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시대·한대 칠기 铁器时代 · 汉代漆器
출처: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한대의 솥, 주전자, 프랑슘, 병, 우, 잔, 컵, 접시 및 기타 식기, 혼수 및 상자 및 기타 화장 도구와 탁자 및 병풍과 같은 가구를 포함하여 많은 유형과 품목이 있지만 주로 식기 위주 용기입니다.
여러 곳의 한족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썩었고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후난성 창사 마왕퇴, 후베이성 강릉 봉황산, 운몽대분묘 등지의 한묘에서 출토된 칠기는 수량이 많고 종류가 많으며 보존이 매우 우수하고 완벽하여 한나라 칠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 장사 마왕퇴 1호 한묘 출토 서한의 이중층 9자 옻칠 혼자인 구이저우성의 청진, 간쑤성의 무위 및 조선의 평양, 몽골의 노옌우라 등지의 무덤에서 출토된 한대의 칠기는 상세한 명문이 있어 당시의 공관제도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한나라 칠기는 정교하게 제작되어 색채가 선명하고 무늬가 아름답고 장식이 정교하여 귀중한 기물입니다.
그래서 '염철론·산부족'은 '棬 한 잔은 백인의 힘으로 병풍 하나로 만인의 공을 세운다'고 말합니다.한나라 궁정에서는 칠기를 음식 그릇으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일부 칠기에는 '대관', '탕관'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실의 식사를 담당하는 관서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며, '상림'이라는 문구를 쓴 것은 상림원의 궁관에서 사용하는 물건입니다.신망시대 칠판명문에 따르면 당시 장락궁에서 사용된 칠기는 옻칠판의 한 종류, 즉 수천 점에 달했다고 합니다.
귀족 관료 집안에서도 칠기의 사용을 옹호하며, 종종 '장사왕후가(盘)', '轪후가(後家)', '왕씨옥(王氏牢)' 등과 같은 봉작이나 성을 기호에 적어 소중함을 표시하기도 합니다.음식 그릇으로서 칠기는 청동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한나라 지배층에게 사랑받고 제작이 매우 성행하여 청동 용기를 어느 정도 대체했습니다.
▲ 장사 마왕퇴 1호 한묘에서 출토된 서한 운기문 칠방의 태질과 제조 방법에는 주로 목태와 협 纻태의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일부는 대나무 태아입니다.
목재 태아의 제조 방법에는 회전, 절단 및 도려내기, 말기 세 가지 유형이 있으며 다른 기관 모양은 다른 방법을 채택합니다.
纻타이어는 먼저 나무나 흙으로 기형을 만들어 내부 거푸집으로 만든 다음 여러 겹의 삼베나 견직물을 내부 거푸집에 부착하여 겹겹이 칠하고, 다져진 후 내부 거푸집을 제거하고 삼베나 견직물의 纻타이어를 남기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합니다.
▲ 창사 마왕퇴 1호 무덤에서 출토된 서한 운룡문반 문양과 장식용 칠기에 문양을 시용하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① 옻칠 그리기.생페인트로 반투명한 옻칠액을 만들고 각종 안료를 첨가하여 칠한 기물에 그리면 색이 밝고 잘 떨어지지 않으며 대부분의 옻칠기의 무늬가 이 방법으로 그려집니다.
②유채색 유즙(오동유일 수 있음)을 사용하여 안료를 블렌딩하고 칠해진 기물에 그리며, 그려진 무늬는 오랜 노화로 인해 쉽게 떨어집니다.
③바늘 조각은 바늘 끝을 사용하여 칠해진 기물에 무늬를 새기는 것을 '송곳화'라고 하며, 어떤 기물은 새긴 실의 틈에 금채를 채워 넣어 유기의 금과 은의 어긋남과 같은 무늬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④금은박은 금박이나 은박을 이용하여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 기물의 페인트 표면에 부착하여 '금은의 평탄화'와 유사한 효과를 나타냅니다.문양은 섬세하고 유려한 것이 특징이며 가장 흔한 문양은 패턴화된 용봉문, 운기문, 화초문, 각종 기하학적 문양이며 사실적인 짐승형, 새형, 물고기형 등의 문양도 있습니다.전한의 칠기는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를 가지고 있으며, 동한의 칠기는 비교적 단순한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 후베이성 강릉 봉황산 167호 무덤에서 출토된 서한 운기문 평반은 서한 중기부터 동한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칠기 문양은 신선, 효자 및 기타 인물 위주의 이야기 그림입니다.
금은박에 붙은 무늬에는 날짐승, 길짐승, 수레와 말, 인물 및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 등이 있습니다.
전한 중기 이후에는 접시, 병, 상자, 혼수 및 기타 기물의 입가에 금 또는 은으로 도금된 구리 테를 두르고 컵의 양쪽 귀에 금으로 도금된 구리 껍질을 두르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를 '은구황귀' 또는 '단추기'라고 합니다.
병, 혼수, 상자와 같은 일부 칠기의 뚜껑에는 종종 금도금된 구리 장신구가 부착되어 있으며 때로는 수정이나 유리 구슬이 박혀 있습니다.
▲ 후베이성 강릉고대 5호 한묘 출토 서한 권운문 옻칠 도자기 항아리 공방과 공관 한나라 여러 곳에서 칠기가 생산되었습니다.전한 초기에 칠기를 만드는 수공업 공방은 대부분 지방 관영으로 군에 소재했습니다.
