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실내용
1. 원구단 (圓丘壇 ) 2. 중명전 (重明殿) 3. 구러시아공사관 (舊-公使館) 4. 대한상공회 서울대성당
5. 류관순열사 빨래터 6. 배재학당 동관
1. 원구단 (圓丘壇) 지정번호 : 사적 제157호 지정연월일 : 1967년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
서울시청 맞은편의 소공동 조선호텔 후원에는 낮선 고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제단으로
원단(환구단)이라고도 한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둥근 단으로서 조선 초기에도 만들어졌을 것이
확실하나 자리를 알 수 없고, 이것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만들어졌다.
원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황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원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원구인 지금 호텔의 정원인 듯 보여지는 북쪽에 3층 팔각정인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았다.
1913년 4월에 조선총독부가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평의 총독부 철도조선호텔을 착공,
이듬해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1968년에 헐리고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있다.
원구단 원형 모습
원구단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天圓地方)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되었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 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 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늘의 자손인 우리민족이 오랜 상고시대부터 매년10월 상순에 국중 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국태민안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 이라 한다.
이 ‘원구단’ 천제의 유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983년인 고려 성종2년 정월에 황천상제인 삼신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의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 를 드렸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3년인
1394년과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 임금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 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 되었다가,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때에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팔도의 가장 명당 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천제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의식을 올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 하였던 곳 이다.
그러나 또다시 일제와 부일파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천제는 천조대신의 만세일개인 일본 천황만이
지낼 수 있다며, ‘원구단’을 헐고는 그 자리에 철도 호텔을 지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의 자손이요, 단군의 후예인 천손들이 천제를 빼앗기고, 일본 천황이 단군 제천권을
대신 행사해오고 있다.
가장 성스러운 제천단이 일본의 호텔로 둔갑하였고, 이후 철도호텔 자리에, 조선호텔이 세워진 것이다.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단만이 남아있다. 일제로부터 훼손된 원구단의 원형복원은 요원한 상태며,남아있는
‘황궁우’와 ‘석고단’ 만이 민족적 정기와 하늘민족의 부활을 꿈꾸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호텔의 정원 역할을 하고 있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하는 선각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제천 행사는 장엄하고 화려한 행사였고, 국가의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 이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와 전통은 잊혀지고,
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연로한 노인들만의 안타까운 민족정신 운동으로 그치고 있다.
황궁우의 석조 조형물만이 말없이 원구단을 내려다보고있다. “원구단의 복원은 단지 건축물의 복원이 아니다.
이는 역사가 바로서는 것이며, 이러한 단군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뿌리도 없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왜곡 하는 것이다” “현재 삼성일가가 차지하고 있는 조선호텔 자리는,
민족의 성지이며 원구단의 옛 터이다. 우리의 단군천제를 빼앗아간 일본은 108년 동안 천제를 이어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2008년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올리며, 한국이 자신들의 제후국임을 주장하는데, 정작 천제를
지내야할 천손 장자국은 천제, 제천권 마져 상납한 체, 500년이 넘게 하늘민족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초에는 "왕이 圓丘에서 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籍田을 경작하였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 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되었다.
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 에 실시된 원구제(園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으며,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오늘날 한남동ㆍ보광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되는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하였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 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
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
뇌사(雷師)·오진(五鎭)· 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 자리에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과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가 남아 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원구단 전경 1897년 고종은 소공동에 원구단을 축조하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옛 원모습)
이 단(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으로 광무 원년(1897)에 조성되었으며 "고종은
독자적인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원구단' 을 제천단으로 중수하고 천상의 상제님께 한민족의 전통인
천자 등극을 고하는 천제를 올렸다.
원구단 계단 답도와 해태 조선호텔 건물과 너무 가까워 사진 찍기가 어러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던 장소가 여러 곳 있습니다.
풍수 전문가들의 말로는 모두 지기가 강한 생기처(生氣處)랍니다. 그 중 하나인 강화 마니산 참성단을
지기탐지기로 측정해본 결과 이름난 명당이 1분에 20~30회 정도 회전하는 데 반해 분당 65회전을 할 만큼
기가 강한 곳이랍니다. 기가 강한 만큼 기도의 효과도 크답니다.
원구단 터도 기가 엄청 센 곳으로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원구단과 황궁우, 석고단(石鼓壇)이 있었으나
일제가 원구단을 헐고 호텔을 지어서 조선의 지기를 막아버렸습니다.
