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5
1월6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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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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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LxitN2LdVE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임영준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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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수많은 은총!>
그 누구에게든 ‘최초 활동 무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의 베이스캠프로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도시, 거룩한 도시의 상징 예루살렘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유다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할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부들과 농부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한적한 시골,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종교적인 관습이나 전통,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다 지방과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던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깡촌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휘황찬란, 위풍당당한 당대 대도시들의 위선과 타락을 산산조각내기 위해 작고 낮은 도시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작고 낮은 도시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잔뜩 부풀린 사람들, 자칭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서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성탄 대축제 기간을 끝내고 이제 다시 한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회개해야겠습니다.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작은 것도 아름답고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고통이나 십자가도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온통 기쁨꺼리로 가득한 축제의 장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고통을 안긴 이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한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셨다가 철퇴를 내리시는 징벌의 하느님의 아니라, 돌아갈 때마다 활짝 팔을 벌리시며 또 다시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 삶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사실은 선물이요 축복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 갖은 결핍과 죄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란 존재, 흙부스러기처럼 나약하고 머리칼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안심하고 기쁘게 지상 생활을 엮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저 사람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그를 귀히 여기고 그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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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EV33ziWK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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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마음 여는 법: 작은 틈새 찾기
어떤 분이 요즘 믿음에 불타 그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하려 하는데 거기에서 반작용이 너무 커서 조금은 힘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그분에게 저는 ‘너만 잘났냐?’라는 반발의 마음이 들지 않게 살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이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가끔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부모에게 떠밀리다시피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 청년이 들어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고해본 지 얼마 되었는지, 죄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꽤 오래 냉담하던 입이 반쯤 나와 있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진짜 죄 없어요.”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을 읊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십니다. 빛이 의미 있는 곳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굳게 믿게 하는 무언가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주려고 간암 말기 환자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고해성사를 거부하며 “나 죄 없어!”라고 외쳤습니다. 임 신부님은 속으로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하며 돌아섰습니다. 꽉 막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이 어둠임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빛을 거부해 목을 매 자살하게 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빛을 차단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빈틈을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탄만이 빈틈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나름 잘 산다고 교만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의 빈틈을 공략하는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를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 강론 때 조금 합당하지 않은 농담을 하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새벽 미사를 했던 것, 감기 걸리고 마스크 안 쓰고 미사 하는 것 등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신부님은 회개하셔야 해요!”라고 말하면 저도 “본인이나 잘하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어린 관심으로 그러한 것들을 말해줄 때는 ‘아, 바꿔야겠구나!’라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시작되고 그 믿음을 파괴할 작은 틈을 찾아 누구도 빛을 넣어주지 못한 데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를 들어 ‘멕베스’를 생각해봅시다.
맥베스의 비극은 세 마녀의 예언을 맥베스가 맹목적으로 믿고, 주변의 누구도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하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그리고 미래의 스코틀랜드 왕이라는 칭호로 인사를 건넵니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말은 맥베스의 마음에 야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마녀들의 말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맥베스는 이 예언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가 코더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를 들은 레이디 맥베스는 그의 야망에 불을 지피며, 맥베스가 직접 행동해 던컨 왕을 살해함으로써 예언을 이루라고 부추깁니다. 만약 레이디 맥베스가 던컨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나, 던컨이 친척이자 집에 초대받은 손님임을 상기시켰더라면, 맥베스의 결심은 약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언은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운명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맥베스는 예언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마녀들의 반쿠오 후손에 대한 예언 때문에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는 반쿠오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암살하려 하지만, 반쿠오는 살해되었지만 플리언스는 도망칩니다. 누군가 마녀들의 말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예언이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더라면, 맥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재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의 확실성을 믿는 그의 집착은 그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맥베스의 불안감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마녀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녀들은 새로운 애매한 확신을 제공합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를 해칠 수 없다.”라는 말과 “ "버넘 숲이 던시넌 언덕으로 움직일 때까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러한 말은 맥베스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자만심을 심어줍니다.