광둥성 광저우시춘, 광시좡족자치구 구이현 뤄포완, 산둥성 린이 은작산, 후난성 창사 마왕두, 후베이성 강릉 봉황산 등 서한전기 무덤에서 출토된 칠기는 각각 '번우', '푸산', '쥐시', '청시'로 낙인이 찍혀 있어 각각 남해군의 번우(지금의 광둥성 광저우), 위린군의 포산(지금의 광시좡족자치구 구이핑), 청두(성 청두현), 촉군 청두(成都)의 관할 도시입니다.
쓰촨은 칠기 제조업이 가장 성행하며 청두의 제품은 창사와 강릉 등지로 대량으로 운송 및 판매됩니다.안후이(安安徽)성 푸양(阜陽) 쌍고퇴(雙古堆) 여음후(如陰侯) 묘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여음(女陰)'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제조를 담당하는 관리들과 장인들의 이름이 명문에 적혀 있어 제후왕과 열후들도 자체적으로 수공업 공방을 만들어 칠기를 비롯한 각종 기물을 제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에서 무제까지의 초기, 한나라 중앙정부는 각지에 공관을 두었는데, 그 중 촉군(청두)과 광한군(재동)의 공관이 칠기를 대량으로 제조했습니다.주로 궁중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기물명문에는 '승여(乘輿)'라는 글자가 많이 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변군의 관리와 소수민족의 수령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촉군과 광한군의 공관들이 만든 칠기도 구이저우성의 칭전, 몽골의 노옌우라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이 칠기들의 연대는 가장 먼저 서한 소제 시원 2년(기원전 85)이고, 가장 늦게는 동한과 제영원 14년입니다.
▲ 후베이성 강릉고대 28호 한묘에서 출토된 서한추화운기문빗집 장인과 장인의 조직체제는 명문에 따르면 촉군과 광한군 공관 중 칠기를 만드는 장인은 직종에 따라 '소공', '치공', '상공', '동이황도공', '동단추황도공', '화공', '공', '청공'으로 구분됩니다.소공은 목재로 만들어지며 클램프 纻기가 있는 경우 소공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예를 닦는 공은 칠공입니다.작업은 때때로 '㲺 작업'을 하는데, 페인트 작업임을 알 수 있으며, 사전 페인트 작업과 추가 페인트 작업입니다.구리가황도료공과 구리가황도료공은 옻칠잔에 박힌 구리가마와 옻칠쟁반, 옻주전자 등에 박힌 구리띠에 금을 입힌 것입니다.
화공은 기물에 무늬를 그리는 것입니다.'공'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조각가의 가능성이 높았고, 명문이나 무늬를 새기는 것뿐만 아니라 주로 칠기에 광택을 내도록 정성껏 긁어내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세척 작업은 만든 칠기를 다듬고 세척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검사 작업입니다.제조공은 공장 주임입니다.같은 작업장에서 말끔한 작업자의 수가 가장 많고, 상근, 황도장, 그림 작업자가 그 뒤를 잇고, 청소 및 건조 작업자의 수가 각각 1명으로 가장 적습니다.
비교적 이른 소제(昭帝) 기원 2년의 칠기 비문에는 일꾼이 말뚝 박기, 화공, 공예가만 있었고, 성제 이후 칠기 비문에는 상공, 황도공, 청소공만 추가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분업이 점점 더 세분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같은 장인이라도 때로는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작업을 겸임합니다.공관 중의 관리에는 호공졸사, 장, 승, 속관, 영사가 있습니다.주임자는 주로 행정 책임자이고 승리는 그의 부직이며 그들의 지위와 대우는 현장과 승려에 해당합니다.
▲ 후베이성 운몽수호지 47호 한묘 출토 서한돼지 입모양 칠함 속관은 장, 승하의 사무관리입니다.
영사는 문서를 관장하는 관리입니다.간병인은 중앙정부의 소부(小府)에서 파견한 사람으로 공관(工官)에서 감시·감독하는 직위로 질위는 높지 않으나 권력은 매우 큽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2년의 칠기명문에는 호공졸사(護工卒史)라는 이름이 장(長), 승(丞)에 이어 성제(成帝) 양삭(陽朔) 2년(前 23)의 칠기명문에서도 호공졸사 이름을 맨 앞에 올리기 시작하여 이후 맞춤화되었습니다.
이는 성제 이후 촉군과 광한군 공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수도 장안에 있는 공관들도 칠기를 제조하는데, 그 제품은 간쑤성의 우웨이와 북한의 평양에서 발견되며, 공관의 이름은 '고공', '우공', '급공'입니다.
'고공'과 '우공'은 모두 소부의 공관이며, '공여'는 '고공' 또는 다른 공관일 수 있지만 소부의 관할이기도 합니다.장안에 있던 이 일꾼들은 놋그릇도 만들고 칠기도 만들었습니다.
▲ 쓰촨성 몐양시 융싱진 솽바오산 한묘에서 출토된 서한 칠기 마차에서 만든 칠기의 명문은 작업장의 노동자도 '화공', '공', '도공' 등의 분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관리로는 '령', '우승', '속관', '영사', '인색꾼' 등이 있습니다.'령'은 수관이고, '좌승'과 '우승'은 모두 그 부직이며, 후자는 칠기 제조를 주관합니다.고고학적 발견으로 볼 때 장안 공관의 제품은 촉군과 광한군 공관의 제품보다 수량이 적을 수 있습니다.
분류:고고 표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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