황궁우 동쪽문
황궁우 정문 황궁우의 정문은 돌과 벽돌로 지은 특이한 문으로 조선호텔에 바짝 붙어있어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 중앙의 답도에는 용을 새겼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답도는 봉황문양이나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 세운 것이라
중국과 동등하게 격을 높인 것입니다. 답도 좌우측에 배치한 해태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솜씨를 발휘한 작품으로 표정이 풍부합니다. 이런 솜씨가 궁궐건축이 이어지지 못하면서
맥이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은 궁궐 석조동물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 있을 정도입니다. 고종 36년(1899)에 지은 황궁우는 석조기단을
8각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세운 8각 3층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보이나 안에는 통층입니다.
내부에 3층 지붕까지 지탱하는 팔각기둥 8개를 둥글게 돌려 세웠습니다.
1층 바깥에는 모서리마다 3개의 팔각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윗부분과 창방의 아래에 파련각(波蓮刻)한
장식을 돌려붙여 화려 합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각 전돌을 깐 바닥 위에 천신과 지신을 모신 작은 철제 가구 2개가 보입니다.
▲ 원구단 토수
짙은 청색 보를 덮은 것이 천신이고 황색 보를 덮은 것이 지신이랍니다. 보자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여
서울 중구청 문화재과에 물어보니 상징물일 뿐 아무것도 없답니다.
2층 지붕과 3층 지붕 사래 끝에 토수가 끼워져 있습니다. 사래가 비를 맞아 썩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입니다.
본래 모두 청동토수였으나 근래에 흙으로 만든 토수로 갈아 끼운 것이 보입니다.
돌 북 3개 나란히 세워둬 지붕 추녀마루 잡상은 맨앞에 삼장법사, 그 다음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순으로
늘어서서 잡귀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돌 북 3개를 나란히 세운 석고단은 고종 즉위 40년(1902)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몸통에 새긴 용무늬의 조각 솜씨가 뛰어난데 마모가 되지 않아서 갓 만든 작품처럼 산뜻해 보입니다.
나라 안에 단 하나뿐인 돌 북으로 용 문양을 연구하는 분에게 꼭 찾아보라고 권하는 명작입니다.
하늘의 자손을 자처하는 우리 민족은 환웅 때부터 영고탑을 세우고 하늘에 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만이 하늘에 제를 지낼 수 있다는 이유로 고려 말 우왕 11년(1385)에 폐지됩니다.
나라가 힘이 약해지면 제사도 마음대로 못하게 됩니다. 원구단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이 마지못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 원구단 석고
고종 34년(1897) 조선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남별궁터에 원구단을 건립합니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으로 정하고 그해 10월 12일에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그날 참석하였던 외국 외교관들은 “이처럼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
이라고 기록을 남깁니다. 당일 아침 고종은 “꿈에 선왕이 나타나 노한 얼굴로 ‘예로부터 내려온 유풍을
변혁해서는 안되느니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고종은 40명이 메는 화려한 대련을 타지 않고 4명이 메는 소련을 타겠다고 화를 내는 등
까탈을 부리며 출발을 지연시킵니다. 겨우 떠난 행렬은 도중에 내부대신 박영효가 낙마를 하는 불상사까지 생깁니다.
고종의 한숨이 늘었겠지요. 여하튼 고종은 천지제를 올리고 황제에 오릅니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중화전으로 옮겨 잔치를 하며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합니다.
원구단은 사각형으로 쌓은 벽돌담 안에 다시 원형 벽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화강석으로 3단의 단을 올렸습니다.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이치에 맞춘 것입니다. 각 단마다 여러 신을 모셨지요. 맨 위 석단에는 원추형
지붕을 세웁니다. 지붕은 황금색이었답니다.
▲ 원구단 옛사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3년 원구단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어서 조선의 맥을
누르려 합니다.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호텔을 헐고 원구단을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황궁우
마당이 호텔의 정원처럼 보이는 현실이 더 안타깝지요. 황궁우와 석고는 역사는 짧지만 건축 기법이 특이한
소중한 유물로 자주독립의 의지가 담긴 곳입니다. 보물쯤 되려니 하고 살펴보니 사적지 제157호랍니다.
일제야 당연히 문화재 지정을 하기 싫었겠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달리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구단을
보시고 난 후 고종황제가 말년을 보낸 경운궁(덕수궁)을 돌아보면서 구한말의 역사를 되짚어 보세요.
