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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ure 스크랩 건축역사 :: 건축사의 역사적 흐름의 이해와 현대건축이 가지고 있는 성향분석과 문제점
공간의 미학 추천 0 조회 3,215 13.03.20 11: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 양 미 술 사

- 건축사의 역사적 흐름의 이해와 현대건축이 가지고 있는 성향분석과 문제점에 대하여 -

2003년 1월 17일 / 대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 학번 : 50231255 / 강 현 희

- 건축사의 역사적 흐름의 이해와 현대건축이 가지고 있는 성향분석과 문제점에 대하여 -

1. 서론 - "건축은 패션과도 같다" : 연구범위설정 및 목표제시

2. 본론 - 유럽의 건축사 및 대표적 건축양식 분석
1)고대 : 이집트, 그리스, 로마
2)중세 : 초기 기독교,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3)근세 :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절충주의
4)근대 : 모더니즘
5)근대건축의 문제점 : 근대건축에서 나타난 문제점
- 근대 건축이 우리에게 주었던 몇가지 잘못된 환상적 개념
(기능의 환상, 기술의 환상, 초고층의 환상, 이동성의 환상)
6)현대 : 포스트모더니즘
1. 현대건축 : 포스트모더니즘
2. 탈근대의 이해
7)우리나라의 현대건축

3. 결론 -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과 해결방향

********************************************************************

1. 서론

"건축은 패션과도 같다"

본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고대로부터의 건축을 다 이야기하지 않고 현대건축의 성향만을 보더라도 건축은 그 시대의 여러 상황과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로마의 도로건설, 중세시대의 교회건축, 근세의 과도기적 건축물, 근대시대의 실용주의 편향적 건축 등 많은 건축물들이 마치 패션의 한 흐름처럼 시대적 환경과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건축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서양미술사 전반의 이해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리포트를 통해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서양미술사를 통해 본 건축사의 역사적 흐름의 이해와 현대 건축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분석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이전 건축의 문제점과 제시되고 되어질 수 있는 여러 사안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근대건축에서 가졌던 문제들을 탈근대 시대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해 나아갔으며 또 그 해결책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무엇인지, 또 그것들이 한국의 건축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한다.

2. 본론

유럽의 건축사를 크게 나누면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서양의 문화의 시작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단 메소포타미아로 출발점을 잡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나일강 유역의 넓고 비옥한 삼각지로 문명이 발생할 모든 조건을 갖고 있다. 유럽의 건축양식이지만 유럽 건축양식의 기원, 뿌리는 앞에서 말한 메소포타미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거치므로 여기서는 시작을 일단 메소포타미아, 유럽의 건축양식이 형성되는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러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되어서 유럽 문화의 한면을 장식하고 있는 유럽의 건축양식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1. 고 대

초기 인간들의 주거는 동굴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점점 기술이 발달하여 주거지를 농경이나 수렵에 이로운 호수, 하천, 강 주위로 옮겨가면서 흙을 이용한 점토나 나무, 돌로 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기술은 급격히 발전하게 되고 금속을 사용하면서 더 안전하고 안락한 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 이집트 건축
(1) 시 대 : 이집트 통일왕조가 세워진 B.C. 32000년경부터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된 B.C. 530년경까지 나일강 유역에서 형성된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던 건축양식을 말한다.
(2) 건축양식의 특징 : 이곳 역시 지형상 목재가 귀했으며 흙과 돌에 의존하여 건물을 만들었다. 이집트 문화의 특징은 이집트사람들은 현세는 일시적이며 사후의 분묘가 영원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피라미드 같은 독특한 이집트만의 분묘건축이 발달하였다. 주거로서의 건축은 비가 잘 오지 않는 지형적 특색 때문에 지붕은 평지붕을 많이 썼다. 기둥은 석재, 보는 석재 또는 목재를 사용한 가구식 구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2) 그리스 건축
(1) 시 대 : 고대전기로 B.C. 1100년경부터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된 B.C. 30년까지, 서양문화의 근원인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대 그리스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서 로마건축과 함께 고전주의 건축의 원형적인 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 그리스의 건축 재료로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석재를 건축의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석재를 이용한 석조 가구식 구조가 발달하였으며 석재 가공기술이 발달하여 주범양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온난한 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외생활에 치중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활발한 야외활동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외부공간이 발달하였다. 건축형태로는 외부공간 구성요소로서 건물기능을 중시하여 조작적 형태의 건물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건축물의 공간미보다는 형태미를 추구하여 건물외관에 치중하기 때문에 주범을 기본으로 하는 비례의 조화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형태미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스 건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신전들은 공간보다는 형태를 중요시하는 조각적인 느낌을 주는 건축이라 할 수 있고 가구식 구조이므로 직선이 형태를 이루는 주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주범양식에는 도라이식 주범, 이오니아식 주범, 코린트식 주범이 있다. 도라이식 주범은 가장 오래된 주범양식으로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양식으로 직선적이며 장중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오니아식 주범은 소용돌이 형상의 주두가 특징이며 우아, 경쾌, 유연감을 주며 곡선적이며 여성적인 느낌을 갖게 되고 주초가 있고, 배흘림이 약하며 주신에 골줄을 새긴다. 코린트식 주범은 주두를 아칸더스 나뭇잎 형상으로 장식하고 세가지 주범양식 중 가장 장식적이고 화려한 느낌이 든다.
(3) 대표적인 작품 : 파르페논 신전, 에렉테이온 신전, 포세이돈 신전

3) 로마건축
(1) 시대
로마가 최초로 건축된 B.C.753년부터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365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제국과 유럽, 북부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의 로마 식민지에서 전개되었던 건축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로마건축은 외관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건축에 로마시민을 위한 다양한 실용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다. 로마의 건축은 창조보다는 과거 건축을 답습하고 모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료의 특징으로는 콘크리트를 발명하여 구조나 시공기술, 규모 면에서의 발전을 한 점에 있다. 로마건축에 가장 중요한 점은 건축을 공간창조의 예술이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점에 있다. 과거의 건축을 모방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들은 여러 변형을 통해 독특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자신들을 유럽의 최고 맹주라고 생각했던 로마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규모가 큰 공간위주의 대규모 건축을 추구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그리스인들보다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모습은 콜로세움 같은 커다란 체육시설이며 단순히 목욕탕의 기능뿐만 아닌 다목적 사교적의 목욕탕, 극장들에서 볼 수 있다
(3) 대표적인 작품
대표적인 것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및 개선문,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 갈의 수도교(水道橋) 등이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투기장으로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고 하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건설하였다. 외벽은 높이 48 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2. 중 세

1) 초기기독교 양식
(1) 시 대 :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이 시작된 9세기경사이에 기독교 건축에 집중되어 이탈리아 반도를중심으로 유럽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적 건축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 재료나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지 못하여 로마의 건축양식을 계승하여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두 가지 구조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 기둥과 보에 의한 가구식 구조이며 기둥과 아치에 의한 아케이드 구법이다. 또한 초기 기독교 양식은 기독교 건축의 발달로 대부분의 건축활동이 기독교에 집중되어 교회, 세례당 등의 기독교 건축물이 발달하였지만 기독교건축 이외에 건축분야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발달도 부진한 상태였다.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를 교회건물로 전용하여 급속한 교세확장에 비해 교회재정이 빈약하여 새로운 건물의 건설이 곤란하여 교회에서 요구되는 집회공간, 제단, 사제석 등의 기능과 기존의 바실리카의 기능이 상호유사하게 되었다. 바실리카식 교회는 중세 교회건축의 원형으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고딕양식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3) 대표적인 작품: 바실리카식 교회 (Basilican Church)

