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 가도 못 하는 50년 역사의 한센병 치료기관
50여 년간 경기 의왕시 성라자로 마을에 자리 잡아 수많은 한센인 치료와 관리를 해 왔던 한국한센복지협회 건물 외관. 이제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됐다. 한국한센복지협회 제공
“주한 교황청대사에게도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가 교황청에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한국한센복지협회는 최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실한 목소리로 지인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현재 경기 의왕시 원골로에 위치한 한국한센복지협회는 50년간 지켜온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갈 곳도 없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한센병은 과거에 나병으로 불렸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인해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질환이다. 협회는 바로 국내 한센병 환자들의 복지와 지속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한센병과 관련해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업을 하는 곳이다. 한센병 환자의 진단, 치료, 연구, 교육 등 모든 분야를 관리하는 중이다. 협회는 피부과와 가정의학과 등의 의원도 운영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협회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원골로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곳에 터를 잡게 된 배경은 천주교와 관련이 깊다. 한국 최초 천주교 한센병 환자 복지시설인 성라자로 마을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초대 원장인 이경재 신부가 마을 내 한센인 치료에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협회 유치를 권유하는 요청이 있었다.
결국 협회는 성 라자로 마을 내의 부지 약 3400평을 50여 년간 무상 임대한다는 계약을 천주교 수원교구와 체결하게 됐다. 이곳에 자리 잡은 협회는 50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룩해냈다. 한센병 치료뿐만 아니라 학술 및 연구까지 업무를 확장시켰다. 예전에 하지 못했던 한센병 역학조사, 진단 및 검사 방법 개발 그리고 임상 치료 등 한센 사업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한센인 입원 시설은 전국에서 오는 환자들의 신경통, 피부 궤양, 후유장애 수술 등 다양한 치료도 해오고 있다.
그런데 50년간의 부지 무상사용 약정이 2025년 4월 만료된다.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는 천주교 요청에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부지 소유주인 천주교 수원교구는 임대 기간 만료 이전에도 여러 차례 부지 반환을 요구해 왔다. 이에 협회는 고민이 쌓여가고 있다. 청사를 이전하기 위해 그동안 수차례 타 지역을 물색 해왔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무엇보다 님비 현상이 컸다. 이전 지역에서 협회를 기피시설로 인식해 주민 반대가 거세서 번번이 좌절됐다. 1996년 첫 시도가 있었다. 충북 청원군이었다. 정부로부터 청사 신축이전 예산도 받았지만 지역 주민 반대로 무산돼 그 예산은 고스란히 반납됐다.
또 서울 대방동에 청사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해당 지역 주민의 협회 이전 절대 반대 시위 때문에 무산돼버렸다. 한센병은 좋은 약 덕분에 완치도 가능한 병이 됐지만 이러한 님비 때문에 졸지에 이도 저도 못 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협회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현재 위치에서 한센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현 부지 일부를 매입해서 한센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천주교 수원교구에 요청했다. 하지만 천주교로부터 “가톨릭 복합타운 조성 관련 자체 복지사업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수용 불가 통보를 받았다. 당초 약정대로 이전해 달라는 답변만 받은 셈이다.
한센병 환자 수는 국내에 약 8100명으로 매년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국내 외국인 한센병 유입의 증가로 인해 매년 외국인 신환자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선 점차 잊혀가는 희귀질환이 아니라 결핵처럼 언제든지 계속 생길 수 있는 질환이 됐다.
협회는 천주교의 지원이 목마른 상황이다. 더구나 한센병 환자들의 피부과 진료를 위해 피부과가 부속으로 있는 협회의 장소도 접근성이 좋아야 돼서 무작정 인적이 없는 지역으로 옮기는 것도 어렵다. 협회 김인권 회장은 “외국인 한센병이 지속적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치료와 연구가 지속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관심이 꼭 필요하다”면서 “그간 한센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천주교 수원교구 측에 늘 감사드리며 마지막 한 명의 한센인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협회와 천주교가 책임진다는 큰마음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