나라의 힘이 부족하면 어떻게 되는지의 역사 현장입니다.
환구단 정문은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면서 존속되 오다가 1967년 조선호텔을 다시 지으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환구단 정문으로 전문가들이 판단하고 있는 문은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의 백운문으로 보고있다.
*http://kr.blog.yahoo.com/choonggyuk/6418외 다수 참조 인용
2. 중명전 (重明殿) 사적124호-덕수궁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1-11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말기의 2층 건물.
1900년(고종 36)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서,1904년 경운궁(덕수궁)에 대화재가 나면서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경운궁(慶運宮;德壽宮)에 딸린 접견소 겸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조인되었으며, 이듬해 황태자[純宗(순종)]와 윤비(尹妃)의 가례(嘉禮)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독립적인 건물이 되었으며, 1915년부터 1960년대까지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Seoul Union)의 사교장소로 쓰였다.
1925년 화재로 인하여 벽면만 남고 모두 타버렸으나 곧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3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수옥헌이라 불리던 이 건물은 황실 의 도서관 으로
건립된 궁궐내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00년 1월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진러시아식 2층
벽돌건물이다.
지금은 덕수궁 경계 밖에 나와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은 1904년부터 1907년 강제 퇴위 당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외국인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가 되여 국권을 빼았겼다. 고종은 이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고자 1907 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때문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하고 1910 년 한일 병합에 이르게 된다.
합방 뒤 외국인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의 모임장소로 이용.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왕 이은.
이방자 여사에게 이 건물을 기중했는데 1975년 민간소유로 넘어갔다.
우리가 배울땐 을사(보호) 조약 이라고 배웠는데 지금은 을사늑약 이라고 한다. 조약과 늑약은
무었이 다른가
조약은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협상 인데 늑약은 강제로 한 협상을 말한다 .
따라서 총칼로 위협 하며 맺은 협상이라 늑약이라 한다 을사늑약시 대신중 이를 찬성한 5 명을 을사오적
이라 하는데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말한다 고종은 두 건물(중명전과 건청궁)을
거치면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으며 조선왕조도 함께 종말을 고했다.
두고두고 쓰디 쓴 교훈으로 삼기 위해 기억해야 할 건물이지만 역사교과서 어디에도 두 건물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은 민간인 소유로 넘어갔던 이 건물을 다시 인수하여 건물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단순한 2층 벽돌집이지만 1층의 창문은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으며, 2층 서쪽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1925년의 화재로 벽면만 남아있던 것을 다시 원래대로 지었으나 처음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져 있다.
2006년까지 서울시에서 관리(서울시유형문화재 제53호)하여 왔으나 당초 덕수궁 권역의 건물이고,
문화재청으로 소유권 이전등기(‘06.9.1)됨에 따라 덕수궁에 포함시켜 보존 관리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사적 제124호 덕수궁에 추가지정(2007.2.7)하고 해제하였다.
해방후 이왕가에서 잠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63년 귀국한 영왕 이은(李垠), 이방자 여사에게 정부에서
이 건물을 거처로 기증하기도 했다. 그후 1976년 5월 민간에서 처음 사들인 뒤 몇 차례 소유주가 바뀌다가,
1983년 11월 11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의 구속사건이 터졌을 때 비자금으로 이 건물을 사들인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노태우 전대통령이 구속 수감되어 서울구치소에 첫 밤을
보낸 날은 을사조약 체결 일자와 같은 11월 17일이었다.
'직선제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첫 구속수감'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야말로 헌정사의 국치(國恥)가
아닐 수 없다.
'밝음이 거듭되는 집(重明殿)'이란 건물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건물의 역사와 내력은 이처럼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현재는 덕수궁 중명전 보수 복원공사로 가림막이 처저 있습니다. 제대로 볼려면 공사가 끝나는
2009년도 말경이라야 되겠습니다.
* http://blog.daum.net/baweesol44/722735외 다수 참조인용
3. 구러시아공사관 (舊-公使館) 지정사항: 사적 제253호 (197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1
서울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있는 구한말 러시아공사관 건물. 2층 벽돌구조이고 한쪽에 탑옥이 있는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로 정문은 개선문 양식 , 1890년(고종 27)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했다.
