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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룡교수는 서강대, 장신대학원, 미국 포담대학에서 영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장신대학원 영성학 교수로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의 관상적 전통과 예수의 기도
(The Contemplative Tradition and the Jesus Prayer in the Orthodox Church)
유해룡
I. 들어가는 말
사막의 교부들이나 관상생활에 투신하는 동서방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영성생활의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근거리 목표로는 마음의 청결이요, 궁극적 목표로는 하나님을 봄이다. 이러한 목표에 근거를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말씀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 5:8)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 48)는 산상수훈의 말씀이다. 이런 궁극적인 목표, 즉, 하나님을 향한 지복직관(至福直觀, beautific vision)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 안에 담겨진 정념들(passions)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면 하나님의 비젼에 이르게 된다.1) 동방교회에서는 특별히 정념의 근원을 무엇보다도 타락된 내면의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념들이 바로 영혼의 눈인 순수지성(nous)2) 을 어둡게 함으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하나님의 비젼을 가로막는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들을 더럽게 하느니라”(마르 7: 14-22). 이러한 정념들을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둔한 자)(마태 13: 14-15)”라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빌어서 지적하고 있다. 정념들이 가득 찬 마음을 정화하고 본래 하나님이 부여하신 청결한 마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비젼에 이르고자 함이 곧 영성생활의 근본목표이다. 본 소고에서는 동방정교회 전통이 제시하고 있는 관상적 삶에 이르는 특징과 과정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2. 동방 정교회에서 바라본 인간론
동방 정교회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26절)”라는 말씀을 보다 정교하게 이해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물론 육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삼중적인 것처럼 - 정신(Nous), 말씀(Word), 그리고 영(Spirit) - 인간의 영혼도 삼중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순수지성(nous), 영혼(soul) 그리고 영(spirit)이다. 동방정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이면서 신학자인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이 세 특징들은 인간에게 나타난 삼위일체의 신비이며, 인간에게 부여된 삼위일체 형상의 특징이라고 말한다.3) 육체에게 생명을 주는 영혼은 인간의 순수한 사랑의 표현인데, 그것은 순수지성(nous)과 말씀(word)으로부터 비롯될 뿐만 아니라, 말씀과 순수지성 안에 존재하며, 또한 인간의 영은 그 자체 안에 말씀과 순수지성을 소유하고 있다.4)
삼위일체가 그러하듯이 인간의 삼위일체 이미지인 순수지성, 영혼, 그리고 영은 서로 섞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각각 나뉘어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했다고 해서는 안되며, 단지 하나님의 에너지를 공유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영혼도 본질(essence)과 에너지(energy)로 나뉘어진다. 여기에 동물의 생명과 인간 영혼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다른 동물들의 생명은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이라기보다는 에너지로서의 생명이라고 보았다. 이 생명은 육체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으며, 따라서 에너지로서의 생명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활동으로서의 생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육체가 사라질지라도 더불어 사라지지 않아 본질적인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5)
동방교부들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육체와 구분된 어떤 보이지 않는 구성요소나 별개의 실체를 의미하기 보다는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전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St. John of Damascus)은 “영혼은 살아있으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단일하며, 비육체적인 실체이다. 영혼은 몸의 유기체적인 기관으로서 육체를 사용하며, 그 육체에 의지가 부여된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영혼은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부여받은 자유로운 존재이나 그것은 여전히 피조물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다”6)라고 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 이전의 사람인 니사의 그레고리오(St. Gregory of Nyssa)도 “영혼은 창조되었고, 살아있는, 순수지성적인 실재이며, 감각적인 육체에 살아 움직이는 능력과 감각의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을 전달해 주는 실재이다”7)라고 했다.
