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
늘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정직하려 노력하는 사람.
어린 시절의 정겹던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가슴 한켠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하덕규는 한 사람의 음악인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시인이며, 한 사람의 신앙인입니다.
그의 음악은 사랑의 울림이 되어 듣는 이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고,
그의 시는 순수함의 빛깔로 다가와 병들고 오염된 세계에 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본명보다는 ‘시인과 촌장’으로 더 잘 알려진 가수, 하덕규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바닷가 마을이다.
그곳에서 하덕규는 눈물없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도 팽개치고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파도에 쓸려온 미역이나 도루묵 알을
주워 먹으며 아무 걱정도 없이... 그러나 천진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어머니와 헤어져
서울로 떠나간 후 그는 고향을 못잊어 끝없는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인가. 그의 노래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히 묻어난다.
‘그 눈물 없는 동산 강가에서 불고 싶다고 고향이 그립다고 (새봄 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봄이 정말 와 준다면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요.(기쁨 보리떡)’,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사랑해요라고 쓴다. (사랑일기)’
20대 젊은 방황의 시절, 그는 한계령을 넘고 동해바다에서 위안을 찾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는
향임을 발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향은 다만 마음속의 고향이며, 다가갈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 뿐.
80년대 모든 것들을 꽁꽁 얼리는 암울한 독재의 시절, 차디찬 겨울같은 도시생활 속에서 그가 절망의
심정으로 만든 ‘한계령’이 가수 양희은의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었다.
‘한계령’에서는 고향이라 찾아가도 발걸음을 돌려야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로 표현된 것이다.
고향상실로 시작된 방황과 절망, 허무주의를 결국 다시 고향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 극복할 수
있었다고 그는 스스로 토로했다. 열심히 생활하며 보람을 찾는 고향사람들로부터 건강한 삶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땅을 홀로 일구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라고 쓴다.(사랑일기)’
이제 그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보듯 그는 90년대 이후 자신의 내면에서 벗어나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94년에는 20여명의 가수를 이끌고 아프리카 난민돕기 음반 ‘한톨의 사랑이 되어’를 기획, 출반했으며,
아울러 세계순회공연도 가졌다. 또한 착한 노래만들기, 평화만들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등 사회성
있는 공연에 참가하거나 개최하는 등 밝은 세상 만들기에 자신의 노래가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덕규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는 자신의 노래 ‘풍경’의 가사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은
바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라고 꼽았다.
-하덕규님의 홈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과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이 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덕규님의 신앙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노래의 ‘당신’은 하덕규님의 말에 의하면 ‘절대자-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기초하여 볼 때 자아를 내세우고 욕망을 추구하고 사는 인생 속에서 원래 마음속의
주인이었던 ‘당신’조차 들어와서 머물 곳이 없음을 가시나무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어둠’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악을 상징하고 ‘이길 수 없는 슬픔’은 인간사에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가시나무’는 스스로 가시를 품고 싶어서 품게 된 것이 아니기에 '가시'는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타인에 대해 상처를 입히고 절대자에 대하여 불복종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괴롭고 슬픈 노래를 부르던’ 시인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안의 '바램'을 버림으로써 '당신'이 와서
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고 지금은 '당신'과 함께 쉼이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 합니다.
하덕규님은 성경에서 가시나무의 힌트를 얻어 작사를 했다고 하는데 40분만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기심, 욕심, 시기 그리고 허무감의 아픈 가시나무들속에 내 스스로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왠지 가시나무가 생각나는 시린계절 가을..이 가시나무에도 빛이 비쳐져야 한다는 소망입니다.
십가자상의 예수님을 아프게 한 가시나무가 그의 피흘린 사랑으로 쉼과 자유를 주는 생명나무가 될 수
있었듯이,쓸쓸한 계절 움추리지 말고 여러분 마음속에 돋아난 어두움, 답답함,불안함의 가시나무를
빛 가운데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새(THE THORNBIRDS)?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그 울음 소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보금자리인 둥지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찔리게 합니다.
죽어가는 새는 그 고통을 초월하면서 종달새나 나이팅게일조차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이 최상의 노래와 목숨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은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고 하늘 나라의 신까지도 미소를 짓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훌륭한 고통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덕규님의 노래 '가시나무'을 처음 들었던 십수년 전 어느 밤을 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노래 하나에 어쩌면 이렇게 깊은 감정의 골짜기를 파놓을 수 있을까.
그 순간의 전율을 제 피부는 영원히 간직하고픈 떨림으로 기억합니다.
내면 어둠을 응시하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자리 없네"를 신음하듯 토하는
목소리엔 고통의 심연을 헤매다 바닥을 쳐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절절한 고백이 담겨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