건물이나 대지 규모에서도 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관 보다 컸다.고종이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양세력을 이용하려 했는데 특히 러시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했던 곳인데, 아관파천(俄館播遷)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이 주재한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역사적 의의가 큰 건물이다.
6·25 때 불타고 탑옥 부분과 지하 2층만 남았는데,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3층 규모의 탑만 복원하였다.
지하의 석단시설과 주위 상황으로 보아 이 건물에 이어지는 건축물이 있었을 듯한데 현재로서는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1896년 구러시아공사관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특히
고종황제가 1896년 2월 1일 세자인 순종과 함께 옮겨 와서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거처하였으며, 이 파천중에 친일 내각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파인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건물이다. 본래 이 건물은 전(?)벽돌, 즉 회색 벽돌로 되었던
것이며 탑외부(塔外部) 단장 때 흰 회반죽칠로 마감하였으며, 탑부분에 있는 3각박공형(Pediment)은 건물
여타 부분의 요소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표하(地表下)에 지하실이 있고 그 일부가 발굴되었다. 탑의 1층은 본관과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2층은 하나의 창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으며, 3층 창들은 사면 모두 반원 아치를 이루고 있다.
국제정세에 휩쓸려 자주 정변을 겪어야 했던 다난한 시대의 증인이 되는 건물이며,1980년 유적 발굴 당시
이 건물의 지하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밀실과 공사관 탑은 비밀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그 폭은 45cm, 길이 20.3m이다. 통로 중간지점은 폭 50cm, 길이 5m로 확장되어 있는데, 이는 통행인이
급히 왕래할 때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공사관은 광복 후 소련영사관으로 사용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탑 부분과
지하층 일부만 남아있다가 1973년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1896년 촬영 당시의 사진을 보면 러시아공사관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다.
또한 건물은 ‘ㄱ’자 형태로 된 단층 건물과 지금의 3층짜리 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벽은 석재와
회색 별돌로 마감되었고, 1970년 보수공사를 통해 흰색 회칠로 마감했다고 기록된다.
현재 단층건물은 허물어져 그 터만 남아 있고,당시 경복궁과 덕수궁등 서울 4대문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던 3층짜리 탑은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1층은 긴 반원형 아치문이고,
2층은 단순한 네모 창문이 좌측으로 나 있다.
또한 3층은 사면에 반원형 아치창이 2개씩 있다. 러시아공사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이고 현재 탑의 동북쪽에 지하실을 두어
덕수궁까지 비밀통로를 연결했다. 공사관이 건립된 일대는 연산군이 도성 밖으로 놀러가기 편리하도록
설치한 3개의 마장의 하나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덕수궁이 인접한 곳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아관(俄館)이라 불리는데, 처음 고종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양 세력을 이용해 이곳을 중시했으나 우리에게는 고종의 아관파천 사건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시해를 당한 후 친일내각에 들어서자 경복궁에
유폐된 상태에 놓여 있던 고종을 보호한 다는 명분으로 친러파의 범진 등과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896 년 2월 1일 세자와 함께 아관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그 결과 친일 김홍집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로 박정양내각을 조직하는 등의 국정을 처결하다가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 하였던 일련의 과정을 아관파천 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 고종은 음식을
담당하던 엄상궁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엄상궁이 나은 아이가 영친왕이다.
현재 탑 아래 조경을 새로 하여 시민공원이 들어서 있다. 또한 곁에 정동극장과 난타극장이 들어서
‘역사의 비운’인 이곳을 가리고 있다. 국력이 약한 나라의 쓰라린 비운과 고통을 목도하게 하는 처참한
흔적, 아직껏 눈에 띄는 상처로 그 잔해를 가지고 있는 ‘구러시아공사관’
3층탑에 시대의 교훈을 새겨 보자
3층탑 동쪽의 건물 주춧돌 잔해
*http://www.visitkorea.or.kr/ya/gg/yagg_mp0.jsp?i_seqno=7826&mode=p 외 다수에서 참조함
4. 서울성공회성당(서울聖公會聖堂)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 (중구)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3
로마네스크 양식의 3층 교회건물이다.
조선 고종 27년(1890)에 우리나라에 온 성공회 1대 주교인 코프의 전도활동으로 성공회의 기초가
잡히게 되자,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건립하였다.
영국인 딕슨의 설계로 감독관 브로크가 192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에 완공하였다.