그레고리오 팔라마스는 영혼은 불멸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적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영혼불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역설한다.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은 영혼이 본성상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멸하다고 믿지만, 기독교 신학에서는 영혼 자체가 불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혼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혼은 결코 인간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영혼은 심리적이지 않고 육체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불멸하다고 하는 것은 죽음 후에 지속될 영혼의 생명성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로 인해서 죽음이 파해졌다는 사실과 다가오는 육체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8)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에너지를 부여받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육체를 창조하는 순간 영혼도 창조하신다.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오(St .Anastasios of Sinai)는 “영혼 전에 육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육체 전에 영혼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9)
이 땅에서 전인적 인간으로서 영혼이 겪어야 할 영적여정에 가장 독특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deification)이다. 대 바실리오(Basil the Great)는 “그대 인간은 신화(神化)되어야 할 유일한 존재이다”라고 했다.10)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는 “인간은 단순히 손과 발을 가진 이성적인 존재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 있게 헌신과 덕목들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이다”11)라고 한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한 번 태어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존재이다. 즉 신화되기 위해서 인간은 생물학적 탄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신화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가를 묘사함에 있어서, 마치 내과 의사가 육체적 기관을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듯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신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영혼(soul), 순수지성(nous), 마음(heart), 정신(mind)이 복잡하게 얽혀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구원을 영혼의 치유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유전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인간의 순수지성이 무감각하게 되어 전 본성이 병들게 되었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의학적인 의미이다.12) 그래서 막시무스(St. Maximus)는 그 결과로 ‘거짓된 지식을 갖게 되며,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된다. 그리고 정욕적인 생각에 빠지며, 죄에 동의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13)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고 치유되기 위해서 순수지성과 마음(heart)이 정화되어야 한다.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마음(heart)과 순수지성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면서 마음은 영혼의 본질이며 생각과 개념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순수지성의 활동이라고 한다.14) 그래서 순수지성은 때로 본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에너지나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영혼의 순전한 파트너이며, 영혼의 눈이기도 하다. 영혼은 영혼 그 자체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서 순수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눈이 육체에 해당하는 것처럼, 순수지성과 영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리고 성경이나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는 자주 순수지성과 마음을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마태 5:8의 “마음(καρδι)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καρδι’는, 로마 12:2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νοο)을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에서 νοο와 서로 호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례에서 보듯이 순수지성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순수지성과 마음은 상호교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니케타스 스테타토스(Nicetas Stethatos)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모든 순수지성과 모든 무정념(dispassion)을 초월하는 무정념의 순수지성(dispassionate nous)이다. 하나님은 빛이요, 모든 선한 빛의 원천이시다. 그는 지혜와 말씀과 지식이면서 동시에 지혜와 말씀과 지식을 수여하시는 분이시다”15)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타락 이전의 그 본래적인 상태에 있었을 때에 인간의 순수지성은 무정념의 순수지성이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게 한다. 하나님은 순수지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며 그로 인하여 순수지성은 하나님의 순수지성 즉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한다. 뿐만 아니라 고백자 막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는 “정념들(passions)이 통제를 받으며 순수지성이 피조물의 내적실재를 관조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거할 때에 순수지성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16) 고 가르친다. 이런 논리 아래에서 동방교부들은 순수지성이 사물을 통해서 받아들인 모든 개념적인 이미지들이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준다고 한다. 순수지성이 관조한 것에 따라서 영혼이 변화를 겪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순수지성이 본래 지어진 본성에 따라서 움직이려면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적지식에 대한 조명이 순수지성의 생명이며, 이 조명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위대한 영적 지식은 없다.17)
순수지성이 정화되어 제 기능을 할 때 순수정신은 끊임없이 마음으로 돌아간다. 순수지성은 실재(essence)와 에너지(energy)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에너지로서의 정신은 생각 안에서 작용하며 육체 밖으로 나와서 사물에 대한 개념적 이미지들을 받아들인다. 본질로서의 순수지성은 보이는 형태처럼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육체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알려진 마음 안에서 제 기능을 찾는다. 그러므로 순수지성이 본래적 상태라면, 에너지가 끊임없이 본질로 복귀하려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순수지성은 마음으로 복귀하려는 특징을 지닌다. 거기서 비로소 본성대로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한 존재의 순수지성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대신에 피조물의 노예가 되어 주변 환경을 배회한다. 동방정교회의 금욕 수련중의 하나인 헤시카즘(hesychasm)은 순수지성이 배회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지성의 혼돈상태로부터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신학적 운동이며, 시도이다.18) 왜냐하면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곳이며, 성령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은둔자 테오판은 순수한 기도를 위해 지성에서 마음으로 내려가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마음에서 지성(mind)으로 집중하라는 의미로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음(heart)안에서 주의력을 기울이는 것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계시는 하나님을 정신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9) 필라델피아의 테오렙토스(Theoleptos of Philadelphia)는 순수지성(nous)을 주의력과 관련시켜 설명을 한다. 예를 들어 기도를 할 때 말로 기도를 하지만, 순수지성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즉 지성은 습관적으로 입을 사용하여 말을 하지만, 순수지성은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기도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순수지성이란 단순히 어떤 생각이 아니고 아주 미묘한 주의력(attention)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주의력이 활동을 할 때에 지성은 마음으로 내려간다.20) 이런 경우 순수지성이란 독립된 어떤 실재라기보다는 순수지성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방정교회에서 전인으로서의 영혼(soul)은 순수지성(nous), 마음(heart), 지성(mind)이라는 세 기능들을 동시에 언급해야 한다. 이 세 기능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만이 전인으로서의 영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의미이다.21)
3. 관상적 삶의 장애물로서의 정념들
호교론자 유스티노는 그의 저서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150년경)에서 ‘플라톤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기를 원했다. 그것이 그들 철학의 목적이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혼은 불멸하며 본질적으로 신적이므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22)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에서는 비록 그 동기는 그릇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을 영성생활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 과연 무리한 일인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 이방사제가 올림피우스라는 수도자와 하루 밤을 지낸 후에 그에게 “이러한 수도생활을 해오면서 당신의 신으로부터 아무런 환상도 받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올림피우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자, 그 이교 사제는 “당신의 마음 안에 순수하지 못한 생각이 당신과 당신의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오.”라고 말한다. 이교 사제의 충고이지만, 이 사막의 수도자는 이러한 판단을 인정한다.23)즉 하나님과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그 장애물들이 정념들(passions)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야기이다.
