 도움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 의해서 맺혀지는 열매는 명백하게 ‘성령의 열매’로 불려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존귀와 영광은 오직 그에게만 돌려질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14:8).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사도 바울은 사역을 행하며 성령께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되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시는 방법이다. 아니 그보다는, 성령께서 우선 저를 열매 맺기에 적합하게끔 만드시는 방법이라고 해야겠다. 즉, 저희 속에 그리스도인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이다.
이 비유는 모태 속에서 어린 아이가 형성되는 것으로부터 취해졌다. 육신의 부모는 어린 아이의 몸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것들을 전해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기는 부모를 닮은 모양으로 형성되고 골격을 이루게 되고 수족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부패하지 않은 ‘씨’(요일3:9), 혹은 영적인 성품을 마음에 전하여 주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루어지게 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에 대한 성령의 열매 맺게 하심은 곧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심이다. 먼저 그의 마음속에서, 그 다음에는 그의 삶 속에서이다. 본래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았다. 우리는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고 사단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7-20).
그들이 맺는 열매가 곧 마귀의 자녀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구분 짓는 기준이다. 이 ‘열매’란 성령으로 인하여 택함 받은 자 안에 형성된 기질 내지 성향으로, 각자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4:7) 나타나게 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함으로써 거듭난 자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신다. 그 다음에는 모범을 닮게 하신다.
그들 안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덕성들은 타락한 자의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심어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함이다.
갈라디아서5장은 열매 자체에 대해서 그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후서1:5-8절은 열매의 순서, 혹은 그것이 맺어지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성령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스스로를 포도나무에, 제자들을 가지에 비교하심에 있어 나무는 몸에 해당되며 생명은 성령에 해당된다. 생명을 보급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그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시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도 열매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 없이는 연합도 안에 거함도 있을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5:22,23).
이 열매들은 고린도전서12장에서 열거 되여 진 성령의 은사들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성령의 은혜이다. 이 열매들은 행동을 수반하는 거룩한 하늘의 성향들이다. 사도는 영적인 마음의 주요한 특성들로부터 시작하여 개인적인 행위, 사회적인 가치, 그리고 실제적인 행동에 있어서 그것이 어떻게 작용되고 표현되는지에 대해 계속하여 기록하고 있다. 왜 이 영적인 은혜들이 ‘열매’로 불려지는지 그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다.
첫째로, 식물의 열매가 그 식물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처럼 모든 은혜들은 성령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이 은혜의 즐거움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것은 받은 자에게 되돌아오는 유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열매들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단수로 쓰여진 것은 성령의 사역의 통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성령의 열매는 언제나 불일치와 혼란을 일으키는 육신의 산물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분석하면 -
<사랑> 사도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어주신 것을 맨 처음에 쓰고 있다(롬5:5). 사랑 없이는 하나
님과 교제할 수도, 그를 기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희락>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며, 죄 사함에 대한 깨달음, 그리스도와의 교제, 경건의 의무들, 천국에 대한 소망 안에서의 기쁨이다.
<화평> 양심의 화평, 마음의 평안, 정신의 평정 상태이다.
<오래 참음>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화가 나게 되고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 동료 인간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관대하게 인내하는 것이다.
<자비> 고린도후서6:6절에서 언급한 ‘자비함’과 같으며 거칠고 심술궂고 야비한 기질과 반대되는 인자한 친절함이다.
<양선> 선행은 어떠한 되돌려 받을, 혹은 보답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추구하는 것이다.
<충성> 충실함은 믿음직스러우며 정직하며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온유> 양보는 자기 뜻대로 행하거나 자기 주장만 하지 않는 것이다.
<절제> 자기 통제는 모든 일에 있어 삼가고,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며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성령 사이에 협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맡은 바 책임은 우리의 은혜들을 마음에 품고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며 그에 반대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거부하는 일이다.
열매는 우리들이 이루어낸 소산도 산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베드로후서1:5절의 말씀이 명백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우리로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한다. 돌보지 않는 정원은 잡초가 자라게 되며, 그리하여 그 꽃과 열매들은 이내 짓 눌려지고 만다. 정원사는 계속하여 주의 깊게 그것들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만일 신자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기를” 바란다면 시편1편으로 눈을 돌려 묵상함으로써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이지 알아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15장을 다시 읽고 많은 열매를 맺는 조건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열심히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은사를 주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 중 특별한 일을 수행하도록 어떤 사람을 부르셨을 때 자신의 영, 곧 성령의 은사로 그를 무장시키신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와 일반적인 은사를 구별하지 못하였으며, 특별한 예외적인 은사들을 일반화시키려 애써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온 능력’, ‘성령 세례’, 혹은 ‘임무를 위한 성령 충만’을 추구하게끔 역설함으로써 극히 무절제한 방종이 조장되었으며, 또한 사단이 들어와 영혼을 미혹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파멸시키도록 문이 열려 졌다.
