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여성 2명이 먼저 석방되었다. 그러나 아직 19명의 인질들이 잡혀있다. 이 사태는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사태로 인해 국내에서도 수많은 논란과 주장,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아직도 사태전개의 정확한 전모는 가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판단하고 생각하고 명심해야 할 교훈들은 충분히 드러난 것 같다. 한국 기독교는 분명히 잘못했다 이번 사태의 근원은 분명히 평균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기본인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은 최고의 명령이기에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최우선적 임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원하든 원치 않든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런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다소간의 충돌과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기독교인들은 배타적이고 비상식적이며 위압적이거나 상대방을 깔보는 태도를 보인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인들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이런 배타적이고 비타협적 태도는 대부분 신앙 좋은 것으로 칭송된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는 해방 정국과 이승만 정권 이후 항상 정치권력에 밀착한 경험을 갖고 있어서, 실제 교세에 비해 훨씬 월등한 정치, 사회에 영향력을 발산했다. 지난 7월 30일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설문조사를 보아도, 국민들은 정치권력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종교로 개신교를 들었다. 한국 기독교의 친미적, 반공적 이미지 때문에 정권들마다 한국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여기게 했고, 많은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충성으로 보답했다. 그런데 군부독재 정권이 끝나고 민간정부가 들어선 90년대 이후,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상대적 홀대는 그동안 충성과 온갖 특혜에 길들여져 온 한국교회를 분노하게 했다. 엉뚱하게도 민간정부 들어서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정부 재야인사(?)로 돌변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것일까? 기독교를 특별 대우하지 않는 모든 것이 홀대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단군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신앙일 수 있지만, 일정한 절차를 거쳐 세워놓은 것을 강제적으로 철거하는 것은 분명 처벌대상이다.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가 목사든 장로든 처벌받는 것은 마땅한데, 한국교회는 그런 행위가 순교적 의거며 처벌은 교회 탄압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럴 때 교회에 분노한다. 통일교를 이단집단으로 규정하고 대처하려는 것은 한국교회의 입장일 수는 있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축구단을 운영하고 있는 성남 일화를 연고지에서 배척하려는 시도는 현대사회를 살아갈 상식이 없는 짓이다. 사람들은 그럴 때 기독교인들의 이성을 의심한다. 사학재단을 운영하기 위한 한국교회?특별한 의지와 계획이 있는 것은 백번 좋으나, 우리가 세운 학교에 들어왔으니 학생들은 불합리해도 무조건 학교 방침을 따라야 하고 정부조차 간섭해서는 안 된다며 삭발의지를 불태울 때 사람들은 교회를 비웃는다. 목회직을 일반 직업과는 다른 특수직분이라고 느끼는 게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 생각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일정정도의 소득을 받는 목회자가 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경멸한다. 이제 주일에 국가고시를 실시하는 게 종교자유 탄압이라는 해묵은 주장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이젠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홀대(?)를 못 참겠다고 정치권력 획득에 직접 나서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장로 대통령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정서상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가 보일 비상식적이고, 몰염치한 요구가 어디에 이를지 보지 않아도 뻔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한국교회는, 기독교는, 나아가 결국 예수님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다. 120년의 역사가 넘도록 미국 등 서구의 이미지를 조금도 벗지 못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들만 옳다면 어떻게든 관철하려고 떼쓰는 무례한 기독교인들. 할 수 있는 한 정치, 사회적 권력을 획득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정치 지향적 집단. 이러한 한국교회의 오랫동안 누적된 이미지가 말은 하지 않아도 국민들의 뇌리와 경험 속에 지겹도록 뚜렷이 박혀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미운 것이고, 지겨운 것이다. 안티기독교운동의 존재는 한국 기독교의 자업자득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가졌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는 정말 깊이 살펴봐야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번 샘물교회 방문단이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가졌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한국교회의 보편적 이해와 행습들이 샘물교회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샘물교회는 피랍 사건 자체 이상의 사뭇 엉뚱한 뭇매를 맞고 있다(물론 이번 사태 발생과 관련한 샘물교회의 책임은 결코 벗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일단 그러한 분노를 인정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감당하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대신 매를 맞아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영웅인가, 역적인가 이들이 영웅(순교자)인지, 철없는 태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역적인지 말하려면 방문 목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이들의 방문 목적이 선교냐, 봉사냐를 엄밀히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논쟁이 촉발된 것은 지금껏 흔히 그래왔듯이 선교 열정으로만 무장된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권에서 무리하게 선교하려다가 현지인들을 분노하게 한 결과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묻고 싶다. 