2) 비잔틴 양식
(1) 시 대 :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환도하고 동로마 제국을 건국한 330년부터 오토만 터어크 족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로마 지역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로마건축에 동양적인 건축요소를 혼합한 건축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 비잔틴 예술은 궁전과 교회 건축에서 발전하였는데, 비잔틴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동양 양식과 서양 양식의 건축양식이 혼합되었다는 점이다. 돔을 그 중에서 가장 큰 특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서양의 열주식 구조에 돔이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돔은 그전에 로마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비잔틴에서는 원형, 평면에 국한된 모습에서 정사각형 위에 펜덴티브라는 삼각형 곡면부를 도입한 점에서 다른 점을 보인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세계 3대 건축물로 손꼽힐 만큼 뛰어난 성 소피아성당을 들 수 있으며 비잔틴 건축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 건축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긴 바실리카식 평면을 채용하였으나 점차 둥근 돔 지붕을 가진 집중형으로 바뀌었다. 바실리카의 유축형과 중앙 집중식의 유심형을 결합한 비잔틴 교회의 그리스 십자형 평면은 중앙 집중적인 방사상 평면으로, 동방 교회에서 강조하는 위계적인 우주관과 잘 들어 맞았으며, 이러한 우주관은 건축적·회화적 표현 방식을 두루 융합하여 성당의 돔·벽·천장 등에 꾸며 놓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와 같은 교회 장식의 도상 체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콘크리트나 벽돌구조법은 로마의 기술을 물려받아 구체구성을 하였고, 그 표면을 대리석으로 포장하는 방법을 썼다. 벽돌 쌓기는 색을 달리하여 횡선을 만드는 비잔틴식 쌓기법을 창안하였다.
(3) 대표적인 작품 : 대표적인 건축물은 콘스탄티노플의 성셀기우스와 바커스성당(527) 및 성 소피아 성당(532∼537), 라벤나의 성비탈레 성당(526∼547), 베니스의 성마르코성당(1042∼1085) 등이다.

3) 로마네스크 양식
(1) 시 대 : 13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에서 교회 축에 집중되어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교회건축의 초기양식인 초기기독교양식으로부터 완성양식인 고딕양식에 이르기까지 과도기적인 건축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 로마네스크라는 단어는 로마건축의 특성을 띤 건물을 지칭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했으며 로마네스크양식을 처음에는 완벽한 양식이라고 평가되는 고딕으로 가는 과도기적인 건축양식으로 생각되었으나 오늘날의 건축학자들은 로마네스크 자체로도 충분히 성숙한 양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건축양식의 특성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바실리카식 교회의 장축형 평면을 기본으로 사용하였으며 규모를 확장하였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가가 상승하여 고탑 및 종탑을 창안하게 되었다. 재료 및 구조에는 거석보다는 운반 및 취급이 용이한 석편, 연와 등의 단위석재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아치, 보울트, 피어 등을 조적하게 되었다. 또한 교차보울트 기법이 발달하여 종래의 목조 지붕틀과 천장을 내구적이고 방화적인 석조보울트로 대치하였다.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정방형의 교차보울트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적, 공간적 불합리성을 극복하고 채광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의 특색은 외관적으로는 종교적 분위기의 조성을 위해 단순하고 건조하지만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탑이 외관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치의 연속과 중첩에 의해 형태상의 통일과 내부기능의 기능적 형태가 그대로 외관에 명쾌하고 솔직하게 표현된 점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은 주로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바실리카식과 중앙집중식 배치에 있다
(3) 대표적인 작품 :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적인 예는피사성당(Pisa,1062∼1350), 독일의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작은 아헨의 팔라틴 채플과 성미카엘 교회, 슈페이어성당이 있으며 영국의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더램 (Durham)성당이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건축: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의 대표작품이며 일명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우는 종탑이 유명함.

4) 고딕양식
(1) 시 대 : 13세기초 프랑스에서 발생되어 르네상스 건축이 발생된 15세기까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중북부 유럽에서 전개된 중세의 건축양식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 로마네스크 시대에 걸쳐 형성된 중세 교회건축을 완성하므로써 역사상 종교건축의 최절정기를 이루었다.
(2) 건축양식의 특징 및 대표작 : 고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양식의 특징은 뾰족한 탑과 플라잉버트레스(flyingbutress) 라는 건축기법이다. 또한 고딕양식은 구조적인 발명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딕양식의 구주체계는 서양건축사를 통틀어 구조적 역학적 문제를 가장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첨두형 아치, 리브, 보울트, 플라잉버틀레스 등 이전에 사용되었던 양식을 완벽하게 결합시켰다. 화려한 첨탑과 웅장한 내부를 통해 성당건축의 완성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고딕건축은 성 드니(St. Denis)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노트르담 성당은 플라잉 버트레스가 최초로 사용되어 완벽한 형태의 고딕양식이 된 예이다.
영국에서의 고딕건축은 프랑스로부터 도입하여 13세기초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다 독창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늦게 고딕이 전파되고 늦게 전성기에 이르렀다. 부채살 모양의 선상보울트(Fan Vault)것이 특징이다. 초기(1189-1309)는 Early English Style이라 하는데 첨두아치가 주로 나타난다. 고딕과 르네상스의 과도기인 Tudor Style(1485-1588)은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나타난다. 건축실례로는 솔즈베리(Salisbury Church)교회가 있다. 영국최고의 첨탑을 자랑하며 영국 초기 고딕작품의 대표작이다.
독일의 고딕 건축은 당시 유행하던 로마네스크 양식에 부분적으로 적용되었다. 할렌키르헤(Hallenkirche, hall church)라는 네이브와 아일의 천장이 거의 동일한 높이로 구성된 교회가 생기는 것이 건축적 특징이다. 결과적으로 트리포리엄(Triforium)과 고측창을 제거하여 내부공간의 채광문제가 발생한다. 쌍탑보다는 단일한 탑이 사용된다. 건축적 실례로는 명 쾰른, 코로뉴성당은 북유럽 최대의 교회건축이며 프랑스 아미앵 성당을 모방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고딕건축은 본래의 의미대로 완벽하게 전개되지 못 하였다. 밀라노에서는 롬바르디아풍과 고딕풍이 혼합하여 나타났고, 플로렌스는 로마 풍을 고수하였다. 본래적인 고딕건축적 성격보다는 결과적이고 장식적인 고딕건축을 취하였다. 고딕양식의 유기적, 합리적인 구조방식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단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구워서 착색한 유리)가 있는 클리어스토리 등 장식기법으로만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밀라노 성당(Milano Cathedral, 1386-1577)이 있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되었지만 후기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3. 근 세

1) 르네상스 양식
(1) 시 대
봉건제도와 기독교 정신 위주의 중세가 붕괴되고 상공업 위주의 시민사회가 성립된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어 15,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개된 고전주의적 경향의 건축양식이다.
(2) 건축양식의 특징
르네상스는 유럽근세의 시작이라 할 만큼 르네상스가 유럽문화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건축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와 복고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건축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고전건축과 같은 성격 즉, 정적이고 명쾌하며 격조를 중시하고 이성적인 성격을 부여하지만 표현된 개개의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와 비교해 볼 때 우아하며, 고대 로마와 비교해 볼 때 일반적으로 섬세하고 중량감이 약하다. 이러한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은 르네상스에 기인한 건축가들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건축물을 무엇보다 예술작품으로 제작하려는 경향이 다분했기 때문에 중세의 신비적인 초월적 상징공간을 추구했던 모습은 볼 수 없으며 아름다운 예술적 상징공간으로 건축물을 제작하려했다. 또한 고딕건축에서의 뛰어난 논리적 시스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구조의 범위를 고대 로마 및 초기 기독교 건축, 비잔틴에서 구하는데 만족했다. 따라서 건축의 구조적 기술면에서는 별로 큰 발전을 볼 수는 없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는 항상 예술적 성격이 종교성에 앞섰으며 때로는 건축의 실용성과 목적성을 무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건축의 법칙을 추구했으며 고전건축의 연구분석 통한 고전건축의 이론화, 체계화를 하였다.
(ⅰ)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
르네상스 문화의 발상지로 르네상스가 가장 융성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고전 적 요소가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중기로 가면서 고전적이고 복고주의적인 성격으로 발전하였으며 중심도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가게된다 후기로 가면서 미켈란젤로로 건축에서 유래된 매너리즘적인 성향이 강하게 된다. 여기서 매너리즘이란 과거양식의 규범을 모방하지만 다양하고 의도적인 조작을 통하여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건축을 추구하는 것이라 한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부르넬스키가 제작한 피레체성당의 돔, 피렌체의 유명한 가문인 메디치가의 메디치궁, 바로크 양식이 복합된 미켈란젤로의 성베드로 성당을 꼽을 수 있다.
(ⅱ)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양식은 이탈리아에 비해 종교적인 건축보다는 귀족, 상류층에 의 한 궁성이나 성관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고딕건축이 융성한 것에 비해 르네상스 건축은 프랑스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ⅲ)영국의 르네상스 건축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유럽에서 가장 늦은 17세기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초기 르네상 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목재가 외부로 노출되어 보이는 장식수법인 하드팀버기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ⅳ)독일의 르네상스 건축
독일의 르네상스는 아쉽게도 독일이 신구양파의 종교전쟁인 30년쟁의 무대가 되어서 많 은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건축물로는 뮌헨의 미샤엘성당을 들을 수 있으며 북유럽의 특징인 수직성을 엿볼 수 있다.

