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표준 :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또 화두를 하다가 보면 깨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것도 여러 수십 명 수백분을 봤어. 깨친 사람 말이야.
어떤 젊은 수좌 하나는 저기 오대산 쪽에 토굴지어 사는데, 한 해 여름 그 천리 길을 세 번이나 왔어. 처음에는 와서 공부를 하다 보니 자기가 깨쳤다고 해서 그건 공부아니라고 말했지. 그래서 그 수좌가 해보니까 또 뭘 좀 알았던 것 같아. 아! 이번에는 아마 참말로 바로 깨쳤지 싶어 또 쫓아왔단 말이여. 세 번이나 오는 사람을 봤어. 내가 볼 땐 아무것도 아니라. 그래 그 사람뿐 아니라, 흔히 공부하다가 깨쳤다 해서 와서 묻는 사람 더러 봤거든.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그냥 의심난다고 하는 사람도, 뭘 지견이 나고 뭐 경계가 나타나고 하면 깨쳤다고 하는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내 몸이 고달프고 아파도 꼭 만나 줬거든. 만나줬는데 여러 해를 그러다 보니까 아무 소용없어.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이야기 해봐도 소용없어. 처음에는 ‘예! 예!’ 하더라도 내 말 안 듣는다 말이여. 지 맘대로 해버리고 그래서 요새 근래 와서는 공부하다가 뭘 깨쳤니 그런 사람들은 전부 안 만나주거든. 깨친 것이라는 건 바로만 깨치면 얼마나 좋나? 바로만 깨치면 말할 것 없는 거라. 중간에 가다 병 난 걸 깨쳤다 그러니......
우리 종문에 불교 근본 법칙이 있어.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강원에서 배우는 선요(禪要)의 고봉(高峰)스님이 공부하다가 깨쳤단 말이야, 설암(雪岩)스님한테 가서 깨쳤다고 하는데, 뭐 법문을 물어보면 대답을 얼마나 잘하나. 설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저놈이 공부하다가 바로 깨친 게 아니고 병이 났는데 암만 아니라 해도 소용없거든. 그땐 부처님이 아니라 해도 안 들어. 자기가 옳다 말이여. 자기가 옳다 해서 안 듣는다 말이여. 그래서 한 삼년 가만 그대로 뒀어. 그러니까 한 삼년 동안은 그만 자기가 제일 깨친 것 같고 자기 스님보다 나은 것 같다고 말이지. 그래 한 삼년 지나서 설암 스님이 보니까 어지간히 그 객기 말이야, 그 병증이 좀 가라앉은 것 같거든.
그래서 오라 해서 물었어. “내 지금 법문이나 법담(法談)하는 것 아니고, 뭘 물으면 네가 대답 못하는 게 뭐 있나? 환하니 물을 필요도 없잖아! 내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 니 그 실제 공부한 것 물어보지. 그래 공부하다 깨쳤다 그리 소리치는데, 니 공부한 그것 말이야, 밥 먹고 옷 입고 그 활동하며 다닐 때 그때 일여(一 如)한 그것이 어떠하냐? 아무리 활동하더라도 그대로 일여하더냐?”하고 물었거든? 자기가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 경계로 설치고 하여도 자기 공부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 그대로 일여한 거야, 그럼 꿈에도 일여하냐? 꿈에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여하거든. 경계가 없단 말이여. 그래 또 묻기를 “그러면 잠 꽉 들어서 꿈도 없을 때, 그때도 네가 일여하냐?” 그땐 캄캄하단 말이여.
중생 생활이 어떠하냐면 일간(日間)에 잠 안잘 대 생활하고, 잠들어서 꿈꿀 때 생활하고, 잠들어서 꿈도 없는 -아주 꽉 잠 들어버렸을 때- 생활하고 그 세 가지가 평생 전체 생활이다. 그런데 설암스님이 묻기를 “꿈에 일여하다면 그럼 잠들어서는? 잠 꽉 들어서는 어떠하냐?”고 물으니 잠 꽉 들어서 꿈도 없을 때는 캄캄하다 말이여. 그때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랬거든. “그럼 그거 아니다. 네 공부가 바로 깨친 게 아니니까 너 오늘부터 무조건 발심해가지고 공부를 잠 꽉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 깨쳐야 되지. 꿈에서 일여한 그것 가지곤 안 돼. 잠 꽉 들어서도 깨쳐야 되지 말이여. 공부한 거 다시 공부해라” 그러니까 그때는 미친 기운이 병난 기운이 많이 가라앉아 설암스님 말을 믿었거든. 그래서 또 삼년을 살며 공부를 죽자하고 했어. 그 때 가서 참 바로 깨쳤단 말이여. 잠 꽉 들어서도 일여한 이것이 실지 오매일여(寤寐一如)라 하는 거야. 꿈에서 일여한 건 숙면일여(熟眠一如)라 하는 거야. 그때 깨치고 보니까 몽중일여 들어가고, 숙면일여 들어가지고 자기가 바로 깨쳤거든. 그래 설암스님이 인가를 했단 말이여. 그렇게 되어야만 그게 바로 깨친 거여!
요새 깨쳤다 하는 사람들 보면 말이야, 그건 그만두고 환한 것 같고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지? 아! 그 석가 그까짓 것 뭐 똥덩어리만도 못하는 거, 지가 천하제일이라고 “그래! 석가가 똥덩어리만도 못하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네가 공부한 것이 보통생활 때도 일여하냐?” 고 물으면, “아, 그건 안 됩니다.” 이러거든?
