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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경종실록
1.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955년-981년. 재위기간: 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광종이 죽자 고려의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광종대 말기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던 호족들이 경종(景
宗)의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대의 수모를 앙갚음학기 위
해 복수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고려 조정엔 또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伷), 자는 장민(長民)이다. 965년(광종
16년)2월 11세의 나이로 왕태자,내사,제군사,내의령(중앙행정의 최고기관으로 임금의 조칙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기관),
정윤에 책봉되었다.
그가 왕세자로 책봉되던 때는 이미 광종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상태였다.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
의 참소로 대상 준홍,좌승 왕동 등이 내쫓긴 이래 광종의 호족 숙청작업이 본격화되었고, 965년에는 박수경의 세 아
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호족 출신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광종의 이 같은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호족들 중에는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려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
에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군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그리고 경종 역시 부왕의 의심어린 눈초리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마 호족들이 광종을 제거하고 세자 주(경종)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참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나 세자 주는 다행히 화를 당하지 않았다. 동생 효화태자가 어린 나이로 죽은 터라 광종에겐 세자 이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세가를 대신할 다른 왕자가 있었다면 그도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 당시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면 핏줄을 가지지 않고 죽였던 까닭이다.
이렇듯 공포와 불안 속에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세자는 975년 5월 광종이 병으로 죽자 21세의 나이로 비로서
왕위를 넘겨받는다. 그가 바로 고려 제5대 왕 경종이다.
경종은 즉위하자 곧 대사면령을 내려 귀양중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오게 하고, 같혔던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작시켰다. 또한 광종대에 설치했던 임시 감옥을 모두 헐고 신하들을 참소한 글들을 불살랐다.광종
11년이후 15년동안 지속되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공포정치의 종결을 알리는 의미로 경종은 호족 출신 왕선을 집정(執政, 재상)에 임명하고 광종시대의 잔재 청산 정책
을 실시했다. 왕선은 성씨로 봐서는 건국초에 왕씨 성을 하사받은 호족세력일 것이며, 광종 11년에 쫓겨난 왕동과도
친인척 관계에 있던 인물일 것이다. 이런 출신 배경을 가진 왕선을 집정으로 내세운 것은 또 한 번의 피바람을 예고하
는 일이었다.
광종의 공포정치가 종결될 무렵, 살아남은 호족 공신은 겨우 40여명이었다. 수백명에 달하던 호족 관료들은 조정에
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이것은 공포정치시대에 끊임없이 이
어졌던 참소의 결과였다.
광종시대의 역모에 대한 고변이나 참소는 주로 호족들 치하에 있던 노비나 하급관료에 의해서 이뤄졌다. 공포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던 황동과 준홍의 역모사건을 고발하였던 권신 같은 인물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한 과거를 통해 등용된
신진관료나 귀화인들의 천거로 등용된 하급관료도 호족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을 것이다.
호족 출신 왕선이 집정에 임명되자 이들 참소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전이펼져졌다. 왕선은 경종에게 복수법 마련
을 건의했는데, 이는 광종대에 참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
었다. 왕선을 비롯한 호족세력의 강력한 건의에 밀려 경종은 복수법을 허락하였고, 이 때문에 곳곳에서 복수전이 벌어
졌다.
경종이 복수법 건의를 받아들인 것은 광종대의 공포정치 이후 왕실에 등을 돌린 호족들을 달래고 화합정치를 모색하
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복수전이 가열되면서 경종의 화합정치에 대한 열망은 퇴색되고 정국은 팽팽한 대결국면으로
치닫는다.
비록 호족출신인 왕선이 집정(나라의 정권을 잡은 왕아래 임시 최고권력자)에 임명됐지만 광종대에 과거로 등용된 신
진관료들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복수전을 펼치려는 왕선과 호족세력을 견제하던 신진관료들의 힘
싸움은 불가피했다. 그런 가운데 호족들의 복수전은 시작된다.