정념이란 헬라어의 παχω 라는 동사로부터 유래한 어휘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무엇을 경험하다.’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보통 ‘나쁜 일을 경험하다.’라는 개념이 강하게 담겨진 용어이다. 특히 병이 들 때 내적으로 고통을 겪는 경우를 의미하는 용례가 있다.24) 동방 정교회에서는 구원을 치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정념을 영혼 안에 품고 있는 질병. 즉, 만성적인 영혼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시나이의 필로테오스(Philotheos of Sinai)는 “정념이란 엄밀히 말해서 오랫동안 영혼 안에서 무감각할 정도로 잠복되어 있는 것으로 정의 되어진다.”25) 라고 말한다. 동방교부들은 정념과 죄를 이렇게 구분하기도 한다. “정념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인 반면에, 죄는 육체 안에서 드러난 것”이다.26)
어두움을 어떤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의 결여로 이해하는 것처럼 정념도 어떤 실재나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정념은 영혼의 기능들의 왜곡이다.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영혼은 하나이지만, 그 기능은 지성적 능력(intelligent power)), 미각적 능력(appetitive power)과 분개하는 능력(incensive power)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영혼이 타락되지 않은 본래적 상태라면, 이러한 기능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에 합치되는 덕목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의분을 일으킨다. 그러나 타락되어 오용된 지성은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교만을 낳고, 오용된 감각적 욕구는 방탕과 증오를 낳는다.27) 지식욕이 악한 것이 아니고, 그 지식이 교만케 하고, 그 교만이 어리석게 몰아가는 것이 악한 것이다. 음식에 대한 맛을 갈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곡되어 탐식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랑의 욕구가 감각적인 것에 기울어져 부주의한 애착을 일으키고, 분개하는 능력이 무분별한 증오로 바뀔 때 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정념들이 배태된다.
왜곡된 영혼의 기능들로부터 배태된 정념들은 다양한 이름을 지닌다. 바울은 로마 7: 5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한다.”라고 하는데, 이 말씀에서 ‘죄의 정욕’(τα; παθη;ματα των; μαρτιων)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동방정교회의 정념과 같은 의미이다. 죄로서 열매를 맺기 전에 일어나는 내적인 움직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of Nafpaktos Hierotheos)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바울서신으로부터 그 정념의 원인과 이름들을 제시한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등이다(로마 1: 28-31).28) 이러한 다양한 정념들의 이름들을 다마스커스의 요한(St. John of Damascus)은 영혼의 기능에 따라서 지성의 왜곡으로 인한 정념들과, 분개하는 능력의 왜곡으로 인한 정념들과, 미각의 왜곡으로 나타난 정념들로 분류한다.29)
이렇게 다양한 이름들을 가진 정념들을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는 ”탐식, 부정함, 탐욕, 분노, 낙담, 태만, 자만심, 교만 등의 8가지로 집약하고 있다.30) 정념들은 이렇게 각각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을 각각 독립적으로 다룰 수 없을 만큼 서로 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막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는 이 모든 정념들의 근본 뿌리는 자기사랑. 즉, 하나님이나 이웃에 대한 관심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자기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한다.31) 자기 자신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과 애착이 갖가지의 정념들을 만들어 낸다. 모든 정념의 근본 뿌리인 무분별한 자기사랑이 순수지성을 왜곡 시키고 잘못 인도하기에 영혼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받을 수밖에 없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정념들에 대항하는 가장 위대한 무기를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교회의 특징적 영성을 헤시키아 영성(hesychastic spirituality)이라고 한다.