누군가 숲이 인간의 위장으로 인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이나,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지적했더라면, 그의 자만심은 누그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맥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맥더프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한편 레이디 맥베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미쳐가며,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콤과 맥더프가 이끄는 군대가 버넘 숲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위장하며 던시넌 성으로 진격하자,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는 마녀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고, 맥베스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을 굳게 유지합니다. 맥더프가 자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났음을 밝히자, 맥베스는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마녀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그의 행동과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맥베스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맥베스의 비극은 마녀들의 예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덕적 논리를 제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은 야망과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맥베스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그의 길에는 파괴와 비극만이 남았습니다.
꽉 막힌 사람을 설득하려면 그가 믿는 믿음의 빈틈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봐야 이미 세 마녀를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방법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은커녕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도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녀의 믿음을 조금씩 허뭅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남편과 살아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참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 당신임을 알리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는 귀를 더 막아버렸을 것입니다. 항상 꽉 막힌 사람은 그 사람의 믿음을 깰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서 그 안으로 빛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어둠의 믿음을 깰 작은 빈틈으로 들어오는 믿음의 빛으로 자신이 어둠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차차 빛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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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선 음악회를 마치고, 수익금은 장애인 학교에 전달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는 18세 이상인 학생과 18세 이하인 학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8세 이하의 학생들은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반 학교에는 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급이 따로 있어서 선생님들이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토요일에 장애인 학교에 와서 지낸다고 합니다. 18세 이상인 학생들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장애인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수익금 전달하는 날은 학생들의 성탄 파티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이사진이 선임되었습니다. 저는 장애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는 목사님,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님, 그림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 음식을 준비하는 봉사자,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는 미용 봉사자, 학생들의 건강을 챙겨주시는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다운 증후군 학생과 자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일반 학생과 조금 다른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장애인 학교를 도울 수 있어서 제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내년에도 자선 음악회를 한다면 그 수익금을 기꺼이 장애인 학교를 위해서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논쟁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과 같습니다. 교회와 다른 교리를 이야기한 사람은 이단이 되어야 했고, 교회는 처음으로 이단을 단죄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공격입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는 막강한 힘으로 교회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는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자비와 용서의 종교는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했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내부의 분열과 갈등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같은 배를 탔던 교권과 왕권은 각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도래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류의 영성과 지성을 물질의 ‘틀’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위기는 신앙과 삶이 다른 겁니다. 교회의 전통과 유산이 사라지고, 세속화의 바람이 들어온 겁니다. 성소의 감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지 않고, 세속의 가치와 판단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진 걸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밝아지듯이, 빛이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내 마음 안에 있는 거짓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사랑을 담아 빛이신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듯이, 신앙 안에서 작은 실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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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 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에서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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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주요한 기준 하나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고 고백하는가 그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표현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인간’이시라는 믿음의 여부입니다. 이를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성탄과 공현의 의미를 깊이 되새길 수 있습니다.
주님 공현 뒤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뒤 유다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물러가시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하는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여기’ 이 세상에 왔음을 말씀과 행적으로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 선포가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4,16)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든 당신의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구원이 내게 필요함을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인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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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4,12-17.23-25)
1)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라는 말은, 다음 증언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4.9.12)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받으려면, 우선 먼저 ‘내가’ 죽음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 생명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합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2) 산상 설교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라는 말씀이 있고, 루카복음을 보면,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면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 줄 알면서도,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 그래서 빛을 거부하고 짙은 어둠 속으로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어쩌면 지옥은, 가고 싶어서 가는 자들만 가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해서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지옥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곳에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을 텐데, 천국보다 지옥이 더 좋다고 가는 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빛’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천국보다 지옥이 더 좋다고 하면서 자기 발로 지옥으로 가는 자들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비참한 곳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지옥에서는 모든 희망이 완벽하게 사라져서, 그곳에는 오직 ‘절망’만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대한 후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후회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곳, 바로 그런 곳이 지옥입니다.
