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주인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민이 주인이다. 국민이 주인인 이 집에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정해진 기간 동안 머물다가 떠난다.
먼저 청와대라는 집을 살펴보고 이 집에 세들어 살다 떠난 사람들의 개인적인 풍수지리학적인 요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청와대는 名堂인가? 풍수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청와대는 凶家(흉가)에 가깝다.
고려시대 離宮에서 조선총독의 관저로
청와대의 뿌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숙종 9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南京(남경)의 離宮(이궁)을 세웠다. 조선조 태조 4년에 正宮(정궁)인 景福宮(경복궁)이 創建(창건)되면서 이곳은 경복궁의 後園(후원)으로 사용되었다.
고종 때 경복궁이 重建(중건)된 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는 中日閣(중일각)·五雲閣(오운각)·隆文堂(융문당)·景武臺(경무대)·隆武堂(융무당)·春安堂(춘안당) 등의 건물이 지어졌다. 용도는 대개 과거장·관농장·연무장으로 사용됐는데, 경무대는 과거장으로 사용됐다.
日帝는 조선의 正宮인 경복궁의 일부에 총독부 청사(철거된 중앙청)를 지었다. 아울러 총독 관저를 경복궁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풍수상 조선의 용맥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위해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신축했다.
이때가 1939년으로 6代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첫 주인이었다. 미나미 총독은 총독 관저를 옛 이름 그대로 「경무대」라 불렀으나,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고 식민정책이 강화되면서 이 건물의 이름은 경무대 대신 「조선총독관저」로 불렸다.
총독 관저 시절의 마지막 주인(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1945년 9월 총독부(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美24사단장 하지 中將에게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어 주고 日帝 관리들과 함께 이 땅을 떠났다.
日帝가 남산에 있던 총독 관저를 경복궁 주변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터를 물색하면서 당시 활약하던 한국의 유명 풍수들을 동원하여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한국인 풍수들은 용맥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벗어난 엉뚱한 지점을 名堂으로 지목하여 천거했고, 그 때문에 총독 관저는 名堂이 아닌 엉뚱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경무대가 名堂 아닌 엉뚱한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집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뒤끝이 좋지 못했다.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고 목숨만 연명하여 쫓겨간 조선총독과 그 수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 신생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경무대의 주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운했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운
初代(초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4·19로 下野(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 결국 망명지에서 孤魂(고혼)이 됐다. 그 후임으로 세종로 1번지에 들어온 尹潽善(윤보선) 前 대통령은 재임 9개월 만에 군사 쿠데타로 失脚(실각)했다.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바꾼 사람이 尹대통령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은 부인 陸英修(육영수)를 먼저 兇彈(흉탄)의 제물로 보냈고, 자신은 부하였던 金載圭(김재규)에게 살해됐다. 그 뒤를 이은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후 내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백담사로 유배당했다.
全斗煥 前 대통령 다음으로 이 집의 주인이 된 盧泰愚 前 대통령은 청와대를 새로 짓기로 작정하고 신축공사를 서둘렀다.
신축 본관(대통령 집무실)은 1989년 7월22일 착공, 1991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그보다 1개월 앞서 9월에는 프레스센터 격인 「춘추관」이 완공되었다.
새 청와대도 문제
새 청와대 건물은 풍수지리학상의 名堂 자리에 앉았을까? 아니었다.
흔히 경복궁의 입지를 말할 때 북악산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을 잇는 직선상에 있는데다 「左靑龍 右白虎(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청계천과 한강이 앞을 휘둘러 「더할 나위 없는 名堂」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인왕산 결인목에 해당하는 서북 간의 자하문 터널 쪽이 푹 꺼져 골바람이 넘어오기 때문에 애당초 名堂으로서의 입지가 아니었다. 또한 안산인 남산이 너무 높아 늘 고개를 숙여야 하는 형국이다.
일찍이 일본은 풍수지리학이 발전했고, 특히 조선을 강점 병합한 이후 조선 반도의 풍수지리학적인 특성을 식민지배에 최대한 활용했다. 저들은 경복궁의 결함을 간파하고 새로 만드는 총독 관저를 남산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인왕산을 향하게 했다. 그래서 경복궁이 지닌 결함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名堂 아닌 엉뚱한 자리에 본관을 앉히는 愚(우)를 범하고 말았으니 이는 남의 나라를 침탈한 日帝의 原罪(원죄)에 따른 당연한 업보였다.
새 청와대도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向으로 지어졌다.