호족들의 복수전은 약1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러던 중에 태조왕건과 천안부원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성태자와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 소생 원녕태자가 살해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왕선은 복수법을 빌미로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종실의 어른을 살해했던 것이다. 이는 곧 효성태자와 원녕태자가 광종대에 호족들의 숙청에 깊숙이 개
입하였음을 의미한다.
호족들의 복수전으로 인해 종실의 어른이 살해당하자, 경종은 곧 복수법을 금하고 왕선을 파직시켜 귀양 보냈다. 그
리고 순질과 신질을 좌우집정에 임명하고 그들에게 내사령(왕의 조칙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중앙관청의 최고책임자)
을 겸하게 하였다.
집정제를 좌우집정으로 바꾼 것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또한 왕명을 출납하
는 내사령을 좌우집정에게 겸임시킨 것은 자신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신하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경종
의 좌우집정제 도입은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동시에 왕명의 권위를 살리는 이중 효과를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좌우집정제를 확립한 경종은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여 토지제도의 혁신적인 변환을 꾀한다. 고려경제의 토대가 농
업인만큼 토지제도의 변환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토지를 힘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호족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
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려초부터 역분전(役分田-고려 건국에 공헌한 호족,공신,군인들에게 그에 합당하게 지급한,세
금을 거둘 수 있는 토지)제도 등 몇 차례에 걸쳐 토지제도의 정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는데, 경종이 비
로소 전시과를 마련하여 토지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는 고려 개국후 토지제도가 처음으로 마련됐다는 측면에서 역
사적인 개갸 아닐 수 없다.
관등(官等,관리의 품계)과 인품(人品,덕망이나 학문적 업적)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인 전시과(관리들의 품계에
따라서(1과-18과) 전지와 시지를 나누어 준 제도)를 마련했다는 것은 당시의 지배 계층 전체를 정부의 토지제도 틀 내
에 흡수하려는 획기적인 조치였으면,결과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다.
경종은 이 같은 전시과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 광종대에 호족 공신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상대적으로 왕권이 안정
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광종의 공포정치가 공신세력을 불만세력으로 키워 놓았기 때문에 경종은 다소 타협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다. 즉, 공신세력을 끌어안고 동시에 광종대에 성장한 신진관료들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하게 하는 양
면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다.토지 분급의 기준을 관품에 한정시키지 않고 인품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양면책의 일환
이었다. 호족세력은 원윤이상의 자삼(자주색 관복)계층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진관료들은 단삼(빨강색 관복)계층의 실
무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관품만을 분급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토지가 높은 관계(官階)에 있는 호족들
의 독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인품을 분급 기준에 둠으로써 낮은 관계에 있으면서도 호족을 견제하여 주요 업무를 수
행하고 있던 신진관료들을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좌우집정제와 전시과를 마련하며 왕권의 안정을 노린 경종은 한동안 평화기를 지속하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977년에는 친히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 등 여섯 사람을 급제시키고, 송과의 국교도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잦았
다. 게다가 979년에는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지금의 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이 고려로 왔다는 것은 곧 요를 세운 거란족이 체제를 정비하고 남하하여 여진을 압
박하고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실시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가 일시에 수만 명의 이민을 받아 들
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관청)에 임명되면
서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혜종 재위 시절에 사천관으로 있던 최지몽은 왕규의 역모혐의를 고변한 인물로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기여한 바 있
다. 하지만 광종 재위시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만취하여 왕에게 주정을 한 죄로 외직에 나가 있다가 경종
5년(980년)에 다시 등용된 인물이다. 이때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 관직과 동래군후의 봉작에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대광으로 왕명을 다루는 내의령을 겸직하게 된 최지몽은 조정의 실세로 등장한 후 곧장 왕승 등이 반란을 꾀하고 있
다고 고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집권 후 처음으로 역모사건을 경험케 한다.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된 왕승은 왕족이거나,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부여받은 유력한 호족 출신의 인물일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런데 최지몽이 그에게 역모혐의를 씌웠다는 것은 경종 집권 후 세력을 정비한 호족들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경종은 최지몽에게 의복과 금띠를 상으로 주게 되는데, 이는 곧 왕승이 경종의
정적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은 호족세력의 견제를 받자 쫓겨났던 최지몽을 등용하여 정적들을 역도로 몰
아 제거했다. 최지몽은 점성술에 능한 인물인데다가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이 관여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경종은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경종은 정사를 게을리 하고 날마다 오락을 일삼으며 여색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는 등 방만한
생활로 일관한다. 경종이 갑자기 이같이 변해야만 했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정치 자체에 염증을 느낀 듯하다.