4)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 병을 치유하는 약은 용서뿐이고, 용서는 주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되는 길은,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을 억압하는 한계입니다. 그 한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길은, 주님을 믿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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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땅, 거칠고 척박한 땅으로 가십니다. 즈불룬과 납탈리,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이며, 가난과 고통의 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듯이, 이제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회개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당신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화해하고, 내 주변의 이웃을 돕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행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배워 그분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주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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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초기 교회는 구약의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다가 구약에 없었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정의가 또한 큰 분수령이었습니다. 유일신이었던 구약의 신관(神觀)은 사람들에게 무리가 없는데, 삼위일체로서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큰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 서간의 이러한 배경에서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과 구분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1요한 3,2-3)
이렇게 초대 신앙의 공동체는 서로 갈라지는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요한 서간 저자는 이런 문제를 잘 지적하며 세상에 속하는 것을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죽고 나서 공적으로 당신의 소명을 펼치십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복음 선포의 시작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님 안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주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마태오는 주님 소명의 내용을 간략하지만 전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로서의 첫발을 내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어둠이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육신의 병이지요.
건강할 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병이나 큰 상처를 받으면 먼저 두려움이 앞서고 실망 또한 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어둠이라면 죽음이지요. 이 어둠도 우리에게는 고통도 주지만 두려움도 줍니다. 그리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두려움뿐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육신의 병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 중풍병자들은 주님을 뵙고 치유가 됩니다. 예언자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큰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즈불룬과 납탈리는 갈릴리 부근에 있는 지방입니다. 열두 지파들이 가나안의 정복 후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분배받았던 관할 지역은 그대로 지파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이래저래 천덕꾸러기입니다. 우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고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점령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이 이교 문화와 종교까지도 강요당했기 때문에 ‘순수성이 떨어진다’라고 유다로부터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분위기에서 즈불룬과 납탈리를 추겨 세우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간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8,23-9,1)
아시리아의 지배가 끝나고 남유다도 바빌론에게 지배당하고 유배의 땅으로 끌려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북부 이스라엘 대한 감정이 풀리지 않고 계속 배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골이 깊은 감정이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유다가 생각하는 것을 넘어 포용하고 이방인의 세계에게 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마태오는 과거의 감정을 딛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선포되고 있음을 알리고있습니다. 과거에 예언자도 이루지 못했던 소명을 이제 예수님 시대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을 허물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의 대상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과 요르단 건너편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계시는 갈릴래아로 모이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조건은 이제까지의 불의에서 벗어나 ‘회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하 그릇된 가르침에서 올바로 그들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둘러싸고 아예 부활을 부정하거나, 주님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육신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단으로 흐르는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새해에는 죄인 편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하며, ‘있는 사람’, ‘편한 사람’, 내게 이로운 사람‘ 편에 서지 말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 소외된 이웃을 사랑해야 되겠지요. 조급하고 인색한 세상 뜻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며 매사 ‘그러려니’하며 긍정적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새해에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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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배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배움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릇이 바뀌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중)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그릇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라는 말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 본당에서 매주 성경 강의를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강의했던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즉, 앞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며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공부하기 전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그릇이 바뀌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움은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움을 멈춰야 할까요? 아이들은 공부가 싫다고 말하고, 청소년은 공부가 지겹다고 합니다. 중장년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노년이 되어서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합니다. 그릇이 바뀌지 않으니 계속 똑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이 바뀌어야 행복할까요? 바뀌지 않아야 행복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새 물건을 사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움의 시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배움을 통해 바뀌게 되는 나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똑같은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도파민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도파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설수록 새로운 배움이 계속됩니다. 그 새로운 배움으로 행복이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실제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사람들이 데려온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고쳐주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환자들만 치유하시는 의사의 역할만 하셨을까요?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그릇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알리게 됩니다.