4. 헤시키아와 관상적 체험
헤시키아란 헬라어의 ησυχια로부터 온 말인데, 고요, 침잠, 내적 평화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영혼이 정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된 헤시키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탈라시오스(St. Thalassios)는 “헤시키아와 기도는 덕목들을 실천하고 내면화 하는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무기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순수지성(nous)을 정화시키고, 그것에게 영적 통찰력을 주기 때문이다.32) 사다리의 존(St. John of the Ladder)은 ‘영혼의 침묵은 우리의 생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게 하고, 그것들을 바르게 경영하게 한다. 그리고 침묵은 마음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다가오는 생각들을 사라지게 한다.’고 한다.33) 신 신학자 시메온(St. Symeon the New Theologian)은 “헤시키아는 정신이 방해받지 않고 환희에 사로잡힌 상태이며, 자유롭고 즐거운 영혼의 고요함이며, 요동하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빛과 지식에 대한 비젼이며, 하나님과의 순수한 교제이며,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라고 말한다.34) 헤시키아를 추구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정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념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영혼의 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헤시키아를 성취함으로서 얻어진 또 다른 표현은 무정념(dispassion)의 상태이다. 무정념은 문자 그대로 정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상태이며, 그 결과로 정신이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상태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정념은 고대 스토아 학파들이 극단의 고행을 통하여 얻은 무념(apatheia)의 상태와는 구별이 된다. 막시무스에 따르면 “무정념은 영혼이 악에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이며, 피조물이 전해주는 개념적인 이미지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에 의해서 고통을 겪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35) 고 한다. 그 결과로 영혼의 세 기능인 지성의 능력, 미각적 능력, 분개의 능력 등의 기능이 본래대로 회복되는 영혼의 상태를 무정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혼이 악한 충동에 굴복당하지 않으며, 하나님 없이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바울이 ‘정욕(passions, παθη;μασι)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다.’(갈라 5: 24)라고 말하는 것은 육체가 지니고 있는 감각적인 에너지나 영혼의 능력을 억제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맛과 행동들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진 무정념이란 영혼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능력들이 억제되어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고, 그것들이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살리고 최상의 것으로 회복되는 상태를 말한다.36) 그러므로 무정념의 상태는 사랑과 생명, 그리고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막시무스는 정념에 이르는 네 단계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헤시키아에 이르는 단계이기도 하다. 첫째는 실제적으로 죄를 짓는 행위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단계이다. 둘째는 악한 생각들을 의지적으로 단호히 거절하는 단계이다. 셋째는 정념적인 욕구를 완전히 잠잠하게 하는 단계이다. 넷째는 정념과 관련이 없는 심상들까지도 완전히 제거하는 단계이다.37)
이미 획득된 무정념이 기독교 영성적인 측면에서 진정한 무정념인가 거짓 무정념인가에 대한 구별은 사람들(형제들)을 향한 태도에 달려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무정념은 보다 완전한 사랑을 획득하고 끊임없는 관상적 삶(하나님을 봄)을 통하여 왜곡된 감각적 차원을 극복하고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다. 최고의 무정념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순수지성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지성은 기도동안 일어나는 어떠한 개념적 이미지들에 의해서도 혼란을 겪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무정념의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로 가득 차게 된다.38) 헤시키아를 통해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어 무정념을 성취한 순수지성은 마음으로 내려가서 맑은 시선(vision)을 회복하고, 빛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헤시키아의 영성이 소피아 공의회(The Council of Sophia, 1368)에서 동방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선포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y of Palamas, 1296-1359))이다. 헤시키아 영성이 자리를 잡기까지 반대자들과(대표적인 사람은 발라암Barlaam) 심각한 논쟁을 겪어야만 했다. 여기서 논란된 핵심적인 주제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함 사이에서의 연속성의 문제이다. 둘째는 마음 안에서의 순수지성적인 기도의 문제이다.39) 셋째는 창조되지 않는 빛에 대한 이해와 신적인 실재(essence)와 에너지를 구분하는 일이었다.40) 이러한 치열한 신학적 논쟁에서 그레고리는 전통적으로 동방교부들이 실천해오고 있었던 헤시키아 영성을 지키고 옹호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발라암과 그의 추종자들은 순수지성이 육체와 깊이 관계를 맺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플라톤 철학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그레고리는 바울서신의 말씀을 통하여 반박을 한다. “세례를 통하여 몸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고, 몸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거하고 행하며,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몸은 결코 악이 아니며 단지 육체적 태도가 악일뿐이다.”라고 했다.41) 인간의 순수지성을 육체와 관련하여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심장(heart)은 육체의 첫 이성적 기관이며 이성적 능력을 발휘하는 장소이다. 순수지성은 용기(用器)로서가 아니라 전 육체를 안내하는 육체의 유기체적 기관(器官)으로서 심장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다.42)
