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백기행 (白夔行 1912년~1963년)
학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데뷔 :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 (1935년)
화제 : 시로 데뷔해 소설로 두각을 보임
약력 :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1918년(7세) 오산 소학교 입학.
-1930년(19세)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하여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함.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
도오쿄오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함.
-1934년(23세) 아오야마학원 졸업.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지의 편집을 맡음.
-1935년(24세) 8월31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이후 시작품에 더욱 정진함. 조광(朝光)지 편집부 일을 봄.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
1월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짐.
-1939년(28세) 1월 26일 조선일보에 재 입사.
-1940년(29세) 만주의 신찡(新京,지금의 長春)으로 옮겨 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의 중국인 황씨 집에 거처를 정함.
-1942년(31세)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함.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 등을 번역함.
-1945년(34세) 해방과 더불어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7년(36세) 시 [적막강산}이 그의 벗 허준에 의해 신천지에 발표됨.
-1948년(37세) 김일성 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짐.
-1949년(38세)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 출간함.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를 번역 출간함(191면).
-1950년(39세)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 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년(42세)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함.
-1954년(43세)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함.
-1956년(45세)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평론을 발표함.
-1957년(46세)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발간함.
-1958년(47세)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함.
-1959년(48세) 시 [이른 봄] 등 7편을 조선문학에 발표함.
-1960년(50세)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함.
-1963년(52세) 이해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음.
평북 정주에서 출생(1912년),
오산고보를 나와 일본에 유학한 후 조선일보 기자생활도 하고
함흥으로 내려가 영생여고보에서 교직 생활도 하다가,
일제말기 만주로 건너가 생활을 위해 측량서기도 하고
세관업무에 종사도 했다는 백석 시인의 연보는
해방후 귀국해서 신의주에 머물렀었다는 것 외에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제6공화국 아래서 약간의 융통성이 생기면서 그의 시집은 해금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되었고,이동순 시인이 엮은 <백석시전집>의 발간(1987년)이
계기가 되어 김자야라는 익명의 여성이 나타나
<내사랑 백석>이라는 에세이집을 내어(1995년)
백석 시인과의 숨은 사랑의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할머니로 밝혀진 자야는, 그 자야라는 이름도
백석 시인이 전장터에 가 있는 낭군을 그리는 여인의 심회를 읊은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서 지어주었다고 고백하면서,
"당신은 학교의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나의 하숙으로
바람같이 달려왔다. 우리는 새삼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두손을 담쑥 잡았다. 꽁꽁 언 손을 품속에 데워서 녹이려 할 양이면
난폭한 정열의 힘찬 포옹, 당신은 좀처럼 풀어줄 줄을 몰라했다"고
백석 시인이 잠시 내려가 있던 함흥에서의 로맨스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눈과 흰 당나귀와 나타샤라는 순백의 이미지의
아름다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그녀에게 바쳐진 것이다.[자료출처 : 백 석/눈을 맞고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 - 신경림(시인)]
일제시대 시인 백석(白石)에게 함흥은 ‘바리키노’였다. 본명은 백기행,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에 유학한 영문학도이자 시인이었던 백석은
귀국 후 조선일보를 사퇴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전근한다.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향톳빛이 비쳤다. 함흥으로 간 까닭이 그의 고향
정주(定州)로 가는 길목이었거나, 첫 시집 ‘사슴’(1936년)을 가득 메운
향토적 생활로의 귀향의식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시집 ‘사슴’에 실린 ‘정주성’).
그의 시심(詩心)은 제삿날 찾아드는 할배 귀신,
오지항아리 술을 채먹는 삼촌, 더부살이 아이, 바느질하는 어미,
손자, 나그네, 붓장사가 함께 모여 모닥불을 쪼이는 밤에 서로 뒹굴며
가난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공동체였다. 그 시심의 원경(遠景)은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白樺’)
자작나무가 둘러처친 그의 시세계로 무작정 걸어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진향). 자야는 생활고 때문에
권번(券番·기생조합)으로 들어가 예인(藝人)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新女性)이었는데, 독립운동 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녀의 후원자를
만나러 함흥으로 갔었다. 백석과의 조우는 우연이었지만, 불꽃이었다.
“단 한번 부딪힌 한 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김자야 ‘내 사랑 백석’)
그들의 ‘바리키노’, 함흥의 시간은 짧았다.
부모의 강권으로 백석이 세 번이나 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백석은 도망쳐 태연하게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홀로 함흥을 떠났다.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백석은 태연하게 시 한편을 전했다.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마가리(오막살이)’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그가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백석은 만주에서 몇 년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함흥을 떠날 때처럼 그들은 서로를 기다렸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졌다.