우리의 그릇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알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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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마태오 4,12-17.23-25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예수님과 군중)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서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님
가까이
오시니
나
가까이
다가가요
믿음에
믿음으로
기쁨에
기쁨으로
희망에
희망으로
사랑에
사랑으로
품음에
품음으로
베풂에
베풂으로
돌봄에
돌봄으로
섬김에
섬김으로
돋움에
돋움으로
살림에
살림으로
님
가까이
오시니
나
가까이
다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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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관심>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대부분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허약한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와 병원 복지시설은 이미 우리 마음에 설립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힘든 사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알아봐야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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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제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께서, 오늘은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드러내십니다. 아기의 모습일 때에는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갔다면, 어른의 모습일 때에는 그분께서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이 다른 점이지요. 그런데 그런 차이점 가운데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진 게 없고 힘이 없어서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작고 약한 이들에게, 세상으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이방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춰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일부러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는 이들, 부자들과 권력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일부러 외면하시거나 배척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예수님께 무관심했기에,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핍박하기까지 했기에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반면 이방민족들과 교류가 잦다는 이유로 거의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갈릴래아나 요르단 건너편, 즈불룬과 납탈리 땅 주민들은 자기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각박한 세상살이의 어둠, 고통과 시련의 어둠 속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 비춰주신 구원의 빛을 금새 알아보았고 그 빛에 그들 신앙의 빛이 더해져 더 밝게 빛났던 것이지요.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심지어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이들까지 그 빛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면서 사람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한 가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שב)를 직역하면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 이 그림문자는 ‘집을 무너뜨리는 모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머무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전에 살던 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 전에 욕망과 고집에 휘둘려 살던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한편 ‘새로운 집’은 빵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뜻하지요. 따라서 제대로 회개하려면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그 말씀이 나를 통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내 삶의 집을 짓고 그분으로부터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당신께서 구세주이심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분의 표징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따르는 이들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분명하게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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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인터넷을 여니 1.3일부터 1.6일 새벽 지금까지 한남동 공관 앞에서 고스란히 눈을 맞으며 추위에도 불구하고 20-30대 여성들 주도의 은빛 우산을 쓰고 은빛 우의를 입은 수많은 은박 탄핵시위대의 정의롭고 순수한, 간절하고 절실한 나라 사랑에 코끝이 찡하며 가슴 먹먹한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이 또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자 역사의식의 발로요, 이 연대의 힘이 국민을 일깨우고 나라를 살린다 생각이 듭니다. 전번의 남태령대첩에 이은 한남동대첩이라 명명하네요. 언젠가 어느 신자의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확인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상하자 마자, 또 취침전 십자가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입니다. 요즘 하얼빈 영화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안중근 토마 의사가 남긴 삶의 가르침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세월을 낭비하지 마라.”
요즘 세계적 정치지도자였던 독일 최초의 전임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라는 회고록을 읽고 있습니다. 그의 감동적 신앙 고백 일부를 나눕니다.
“‘주여, 저를 굽어 살피소서.’ 나는 선서문 말미에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 종교적 차원의 맹세없이도 선서할 수 있었지만 내게 이건 아주 중요했다. 나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주여, 저를 굽어살피소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도 하느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을 쓰게 된 지금 돌아보니, 나의 총리 재임 시절, 그러니까 임기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한 지난 16년 5860일 동안 매일의 혼란스런 사건들 너머에서 나를 붙들어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참으로 기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 교육자들을 알현할 때 하신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희망을 잃는 것을 피하고 날마다 그 희망을 키울수 있을까? ‘날마다의 투쟁중에,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다(Amid daily struggles, keep eyes on Christ).”