복음은 처음에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선포되었다. 그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말미암아 전파되었으며 그의 능력에 의하여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외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의 역사가 수반되었으며 이 모든 일은 ‘영의 직분’(고후3:8)으로 불려졌다. 초대 교회 시대 때에 교회를 진리와 평강 가운데서 보호하고, 동시에 성령의 특별한 은사가 실제로 교통되는 사이에(여기에서 성령을 받은 체 가장하며 속이는 경우가 보다 많이 보여졌다), 거짓 예언자들로 말미암아 속임 당하지 않게끔 저희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 도 자기 백성 중 어떤 사람들에게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내려주셨다(고전12:10).
이로써 성도들은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판단하고 식별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특별한 역사들이 중지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은사 역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시험하는 수단으로서 오로지 말씀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2:3,4).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의 처음, 곧 초대 교회 때 나타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한다. 그 은사들은 선포된 말씀을 확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아직 신약성경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은사들은 복음을 굳게 세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즉 믿음을 심어 주고 강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이다(고전14:22-25과 비교).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 은혜들로 구분되었던 것과 똑같이(갈5:22,23), ‘성령의 직분’도 여기에서 아홉 가지의 독특한 은사들로 묘사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지혜의 말씀> 고전12:8절은 강력한 대적들에 대항하여 복음을 지킬 수 있도록(눅21;15) 사도들에게 주어진(이 점에서 이 은사는 모든 다른 은사들보다 앞서 제시되었다) 특별한 은사였다.
<지식의 말씀> 그 당시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였다. 그 은사는 오랜 기간의 연구나 많은 경험 없이도 하나님의 신비들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초자연적으로 저희에게 부어주었다(행4:13참조).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곧 어떠한 위급한 경우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며, 담대히 순교의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은사이다(행6:5참조).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예언함>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직접적인 영감 내지 계시이다.
이들 성령의 특별한 감동과 은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세대 전체를 통하여 지속되도록 의도되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은사들이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는 것은 여러 고찰로부터 명백히 결론지어진다.
이 은사들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음은 그리스도의“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라는 말씀이, 마가복음16:20절의 말씀에서 생략됨으로써 넌지시 암시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종들에게 이 같은 은사에 의지하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가 있다.
이 세대의 초기, 즉 초대 교회 때에는 특별한 직분들(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특별한 은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시대의 계승자들이 이 특별한 직분들을 맡도록 명해지지 않는 것처럼 또한 결코 이 특별한 은사들을 부여 받도록 의도되어지지 않았다.
이 은사들은 그 특별한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행8:13-21. 10: 44-46. 19: 6. 롬1:11. 갈3:5. 딤후1:6참조). 우리 곁에는 이제 더 이상 사도들이 없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사들(그 은사들의 교통함은 ‘사도의 표’의 근본적인 요소였다.
고후12:12)도 더 이상 있지 않다. 오직 예언자만이 예언을 할 수 있다. 선지자와 교사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사실에 확실하게 주목해야 한다(고전12:28,29. 엡2: 20. 3:5).
선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아니하며 교사는 여전히 존재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확실하게 교통하심 받은 바를 말하도록 그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이다(벧후1:21).
성령이 오늘날에도 활동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은밀히 행하시며 사도 시대 때처럼 공공연하게 나타나지 않으신다. 즉 그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방법으로 행하신다. 진리는 가르쳐진다. 그러나 사도들과 저희가 파견한 자들이 선포했던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는 아니다.
오늘날 행해진 최상의 설교나 가장 잘 쓰여진 글들도 표준이 아니다(만일 성령으로 영감 받았다 해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체 내에 결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령은 그에 대한 책임이 없으시다.
성령이 오늘날 하시는 일은 목회에 필요한 일반적인 은사들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받은 자는 이를 연구하고 사용함으로써 마땅히 그 은사를 진전시키고 계발시켜야 한다. ‘하늘로부터 나온 능력’, 혹은 특별한 ‘성령의 충만케 하심’을 추구하는 일은 빛의 천사들인 양 가장하는 악한 영들에게 지배되는 심각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다<아더 핑크의 성령론>.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