또 다른 주된 논쟁은 기도의 열매로서 획득되어지는 창조되지 않는 빛(the uncreated Light)과 신적인 지식의 문제였다. 발라암과 그레고리와의 신학적인 논쟁은 인간이 과연 창조되지 않는 빛을 경험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발라암은 감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빛은 창조된 자연적인 빛이며, 이 빛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사고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라암은 이러한 생각이 발전되어 창조되지 않는 빛을 경험했다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보다 철학자들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까지 생각했다.43) 그레고리는 이러한 주장은 동방교부들의 전통적인 입장을 역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적인 지식으로부터 비롯된 빛과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창조되지 않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빛을 구분했다. 사도들이나 성인들이 경험한 신적인 빛은 결코 상징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빛이 아니다. 그레고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산상에서 경험한 ‘광채가 나서 아무리 빨래를 해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흰 빛(마르 9: 3)’을 예로 제시한다. 그와 논란을 벌였던 발라암은 이것은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환영이든지 외적인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그 빛은 순수지성에 의해서 조명된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예수님의 이 영광의 빛은 전에 없었던 어떤 것이 비로소 변모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자들이 이 순간 눈이 열려서 이전에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던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빛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어나고 인간이 신화(deification)된다고 했다.44)
그런데 이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빛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에너지(divine energy)로부터 비롯된다. 이 에너지는 삼위일체에 속한 것이며, 삼위일체와 피조세계를 이어주는 원동력이다. 즉 삼위일체의 활동은 하나님의 에너지에 의해서 알려지고 그 효과를 나타낸다. 이 에너지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속성을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돌리려는데 그 의미가 있다.45)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실재(essence)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에너지를 통하여 하나님이 활동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해적인 단순성과 삼위일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실재가 신성을 지니고 있듯이, 그의 에너지 역시 신성이다.46) 하나님의 에너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지만 본질적이다.(hypostatic) 그것은 하나님의 에너지와 실재가 동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본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며, 에너지는 본질로부터 비롯된 필연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47) 헤시키아를 통하여 정화된 순수지성은 마음 안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로, 감각적 시각을 초월하는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빛을, 감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육체는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지성을 통하여 신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육체와 순수지성은 떼어낼 수 없는 필연의 관계이다.48)
5. 예수기도
동방정교회는 헤시키아적 영성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련 방안으로서 예수기도(The Jesus Prayer)를 제시하고 있다. 헤시키아적 분위기에서 예수기도가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보통 그 기원은 14세기 비잔틴 시대의 동방정교회의 신비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예수기도의 실제적인 초기 기원은 시나이의 헤시카즘(Sinaite Hesychasm)에서 찾는다. 예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포티케의 주교인 디아도쿠스(St. Diadochus, 458년경)의 『완덕에 대한 100편의 글』(Hundred Chapters on Perfection)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서 마음을 정화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은 순수지성이 오직 주 예수님께만 관심을 갖게 하도록 지성을 정화시키고 불을 붙게 만든다고 한다.49)
그 이후 시나이 영성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예수기도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아름다운 문서를 남긴 사람은 바르사누피우스(Barsanuphius, 약 540년경)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영적지도를 받으면서 양심성찰을 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연약한 우리들이 피할 유일한 피난처는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한다.50) 존 클리마쿠스(649년경)도 그의 저서 『낙원의 사닥다리』(Ladder of Paradise)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당신의 호흡에 달라붙도록 하라, 그러면 헤시키아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51)
이러한 예수기도의 전승은 지금까지 동방정교회의 성지로 알려진 아토스의 헤시카즘(Athonite Hesychasm)에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전 시나이의 헤시카즘에서는 예수기도와 시편기도가 동시에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토스의 헤시카즘에서는 모든 기도를 예수기도에 흡수시킬 만큼 예수기도의 가치가 급진적으로 부상했다.52) 아토스에서의 예수기도의 발달은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명성 때문에 이름이 가려졌지만 그레고리의 스승인 테오렙투스(1310-20년 사이에 죽음)의 역할이 크다. 그는 로고스와 영을 말하는데, 이 말들은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을 묘사한 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신비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유비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유비가 인간과 하나님이 생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기도로서 그 연결이 현실화 된다. 그래서 테오렙투스는 “순수한 기도는 로고스인 마음과 영이 연합되는 기도이다. 로고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이다. 순수지성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 속에서 부르는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영을 통하여 우리는 양심의 찔림과 겸손한 사랑을 경험한다."53) 고 했다. 하나님의 이름. 즉, 예수라는 이름을 부름으로 인간의 순수지성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인도를 받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레고리 팔라마스가 논쟁에서 승리하고 헤시카즘이 동방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선포되면서 더욱 구체화 된다. 센츄리의 칼리스토스(The Kallistos)54) 는 헤시카스트들(헤시키아적 삶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생활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 규범의 핵심이 예수기도이다. 그는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라는 예수기도의 형식을 제시한다. 이 형식은 이중적인 운동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라는 전반부의 기도는 우리의 정신을 그리스도에게로 고양시키고, 후반부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다.55) 이러한 운동이 거듭되면서 이 둘이 일치될 때 순수지성은 신적인 빛을 보게 되는 관상적 체험에 이른다.