그래서 공부란 것은 동정(動靜)에 일여해야 된다.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도 일여해야 되고, 숙면에 일여해야 해. 숙면에 일여해도 깨쳐야 공부인 것이고 바로 깨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지 공부 아니야.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이전 조사스님도 다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뭐 잘났다고 내 법 세우면 되나? 자고로 잠 꽉 들어서도 일여한 거기서 깨쳐야 그게 참으로 바로 깨친 거지, 그러기 전엔 절대 깨친 게 아니라고 부처님도 그리 말씀했고 조사스님도 다 그리 말씀했단 말이여. 잠 꽉 들은 건 고사하고 또 꿈에도 고사하고 동저에도 일여하지 않는 그걸 갖고 네가 뭘 깨쳤다 할 것인고? 그건 순전히 병난거지 깨친 게 아니다.
동정일여! 이게 보통 보면 쉬운 것 같지만 그것도 참 어려운 거야. 여기 뭐 쫓아다닐 때 화두가 일여하던가? 안 일여하단 말이여. 좀 지견이 났다하면 화두는 있고 없고 하고 안하고 관계없이 이러한 경우가 더러 있어. 그렇지만 난 이때까지 몽중에 일여한 사람 아직 못 봤어. 몇 사람 이제 몽중에 좀 일여하려 하는데 말이지, 그만 깨친 거다 싶어 공부를 안 해버린다 말이야, 그러면 그건 나중에 도루묵이 되 버리는 거야.
그건 무슨 소릴 해도 소용없는 것이고 실지로 내 공부가 돌아다니다 보면 알 것 아니야? 얘기할 때 밥 먹을 때 말이야. 동정일여라 하면 아무리 분주하고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몽뚱이를 움직이고 하더라도 그대로 간단없이 일여한 그런 경계인데 여간해서 되는 게 아니야.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몽중일여는 참 어려운 거야.
그 전에 어느 조실스님하고 이것저것 이야기했는데 그래 딴 것 말할 것도 없고 실지 공부하는 것은 동정에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 일여해야 되고 숙면에 일여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데, “스님 어떻습니까? 그 꿈에도 좀 됩니까?” 하고 물으니, 꿈에도 안 된다고 하거든. 그건 양심이야! 아니 꿈에도 안 되는 그걸 갖고 조실이라 하면 되겠나? 그걸 말했더니 “조실해라 자꾸 이러든데 뭐.” 그 말도 옳거든. 아무리 안하려 해도 자꾸 와서 조실 하라 하니까 할 수 없는 게지. 꿈에도 안 되는 그런 큰스님들도 보면 더러 있거든?
어떤 사람은 또 안 그래. “그걸 말이라고 해? 난 벌서 숙면은 지나갔어!” 하지만 내용은 안 그렇거든? 그래도 자기 양심은 안 있겠어? 그러니까 뭐, 예전 스님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예를 들면 그럴 수도 있다 그 말이라!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부처나 달마보다 내 법이 더 깊다 그러고 그런 쓸데없는 망상을 가진단 말이야. 내 그런 사람한테 “그러면 그 경계가 동중에도 일여하냐 몽중에도 일여하냐. 잠 꽉 들어서도 일여하냐?” 고 물으면 다 그만 무너져 버리거든.
언제 큰 법당 법문을 하고 내려오니 웬 수좌가 나를 보고 자꾸 절을 해. “왜 절을 하노?” 하니, “아이구, 스님 법문하시는데 일언지하에 확철대오했습니다!” “허! 참 반갑네. 초단법칙이로구만. 그래 일언지하에 뭘 깨쳤기에 그래?” 하니, 온 천칠백공안이 환하다 해.
“그래? 뭐 천칠백공안이 환한 건 그만두고 지금 니 얘기할 때 그대로 공부가 되나?”
가만 생각해보더니 얘기할 땐 없다 그래.
“허! 허! 허! 에이 도둑놈의 자식! 깨친 게 그런 건 줄 아나? 쌍놈의 새끼!” 그래서 몽둥이로 탕! 탕! 때려줬지.
“임마! 그거 공부 아니야. 하다 보면 뭐 망상이 좀 생기고, 경계가 조금 비친다고 해서 깨친 건 아니란 말이야. 동정일여하고 몽중일여, 숙면일여한데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깨친 게 아니야. 우리 불법의 근본은 거기 서 있다 말이여.”
공부라는 것은 묵언을 하고, 장좌를 해도 속을 보면 동정일여 안되거든. 몽중에도 되는 사람, 몽중일여는 참 드물단 말이여. 그걸 알아야 돼. 그래도 저 선방 밥 먹으려면 몽중일여는 돼야지 그 전에는 뭘 공부한다고 가사를 입고
앉았다 해도 수좌라고 할 수 없거든. 그러니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그것이 공부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우리 선가(禪家)의 근본 생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소견이 생겨서 자기가 석가 달마보다 낫다는 망상 가진 사람 많거든? 그런 병 가진 사람들은 동정일여한지 몽중일여한지 숙면일여한지 그걸 한번 생각 해 보란 말이여. 그 세 가지 조건에 안 들었으면 깨친 게 아니고 병이야! 그러면 말할 필요도 없는 거야.
첫댓글 ()()()
큰스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