전도(선교)의 목적을 갖고 낯선 땅을 방문한다는 게 그 자체로 비난 받을 일인가? 아니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독교·불교·천주교·이슬람교 신자가 있었던 게 아니다.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했고, 받았기 때문에 확산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자가 기독교 전도(선교)의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전파의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봉사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전도(선교) 목적으로 갔다고? 그러나 내 생각에는 전도(선교) 목적과 봉사 목적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다. 정직히 말한다면 두 가지 의도가 다 있었을 것이다(다만 가족들이 한사코 선교가 아닌 봉사 목적이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슬람의 반감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눈물어린 호소로 보아줄 수는 없을까?). 실제 봉사하러 갔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최종적으로는 복음이 전해지기 바라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그 자체가 욕먹을 일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토회’라는 아름다운 단체가 있다. 법륜스님 같은 불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 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선한 활동에 힘써왔다. 그러면 정토회는 포교 단체인가, 순수한 봉사단체인가? 내 생각으로는 둘 다 맞다. 이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현되는 세상을 꿈꿀 것이다. ‘정토’라는 말 자체가 무엇보다 강한 불교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나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토회가 비난받는 일은 없다. 그들의 포교 방식이 사람들을 배타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며, 수준 높은 양식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우리 기독교인들의 선교(전도)는 너무 근시안적이고, 멸시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제 다시 샘물교회 사례로 돌아가보자. 만약 이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 식량 주고 약품 주고, 안 믿는다 하면 그냥 가버렸다면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의 봉사가 그랬다는 근거는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동기 속에 전도의 열망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전도의 열망을 너무 서둘러,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조급함을 자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샘물교회도 한국교회가 받아야 할 따가운 눈총을 벗어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선교의 영웅이나 순교자로 떠받들거나 무슨 대역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비난하는 것은 모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나는 우리 종교인들이 너무 쉽게 사용하는 ‘순교’라는 말을 없앨 것을 호소한다. 순교는 본래 그 취지와 상관없이 이미 정치적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 죽음이 순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고, 우리는 다만 최선을 다한 삶이었음만 말하자. 그들은 한국교회가 마땅히 져야 할 짐을 대신 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샘물교회를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하자. 그리고 분노한 네티즌들도 그 정서는 이해되지만 상갓집 예절이 있듯이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만 더 자제하면 좋겠다.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는 문제의 근원 생각하자 지금까지는 아프간 사태의 희생자들이 동정보다 오히려 비난을 받고 있는 아쉬운 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남은 인질들이 무사히 다 돌아오고, 한국교회가 더 이상 무모한 선교 행위를 자제한다고 해서 또 다른 돌발사태가 없으리라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샘물교회 사태와 상관없이 지금도 아프간 사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스트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사태의 진정한 원인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을지라도 탈레반 테러의 진정한 뿌리는 미국의 차별적, 강압적 중동 및 이슬람 정책에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제2, 제3의 샘물교회 사태는 언제나 준비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아프간 파병이 전투병이 아닌 평화와 재건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우리끼리만 통하는 명분이지 아프간인들이, 더구나 탈레반이 이해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땅을 빼앗으러 온 미국에 동조하여 군대를 파견한 하수인 나라에 불과하다. 그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가급적 빨리 철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가 아무리 봉사를 위해 갔다고 주장해도 그들이 기독교를 강요하러 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그들의 시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온통 한국, 한국 국민, 기독교에 모여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아프간 국민들에게 가 있을 것이다. 감히 내가 대표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데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 구교형/ 하나누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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