비잔틴의 시대의 멸망으로 일부 제한된 지역 외에는 예수기도가 활발하게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성산의 니코데머스(Nicodemus of the Holy Mountain)로 말미암아 정교회의 헤시키아적 삶과 예수기도의 중요성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니코데머스 이전부터 꾸준히 헤시카스트들의 삶과 예수기도에 관련된 중요한 문헌들이 수집되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필로칼리아(Philokalia)56) 이다. 니코데머스는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필로칼리아로 말미암아 예수기도는 오늘까지 전수되고 발전되어 왔다.57)
예수기도가 추구하는 중요한 목적은 마음의 단순성과 예수라는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정화된 순수지성이 마음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다. 단순한 기도를 통해서 정념들로 인해 배회하고 있는 순수지성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이름 자체가 그 정념들을 극복하게 하고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이 기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름은 곧 신앙 고백적 의미를 지닌다. 이 고백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바울서신의 가르침에 의해서 이 기도 자체가 성령의 개입을 전제한다. 예수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그 이름 아래에 두며, 자신을 그 분에게 희생 제물로 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에너지를 향하여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개방시킨 상태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기도는 전례적인 의미를 지닌다.58) 물론 예수기도는 예수 이름 자체가 무슨 마술적인 힘을 지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신앙 고백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의 에너지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기도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하여 순수지성을 한곳으로 집중하게 하며, 기도가 자신의 존재의 한 부분이 되게 한다. 기도를 할 때에 보통 기도자와 기도가 서로 다른 두 대상으로 분리되곤 하는데, 이것을 막고 두 대상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데 예수기도가 기여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기도가 육화되어 기도자가 곧 기도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예수의 기도이다. 시나이의 그레고리(1346년경)는 ‘왜 기도는 길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이시다. 기도란 내가 시작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내가 나누는 어떤 것이다. 일차적으로 기도는 내가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어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무엇보다 침묵하는 것이다.”라고 한다.59) 입술로 움직이는 반복되는 예수기도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가 내면화 되고 마음의 참여가 점점 강렬해지면서 예수기도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예수기도는 침묵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로 바뀌며, 이것을 마음의 기도(the prayer of the heart)라고 한다.
마음의 기도는 입술이나 지성의 기도와는 달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본능적 차원과,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차원 모두가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작용을 의미한다. 여기서 비로소 깊은 참회가 동반되는 마음의 아픔을 경험한다. 동시에 양심의 가책과 무가치한 자신의 느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전히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에너지로 느껴지는 따스함과 기쁨을 맛본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따스한 영적 감정이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의 타오름, 마음 안에서 붙여진 은혜의 불꽃과 같은 감정이다. 정교회의 교부들은 마음의 이 기도는 곧 마음과 지성의 일치 경험이고, 이것은 분열된 본성을 재통합하여 전인적인 회복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지성 안에서의 마음의 기도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도 안에서 내가 말하는 기도라기보다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말하는 기도이다.
러시아에서 1855-1861년 사이에 익명의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이름없는 순례자』(The Way of a Pilgrim)는 예수기도를 실천해가면서 마음의 기도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 주는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순례자는 예수기도를 통해서 성취된 마음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기도가 나를 깨운다.” 그는 자기도 의식하지 않은 채 예수의 기도가 심장박동과 더불어 지속되는 경험을 한다. 이 책은 순례자가 예수기도를 드리는 동안 경험되는 것을 이렇게 서술한다. “예수기도는 배고플 때에 음식이 되었고, 목마를 때 음료가 되었고, 지칠 때에 힘이 되었다. 그리고 여우들과 다른 위험에 처할 때에 방패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동안에도 예수의 기도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문장은 “나는 어느 날 순전히 기도 때문에 깨어난 사람처럼 일찍이 일어나는 즉시 아침 기도를 바쳤습니다....입술은 저절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온 종일을 지내는 동안 나는 온갖 것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아주 딴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60)
기도의 경험을 거룩한 변모 산상에서 나타났던 찬란한 빛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내 마음과 생각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이것이 점점 불꽃이 되어 피어 타오른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 때 어디선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 같은 마음을 숨어서 지켜보셨다고 한다면, 나는 그 즉시로 그 분의 발아래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춤을 하면서, 죄 많은 자신을 속죄하고, 그 넘치는 은총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그것조차 깨닫지를 못했을 겁니다. 그 때 나의 심장은 그 어떤 즐거움이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득 찬 즐거움과 따스함은 이윽고 내 가슴 전체에 모닥불처럼 번져갔습니다. 나는 이런 놀라운 사실 앞에 일종의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62) 그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안에 있다”63) 라는 말들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도는 곧 마음과 지성의 일치 경험이고, 이것은 분열된 본성을 재통합하여 전인적인 회복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지성 안에서의 마음의 기도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도 안에서 내가 말하는 기도라기보다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말하는 기도이다.
