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색즉시공]보다 지저분하지 않고 [품행제로]보다 깔끔했다. 영화보는 동안 수없이 자지러졌다. 내 뒷자리의 어떤 여자는 거의 숨이 넘어갈듯이 웃어제꼈다. 기자 평론가 시사회 반응이 이 정도면 일반 시사회는 아마 천정이 날아갈 것이다.
난 과외해본 적이 없다. 개인과외는 할 생각도 안했고 그룹과외는 몇 번 시도했다가 한 두 번 나가고 안나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모여 있는게 싫어서였다. 하지만 김하늘같은 동갑내기 과외선생이 있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최수완씨가 2000년 6월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올린 [스외니-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영화화 한 것이다. http://www.puha.co.kr에도 올라가 있고, 월간 [이슈]에 심혜진의 만화 [그 녀석과 나]로 연재되기도 했으며 2001년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영화 제목처럼 대학 영문과 2학년인 스완(김하늘 분)과 고등학교 3학년을 두 번이나 꿇은 지훈(권상우 분)은 동갑이다. 집안이 어려워 어머니(김자옥 분)가 [스와니네 닭집]을 운영하는 형편이어서 거액의 과외비를 포기할 수 없어 스완은 온갖 서러움을 당해도 꿋꿋이 과외하러 지훈이네 집에 간다.
왕년에 어깨 출신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아서인지 지훈이는 학교 쌈장을 떡주무르듯 하는 고도의 무공 보유자이다. 첫 만남부터 과외 선생에게 대뜸 반말을 하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스완이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운다. 미국에 몇 년 있었다고 했지만 기본적인 영어 문장도 읽을줄 모른다. 그저 시간만 때우다 가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과외를 해야 하는 지훈이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외를 해야 하는 스완.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지훈과 스완을 축으로 잔가지를 최소화해서 전개된다. 따라서 군더더기가 없다. 불필요한 설명을 자제하고 점프컷으로 넘어가는 감독의 빠른 속도감 때문에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슬림하지만 대신 촛점이 뚜렷하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가장 큰 미덕은 대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문어투에 관념적인 대사가 난무하는 우리 영화 시나리오판에 이런 정도의 흡인력 있는 대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또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살아 있다. 권상우는 지금까지의 연기를 업그레이드 해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연기를 보여준다. 김하늘도 그렇다. 여전히 질질 끄는 청순가련형의 푼수끼가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김하늘 연기 중에서 압권이다.
기고만장한 지훈이가 아버지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가, 바로 카드 때문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과외를 받지 않으면 카드를 압수하기 때문에 지훈은 아버지 앞에서 맥을 못춘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물신주의에 길들여진 세태의 풍자가 곳곳에서 비루를 번뜩이고 있기 때문에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더욱 즐겁게 한다.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쳤던 원작을 씨줄 날줄로 얽어서 갸벼운 감상이나 지나친 오버로 과장에 빠지지 않고 그 흔한 키스씬 하나 없이 섹스씬 하나 없이 이 정도 선에서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각본이나 연출,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다.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은 흠이지만 충분히 눈감아 주고 싶다.
스완과 지훈의 이야기로 한정 지으면 과외받는 좁은 방이 무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훈의 학교생활,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기존 쌈장인 종수(공유 분)와의 갈등이나, 지훈에게 뻐꾸기를 날리는호경(긴지우 분)을 등장시켰는데 모두 마무리가 귀엽게 처리되었다. 어느 인물 하나 악인이 없이 관객들이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것은 감독의 연출력 때문이다. PC통신 연재소설 원작이라는 점에서 제2의 [엽기적인 그녀]가 아닐까 의심했던 시선들은 눈녹듯이 사라졌다. 또 하나의 대박이다.
지훈의 아버지로 나오는 백일섭이나 스완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김자옥은, 몇 씬 아니지만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역시 노련한 배우들은 다르다. 화면에 얼마나 많이 모습을 비치는가 보다, 얼마나 깊은 인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가가 중요하다. 젊은 배우들이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 보이는데는 직접적 체험 이상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배우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이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는 배우들을 일찍 졸업시킨다. 익을만 하면 퇴출시키는 것이다. 관객들이 더 싱싱한 배우들을 원한다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신인 감독 김경형의 인상적인 연출력에 힘입어 한국영화 상반기 최고의 힛트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과외를 다룬 영화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혹시 유사 조폭영화가 범람한 것처럼 유사 과외영화가 쏟아지지는 않겠지? 유사품을 근절합시다.<
*사족, 그 후의 이야기 : 영화 속의 모델이 된 지훈은 스완의 과외 덕분으로 K대 체육학과에 진학했고 지금 영국 어학연수 중이며, 스완은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했다. 그들이 실제 연인 사이를 지속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