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삼척동자]

(부석사, 봉정사 여행기에서 이어집니다.)

봉정사 다음으로는 도산서원에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길동무들과 청량산에 가자고 했으니 도산서원까지 보기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봉정사에서 청량산 가는 길 어귀에 도산서원 안내판이 보였지만  오늘은 지나칠 수밖에 없다.

퇴계가 만년에 서당으로 사용했던 도산서당 자리가 지금의 도산서원이다.

퇴계가 안동 도산 토계에 살면서 바로 지척에 있는 봉화 청량산을 읊은 '청량산가'를 떠 올린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者)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魚舟者) 알까 하노라”

                          -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자는 나와 흰 갈매기뿐이로다 -

                          - 흰 갈매기야 떠들고 다녀 남에게 알릴까마는 못 믿을 것은 복사꽃이로구나 -

                          - 복사꽃아 떨어지지 마라. 고깃배 사공이 알까 하노라 -

       

도산서원에서 퇴계 선생을 뵙지는 못하더라도 그 어른의 발자취가 남았을 청량산에 가는 것으로도

못지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봉정사에서 청량산은 한 시간 남짓이 걸렸다. 청량사로 올라가는 입구인 

선학정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다섯 시를 넘어섰다. 날이 길어지기는 했어도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먼발치에서 본 청량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천애의 낭떠러지 암벽이 곳곳에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는가 

하면 아름드리 낙락장송이며 떡갈나무의 우거짐으로 이름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을 느끼게 한

다.  산세가 얼마나 아름답고  빼어났으면 퇴계가 이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하여 복사 꽃 흐르는 물

을 보고 뭇 사람들 알고 찾아와 비경이 훼손될까 걱정을 했을까?

퇴계는 스스로 <청량산인>이라는 당호를 지었을 만큼 청량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청량산을

드나들며 공부했고 후학들을 모아 강론도 즐겨했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도 현재의 도산서당과 이곳을 두고

끝까지 망설였다고 한다.

육육봉은 내육봉(內六峰) 여섯 봉우리와 외육봉(外六峰) 여섯 봉우리를 합쳐 도합 12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주봉인 의상봉(일명 장인봉)을 비롯해 시계방향으로 언급을 하면 자란봉, 선학봉, 향로봉, 연화봉,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경일봉, 금탑봉, 탁립봉, 축융봉이 그것이다. 소수서원을 세운 신제(愼齊) 주세붕 

선생이 명명했다.

        

선학정 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청량사 올라가는 길로 접어든다.

초입부터  길이 가파르고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용트림을 한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숨이 턱에 찰 때 쯤 저만치 청량사의 모습이 들어난다. 

이 절 역시 깎아지른 경사지 구비마다 용케도 축대를 쌓아올려 절을 앉혔다.

범종각과 오층석탑을 지나 본전인 유리보전이 올려다 보인다.

유리보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글씨라 한다. 그러고 보니 힘찬 기상이 엿보이고 막힌 데가 없어 보인다.

건물  외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팔작지붕에 다포인데 큰 보 밑에 사이기둥(間柱)을 세워 후불벽

을 만들었다. 유리보전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첩첩 먼 산과 하늘을 이고 서 있는 아름드리 노송 한그루와 오층석탑과  범종각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유리보전을 비켜서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좁다랗게 나 있다. 벌써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있고 신록의 숲 그늘이 호젓하다. 산새들이 저녁 공양 준비로 바쁜 날개 짓을 하고 있고 금방이라도 짐승이 뛰쳐나올 것 같은 적막이 감돈다.

       

산길은 온통 철도 침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많은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산을 오르내리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못 마땅하기 그지없다. 

산을 오르면서 땅과 바위를 힘차게 밟고 가는 산행감이 나지 않아서 싫다.

위험한 한 두 곳에 계단을 설치한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줄 곳 나무계단을 설치했으니 산행을 하는 건지

고층 건물을 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이런 계단 길은 오히려 힘이 더 든다. 산길에 변화가 없어서 사람을

금방 지치게 한다.

자연은 자연으로 되돌려 놓아야 마땅하다. 마침내 계단길이 끝나고 자소봉과 의상봉 갈림길 안내판이 보인

다. 평탄한 흙길이 반가워 내친김에 의상봉 길로 접어든다. 워밍업으로 적응이 된 것인지 거칠었던 숨결도 평온을 되찾아 이제 막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될 참이다.

갑자기 저만치 아래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친다.

산행 중 걸려온 전화를 받는 사이 두 친구는 먼저 올라갔었다. 잠간이지만 앞선 친구들이 시야에서 벗어 나

걸음을 재촉했던 것인데 뒤 쪽에서 날 부르니 어찌된 연유인가? 갈림 길에서 뒤쳐진 날 기다리다 둘이서 잠

시 옆 봉우리에 올라갔다 오는 사이에 나와 길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올라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서 갈림길로 내려갔더니 두 친구가 그만 내려가자고 한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었으니 어쩌랴 아쉽기는 해도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또 다시 지루한 침목 계단 길을 내려간다.