2) 바로크 양식
(1)시 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합리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17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어 17, 18세기에 걸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국가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건축에 있어서 감각적, 역동적, 장식적 효과를 추구하였다.
(2)건축양식의 특징
바로크 양식은 르네상스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감각적이고 조각이 많이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르네상스 건축에서 추구되어왔던 엄격한 고전적 법칙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비대칭, 대비, 과장 등의 역동적이고 3차원적인 건축기법에 의해 형태 및 공간의 극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또한 일련의 곡선과 곡면에 의한 화려한 장식을 통해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형태와 공간을 창조하였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 : 이탈리아의 바로크양식은 16세기말 교황청의 후원아래 로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미 르네상스 건축의 미켈란젤로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들에서 이미 바로크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잔틴과 고딕의 전통이 강한 베니스에서는 섬세한 장식이 선호되었으며 특유의 바로크건축이 만들어졌으며 주로 장식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성 로렌쪼 성당, 성 카를로스 성당, 성 베드로 성당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 : 17, 18세기는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시기로 절대왕정의 후원아래 발달하게 된다. 프랑스 바로크가 다른 점은 최초로 바로크양식을 시도했던 계층이 예술적 우수함을 추구했던 식견 높은 부르주아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같은 변칙적이고 곡선적인 오더는 찾아볼 수 없으며 억제된 바로크로 발전한 것이다. 그 중에서 바로크건축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은 프랑스 왕정의 절대적 권위를 세상에 표현하기 위한 무대장치이며 바 로크적인 연극성을 충분히 발휘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바로크 건축 : 프랑스 바로크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바로크 양식은 절대왕정이나 교황청 같은 강력한 후원자가 없으므로 그다지 깊게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파울 성당을 예로 들 수 있다.
(3) 대표작 :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베드로 성당 광장, 성 로렌쪼 성당, 팔루찌 궁전 등이 있다.

3) 로코코 양식
(1) 시 대
로코코 건축양식은 18세기 초부터 1770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영국, 독일 등에 영향을 미쳤다.
(2) 건축양식의 특징
바로크건축은 종교와 권력을 배경으로 공적생활을 위주로 발전하였으나, 로코코건축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위주로 하였다. 주로 실내공간을 아담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장식하는데 중점을 두어서 장대하고 규칙적인 것을 배격하고 소규모적이고 섬세하며 개인생활에 쾌락을 주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3) 대표작
프랑스의 로코코 건축은 스비스 호텔(Soubise Hotel)의 공작부인내실, 암로 호텔, 드 마티뇽(de Matignon)호텔등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뷔르짼 하일리겐 교회당, 산수시 궁 등이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더비경(Lord Derby), 조지아식 주택, 배스(Bath)의 광장 등이 있다.

4) 근세과도기건축

1. 발생배경
바로크 건축양식이 쇠퇴하기 시작한 18세기 말로부터 현대건축이 발생한 19세기말 이전까지의 양식적 혼란기에 전개된 과도기적인 건축양상으로서 신고전주의 건축, 낭만주의 건축, 절충주의 건축의 세 가지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2.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건축
(1)발생배경
18세기 전반기에는 고대유적에 대한 발굴과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하여 고전건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으며 독일의 요한 빙켈만이 1764년 고대예술을 객관적으로 연구한 고대예술사를 저술하여 고전부흥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2) 특 성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 미는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이라고 믿고 그리스와 로마양식을 모방하였으며 그리스와 로마 건축양식의 정확한 복원과 모방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주범 중시하였다. 르네상스 건축을 로마건축을 규범으로 하여 창조적으로 이용한 반면, 신고전주의 건축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을 정확하게 복원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블레, 르듀, 길리 등의 신고전주의 건축가들은 고대건축과 같은 장대한 규모와 순수 기하학적 입방체를 결합한 단순 거대한 건축을 추구하였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의 발상지로서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앙피르 양식 (Empire Style)을 가지며
로마문화를 동경하고 숭배한 나폴레옹 1세는 로마건축을 모방한 장엄하고 웅장한 대규모 건축물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강대함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주로 로마의 신전과 개선문을 모방한 기념건축물을 다수 건립하였다.
3. 낭만주의(Romanticism)
(1) 시 대
고전복원의 신고전주의 건축이 자신들과 시간, 거리상으로 먼 이국적 양식을 도입하고 건물외관의 피상적 형태를 추구하는데 반발하였으며 고대보다는 당시와 시간적으로 가까우며 자기 국가와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있던 중세의 고딕양식에 주목하였다.
(2) 특 성
신고전주의 건축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건축에 열중한 반면 낭만주의 건축은 중세의 고딕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의 기원이 중세에 있는 것을 보고 중세를 낭만주의의 이상을 삼으며 구조와 재료의 정직한 표현이라는 진실성이 반영된 고딕건축이 양식과 방법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영국의 낭만주의 건축 : 낭만주의 건축의 발상지로서 유럽에 전파되었으며 후에 19세기말의 현대건축운동인 미술공예운동을 유발하였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건축 : 신고전주의 건축이 활발했으므로 낭만주의 건축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
독일의 낭만주의 건축 : 고딕양식이야 말로 진정한 게르만적 양식이라고 생각되어 쾰른 성당, 울름성당 등 중세성당들을 중수함.
4. 절충주의(Eclecticism) 건축
(1) 시 대 : 그리스, 로마 위주의 신고전주의 건축과 고딕 위주의 낭만주의 건축을 통해 과거 건축양식의 복원에 의한 새로운 건축양식의 접근방법을 습득하였으며 활발하고 광범위한 역사의 연구를 통하여 과거 건축양식 전반에 관한 지식이 증대되어 과거양식에 관한 객관적 이해와 평가로 사라센, 비잔틴, 바로크 등 건축양식 선택 대상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2)건축물의 특징 : 그리스, 로마 위주의 신고전주의 건축과 고딕위주의 낭만주의 건축처럼 일정한 양식에 국한되지 않으며 과거의 모든 양식을 이용하여 과거양식의 절충을 통하여 새로운 양식의 창조를 시도하였다. 또한 일정한 기준 없이 건축가의 주관에 의해 각종 양식을 선택하거나 종합하였다.
프랑스의 절충주의 건축 : 신고전주의 건축이 발달하였으므로 그리스, 로마 양식을 기본으로 한 절충주의 건축이 성행하였다.