마음 깊이 각인하고 싶은 대목은 괄호안에 영어를 집어넣습니다. 위 모든 내용들이 우리의 회개를 북돋웁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노력하며 산 삶인지 깨닫습니다. 결론은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자는 것이요,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이요 언젠가는 어김없는 죽음입니다. 이래서 늘 반복하여 강조하는 내 인생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했을 때의 시점(時點)을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성탄시기가 끝나가니 오늘 복음은 바야흐로 갈릴래아 전도가 시작됨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펼쳐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말씀이 그대로 통쾌하게 실현됩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의 어둠의 현실은 똑같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의 역설처럼 여전히 어둠은 짙습니다. 어둠 속의 큰빛이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에도 호소력을 지닙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큰 빛이신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회개하여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삶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후,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니 예수님의 눈부신 활약상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합니다. 온통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에 전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일이 회개입니다.
주님께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며 주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저절로 치유되는 영육의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한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안에 있기에 회개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입니다. 회개를 통해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치유요,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 돌아가 제자리에서 제본분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회개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제자리의 정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1서 1독서에 대한 답도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회개를 통한 계명에 충실한 삶이요 영의 올바른 식별이니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속한 삶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회개의 삶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회개의 삶은 믿음과 사랑의 계명 실천의 삶으로 입증되고, 계명의 실천과 더불어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 일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회개의 열매가 바로 믿음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앞서 요한 사도의 사랑의 권고가 생각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래야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참된 회개 은총이 제멋대로의 감정적 사랑이 아닌 진리 이신 주님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할 이기적 불순한 우리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할 “진리 안에서의 행동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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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공현의 회개>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어제 공현 대축일 본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어제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별의 인도로 성자를 이민족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끄시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우리도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기를 비는 내용입니다.
보여줘도 봐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주님께서 당신을 공현하셔도 우리가 보지 않으면 주님의 공현은 내게는 헛것입니다.
공현 곧 모두에게 공적으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어떤 사람은 보지만 어떤 사람은 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아기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주님께서 이제 어른이 되어 공적으로 등장하시며 첫 말씀을 이렇게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의 오심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어도 그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공현의 회개를 묵상해봤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여러 차원에서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순시기의 회개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삶에 대해 회개하고, 부활 시기의 회개는 여전히 죄의 어둠 가운데 사는 삶에 대해 회개해야겠지요.
그렇다면 공현의 회개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보여주셔도 보지 않는 죄와 보지 못하는 죄로부터의 회개인데 우리는 왜 보지 않고 왜 보지 못하며, 왜 어제 삼왕처럼 보고픈 갈망과 보려는 열망이 없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삼왕처럼 어둔밤을 겪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어둠 속에서 별을 찾지도 보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를 볼 때 어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을 볼 때 어둠 곧 절망에 빠지지 말고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하늘을 보고 하늘의 별을 봐야 하며, 하늘의 별이 가리키는 주님을 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어둠에서 빛을 찾고 빛으로 참 빛이신 하느님을 찾는 회개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공현하지 않는 죄로부터의 회개입니다. 우리는 삼왕처럼 별을 보고 그 인도를 받는 사람이자 동시에 빛이 필요한 이들에게 별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별이야!’ 하고 지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린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하늘로 오를 수 있게 되고 그분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신성을 지니게 된 고귀한 신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 공현의 또 다른 모습인 주님 세례 축일에 기념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도 주님의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고, 이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을 공현하고 하느님 나라를 공현하는 자들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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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예수님의 땀!>
오늘 복음(마태4,12-17.23-25)은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면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땀'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까지 행하셨던 '예수님 공생활의 모습'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흘리셨던 '예수님의 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겪고 있는 문제들에 함께하셨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치유 기적의 소문을 듣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땀 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또 그 삶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인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떤지? 예수님처럼 땀 흘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땀 흘리고 있는 이들과 사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치유 받고 있는지?
한번 각자의 성소(삶의 자리)에서 나의 모습을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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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우리는
모든 나라
가운데
하늘나라를
향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참인생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가까이 온
하늘나라를
만나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얼룩진
거짓의
껍데기를
벗고 새롭게
만나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회개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회개의 삶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시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이
하늘 나라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공현은
우리네 삶의
새로운 생활의
물꼬를 트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축복은
우리들의
마음과 실천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늘 나라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실천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하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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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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