이 집을 지은 후 입주해서 살다 간 사람들, 즉 盧泰愚·金泳三·金大中·盧武鉉 네 사람의 대통령은 그전 경무대와 청와대 시절 주인들처럼 큰 비극을 맞지 않고 평탄하게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상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의 통치시대를 조명해 보면 그전 시대, 예를 들어 李承晩·朴正熙 시절보다 국력이 허약해지거나 권력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우선 청와대는 앉은 자리가 너무 높다. 日帝 총독이 경복궁을 아래로 굽어보고 조선의 용혈을 깔고 앉기 위해 정한 자리다. 그러므로 신생 대한민국 최고 권부로서는 맞지 않다. 터가 아니므로 이 집에 들어간 사람들(대통령)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했고, 대통령의 불안정은 곧바로 국가의 운명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청와대를 신축한 후 재임한 네 대통령 중 어느 한 분은 밤에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정신적 불안정이 그 대통령 한 사람에게 국한된 증상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현재의 청와대 자리 말고 달리 터가 없었을까? 기막힌 천하 名堂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창경궁 一隅(일우)가 바로 그 자리다.
昌慶宮이 名堂이다
창경궁 |
창경궁은 日帝가 동물원을 만들어 園(원)으로 격하시켰으나, 1986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지난날 창경원 시절 벚나무가 우거지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 뱃놀이 터로 사용했던 그 부근이 天下名堂이었고 氣가 강하게 뿜어나오는 吉地였다.
日帝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경복궁 윗자리가 지닌 상징적 매력 때문에 총독 관저를 북악산 밑으로 정하기는 했으나, 그에 앞서 창경궁의 풍수지리학적인 힘을 말살하기 위해 짐짓 동물원을 포함한 놀이터로 격하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북악에서 흘러온 龍脈(용맥)이 원서동 뒤편의 일자문성을 주산으로 놓고 창덕궁으로 들어와 세 갈래로 갈라졌다. 한 줄기는 奎章閣(규장각)으로, 또 한 줄기는 映花堂(영화당)으로 흘러 십자맥을 이루었는데, 지난날 科擧(과거) 결과를 발표하던 영화당이 이 군왕맥을 깔고 앉았다. 마지막으로 용맥의 주맥은 수십m를 흘러 창경궁으로 넘어와 通明殿(통명전) 우측에서 生氣處(생기처)를 이루었으니 通脈法(통맥법)으로도 어긋남이 없으며, 氣를 측정할 수 있는 정도의 수련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기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名堂 자리다.
日帝가 동물원을 만들면서 박제표본을 전시했던 바로 그 자리다. 지금은 산책을 위한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창경궁의 문화재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통령 관저를 짓기에 모자람이 없는 터가 남아 있는 셈이다. 삼각산의 청룡 방향(뒤에서 본 좌측 방향) 주맥이 왕궁의 主山을 이루고 내려오다가 창덕궁 뒤에서 수직형 一字文星(일자문성)을 형성한 뒤 창경궁으로 들어와 힘찬 반석을 깔고 生氣處인 大名堂을 이루었다. 서울대학병원 자리의 구릉이 內靑龍을 이루고 낙산이 外靑龍을 이루었으며, 그 밖에 창신동·용두동의 맥이 줄줄이 청룡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인왕산이 백호가 되고 남산이 안산을 이루었고, 신당동·왕십리까지 감싸주고 있어 태극으로 回龍(회룡)하는 형세이다. 四大門 안에 獨山(독산)을 지어놓고(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 인근, 대학천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점) 다시 청계천의 破口(파구)인 한양大 자리에서 좀더 큰 독산을 지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형국이다.
청계천 물이 西出東流(서출동류)하고, 한강물은 東에서 西北으로 빠지는데다 그 너머 交河(교하)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니 가히 後天大運(후천대운) 大發福(대발복)할 天下吉地라 하겠다.
창경궁 뒷담 부근에 서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라. 청와대와 경복궁에서 보는 남산과 달리 편안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왜 남산이 天下名堂의 안산으로 그 자리에 있는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비하면 평지에 가까워 군림하는 집이 아니라 국민들 속으로 훨씬 다가와 있다.
坤度시대가 열린다
易學上(역학상)으로 보면, 세계는 1984년 이래 坤度(곤도)시대다. 陰이 지배하는 시대, 즉 後天시대라는 뜻으로 세계적으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오고 여성 중심의 사회로 이행되어 간다고 한다.