왕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호족들의 반발 또한 거세게 일었을 것이다. 광종의 공포정치 과
정에서 정권 싸움에 환멸을 느껴 즉위하자마자 화합정치를 표방했던 경종은 또 다시 시작된 정권다툼과 살인으로 인해
허망함과 죄책감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경종은 정사를 뒷전으로 한 채 대신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는 시종과 놀이꾼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
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981년 6월 병으로 드러누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져 결국 육체를 망가뜨렸던 것이다.
병상에 누운 지 불과 한 달 만에 경종은 죽음 앞에 서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사촌동생 개령군 치를 불러서 선
위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경조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그의 능호는 영릉이다.
2.경종의 가족들
경종은 헌숙왕후 김씨, 헌의왕후 유씨, 헌애왕후 황보씨, 헌정왕후 황보씨, 대명궁부인 유씨 등 다섯 명의 부인을 두
었으며, 헌애왕후 황보씨에게서 1남을 얻었으니 그가 고려 제7대 왕 목종(穆宗)이다.
이들 다섯 명 중 헌숙, 헌의, 헌애, 헌정 왕후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목종은 ‘목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대명
궁부인 유씨에 대해서는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장태자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헌숙왕후 김씨(생몰년 미상)
헌숙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딸이다. 935년 태조가 자신의 딸 낙랑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낸 바 있는데, 헌숙
왕후는 이들 사이에서 출생한 듯하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975년 10월에 경순왕 김부의 관작을 높이고 공신 칭호를 준다. 또한 식읍(그 지역의 세금을 국
가 대신에 거두고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함)은 종래 것과 합쳐서 1만 호로 늘려준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인데,
이때에 헌숙왕후를 왕비로 받아들인 때문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비록 헌숙왕후가 경종의 제1비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와 가장 먼저 혼인한 부인은 아니다. 다만 늦게 혼인했
음에도 불구하고 제1비로 삼은 것은 신라왕족과 고모인 낙랑공주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보인다.
신라왕족에게 이 같은 특별한 배려를 한 것은 아마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왕족을 비롯한 경상
도 쪽 호족들은 광종의 공포정치에 희생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종 즉위 이후에 상대적으롤 세력이 강했고, 경종은 이
러한 신라계 호족들의 힘을 이용하여 충주 및 평산 호족들을 견제하려 했다.
그녀는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죽은 후 경종의 영릉에 합장되었다.
헌의왕후 유씨(생몰년 미상)
경종의 제2비 헌의왕후 유씨는 광종의 동복동생 문원대왕 정과 태조의 6비 정덕왕후 소생 문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
다. 문원대왕 정은 광종의 친동생이므로 경종과 헌의왕후는 친사촌간이다.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유씨성은 아버지 문원
대왕으 외가 쪽 성을 따른 것이다.
경종의 제1비 헌숙왕후가 경종 즉위 이후에 왕후에 책봉되었다면 헌의왕후가 경종과 가장 먼저 결혼한 부인이 된다.