4. 근대건축

유럽의 건축은 19세기 후기까지는 세계 대부분의 문명지역에 보급되었으나 그 양식의 기본적인 성격은 르네상스 이후 과거의 건축양식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변혁으로 인하여 건축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대규모의 공장 ·창고 ·철도역 ·시장 ·백화점 ·고층빌딩 등의 건조, 대도시의 형성이나 주택문제와 같은 새로운 과제로 인하여 주철 ·선철 ·강철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신 재료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수공업적 기술의 쇠퇴와 노임의 상승이 전통기술의 유지와 응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새로운 건축양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과거 양식에 의존하던 건축미학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미의식의 개혁이 가장 곤란하였다.
W.모리스와 그 일파는 1860년경부터 단순하고 솔직한 표현을 존중하는 공예개혁운동을 일으켜, 주택 합리화를 유도하였다.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1890년대의 벨기에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양식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서 각국에서 일어났으나, 사회적 요구나 기술적인 발전방향과 밀접하게 합치되지 못하여 뿌리 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다. 또한 아르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의 한 발전일 뿐 그 이상의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다. 회화에 있어서는 1890년대부터 세잔과 고갱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을 볼 수 있는데, 면(面) ·형태(形態) ·색채(色彩)의 균형 등에서 추상적(抽象的) 회화의 미학이 점점 확립되었다.
P.베렌스가 설계하여, 1907년 독일의 베를린에 건립한 A.E.G 터빈 공장은 근대건축의 새로운 철의 시기를 기념하는 기념비적 존재인데, 베렌스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고전주의적 형태가 이 건물의 기념비적 의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철골은 명료하게 노출되고, 측면을 벽으로 막는 대신에 교묘하게 구획한 큰 유리면을 쓰고 있으며, 거대한 건물의 중량과 강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모서리에 돌을 사용하는 등, 기하학적 구성에 이르는 건축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A.페레가 철근콘크리트의 특성을 살리는 골조구조의 건축양식을 창조하고, 시카고에서는 L.설리반이 고층 빌딩 건축에 대하여, F.L.라이트(1869∼1959), 로마 주택건축에 대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건축적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건축에 있어서의 근대 디자인의 방법과 방향을 확립한 사람은 베렌스의 주임조수였던 W.그로피우스이다. 그는 파구스 제화공장(Fagus Fabrik, 1911)과 쾰른 독일공작연맹 전람회의 모델공장(1914)에서 철과 콘크리트와 유리에 의한 자유로운 기하학적 구성과, 이것을 이룩하기 위한 기본적 건축기법을 명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독일에서 일어난 보다 자유로운 개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표현주의 건축운동은 그 이론적 뒷받침의 미비함으로 인하여 단기간에 종식되었으나, 같은 20년대에 그로피우스는 자기의 수법을 발전시켜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 교사(Bauhaus 校舍, 1926)를 완성하고, 르코르뷔지에는 주택에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미학을 적용하여 보다 풍부한 조형성(造形性)을 이룩하였으며, M.V.d.로에는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관(1929)에 철저한 건축조형의 순수화를 추구하여 나름대로 기능주의와 기하학적 추상미학에 의한 근대 디자인을 성숙시켰다.
30년대는 근대건축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는데, 앞에서 말한 3인 외에 핀란드의 A.알토, 스웨덴의 E.G.아스프룬트, 미국의 R.노이트라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나,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대두로 근대화운동이 탄압되었으며, 소련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국제적 양식이 억압되었다.


5. 근대건축의 문제점

그러나 근대 건축은 추상적이고 몰개성적인 형태로 말미암아 의미 전달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건축이 가지고 있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 건물의 형태와 외관은 기능과 재료와 구조의 논리적 결과물이라는 믿음, 수단으로서 과학 기술에 대한 신뢰, 추상 기계미학에 대한 선호와 장식에의 혐오, 주거와 도시 문제의 보편적 해결에 대한 유토피아적 낙관적 견해, 집단적 해결 및 대량 생산을 선호하는 정치적 성향, 사회 개조의 사명감과 건축가의 도덕적 직업의식 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제 2차대전 후 미국이 낳은 가장 현명한 건축가인 필립 죤슨은 이미 1968년에 "근대건축은 실패작이며... 우리의 도시는 오늘날 50년 전보다 더 흉하게 되었음을 의심할 바 없다..."라고 피력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국의 가장 우수한 건축가인 제임스 스터얼링은 1974년에 예일 대학에서 말하기를, 자신의 생각으로는 "근대건축의 99퍼센트는 따분하고 진부하고 메마르며, 옛 도시에 놓였을 때 대체로 분열되고 부조화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1970년대 미국의 뛰어난 "실존주의"디자이너인 필라델피아의 건축가 로버트 벤츄리는 이미 1966년에 "건축가들은 정통적인 '근대'건축의 청교도적인 도덕적 언어에 더 위협될 여지가 없다...정통파 '근대'건축가들은 복잡성을 충분히 또는 일관성 있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라고 한 다음 계속하여 "그들은 혁명적 운동의 참여자로서 근대적인 새로움을 주장하면서 그 복잡성을 등한시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들이 과거 일세기 가량에 걸쳐 최고의 확신을 가지고 건설한 우리 주변 환경이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 건물의 벽은 글자 그대로 부서지고 있다. 우리들의 도시 계획가에 의하여 좋은 의도로 짜여진 용도지역은 글자 그대로 사상최악의 '게토우'를 조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상주의적인 건축가에 의하여 가장 잘 계획된 학교는 글자 그대로 멍청이의 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고, 가장 고상한 교훈에 따라 설계된 최고의 공영 주택단지는 글자 그대로 살인, 강탈, 노상강도, 아편중독자의 영토가 되고 있으며, 유일한 해결방법은 글자 그대로 그러한 고상한 교훈을 분쇄하도록 다이나마이트를 장전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근대 건축이 우리에게 주었던 몇가지 잘못된 환상적 개념들을 살펴보자.

기능의 환상
포올 루돌프는 예일대학의 미술-건축학부의 새로운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것은 비범한 건물로서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체적 구성에서나 모든 세부에서나,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코르뷔제가 루돌프의 세대에 끼쳐준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포올 루돌프의 이 찬란한 미술 -건축학부가 준공 된지 6년 후, 학생들은 그 건물을 아주 태워 버리려고 대어들었다.
이 무서운 파괴행위는 예일대학 학생들의 행동 양식과 지성의 퇴보와 몰락을 나타내는 이런 증거와는 별도로, 몰락까지는 아니더라도, 포올 루돌프의 찬란한 구조물의 퇴보는 또 다른 무엇인가의 증거로 보인다. 그것은 한참동안 진행하여 온, 형태와 기능 사이의 괴리의 구체적인 증거로 보인다. 이것은 형태가 반드시 기능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형태는 기능에 대한 불구대천의 저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이 보인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치과대학건물과 루돌프의 건물이 지금은 또 하나의 변신을 겪어 다르게 쓰이듯 전 세계에 걸쳐, 본래의 기능에서 새로운 기능으로 전환한 건물들은 이전 보다 더 좋게 쓰여지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또한. 기능에 다르고 기능을 표현하는 형태로 설계하고 건설한, 현대적인 새로운 역작보다도 더 좋게 쓰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건설의 비용이 거의 천문학적 숫자가 됨에 따라 낡은 건물의 개조가, 철학적인 입장에서 뿐 아니라 경제적인 입장에서 점점 더 관심을 끌게 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물의 개조는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물 개조의 경험이 있는 건축가-스카르파, 벨지오죠소, 페레수티, 로져스, 카를로, 코치, 자이언-는 케케묵은 보존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금세기 후반의 최첨단의 전위주의자에 속한다. 그들은 초기 기능주의자들의 직계 후예이며 또한 그들은 흔히 영감으로 이루어진 자신들의 작품을 통하여 사실상 "형태"는 "기능"에서 작별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 -즉 "형태"와 "기능"의 임박한 괴리 현상 - 의 개념은 아직도 흥미로운 생각이며 전설의 여러 분야에서 탐구되고 있다.
이 개념은 단순하다. 즉 장래의 기능은 오늘날 명백히 예측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의 건물은 닥쳐 올 여러 해, 여러 세대의 가능한 모든 기능을 수용하고 맞아들일 수 있도록 융통성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뛰어나게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표면의 약간 밑에는 놀랍게도 점잖은 급진파인 미스 반 데로에에 의하여 장치되었음직한 2개의 시한폭탄이 있다. 시한폭탄 제 1호는 자유기업 제도에의 영향이다. 자유기업제도는 건물의 퇴화의 가속화에 의하여 번영하고 있다. 다방면의 용도에 적응되는 "유니버설 스페이스"는 건물의 주기적인 파괴에 대체되는 대안을 제시하는 꼴이지만, 그 방법은 건물의 파괴에 이권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시한폭탄 제 2호는 무한히 융통성 있는 건물은 건설하는데 엄청나게 비싸게 치이기 쉽고, 사실상 융통성 없는 건물만큼 쓰임새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미스 반 데로에의 "유니버설 스페이스" 이론은 근대적인 실험연구소나 병원의 설계에서도 썩 잘 맞아들지 않는다. 실험 연구소나 병원을 전체적으로 융통성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장래의 모든 요구에 맞도록 만들기 위하여서는 내부 기둥이 없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고, 또한 모든 덕트, 배선 파이프 그 밖의 기계 장치를 넣을 수 있는 중간층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가능하지만 엄청남 비용으로만 할 수 있다. 개방적이고 기둥 없는 바닥은 칸막이를 옮겨 거의 원하는 대로의 크기, 모양, 기능을 갖는 공간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것은 가능할 것이지만 그런 만능 수송차는 생산하기에 터무니없는 비용이 들고 이용가치는 제한될 것이 분명하다.
무한히 융통성 있는 유니버설 스페이스는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창조성과는 정반대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완전히 융통성 있는 유니버설 스페이스는 그러한 발전을 막아온 일은 없을지 모르나, 분명히 절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는 것은 근대건축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대기의 경우, 형태는 기능에 대한 분별 있는 추측이상의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잘 되면 (오히려 나쁘게 되더라도) 형태는 저당권 이자율에 따른다 대개의 경유, 근대건축에 있어서의 형태는 반 기능적이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좋은 일인지 모른다.