陽이 지배하던 乾度(건도)시대에는 順水(순수)지역(물이 남쪽으로 흐르는 지역)이 발전했으나, 坤度시대에는 逆水(역수)지역(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지역)이 발전할 운세라고 본다. 서울은 큰 형국으로 볼 때 한강이 西北방향(乾方·건방)으로 破口(파구)되었으므로 이 시대에 더욱 크게 발전할 형세다.
全斗煥 前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뜰에서 기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도 그렇거늘 하물며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면 논두렁 정기 이상의 그 어떤 운명적 가호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필연시하려는 표현이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이 한 말은 맞는 말이다. 대통령을 역임했거나 재임 중인 사람들의 先塋(선영)과 生家 중 한 곳에서는 범상치 않은 名堂이 발견되었다.
필자는 역대 대통령들의 先塋과 출생지 生家를 두세 차례 답사했다. 李承晩 前 대통령은 황해도 출신이라 답사가 불가능했다. 최근 서거한 崔圭夏 前 대통령은 재임 기간이 짧아 제외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月刊朝鮮 2007년 1월호 「朴正熙와 金載圭」 편에서 상세히 언급했으므로 제외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의 경우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선영을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 풍수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두고 미묘한 논란을 낳았다. 지금 그 移葬(이장)의 효과를 판단하는 것이 불필요한 논란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제외시켰다.
氣脈 발견 못 한 尹潽善 生家
尹潽善(윤보선·1897~1990) 前 대통령이 태어난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는 대한민국 명문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海平 尹氏(해평 윤씨) 集姓村(집성촌)이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평야촌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 班村(반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 196호인 「尹潽善 前 대통령 生家」(1907년 건립)를 비롯해 尹勝求家(윤승구가·1844년 건립), 尹日善家(윤일선가) 등 중요민속자료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작은 민속촌을 보는 듯하다.
尹潽善 대통령 생가의 뒤편,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尹致昊(윤치호) 박사 기념예배당인 신항감리교회가 하늘을 향하여 십자가를 높이 매달고 서 있다. 충청도 양반 가문이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開化(개화)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면서 마침내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그 역동성을 짐작케 하는 구도이다.
윤보선 일가 선영 앞에 있는 비각. |
尹潽善 대통령의 생가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전체가 일반적인 名堂의 구성요건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背山臨水(배산임수)의 기본은 물론이고, 「左靑龍 右白虎」를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집 안팎을 뒤져 보았으나 기맥을 찾을 수 없었다. 「인물이 나는 데는 반드시 山川과 陰氣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의 근본 상식이 시험대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모습은 뼈대 없이 그저 부드럽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형세여서 「도대체 무슨 氣를 받고 대통령이 태어난 것일까」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생가 중 가장 규모가 큰 尹潽善 대통령 생가에서는 안타깝게 살아 있는 氣를 만날 수 없었다.
마을에서 약 10km쯤 떨어진 곳,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에서 2.3km 떨어진 지점인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의 尹씨 선영을 찾았다. 山의 모양이 龍(용)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세라 하여 이름을 「飛龍山(비룡산)」이라 했다. 대통령을 지낸 尹潽善은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스스로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곳이 과연 얼마나 名堂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尹씨가의 선영은 위아래 6代의 祖孫(조손)이 계단식으로 유택을 지어 잠들어 있었다. 어떤 무덤은 부부 합장이었고, 어떤 무덤은 부부 별장이었다.
맨 위에서부터 尹潽善 前 대통령과 孔德貴(공덕귀) 부부의 합장 무덤이, 그 아래로 (尹潽善의) 고조부모인 尹得實(윤득실·協辨公) 내외, 세 번째로 得實공의 장남인 尹敎東(윤교동) 내외, 네 번째는 尹潽善의 부모인 東野 尹致昭(동야 윤치소) 장로와 李範淑(이범숙) 권사 내외, 다섯 번째는 증조부 교동공의 아우인 取東公(취동공·贊政公)의 첫부인 高靈 申氏(고령 신씨), 맨 아래 여섯 번째 무덤은 尹潽善의 막내 동생인 尹瀅善(윤형선)이었다. 취동공의 유택은 별도로 아산시 석곡리에 안치되어 있었고, 조부 敬齊公 尹英烈(경재공 윤영렬) 내외의 묘소는 평택시 객사리에 있었다.
선행과 적선으로 얻은 고조부의 묏자리
특이한 것은 위로부터 맨 아래나 다섯 번째쯤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尹潽善 前 대통령 내외의 무덤이 다른 모든 先代 무덤을 제치고 고조부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상식을 뒤엎는 逆葬(역장)이었다.