재북(在北) 작가가 된 백석은 사회주의풍의 시를 자주 써야 했지만,
그것의 배경에는 항상 자작나무가 둘러처친 토방(土房)의 공동체가 있었다.
자야가 남한에서 기다림의 얘기를 출간한 무렵(1995년),
백석(白石)은 북녘 어느 산골에서 죽었다.
자야가 지어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을 게다. [자료출처 :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나타샤와 자작나무 :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시인 신경림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시집을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한다.
그의 시는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만큼
감동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시는 40여편이 채 못됐지만
그 감동은 열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 컸다"
그런가 하면 구상씨는
"시인은 빼어난 시 하나만 남겨도 소임을 다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훌륭하다.
나는 평생 그네수준의 시를 한편도 써보지 못했다"며 탄식했다.
또 고 기형도시인은
"이 시대의 진정한 천재시인은 그 뿐"이라고 추앙했으며
시인 최두석씨는
"외래 모더니즘을 수용해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 보였다는 점에서
그는 김광균이나 김기림같은 군소시인과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어떤 인물이길래 당대 내로라 하는 시인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평안도 두메산골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일제의 언어 말살정책에 교묘히 맞섰다는
`민족시인' 백석(본명 백기행 1912년~1963년)을 가리킴이다.
탁월한 언어 조탁능력과 명징한 이미지 형상능력으로 늘 이름앞에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백석. 그러나 수려한 외모탓에
뭇여성들과 스캔들을 뿌리며 말년에는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백석.
그의 문학업적과 삶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국내에서 결성된다.
도서출판 지나(대표 송준)는
최근 백석기념사업회 창립을 위한 준비위를 결성했다.
기념사업회 창립을 추진중인 송준씨(33)는
"해금된 지 8년이 지나서야 백석기념사업회가 결성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1930년대 가장 뛰어났다는 이용악보다
오히려 당대에 더 문학성을 인정받았던 민족시인이
바로 백석이라고 강조했다.
송씨는 지난해 8월 백석의 일대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전4권중 2권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사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방언이 어쩌나 많은 지 별도의 낱말풀이가
없이는 그의 시를 읽어내려갈 수 없었으며 시에 등장하는 음식이름과
식물명 또한 너무나 방대해 후대 학자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그가 월북작가라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물론 백석은 원래 평북 정주가 고향으로 남한에서 생활하다
해방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엄밀히 따지면 월북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북 작가'라는 이유때문에
그는 40여년간 철저히 한국문단사에서 지워진 인물이었다.
그의 명성을 기억하는 몇몇 문인들만이 그의 대표시집 <사슴>을
필사해 몰래 돌려보았을 뿐이다.
그러다 87년 월북작가에 대한 정부의 해금조치로 비로소 그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시선집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미래사 등
각 출판사들이 앞다퉈 그에 관한 책을 냈다. 학계의 관심도 증폭돼
그에 관한 석사논문만도 100여편이나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백석 재조명작업에 관한 한
송준씨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러시아 일본 등 백석의 행보를 그대로 쫓으며
자료조사와 주변인물들에 대한 인터뷰를 해나갔으며
그 결과 백석의 학창시절 모습 등 귀중한 사진자료와
`나 취했노라' `이주하 여기서 눕다' `늙은 갈대의 독백' 등
그의 미발견 시 20여편을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뒀다.[자료출처 : 묻혀진 천재시인 백석 부활한다 - 뉴스피플]
사족이지만,
이 시에 나오는
출출이는 뱁새,
마가리는 오막살이를 뜻합니다.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으로 백석과 3년간의 불 같은 사랑을 한 후
남과 북으로 헤어져 60여년간 평생을 가슴에만 담고 살았던 한 여인이
팔순에 낸 책, <내 사랑 백석>의 저자 김자야는
대원각 (지금의 길상사) 주인이었던 김영한입니다.
자야 (子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백의
'子夜吳歌(자야오가 : 한 밤에 들려오는 오나라 노래)곁들입니다.
長安一片月 (장안일편월)
萬戶擣衣聲 (만호도의성)
秋風吹不盡 (추풍취부진)
總是玉關情 (총시옥관정)
何日平胡虜 (하일평호로)
良人罷遠征 (양인파원정)
장안 한 조각 밝은 달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가을바람 불어불어 그치지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을 향하는 정이라
어느 날에야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을 마치고 우리 낭군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