기술의 환상
19세기 중엽의 발생 시초에서부터, 근대건축운동은 산업혁명을 따라 잡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집념은 강박관념이 되어 기술-근대기술 과 기술 비슷한 모든 것은 근대건축운동의 성패가 달린 신앙조항처럼 되어 갔다.
근대의 신앙이 그 존립을 위하여 얼마나 깊이 근대기술에 의존하였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소련의 예를 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는 근대기술의 심벌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강박관념을 볼 수 있다. 소련 도시의 스카이라인에는 키 높은 크레인 - 그것은 미래의 우상이다 - 이 산재하여 프리캐스트, 프리스트레스트, 프리피니쉬의 철근콘크리트 부재를 미리 정한 위치에 들어올리기에 바쁘다. 소련에는 사실상 수공업적으로 매우 훌륭히 건물을 지어 낼 수 있는 수백만의 숙련된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은 당국에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문제시되는 것은 전적으로 프리패브리케이션, 프리캐스트, 프리스트레스트, 프리피니쉬 만이 확실히 미래의 조류라는 사실이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를 생각할 수 없듯이 근대기술 없는 근대건축운동은 생각할 수 없다.
그 생각은 몇 가지 방법으로 인구증가에 충분히 따라 갈 수 있게 신속하게 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현장노동은 본래 비능률적이기 때문에 그 현장 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다른 대량 생산제품의 특색이 되었던 내외부 마무리의 성질이 그대로 건물의 특색도 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목적은 하나도 달성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미국과 그 밖의 선진국에서는, 프리패브리케이션 - 아마도 그 실패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하여 지금은 "시스템 빌딩" 이라 부른다 - 에 손을 대었던 이상주의적이고 모험적이던 인사들은 떼지어 파산하고 말았다. 실제로, 세계 도처의 건설산업계는 모든 이론을 믿고 모든 사실에 의하여 좌절당한, 그리고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던 공사간의 후원자들의 무덤으로 어지렵혀졌다.
오늘날 미국에 있어서 시장에서 보통 구할 수 있는 큰 모듈러 부재도 건물을 조립하려면 무수한 "특수 세부부품"이나 "특수부재"의 사용 없이는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 특수부재를 사용하면 전통적인 방법으로 지은 대등한 종류의 구조물보다 그 비용이 금방 높아진다.
현실세계와 근대적 환상의 세계 사이의 괴리는 참으로 한스럽다. 왜냐하면 주택과 그 밖의 형식의 거처에 대한 인류의 수요는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고, 선진국의 건설산업은 이런 수요를 채우려는 맥없는 노력으로 자꾸 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만의 예를 들면, 1968년에 존슨대통령과 국회는 주택의 기본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다음 10년 동안 매년 250만 호의 새 주택을 지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실제에 있어서, 그 결정이래 미국은 지나치지 않은 그 목표의 60퍼센트 이상 달성한 일은 드물었다. 그 실패의 이유의 큰 몫은 뒤이은 행정의 비인간성 탓이지만, 일부는 과거 150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선구자들이 그렇게도 분명히 강조하였던 사명을 무참히도 실현치 못했던 건설산업의 결함 탓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미국에서의 참된 프리패브케이션의 큰 실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 나라의 건설산업이 치수와 질에 관한 일련의 표준(예를 들어 미터법이 포함되는데, 미국의 건설산업계는 그것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을 엄격히 지키는데 동의하지 않는 한, 건설부품의 참된 프리패브리케이션은 있을 수 없다. 건설부품 (그 밖의 모든 제품)의 제조업자들이 경쟁에서 협력하기 보다 경쟁에 압승하려는데 제약이 없는 자유사회에 있어서는, 각 제조업자는 자체의 표준을 정함에 있어 경쟁상대와는 가급적 다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큰 건설부품의 대량생산은 대량소비, 즉 공급의 원활하고 고른 유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제너럴 모오터스와 그 밖의 자동차 회사들이 확립한 것과 유사한 판매망을 전국에 설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까지 그러한 공급조직은 설립되지 않았으며, 북미대륙에 걸친 지방건축법의 무수한 특수요건, 그리고 서로 다른 기후조건으로 그 가능성은 의심스럽다.
셋째로, 미국이 거대하다는 바로 그 점이 경제적인 대량공급에 심각한 문제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미국과 같은 자유기업 사회의 고도의 개인주의적 특성은 언제나 규격화에 저항하는 듯하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제품과 서비스에 의하여 대부분 이루어진 생활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한다. 리비트 타운에 지은 주택들은 거주자가 포오치, 지붕창, 사랑채 그 밖의 여러 가지 소용돌이 장식 등을 덧붙임으로써 철저히 개조해버려 규격화한 본래의 외모는 지금 알아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의 지금까지의 프리패브리케이션의 비참한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어떤 우여곡절의 결과이다.
1930년대, 40년대, 50년대 사이에, 미국에서 추진한 프리패브리케이션의 단일 시스템의 대부분은 단순화하고, 신속화하고, 건물 뼈대의 비용을 줄인다는 이론으로 설계한 패널시스템이었다. 원통하게도 이들 시스템 중의 극히 적은 수만이 20세기 미국 건설계에 관한 하나의 기본적이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 기본적 사실이란. 즉 어떤 건물이든지 그 뼈대는 건설비 전체에서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항목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들 세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택과 그 밖의 건물을 마련하는데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금세기에 있어서 건물이 실제로 어떻게 건설되고 있는지를 극히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공업화된 건설이 우리의 생활에 있어 중요 부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건설부품, 건설노동자, 건설금융 등을 슬기롭게 관리하는 편이 새로운 유니버설 조인트를 가진 새로운 패널시스템을 개발하는 것 보다 격증하는 필수적 건물수요를 채우는 데 더욱 더 유리할 것이다.
근대건축운동은 하나의 기본적이 신앙조항을 갖고 있다 그것은 즉 근대기술과 그것의 눈부신 이미지는 모두 의심 없이 건설의 세계와 건축의 세계를 변혁하리라는 신앙이다. 근대건축의 거장들이 제안한 모든 것은 어느 면에서는 그 신앙에 뿌리박고 있었다. 형태상의 이미지-르 코르뷔제와 미이스 반 데르 로오에에 의한 "기계처럼 보이는" 건물-조차 이 신앙의 표현이었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된 패널, 순수한 입방체, 빛나는 유리슬래브, 이 모든 것이 공업화라는 영광된 세계, 즉 아주 합리적인 기계가 불합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손재주와 바뀔, 그런 세계가 도래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만일 그 신앙조항이 무너지고, 또 근대건축운동의 뿌리가 끊어진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실패할지 모른다.