대통령직을 굳이 옛날 벼슬(?)로 환치하자면 王에 비견할 만하니 그래서 조상을 뛰어넘어 맨 윗자리를 차지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예상한 듯 묘소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尹潽善 대통령이 생전에 준비해 둔 자리로서, 조상의 무덤 위에 자리한 것이 예의가 아니라 하나 대통령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등 태운 형국이니 어떠랴」 하여 스스로 이 자리를 선택했다』
格外(격외)의 일이니 그 善惡을 따질 일은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죽어서도 할아버지의 어깨에 무등을 타고 싶었던 尹潽善 前 대통령의 조상에 대한 숭모와 애정이 名堂을 짓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尹潽善·孔德貴 내외의 합장 무덤은 진혈이 아니었고, 결인목보다 위치가 높아 名堂이 나올 局(국)도 아니었다. 생전에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는 尹潽善 前 대통령이 할아버지 무등을 타고서라도 선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정작 자신은 名堂에 들지 못하였다.
유택들 중 名堂은 고조부 得實公의 무덤이었다. 다른 무덤들에 비하여 蟬翼(선익)이 분명하고 기맥이 있었다. 이 무덤을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득실공의 3남 취동은 마흔이 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병들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적선을 그치지 않았다. 집에는 늘 죽을 쑤어 놓고 배고픈 나그네를 대접하였다.
하루는 병든 스님을 모셔다가 지극하게 보살폈다. 기운을 차린 스님은 그 보답으로 묏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득실공을 모시니 아들 형제를 낳고 집안이 크게 일어났다』
바로 그 자리, 스님이 점지해 주었다는 자리에 누운 고조부 득실공의 묘소가 名堂이었다. 『善을 행해야 名堂을 얻는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道人이 점지해 줬다는 全斗煥 祖父의 묘
全斗煥(전두환·1931~ ) 前 대통령의 생가인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는 黃江(황강)이 龍처럼 몸을 틀며 굽이쳐 흐르다가 산자락의 아래쪽 귀퉁이에 빚어놓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마을 뒤에 솟아 있는 池山(지산) 정상에는 규모는 작으나 이름 그대로 백두산 天池(천지) 같은 溶出池(용출지)가 있어 겨울에도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황강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도 이 못은 마르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몰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둔 주차장에는 단 한 대의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生家는 글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농가의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나마 아래채 자리는 지난날 운동권학생들이 몰려와 불을 질러 소실되었고, 본채만 남아 있었다. 본채라고 해봐야 작은 방 둘이 이어져 있고 한 옆에 부엌이 딸린 전형적인 영남의 궁박한 촌가였다. 全斗煥 前 대통령은 이곳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의 全斗煥 생가. |
집 뒤란으로 대나무 울타리가 둘러 있고, 右白虎가 크게 앞을 감싸고 나왔다. 황강 건너편의 안산이 뚜렷했으나, 집 안팎의 어디에서도 생기는 찾을 수 없었다. 집은 南向이었는데 대문은 서쪽방향으로 나 있어 이 집의 주인들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全斗煥 前 대통령의 부모는 그가 아직 어릴 때 率家(솔가)하여 대구로 나갔고 거기서도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다.
지산의 정상 부근에는 全斗煥 대통령의 조부 묘소가 있었다. 「處士 松坡 完山全公之墓(처사 송파 완산전공지묘)」는 전직 대통령의 할아버지 묘소답게 잘 관리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높지는 않았으나 지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의 조카인 전성규씨는 『道人 한 사람이 저쪽 산비탈에서 지팡이를 짚고 오다가 이 자리에 꽂으며 묘를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全斗煥 증조부 묘가 권력을 낳을 형국
全斗煥 부모 墓所. |
그러나 「道人」의 점지에도 불구하고 祖父 묘에는 氣가 없었다. 「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全斗煥 前 대통령의) 증조할머니 入溪 鄭氏(입계 정씨)와 할머니 光州 盧氏(광주 노씨) 고부 간의 무덤이 나란히 있었으나, 이 두 무덤 역시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덤들과 제법 멀리 떨어진 이웃 산봉우리 정상 부근에 자리 잡은 증조부 錫柱公(석주공)의 무덤은 강한 氣가 솟아나는 名堂이었다. 묘소에서 보면 황강이 휘둘러 발 아래를 감싸고(回龍), 앞으로 안산이 내려다보여 권력을 낳을 상이었다. 멀리 남쪽으로 산세가 일자문성을 이루었으며 뒷산은 면류관 형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