十자형의 평면구조를 갖고 있는 이 교회는 기초부와 뒷면의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건물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율동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종탑부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생동감있게 연결되어 있다.
서울 성공회성당은 일제 침략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본격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 건물은 대한 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으로서 조선성공회 3대주교인 마크트롤로프(Mark Trollopc)
주교가 1922년 영국인 아더딕슨(A.Dixon)의 설계대로 착공하여 일제 강점기인 상황에서 설계대로 지을수
없어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뗀체 작은 일자형으로 축소1926년 5월 2일에 미완성인 채 300평의 3층
구조로 헌당식을 가졌다.
이후 1993년에 원설계도를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찾게되어, 본래 모습대로 1996년에 완공하였다.
이 성당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건물 사이사이에 넣은 붉은 벽돌과 기와,우리 문살 형태를 지닌 2층
창문 등은 한국 전통건축기법을 조화시킨 아름다운 건물이다.
외형은 십자가 형태로서 다양한 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성당 내부에는 좌우로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서있고 전면 반원형 벽면에 예수그리스도의 모자이크 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하성당(Crypt)에는
트롤로프 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동판이 새겨져 있다.
유월 민주항쟁이 이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유월 민주 항쟁 십년을
기념하여 세우다 .
1997.6.10 대한 상공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중에 믿음으로 교회를 지켰던 여섯분의 거룩한
죽음을 기리고자 추모의 마음을 모아 순교추모비를 세운다. 1990.9.26
5. 류관순열사 빨래터
정동길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학 이화여고에서였습니다. 교정이 아름다운 그 학교를 둘러보러 들어갔다가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이란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 열사가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교내에 ‘유관순 기념관’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빨래하던 우물가가 그대로 남아있다니...
유 열사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지며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유관순’)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들으면 더 감동적인 위 가사에서 보듯 3월이 오면 떠오르는 얼굴이 유관순 열사입니다.
열일곱 앳된 나이에 순국의 넋으로 산화한 유 열사. 많은 순국선열 중에서도 유 열사를 먼저 생각하게 됨은
일제의 흉포한 발톱에 찢긴 짧은 생애가 너무 애처롭기 때문이지요.
우물은 교정 동쪽 끝 우람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아카시아 나무가 둘레를 지키고 서 있는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지름 1.5m 정도의 둥그런 형태로 전형적인 우리의 옛 우물 그대로입니다.
일찍이 이곳 정동 언덕에 살던 조선시대 서민들이 공동으로 쓰던 우물이 보존돼 내려온 것이라고 하니까요.
두레박을 썼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두꺼운 나무 뚜껑을 덮어 놓은 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3.1운동 3년 전인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유 열사는 학교생활 틈틈이 이 우물가를 찾아 빨래를 했습니다.
우물물을 길어 흰 무명 교복을 깨끗이 빨아 입으며 꿈을 키우던 소녀 유관순. 소녀가 키워온 꿈은 ‘조선 독립’
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열사의 짧은 생애에 비추어 볼 때 열사의 체취가 서린 곳이라고 해야 고향인 천안시 아오내 생가 말고는
이곳 모교일 것이기에 찬물에 시린 손을 비벼가면서 빨래를 하던 열사의 모습을 그려보며 절로 마음이
애틋해짐을 느낍니다
*http://blog.paran.com/shrewd73/15758255에서 참고 인용
6.구배재학당동관(舊培材學堂東館)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 시대 : 1916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번지 5호
이 건물은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되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로, 배재고등학교가 19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東校舍)로 사용하고, 동관(東館)으로 불리었다. 건물 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1916년 한국근대건축양식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 이
건물구조는 앞쪽의 현관과 양옆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건물의 구조와 모습, 건물에 사용된 벽돌 구조가 매우 우수하다.
1916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처음 지어질 때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며, 건물의 형태도 매우 우수하여
한국근대건축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배재학당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에 의해서 1885년 8월에 설립되어 교세(敎勢)가
늘어나자 주변의 집을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배재학당 건물은 대강당, 동관 외에도 1921년에 착공, 1923년에 준공된 서관(西館)이 있었는데 서관은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학교 이전시 이설 복원되었고, 대강당 건물은 배재공원 조성 시에 철거되었다.
*http://tour.junggu.seoul.kr/외 다수에서 참조 인용 *
* 사진 촬영일:2008.1.23 (인용된 사진 제외)**
첫댓글 좋은 사적 자료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