광종은 태조에 의해 족내혼을 했는데,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에게도 족내혼을 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족내
혼은 순수 혈통으로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 이외에도 왕의 위상이 격상되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에 왕권 강화에
매진했던 광종은 당연히 아들에게 족내혼을 시켰을 것이다. 헌숙왕후와의 혼인을 경종 즉위 이후로 잡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헌의왕후 유씨의 사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어디에 묻혔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헌애왕후 황보씨 (964-1029)
경종의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의왕후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 성인 유씨 성을 따르지 않고 황보씨 성을 따른 것은 친할머
니 신정왕후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여자만 모계 쪽 성을 따른다.)
경종은 헌애왕후의 친동생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그녀가 곧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이다. 이렇게 두 자매를
왕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황주 황보씨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대변해준다.
특히 경종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황주 황보씨에 적을 두고 있고, 어린 시절 그들에 의해 양육되었기 때문에 외
가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다. 이 때문에 경종은, 황주 황보씨 세력을 경계하고 있던 광종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헌애왕후는 997년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18세나 되었으나 그녀는 정권욕이 강했기
때문에 섭정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며, 스스로를 천추태후라고 부르기도 했다.
섭정을 하던 그녀가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 아들로 하여금 목조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다. 하
지만 당시 중신들은 안종(郁)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현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였다. 당시 대량
원군은 헌애왕후의 강요로 머리를 깎고 삼각산(북한산) 신혈사에 머물렀는데, 헌애왕후는 그를 죽이기 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다가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보낼 때 그녀도 황주로 내
쫓긴다. 이때 강조는 목종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즉위시키게 되는데 그가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황주로 내쫓긴 그녀는 21년간 그곳에서 머물다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능은 유릉이며
정확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김치양 – 동주김씨(황해도 서흥의 옛이름).김치양은 헌애왕후 외가쪽으로 친척이다. 동주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김행파의 후손임이 유력해보이는데, 김행파의 두딸이 태조의 후궁인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김치양은 승려를 사칭하면서 궁궐에 드나들다가 성종의 동생인 천추태후와 눈이 맞아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했다.
헌정왕후 황보씨 (? - 992년)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는 대종(旭)의 딸이며 헌애왕후 황보씨의 친동생이다. 왕비로 책봉된 후 후사가 없었으
며, 경종이 죽은 다음에는 친정에서 머물렀다. 이때 그녀는 태조와 신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욱(郁,안종)과 간통
하여 임신하게 된다.
그녀가 임신한 때가 991년이니 경종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였는데, 그녀가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잉태하고 만삭
이 되어도 주위 사람들은 그 내막을 발설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이 알려져 성종의 명으로 안종은 귀양갔으
며, 992년 7월 그녀는 혼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려 제8대 왕 현종이다. 아이를 낳은 그녀는 이때 산
고로 죽었다(‘태조실록’ 안종 편, ‘현종실록’ 참조).
그녀의 능은 원릉이며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종 욱(郁)은 태조와 신성왕후 김씨(신라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사이에서 태어났다. 제5대왕 경종이 죽자, 경
종의 제4비인 헌정왕후는 사가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왕욱과 사통하여 왕순(후에 제8대 현종)이 태어났다. 헌정왕후는
곧 바로 죽었고,이 일로 해서 왕욱은 사수현(현 경남사천)귀양 갔고, 아이는 유모에 의해서 키워졌다. 그러나 아이가 아
비를 찾으므로 성종은 아이를 사수현에 있는 왕욱에게 보내져 기르게 했다.
첫댓글
족내혼으로 수명도 짧은
왕족들 거기다 정통도 없는
엉망진창의 족보네요
왕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호족들과 여러 왕비들에게서
생겨난 이복형제들간의 투쟁들로
결코 행복하지도 않는 인생들을
살다 갔네요 ..
정치와 권력
옷만 바꿔 입었을 뿐 현재의
정치판과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모처럼 쉬는 날
신록을 읽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항상 애독하여 주시는 보챙님의 성의에
심심하게 사의합니다.
강건하세요.
점점 흥미 지러지네요 무신시대 언제 오는가 기대 하에 지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추일슬풍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