초고층건물의 환상
초고층건물은 분명히 가장 잘 볼 수 있는 근대건축운동의 상징이다. 그것 없이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기술상의 혁신 없이는-금세기 초의 수십 년 사이에 발전된 도시설계의 새로운 개념은 대부분 빛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르 꼬르뷔제의 '빛나는 도시'-공원 같은 환경 속에 넓은 간격으로 배치된 높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코뮤니티-의 비젼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 한 초고층건설의 기술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근대건축가와 도시 계획가가 그 후에 품었던 모든 꿈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확신에 의존하였다. 즉, 급증하는 인구의 공간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서는 구름 속으로 치솟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수직도시의 이념을 건설기술의 문제, 수송기술의 문제, 무제한 인구 증가의 문제, 토지투기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상호작용의 문제와 갈라놓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근대적 상징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초고층건물은 다양하지만 상호 관련되는 많은 문제에 우리를 휩쓸어 넣는다.
수직도시를 건설하는 단 한가지 방법은, 집짓기 놀이를 꿰 맞추듯 도시 건물의 뼈대를 짜는 일이다. 즉 수직의 기둥과 보로 짜되, 그 사이에는 넓은 공간을 내어 지면층 이거나 그 밖의 모든 층에서 바닥면적의 손실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벽"은 가급적 엷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벼운 재료라면 어떠한 표피나 커어튼 월이라도 건물 설계자의 눈에는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는 그런 의도를 완전히 충족하였다. 그러나 목적이 역시 인간이 견딜만한 내부 환경을 만드는데 있다면, 우리는 미진한 점이 많다. 4분의 1 또는 2분의 1인치 두께의 유리벽을 통한 열 손실은 실로 놀랠 정도여서 단열판을 넣은 전형적인 돌벽의 경우의 10배는 거뜬히 넘는다.
이러한 재료 면의 근본적인 결점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리업계는 유리건물이 인간거주에 알맞게 할 의도로 일련의 기발한 제품을 발명하기에 전력을 다하여 왔다. 그러나 그런 발명과 장치의 어떤 것은 거의 우스꽝스럽다. 예를 들면, 거울 입힌 유리는 당초에 근대건축의 선구자들을 유리 표피의 건물로 유인했던 바로 그 목적을 결국 무효로 하였다. 왜냐하면 낮에는 완전히 불투명하고, 따라서 유리표피의 건물이 그렇게도 극적으로 드러내 놓게되어 있었던 구조의 뼈대 자체를 효과적으로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수직도시'가 불안스럽고 급속히 팽창하는 세계의 도시의 원형으로 선언된 지 50년 이상 지나서야 겨우 초고층건물의 건축가들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그 하나의 이유는 꽤 근년에 발전한 매끄러운 표면의 초고층건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울퉁불퉁한 초고층건물이 일으키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1970년경에야 비로소 건축가와 구조기술자가 고층건물과 그 매끄러운 벽을 시험할, 참으로 믿을 만한 풍동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초고층건물의 생활을 불유쾌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 최소한 건강을 해치게 하는 미해결의 문제가 있다. 고층건물은 흔히 난로에서 연기를 뽑아내는 굴뚝과 같은 작용을 한다. 건물이 높을수록 더 세게 심한 상승기류를 발생시킨다. 값비싼 기압장치를 고층아파트의 공공부분에 설치하지 않고서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 홈통은 굴뚝 역할을 하게 되고, 강풍이 불 때에 엘리베이터 문을 닫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들 문제에서 곤란한 점은 내부와 외부의 환경을 조정하는 매우 중요하고 획기적인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는 기술상에서 실제로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근대건축의 가장 도전하기 어려웠던 교훈의 한 가지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비상한 일련의 상황에 놓여 있다. 강철이나 콘크리트 뼈대로 짓고 유리표피로 덮은 초고층건물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내부환경을 가질 수 없다. 더욱이, 근대기술의 신화보다 오히려 구조적 사실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그러한 구조로 된 초고층 건물은 옛부터 있던 주위의 도시적 짜임새를 침식하거나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대건축 운동의 이상-'빛나는 도시'-은 사실상 우리의 도시적 유산의 불가피한 파괴자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반드시 의도적인 파괴자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도시적 유산의 무의식적인 파괴자임은 확실하다.
르 코르뷔제의 '빛나는 도시' 힐베르자이머 및 미스 반 데로에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 의한 '수직도시'는 하나의 불합리한 유성인 지구에 대하여 분명히 합리적인 해결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수직도시'가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거주지일까? 그것을 위하여 투쟁할 가치가 있는 거일까?
대답은 분명히 "아니"이다. '수직도시'에서는 보도는 엘리베이터로 대체된다. 대화와 만남의 장소인 보도는. 침묵의 상태이고 이웃은 당신의 적이 되며, 그는 당신의 벽 반대쪽에서 못질하는 사람이다. '수직도시'에서는 인간과 동물과의 접촉만 있는 것 같다. '수직도시'에서는 소외는 완벽하다.
콘스탄티노스 독시아데스를 알고 있던 '워싱턴 포스트'지의 평론가 월프 본 엑카르트는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였던 독시아데스가 1971년의 한 회의에서 "나의 가장 큰 죄는 고층건물을 지은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최근에 인용하였다. 그리고 독시아데스는 그가 이전에 고백하였던 "죄"를 이렇게 들어 말하였다.
첫째, 고층건물은 자연을, 또는 현대적인 말로 환경을 거역하고 있다. 그것은 경관을 파괴하고 정상적인 공기의 순환을 방해한다.
둘째, 고층건물은 인간 자신을 거역한다.
셋째, 고층건물은 사회를 거역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중요한 구성단위가 예전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넷째, 고층건물은 교통, 통신, 전력, 급배수 등의 조직망을 거역한다.
다섯째, 고층건물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도시의 경관을 파괴한다. 한때 도시 위에 솟았던 모든 교회, 모스크, 사원, 그리고 시청사와 같은 인간적인 상징은 지금은 초고층 건물의 밑에 있게 되었다.
독시아데스는 근대건축운동에서 나타난 가장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동성의 환상
근대건축운동이 만들어 낸 두 가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의 원형은 르 코르뷔제의 '빛나는 도시' 공원 속에 듬성듬성 선 초고층 건물과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의 '브로드 에이커 도시'이다. 이 두 가지 원형은 첫눈에는 공통된 것이 전혀 없는 같지만 하나의 중요한 결함을 함께 갖고 있다. 둘 다 복잡한 교통방식 없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근대건축의 신조가 하나의 고정된 정수 즉 '분산'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흥미진진하고 그리고 우울한 일이다. 분산은 불가피하게 몇 억대의 자동차와 수백 마일의 고속도로와 거기 따른 자연환경의 전면적인 파괴를 초래한다. '이상적인 근대도시'의 표준적인 이미지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는 이미지이며, 그 기계의 움직이는 부분은 원활하게 운용되는 수송시스템의 구성요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고장에 특별한 애착이 없고 가급적 자주 그리고 신속히 거기서 떠나기를 원하는 특수한 경우라면 이동성이 극히 바람직한 목적임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빈민가에 몰려있는 빈민들은 이동성을 자신들의 더 나은 취업의 기회와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의 더 좋은 교육과 오락의 기회를 교외에서 얻는 수단으로 여긴다. 이사실이 참으로 시사하는 바는 이상적인 '이상도시'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신체의 일부분으로 갖고 있는 것 이외에 극히 적은 기계적 수송형식만이 필요한 도시라는 것이다. 이상적인 이상도시가 보행자의 도시라는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거장들은 자신들이 우리의 도시와 그 주민들에게 오고야 말도록 계획하였던 파괴를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근대의 모든 몽상가중에서 사람을 가장 심심찮게 하던 르 코르뷔제는 앵트란시지의 한 논문에서 그의 거창한 정기적인 장광설의 하나를 기록하였는데 그 제목은 길이었다. 그는 기록하기를 "가로는 영원한 보행자가 잘 다져 놓은 길이며, 수세기에 걸친 유물이며, 이미 기능을 잃은 틀어진 기관이다. 가로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가로는 우리를 넌더리나게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것은 존재하는가?" 그는 분명히 가로는 존재해서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과 대체될 하나의 비젼을 나타냄에 있어서 차차 서정적으로 되어갔다. 아직도" 영원한 보행자가 잘 다져 놓은 길" 은 수백 마일이나 더 많이 남아 있고, 새로운 세대의 점점 더 많은 건축가와 계획가들은 보행으로 다져진 그 길을 되살리고 그것에 새로운 주체성과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한편, 고가차도는 서양인이 배관이나 그 밖의 필요시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집어넣는 방법을 배우기 이전에 건설된 고대 수도교와 같이 지상의 유적의 하나가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6. 현대건축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을 보면, 대전 전에 거장이던 르 코르뷔지에와 로에가 여전히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평탄한 활면이나 판의 조형에서 보다 유기적인 곡면이나 거친 면으로 싸인 매스(mass)의 조형으로 극단적인 작풍(作風)의 변화를 보여, 마르세유의 아파트(Unite d’Habitation) 등의 여러 건축에서 철근콘크리트가 가지는 자유도 ·조소성 ·역감 등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한편 로에는 근대정밀공업의 높은 가공정밀도를 도입하여, 거의 이상화된 순수기하학적인 근대건축의 구체화에 성공하였다. 시카고의 아파트와, 뉴욕의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은 고도의 시공정밀도와 완벽한 비례에 의해 고전적인 완성미에 도달하고 있다. 이 두 거장을 양극으로 하여 현대의 건축은 전쟁 전의 국제적 성격에 대해서 한층 현저한 지역성과 전통적 특색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동시에 보다 자유롭고 개성적인 형태가 표현되게 되었다. 이러한 다면적 경향 장하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P.L.네르비, 멕시코의 F.칸델라, 에스파냐의 E.토로야 등의 조형적 재능이 풍부한 구조 엔지니어들에 의한 정교하고 치밀한 가구기술 개척이다. 이것은 가구의 자유도를 풍부히 확대함으로써, 총괄적으로 보아 현대건축의 선단을 명백히 전쟁 전의 고전기를 탈피하고 좀더 자유롭고 동적인 새로운 양상, 말하자면 근대건축의 바로크적 양상으로 전환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건축활동의 지도적 중심은 유럽과 미국으로 양분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로에와 라이트를 양극으로 하여 다양한 고도의 기술성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활동하였다. 라이트의 존슨왁스 연구소(1950), 구겐하임 미술관(1946∼59), 로에의 일리노이 공과대학 예배당(1952), 시그램 빌딩(1958), P.존슨의 자택인 유리의 집(Glass House), L.칸의 펜실베이니아대학 의학연구소(1957∼61), E.사리넨의 T.W.A.공항 터미널 빌딩(1956∼62), 달라스 공항 건물(1958∼62)), P.루돌프의 예일대학 예술학부(1959∼63) 등이 대표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럽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의 아파트(1946∼52), 롱샹의 교회당(1950∼54), 네르비의 스포츠 전당(1956∼57), M.브로이어의 유네스코 본부(1955∼58), H.샤론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홀(1956∼63)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건축의 특색은 이상과 같은 선단적 변화와 함께 근대건축의 일반적인 보급에 있으며, 한국을 비롯한 중진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후진지역에서 선진국 이상으로 급속히 보급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르 코르뷔지에의 인도의 샹디가르(Chandigarh) 종합 도시계획(1950), 요른 웃존(Jrn Utzon)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1956), O.니마이어의 브라질 종합도시계획(1956) 등은 국제적인 관심을 모은 것들이다.