5. 나오는 말
동방정교회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면 결코 신학이 될 수 없다.’라는 그들의 이해처럼 그들의 신학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여 사변적인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듯하지만, 그들의 신학이 모든 지성과 과학이 활짝 열린 오늘까지도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오히려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간이해도 서방교회보다 훨씬 정교하고 미묘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론 역시 신학적 논쟁을 위한 이론체계라기 보다는 그 다음에 따라오는 실천적 방안에 대한 이론적 기초일 뿐이다. 그러한 차원을 이해할 때만이 실천적인 단계에서 보다 미래를 전망하면서 영적훈련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기도는 이론을 실천적으로 현실화 시킨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어오고 있는데, 신학적 이론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미묘함을 지니지만, 실천적 제안에 있어서는 매우 단순명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단순함과 용이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기도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하게 내면화시키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첫째 예수기도는 하나님-인간이라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선언하고 있다. 마리아에게서 낳은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주님 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두 번째는 삼위일체 세 위격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서 성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셋째는 성령을 암시하고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1고린 12:3)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기도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 삼위일체적이다.64) 또한, 이 기도는 소리를 내어 반복되는 육체적 기도라는 점에서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외향과 내향 그리고 지성과 마음의 통합을 지향하는 묘미를 지닌 기도, 몸의 영성과 조화를 이루는 기도이다.
동방정교회 영성 자체가 이분법적인 인간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다. 즉 영혼과 육체, 지성과 마음은 육체의 기관과 매우 일치하고 있으며, 초월적인 빛도 정화된 육체적 감각기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방정교회 영성은 이론과 실천의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의 통합을 강조함으로서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이러한 영성의 토대를 제고하는 분이 육화 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기도와 관련된 동방정교회의 영성은 매우 실천적이며, 그리스도론 중심의 살아있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형적 모델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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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Cassian, John Cassian: Conference One, 4, trans. by Colm Luibheid (New York: Paulist Press, 1985) pp. 39-40: 본격적으로 서방 수도원의 규범을 세우는데 구체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존 카시안(John Cassian: 365-435?)이다. 그는 하나의 수도자로서 이집트 사막에 흩어져 있는 여러 수도원들을 순방하면서 영적인 대가인 ‘압바’(Abba)들과의 영적인 담화를 나누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 결과로 내 놓은 저서가 수도원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나 수도생활의 초심자들을 위한 『수도원 강요』(Institutes)라는 책과 이집트의 수도자들의 理想에 대한 연구서인 『영적 담화』(Conferences)라는 책이다. 카시안은 수도원 제도를 기독교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건전한 세속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적인 제도로 보았다. 카시안은 수도생활의 목표를 근거리 목표와 궁극적인 목표로 나누어 설명한다. 근거리 목표는 마음의 청결이다. 이것은 주로 도덕적인 정화를 의미한다. 특별히 그가 강조하는 덕목은 겸손과 신중함이다. 이 덕목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된 삶의 형태는 사랑과 자비로 넘치는 관상생활에서 경험되어진다.
2) 앞으로 계속해서 nous를 순수지성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겠다. 왜냐하면 정교회에서 nous는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함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형태이며, 전통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그가 창조한 인간의 지적 본성과 변할 수 없는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Bernard McGinn, The Foundation of Mysticism: Origin to the Fifth Century (New York: Crossroad, pp. 243-244.
3) Mecropolitan of Nafpaktos Hierotheos, Orthodox Psychotherapy: The Science of the Fathers, trans. by Esther Williams(Levadia Hellas: Birth of the Theotokos Monastery, 2002), p.104.
4) 위의 책, p.105.
5) 위의 책.
6) The Orthodox Faith, Fathers of the Church, vol. 37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p. 236을 위의 책, p. 100에서 인용함.
7) On the Soul and Resurrection, Fathers of the Church, vol. 58, p. 205-206, PG 46, 29을 위의 책, p. 101에서 인용함.
8) Orthodox Psychotherapy, pp.101-102.
9) 위의 책 p.103.
10) Mecropolitan of Nafpaktos Hierotheos, The Person in the Orthodox Tradition, trans. by Esther Williams (Levadia Hellas: Birth of the Theotokos Monastery, 2002), p. 76.
11) 위의 책.
12) Orthodox Psychotherapy, p. 37.
13) The Philokalia, compiled by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and St Makarios of Corinth, trans. and ed. by G.E.H. Palmer, Philip Sherrard Kallistos Ware, The Complete Text Volume three, (London: faber and faber, 1995), p.88,34.