오를 때는 얼마 멀리 온 것 같지 않았는데 내려가는 길은 이렇게 많이 왔었나 싶게 멀게 느껴졌다. 다시 청량

사 경내로 들어선다. 우물에 가서 표주박으로 맑은 물을 떠서 마른 목을 적신다. 청량사 이름에 걸 맞는 청량

수여서인지 시원하기가 그만이다.

안내판을 보니 청량산에는  이런저런 유적이 즐비하다. 퇴계가 공부하던 청량정사 그의 제자 성성재(惺惺

齊) 금 난수(琴蘭秀가 세운 고산정(孤山亭)이 있고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왔을 때 쌓았다

는 공민왕산성 그리고 그 외성인 청량산성과 내성인 공민왕산성과 외성을 잇는 오마도산성이 있고 글씨의

대가 김생이 공부하던 김생굴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 등등이다.

       

어찌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갈 수 있을 것인가?

봉정사 기행에서 인용한 영화 동승의 이야기처럼 세상에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지 않던가? 

때로는 체념도 약이 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히 뒤로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지혜라면 지혜다.

이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친구 <봉곡(鳳谷)>이 콘크리트로 포장된 내리막길을 뒤로 걷는다.

우리더러 뒤로 걷기를 권한다. 또 다른 친구 <중산(中山)>이 <봉곡>을 따라 뒤로 걸으면서 짐짓 동참해 보라

는 눈짓을 한다. 나도 결국 슬그머니 돌아서서 뒤로 걸어 본다.

몸의 무게 중심이 뒤에 가 있어선지 한결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신기한 일이다.

<봉곡>은 진즉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뒤로 걷다 터득한 위대한 발견일까?

우리의 하산 길은 뜻하지 않은 어린아이들 같은 뒷걸음질로 웃음꽃을 피웠다.

       

하산을 마치고 다시 처음 그 자리 선학정이다.

시간은 해 걸음 일곱 시를 넘어섰다.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아침에 보온병에 타온 커피한잔을 들이켰다. 신기하게도 커피 한잔에 기운이 솟는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커피를 권했지만 사양을 한다.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선학정을 출발해서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간다.

관리사무소 앞 삼거리에 이르니 좌측은 안동 가는 길이고 우측은 봉화 영주로 빠지는 길이다.

길 밝은 <중산>이 봉화 영주 쪽이 지름길이라고 길안내를 한다.

안동 길을 버리고 봉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도를 보니 국도 35번 도로다.

차창 밖 바른 쪽에는 청량산을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이 수정처럼 맑다.

이 물은 아마도 안동 땜으로 흘러들어 다시 남으로 향 할 것이다.

청량산 병풍바위가 석양빛에 반사되어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비치이고 있다.

나도 너도 이구동성으로 배고프다고 야단들이다.

아침은 빈약한 휴게소 우동 한 그릇으로, 점심은 집에서 싸온 보리밥 한 덩이로 때우고는 청량사 물 한 모금 

밖에 마신 게 없으니 길동무들 원성을 들어도 나무랄 일이 일이다.

        

우리는 이 길을 가다가 아무 곳이나 눈에 띄는 첫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서 청량산 그늘을 벗어나서야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길 건너편에 우리가 가기로 한 첫 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식당은 맞는데 그 시간에 식당 안에

인기척이 없어 보였다.

<중산>이 차를 내려 확인 차, 길을 건너고 있는데 식당 유리창에 ‘금일휴업’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첫 식당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웃어 댔다. 

마을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그 작은 동네에 한집 건너 <전통식육식당>이라는 간판을 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무조건 눈에 띄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동네는 봉화의 봉성이라는 곳인데 삼겹살구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유명하다는 삼겹살 구이를 주문했다. 다른 식당과는 달리 주방에서 고기가 미리 구워서 

나왔다. 솔잎으로 굽기 때문에 연기 그을음이 너무 많아 즉석에서 굽지 못한다고 했다.

고기 한점을 집어 먹어 보니 솔잎 탄 냄새가 나는 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향내가

입안에 진동한다. 야생 신선초와 상추 잎 그리고 토종 된장에 싸 먹는 솔잎구이 삼겹살의 맛은 일품이었다.

밥을 먹다말고 이번 여행에서 빠진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 맛있는 저녁을 우리만 먹는 게 너무 미안해서 전화를 한다고  했는데 들려 오는 목소리가 심상치를 않았

다. “인간들이 말이야! 그럴 수 있는 거야? 나만 빼 놓고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있다고? ”

얼른 전화부터 끊었다.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우리 세 악동들은 박장대소를 했

다.

좋은 구경에 맛있는 밥도 먹었으니 바랄게 없다.

오늘의 일정을 다 마쳤으니 본디 자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제 술 취한 기사는 쓸모가 없다. 

술을 전혀 못하는 <봉곡>이 운전대를 잡았다. 취기가 동한 내가 십팔번 노래를 뽑는다.

<중산>도 <봉곡>도 내 성화에 노래를 불렀다. 

청량사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나누었던 말이 생각났다.

오늘의 미쳐 못 다 오른 청량산 산행은 <짧은 만남 긴 여운>으로 이름 하자고 했었다.

정말이지 내게 예정에 없던 청량산은 <짧은 만남 긴 여운>으로 오래도록 간직될 것이다.  

                                            

 

[삼척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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