1) 현대건축 : 포스트모더니즘
프랑스의 철학 교수인 Jean 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포스트 모던이란 모던에 의해 표상될 수 없는 것을 표상 그 자체로 나타내는 것이며,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형식의 즐거움이나 취미의 합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될 수 없는 것의 보다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고 정의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이를 지양, 극복 하자는데서 출발한다. 이는 건축만의 고유한 개념이 아니고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무용 등에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조류를 지칭하는 바, 넓은 의미로는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휴머니스트적전통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대 문화에 대한 반적용을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특정한 이상과 목표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건축에서 탈근대란 근대 건축이 지니고 있었던 이념적 가정들, 즉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 건물의 형태와 외관은 기능과 재료와 구조의 논리적 결과물이라는 믿음, 수단으로서 과학 기술에 대한 신뢰, 추상 기계미학에 대한 선호와 장식에의 혐오, 주거와 도시 문제의 보편적 해결에 대하가 유토피아적 낙관론적 견해, 집단적 해결 및 대량 생산을 선호하는 정치적 성향, 사회 개조의 사명감과 건축가의 도덕적 직업의식 등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정주환경의 개선을 목표로 과거의 전통적 수법과
결별하고 혁신적 수단과 과학 기술의 잠재력을 추구했던, 급진적이고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던 모더니즘으로부터 탈피하여 모던이전 시대의 사상과의 재통합을 시도하는 일체의 경향을 하나로 묶어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탈근대는 과격한 새로운 방식이나 신기한 어떤 것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로의 진로를 찾고자 하는 색채를 띤다.
결국 근대의 대안으로 등장한 탈근대는 근대와는 다른 논리와 이론을 앞세우면서 건축의 새로운 논리와 비젼을 제시하고자 한다. 건축을 사회와 기술과 시대정신의 산물로 보기보다는 그 시대와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산물로서 간주하고, 하나의 순수하고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보고자 한다. 만인에게 동등하게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건축적 해결보다는 개별적인 상황에 상응하는 특수함을 추구한다. 따라서 올바른 하나의 원리와 방법이 있는게 아니라 얼마든지 다양하고 상이한 접근이 허용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탈근대는 근대가 거부했던 역사와 전통과 풍토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적극 도입하고자 한다. 과거로의 보귀와 건축에서의 의미추구는 탈근대의 가장 주된 주제이다. 이는 기능과 구조의 결과물 정도로 치부되던 형태가 건축의 중심 과제로 재부상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의미와 상징은 형태를 매개로 표출되며 역사적 양식은 형태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근대 건축이 추상적이고 몰개성적인 형태로 말미암아 의미 전달에 실패했다면 탈근대는 인습적인 요소를 재도입하여 건축의 수사학적 기능을 회복하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역사에 대한 존중은 아마도 탈근대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장 커다란 경향인 듯 하며, 그것도 과거의 형태어휘를 디자인에 직접 도입하고자하는 역사주의적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탈근대는 일종의 고전주의적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고전주의가 장식적, 구조적 형태어휘와 구문에 대한 법칙을 준수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원리나 미학을 추구했다면, 탈근대의 고전주의자들은 보다 자유롭고 낭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진지한 매너리스트로부터 유희적인 절충주의자, 안이한 복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다양하고 개별화된 양태를 보여준다.
탈근대가 고전 어휘를 채용하여 상징, 암시, 은유 등의 기법을 구사하는 것은 건축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건축이 기능과 구조의 합리적 해결로 생성된다는 사고는 건축이 고대로부터 발전시켜온 인습체계를 파괴시키고 자체의 고유한 특수성을 상실시켜, 건축을 하나의 자율적이고 추상적인 회화 예술이나 순전히 유물적 생산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적 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의미는 인습적인 것이며 문화체계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임을 망각한 결과이며, 건축이 의사소통의 수단임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건축을 의사소통의 예술로 간주할 때 의미전달의 대상이 또한 문제가 된다. 탈근대는 근대가 소수 엘리트 건축가 사이에서나 소통이 가능한 난해한 추상 예술을 생산해 왔다고 비난하면서 건축의 진정한 소비자인 사용자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대중 예술로서의 건축을 추구한다. 대중주의는 탈근대가 지향하는 또 다른 목표이기에 근대가 사용자의 삶의 방식을 무시하고 미리 설정한 이상적 틀에 맞춰 개조하려한 데에 비해, 탈근대는 그들 그대로의 삶의 모습과 취향을 존중하고자 한다.
도시에 대한 전통적 입장으로의 복귀 역시 탈근대의 중요한 구성 요소의 하나이다. 그들은 근대 도시를 관료주의와 전체주의의 타협의 소산으로 보고 도시의 역사적 연속성의 파괴와 장소성의 상실을 개탄한다. 그래서 근대 도시계획의 기저에 깔려 있는 도시는 곧 성장이며, 개발은 복지라는 도식적 사고의 불식을 주장한다. 도시를 사회학이나 과학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복잡한 유기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제도적 측면만큼이나 물리적 측면을 중시한다. 맥락이란 관점에서 도시를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기능 분석에 따라 도시 구조를 단일 기능의 영역이나 블럭들로 분할하는 수법을 지양하며 전통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시의 연속성, 폐쇄 공간, 가로와 축을 재생기키고자 한다. 도시형태학, 유형학, 맥락주의적 접근은 탈근대의 또 하나의 특성인 것이다.