14) Orthodox Psychotherapy, p.121.
15) Gnostic chapters, 1. Gk. Philokalia, vol.. 3, p.326,1을 Orthodox Psychotherapy, p.126에서 인용함.
16)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and St Makarios of Corinth, eds., 필로칼리아(Philokalia), vol. 2, 엄성옥 옮김(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2), p.167, 45.
17) 필로칼리아 vol. 2, p.72, 9.
18) Metropolitan of Nafpaktos Hierotheos, St. Gregory Palamas as a Hagiorite, trans. by Esther Williams (Levadia Hellas: Birth of the Theotokos Monastery, 2000), p.310.
19) Compiled by Igumen Chariton of Valamo, The Art of Prayer: An Orthodox Anthology, trans by E. Kadloubovsky and E. M. Palmer, (London: faber and faber, 1997), pp.183-184.
20) Orthodox Psychotherapy, pp.123-124.
21) 어거스틴도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 이해, 의지(사랑)이라는 심리학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이 스스로를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지으신 자를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정신은 지혜를 얻는다(On the Trinity, 14, 12, 15).
22) Bernard McGinn, 위의 책, p.23.
23) 위의 책.
24)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v, ed. by Gerhard Friedrich,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3) pp. 904-923 참고.
25)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and St Makarios of Corinth, compiled, The Philokalia, vol. 3, trnas and eds. by G.E.H. Palmer, Philip Sherrard Kallistos Ware (London: faber and faber, 1995) Philokalia, vol 3. p, 29, 35.
26) Orthodox Psychotheraphy, p. 245.
27) 위의 책, pp.247-248.
28) 위의 책, pp. 252-253; 다마스코스의 피터(St.Peter of Damaskos)는 성경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념들을 정리하여 298가지의 정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Philokalia, vol. 3. pp. 205-206.
29) 필로칼리아(Philokalia), vol. 2, pp. 560-561.
30) 필로칼리아. vol. 1, 엄성옥 옮김, pp. 95.
31) 필로칼리아. vol. 2, p.113,59.
32) 필로칼리아. vol. 2, p.505, 67.
33) Orthodox Psychotherapy, p. 315.
34) 위의 책.
35) 위의 책 pp. 298-299.
36) St.Gregory Palamas, Triads, 2,2,19를 위의 책, p.299에서 인용함.
37) 필로칼리아. vol 2. p. 360, 51.
38) Orthodox Psychotherapy, p.304.
39) 여기 정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수지성이란 단순히 추론적인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 혹은 내면의 시각을 통해서 영적진리를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지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매우 다른 용어이다: Bernard McGinn, John Meyondorff, and Jean Leclercq, eds, Christian Spirituality: Origin to the Twelfth Century (New York: Crossroad, 1987) p.400.
40) Metropolitan of Nafpaktos Hierotheos, St. Gregory Palamas as a Hagiorite, trans. by Esther Williams (Levadia Hellas: Birth of the Theotokos Monastery, 2000) p.65.
41) 위의 책, p.67.
42) 위의 책.
43) 위의 책, p.308.
44) 위의 책, pp.309-310.
45) 위의 책, p. 305: 구체적인 예로서 goodness, blessedness, holiness, immortality 등은 하나님의 에너지이며, 그것은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goodness는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에너지이지만, the good things는 창조된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이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피조물이며,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의 결과이다.
46) 위의 책, p.306.
47) 위의 책, p.308.
48) 위의 책, p.321.
49) A Monk of the Eastern Church, The Jesus Prayer (New York: St.Vladimir's Seminary Press, 1997), pp.36-37; 필로칼리아, vol.1. pp.351-407(특히 p.375,59) 참고.
50) 위의 책, pp.37-38.
51) 위의 책, p.39.
52) 위의 책, p.38.
53) 위의 책, p.58.
54) 그는 1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다.
55) 위의 책, p.62.
56)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미의 사랑이다. 헬라적 전통에 의하면 미와 선은 일치된다. 이 책은 진정한 미와 선을 안내하고 추구해왔던 지혜의 모음서라는 의미이다.
57) The Jesus Prayer, pp.67-69.
58) Kallistos Ware, The Power Of The Name: The Jesus Prayer in Orthodox Spirituality, (Fairacres, Oxford: SLG Press, 2002), p.12.
59) 위의 책, p.2.
60) The Art of Prayer, pp.25-26.
61)『이름없는 순례자』(The Way of a Pilgrim), 최익철 옮김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4), pp.28-29.
62) 위의 책, pp.38-39.
63)『이름없는 순례자』을 The Jesus Prayer, p. 82에서 인용함.
64) The Power of the Name,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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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올려 주시니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