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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파나루터 표지석. 송파구 석촌 호수에 있는 송파나루터 표지석 |
ⓒ 이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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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가 조선 임금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수항단을 임시로 가설한 곳이 삼전들녘이다. 삼전은 삼밭(麻田)이 삼전(三田)으로 변한 곳이다. 조선 건국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야생 삼밭이었다. 세종이 이곳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목장을 조성하면서 삼전이라 불렀다. 세종은 이곳에서 기른 말을 기동력 삼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사군 설치를 완료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바람이 차다. 임금이 밭 가운데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항복한 왕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어야 한다. 자율행동권을 반납한 지 반나절이다. 영혼이 없는 임금이다. 해가 짧은 겨울. 정월 그믐날 해가 대모산에 걸렸다. 살을 에이는듯 한 칼바람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발이 시리고 턱이 떨렸다.
"궁으로 돌아가도 좋소."
용골대가 황제의 명을 전했다. 희소식이지만 전하는 말이 아니라 명령이다. 목을 늘어뜨리라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적의 수도 심양으로 데리고 간다 하면 따라 가야 한다. 항복한 왕의 생사여탈권은 황제에게 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 올 때, 군신의 예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키기 위하여 있지만 뒤집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우선 죽이지 않고 궁으로 돌아가라 하니 감지덕지다.
지켜보던 소현세자는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
왕세자와 빈궁 그리고 두 대군과 부인을 데리고 가라 할 줄 알았는데 혼자 가란다. 끔찍이 아끼는 후궁도 포로들 무리 속에 있다. 궁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고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할 게재가 아니다. 인조는 천막에 들어가 빈궁을 만났다. 빈궁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최명길을 불러 빈궁을 배종(陪從)하라 이르고 막차를 나섰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강화도에서 끌려온 자녀들과 왕족들이 울부짖었다. 임금에게는 데리고 갈 힘이 없다. 도성에서 붙잡혀 온 포로들이 울음을 토해냈다. 임금은 데리고 갈 능력이 없다. 가슴이 찢어졌다. 대부분 부녀자들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세자의 목울대가 경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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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기군 깃발. 8기군의 전신 4기군 깃발. 남(藍)색기, 백색기, 황색기, 적색기, 이 깃발 가장자리에 장식을 더한 4기군 깃발과 함께 8기군이라 한다. 심양 고궁에 진열되어 있다. |
ⓒ 이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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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진영을 빠져나온 임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압록강을 건넌지 7일 만에 도성을 유린해버린 팔기(八旗)가 노을에 펄럭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겁지겁 도성을 빠져 나올 때는 한강이 결빙되어 얼음 위로 건넜지만 이제는 날이 풀려 배를 타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만여 명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울부짖으며 길을 메웠다.
"임금님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용골대가 군병을 이끌고 길을 텄다. 채찍이 바람을 갈랐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에 얼음은 풀렸지만 차가운 날씨다. 헐벗은 살갗에 채찍이 닿으니 피가 튀었다. 하늘로 치솟는 선홍색 핏줄기가 노을에 유난히 붉어 보였다. 채찍이 춤을 추었지만 백성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겨우 길을 뚫어 송파진에 도착했다. 나루터는 썰렁했다. 도성을 외곽 방비하던 조선 수군 진영은 괴괴했다. 경강 삼진(三津) 중의 하나였던 송파진나루터가 이럴 수 없었다. 수군진영은 청나라 군에 의하여 불태워졌고 군졸은 도륙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 두 척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없는 민초들의 피를 토하는 절규
당시 한강에는 삼개나루, 광나루, 노량나루 등 백성들이 이용하는 나루터도 있었지만 한강진을 비롯한 동작진, 양화진 등 수군진영이 있었다. 송파진나루터는 어영청 관할이었다. 도승관이 경찰 임무를 수행했다면 수군은 말 그대로 군대였다. 세곡선을 보호하고 병조 소속 전령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임금이 배에 올랐다. 백관들이 서로 타려고 어의(御衣)를 잡아 당겼다. 그들의 옷자락을 백성들이 잡아 당겼다. 배가 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백사장으로 올라올 지경이었다. 평소 같으면 임금님의 용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이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 배에 겨우 올라 탄 당상관들이 민초들을 향하여 호통을 쳤다.