2) 탈근대의 이해
포스트모던 건축은 근대건축이 초래한 반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기능과 생산성 우위의 건축에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건축이 재료와 구조의 사용에서 진실해야하며 건축의 형태 구성은 시대정신에 부합해야 한다는 근대건축의 논리 대신에 건축은 표현의 수단일 수 있으며, 범세계적이기 보다는 지역적이며, 규범적인 것의 산물이기보다는 개인적인 창조의 산물일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다. 또한 건축의 작업은 창조적이기 보다는 역사 의존성을 가지며, 동시에 하나의 원리체계가 아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다. 소위 건축 창작 행위에 있어서의 다원주의의 대두라고 할 수 있으며, 건축의 형태구성 방법에 있어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찰스 쟁크스가 이야기 하듯이 근대 건축의 실패와 포스트모던 건축의 전개는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이 건축에서의 역사적 연속성과 표형에 대한 중요성의 회복에 있다고 본다면 이러한 생각의 시발은 50년대 유럽 건축의 일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대 건축의 기능주의에 대한 반발은 50년대의 영국과 이태리에서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일반 대중들에게 사실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건축 형식과 표현에 대한 모색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현상은 건축의 형태구성에 있어서의 역사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건축 이전의 시기에서는 역사의 사용 여부는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다면 어떤 역사를 선택할 것인가였으며, 선택자체의 논리적 정당성은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역사는 채용되었다기보다는 건축구성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건축 구성에서 본질적인 것이었던 역사의 사용은 근대 건축의 물결 속에서 단절되어 버렸으며, 더우기 비윤리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건축에서 역사성을 회복하고 다시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태도에서 특이한 것이 있다면 역사를 총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전개 과정과 관력되는 또 하나의 특이한 현상은 건축구성을 위한 논리 전개 수단의 하나로써 여러 학문에 눈을 돌리고 이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언어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환경심리학 등에서 논의 되는 사항들이 건축 형태 구성을 위하여 다양하게 도입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제반 학문들의 논의 대상이 문화, 특히 대중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현재까지의 어떤 이론과도 관련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이론 또는 경향이라고 불릴 수 있는 논리들, 즉 맥락주의, 구조주의, 지방주의 등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를 통해서 건축의 형태 구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은 기능보다는 형태에 치중한 건축이기 때문에 형태의 원천을 근대 건축과 역사적 건축 양식에서 다같이 취함으로서 보다 풍부한 형태와 대중들에게 친근한 형태의 도입, 인본주의적 형태와 지역적, 장소적 맥락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의 도입이라는 관점에서 전통과 역사성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인습적 건축요소를 재도입하여 건축에서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인 탈근대 건축은 최근의 추세로 보아 일종의 고전 복고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건축의 기능성 대신에 상징성을, 무미건조함 대신에 표현의 풍부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이며 무미건조한 양식 대신에 형태를 통한 표현성과 상징성을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논리일 수 있으며, 많은 건축가들과 비평가들은 이러한 논리를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7. 우리나라의 현대건축

해방이후 이 땅에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한 근대건축은 때로는 근대화와 선진 문화의 동의어로서, 때로는 성장발전의 동의어로서 인식되면서 우리 도시환경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건축의 수용은 자체 역량의 허약으로 서구모더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화의 능력 없이 수행되었고, 그것은 이제 많은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오늘 우리의 건축문화는 서구건축의 피상적 수용이라는 취약성에다가 근대가 갖는 부정적 측면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는 이중적 부담을 안고 있다. 여기에다 전통 건축문화와의 충돌과 갈등이라는 난제까지 겹쳐서 한국 현대건축의 좌표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80년대 이전 한국 현대건축에서 고건축형태 모티브의 도입이 금기로 되어 왔던 것처럼 근대 건축에서도 전통적 형태나 역사적 고전적 형태의 인용 내지는 유추된 건축물은 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건축 자체가 신고전주의의 반동으로 태동한 만큼 역사적 건축의 인용은 허락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근대건축에서는 상징성, 위계, 장식, 오더 등이 부정되었으며 추상적 형태와 균질공간 및 기계미학이 그 목표였다. 한국 현대 건축에서도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통한 전통이나 역사성 표현에 있어 1967년의 국립종합 박물관과 부여박물관의 전통표현 방법론의 제시라는데 상당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다.
최근 국내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축물들이 보이고 있다. 얼마 전 완공된 한국은행 강남전산센터, 외대 용인캠퍼스 도서관, 단대 천안 캠퍼스, 율곡기념 도서관이나 춘향문화예술화관, 경남사회복지관 부속청소년회관 등에서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표출되고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도시적 맥락을 추구한 예를 볼 수 있다. 대학로에 위치한 공간 설계의 일련의 건축물 군이나 홍대 앞의 아람광장의 건축물군은 벽돌이라는 재료의 사용과 개성적인 형태 구성에 의해 장소적 형태적 맥락을 형성함으로써 건축물 개체와 장소, 그리고 도시조직 간의 유기적 연계에 의한 새로운 도시적 맥락을 창출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는 포스트모던의 직접적 영향은 아니더라도 바람직한 예라고 할 수 있으며, 포스트모던에 의한 도시적 맥락에 대한인식의 제고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맥락주의의 방법론인 전형과 배경이나 꼴라쥬 기법 등이 형태나 공간적 측면보다는 평면적 개념에 의해 디자인되는 모순에 대한 지적도 거론될 수 있으나 도시 디자인에 있어 새로운 방법의 제시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 결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고전주의는 고전장식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뿐 고전주의의 근본정신과는 별 상관없는 '고전주의의 자유양식'이라 불리는 일종의 혼성적 절충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문명의 구조적 변화에 의해 야기된 이른바 '탈 근대적 상황'에서 과연 탈근대주의가 역사적 유산과 현대의 인간 조건의 내용을 제대로 담은 하나의 양식으로 탄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도 하다. 복고라는 것이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을 때 흔히 대두되는 퇴행적 양상이기에 탈근대주의가 현대건축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 혹은 소극적 대응이 아닌가하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이 시대의 경제, 정치, 사회의 복합적 현상에 따른, 즉 건축물이 사회 제 현상의 반영이며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시점이고, 비판적 시각은 근대 건축은 아직 미완성 단계이고 완성을 향한 진행 중에 있으며 포스트모던이 뿌리가 없는 하나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형태유희라는 시점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건축의 본질이라는 문제와 취향 혹은 기호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건축은 시각적 즐거움에 호소하게 되고 이는 건축을 패션과 같은 것으로 흘러가게 한다. 대중의 호기심을 끌어들이고 관심을 자아내게 하기위한 방편으로 건축의 흐름이 패션화되는 것은 건축의 원리나 양식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근대 건축과 포스트모던 건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패션에 변화가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이것이 표방하는 다양한 형태 언어들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근대 건축이 추구하는 형식주의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 건축에 대한 국부적이고 지엽말단적인반발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소위 후기 산업사회가 형성한 풍요로운 산업사회나 대중문화의 폭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비문화의 엄청난 힘은 좀 더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모더니즘의 교조적이며 엘리트적인 문화에 대신하는 형태논리가 근대라는 본질 위에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결방안
80년대 서구에서 불어온 탈근대의 바람은 우리로 하여금 서구의 특정시대의 역사적 산물인 근대건축을 서구 건축의 전부인양 인식할 위험을 불식시키고 건축의 또 다른 본질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제기해주었다는데서 긍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포스트모던에서 전통이나 역사성을 도입하는 방법론을 응용, 한국 현대 건축의 현시점에 맞게 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건축에서 표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 포장적 측면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찰스 무어 등에 의해 외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실내 공간적 장치나 개념이 제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건축은 건축적 노하우를 취하는 것도 표피적 단계에서만 머무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90년대에 들어선 이후 국내건축에 있어서의 가장 커다란 변화의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모더니즘에 대한 재조명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의 배경에는 해체주의라는 사조의 등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이 국제주의 양식과 기능주의라는 대표적 용어로만 축소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입장으로서만 이해되었고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고전적 요소들의 인용이라는 단편적 사실만 부각됨으로써 해체주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거부하는 새로운 반대급부라는 인식이 등장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용하는 수법들이 본질적으로는 이미 모더니즘에서 사용된 수법들이며, 해체주의가 이용하는 수법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법과 근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이니 하고 각각의 것들을 차별하고 나누기에 앞서 그 본질적 모습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종합, 분석, 개발해 나가는 것이 건축사에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건축디자인의 일에 몸담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국내의 디자이너들은 한가지의 개념과 concept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을 차별화의 한 전략으로만 사용함에 따라 건축사 발전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미술사나 시대의 흐름에 대한 보다 폭넓은 견해와 지식이 아마 현대 건축가들이 앞으로의 건축에 대한 방향성의 확립과 새로운 시대사적 의미 창출에 요구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3년 1월 17일 작성자 강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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