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람에 요즘엔 눈길에서 벗어나 있어서 그렇지, 사실 우리 말글살이에서는 한자말이 더 문제다. 우리말 어휘를 풍성하게 하는 한자말이라면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문제는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쓸데없이 한자말을 쓰려 하는 데서 생긴다. 이런 문제는 주로 '관청'이나 '언론'이 만든다. 식목일이면 관청에서는 이런 보도자료를 낸다.
'○○○는 식목일을 맞아 ○본의 나무를 식재했다.'
'식재(植栽)'는 '심다'로 바꿔 쓰라고 나라에서 순화 자료를 펴냈지만 아직 나라의 일부인 행정관청에서는 이렇게들 쓴다. 한자말이라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말뜻을 생각하지 않고 엉뚱하게 쓰니 더 문제다. '식재'는 단순히 심는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심어서(植) 기른다·재배한다(栽)'는 뜻이 있어 식목일에 쓰기엔 알맞은 말이 아니다. 관청에서 말고는 별로 쓰지 않는 '본(本)'도 '그루'로 바꿔야겠다.
관청 탓할 것도 없다. 쉽게 말해, 이런 식으로 보도자료를 내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면 독자들은 이런 한자말에 훨씬 적게 노출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는 신문·방송 책임이 크다.
게다가 언론 스스로 한자말 쓰기를 즐기는 것도 문제다. 언론이 보통 자주 쓰는 한자말로는 '내홍(內訌), 실효(失效/實效), 방중(訪中)/방일(訪日)' 같은 게 있다. 이런 말은 차라리 한자로 쓰면 어려울지언정 헷갈리지는 않는다. 한글시대로 바뀌었는데도 새 말을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통에, 쓰는 사람은 알아도 독자는 잘 모르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예 한 가지 더.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김해 봉하마을에 돌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을 우리 언론은 거의 '사저'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저(私邸)는 '개인의 저택', 혹은 '고관이 사사로이 거주하는 주택을 관저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저택'이라면 '규모가 아주 큰 집, 혹은 (예전의) 왕후나 귀족의 집'을 뜻하니 적당하지 않고, 또 '관저'에 상대하여 부르기엔 '달랑 이 집 한 채' 뿐이어서 어색하다.
우리 언론, 예전에는 정치 지도자들 집을 '상도동 자택'이니 '동교동 자택'이니 하고 부르기도 했다. '사저, 자택' 대신 그냥 '집'이라고 하면 집주인이 섭섭해할까.
2008/03/18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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