"무엄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주상전하 가시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백성들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왕이 무슨 놈의 나라님이냐?'는 눈초리였다. 나룻배는 탔지만 사공이 없다. 내관들이 노를 저었다. 배가 서서히 움직였다. 당상관들이 배에 매달리는 백성들을 뜯어내고 발길로 찼다. 물에 빠진 백성들이 허우적거렸다. 그들을 뒤로하고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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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곶교. 살곶이 다리라고 불리며 인조가 건넜던 다리다. |
ⓒ 이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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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를 지나 왕십리를 지났다. 청계천에 걸친 영도교를 건넜다. 동묘를 중심으로 청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몽고족 군졸들이었다. 한성을 무혈입성 한 몽고군 제1진은 남대문과 모화관 어름에 진을 치고 2진은 동묘 주변에 군영을 마련하고 있었다.
동대문을 통과하여 도성에 들어갔다. 도망갈 때는 허겁지겁 나가느라 시신이나 상여가 나가던 시구문(屍軀門)을 빠져 나갔지만 돌아올 때는 대문으로 들어왔다. 시구문은 수구문과 함께 광희문의 속칭이다.
텅 빈 도성은 참렬(慘烈)함 바로 그것이었다
도성은 텅 비어 있었다. 거리에는 치우지 못한 주검이 널부러저 있었다.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을 붙잡아 가던 청군은 등에 업힌 어린 것을 빼앗아 집어 던졌다. 반항하면 칼춤을 추었다. 산발한 머리통이 구르는가 하면 몸통이 엎어져 있었다. 팔이 잘린 여인의 시신은 하복부가 심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참혹이라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참렬(慘烈)함 바로 그것이었다.
길거리의 참경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배고픈 강아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벌러덩 누운 여자 시신을 발견한 누렁이가 달려와 뒷다리를 들고 오줌을 갈겼다. 수캐였다. 먹잇감 찜이다. 아직 사람을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았는지 누렁이는 영역표시만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검둥이가 나타나 코를 박고 킁킁거리더니만 시신을 뜯었다. 굶주린 개들이 피 냄새를 맡고 늑대가 된 것이다. 시신을 뜯어먹던 검둥이가 청의(淸衣)를 입은 임금을 보고 컹컹 짖었다. 검둥이의 눈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그 개는 미친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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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흥인지문이라 부르며 근처에 배오개 시장이 있었다 |
ⓒ 이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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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시한 배오개 어름은 적막했다. 배오개 시장은 양곡과 채소를 주로 파는 양전(糧廛)이다. 그득히 쌓여 있던 쌀가마는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도 쌀 한 됫박 없고 빈 창고였다. 전주가 모조리 가지고 피난을 갔을까?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이고 지고 잰 걸음을 놓았을까? 청군들이 약탈해 갔을까? 주인은 없고 빈 가가만 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배오개 시장은 어물을 주로 파는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포목, 주단, 고급 방물을 취급하는 시전과 함께 도성 3대 시장이다. 종루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에 대항하여 시장을 열었을 때는 난전(亂廛)으로 탄압을 받았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성장하여 이제는 도성의 양곡시장을 쥐고 흔들었다. 이렇게 성황을 이루던 배오개 시장이 인적은 없고 서생원 천국이었다.
후미진 모퉁이에 머리를 산발한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젖퉁이는 나와 있었다. 옷감으로 보아 사대부집 여자 같았다. 싸전에서 콩을 줍던 그녀가 콩으로 공기놀이를 하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냉기를 피하려고 치마를 잡아 끌어당겼다. 찢어진 치마 사이로 허연 허벅지가 드러났다
산발한 머리를 옷고름으로 질끈 동여맨다고 맸지만 느슨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목선이 갸름하다. 피부도 곱다. 공기놀이하면서 흘러내린 옷고름을 입에 물었다. 그녀의 치아는 반듯했고 입술은 19세를 넘기지 않은 여인의 입술이었다. 임금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