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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병의 사라짐.
철책 근무 첫 날부터 연대장이 환경 미화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계속 지시가 내려왔다.
‘막사의 페인트 칠을 하라.’ ‘화단 경계석의 구조를 바꿔라.’
또는 ‘계단의 돌을 다시 쌓아라.’ 등의 지시였는데
이행 완료 날짜가 항상 촉박했다.
이행 여부도 보고해야 한다.
지시 사항을 이행 못할 시의 중대장들은 지휘봉으로 배를 찔려가며
모욕을 받았다.
중대장 이상은 직업 군인이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상관의 말이
‘군복 벗겨 버린다.’였다.
‘군복 벗겨 버린다.’는 강제 전역을 뜻했다.
야간에 경계 근무에 투입되면 주간에 충분히 재워야 하는데 수면이 부족했다.
나의 소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연대 내의 온 예하 부대가 비슷하였다.
따라서 야간 경계 근무시 순찰을 돌면 대부분 졸았다.
자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분대장들의 순찰이 더욱 강화됐다.
하루는 야간에 내무반장이 사색이 되어 보고했다.
보초를 서던 병사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이다.
찾아보느라고 시간도 꽤나 지났다.
당시 내가 맡은 경계 지역은 타소대에 비하면 길었다.
길이가 길어 일부 초소는 한명을 세웠다.
복초로 세우면 초병의 간격이 너무 멀었다
내가 지킨 곳은 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과 강 주변이었다.
임진강은 북에서 내려와 남에서 한탄강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다시 북으로 넘어간다.
육지에는 철책이 설치되어 있지만 강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좌우 산에서 내려오던 철책이 강 양쪽 모래사장부터는 끊어져 있었다.
장마철에는 철책이 떠내려 갔다.
강위에 출렁다리가 놓여져 있었고 출렁다리에서 라이트가 북쪽을 향해 비췄다.
경계는 출렁다리 위에서 섰다.
출렁다리는 길었고 순찰 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 명만 걸어와도 다리가 흔들렸다.
내무반장과 같이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초소를 비워놓고 어디를 갔단 말인가.
내무반의 잠자는 병사들의 얼굴을 일일히 플레쉬로 비추어 봤으나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에도 없었다.
발전기실에도 없었다.
취사장에도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 병사를 본 소대원은 없었다.
‘아! 그 병사는 말이 거의 없더니 결국 북으로 넘어갔단 말인가?’
북으로 넘어가기는 이중 삼중의 철책이 설치되어 있는 육지보다 쉬웠다.
아래 강변으로 내려가 강 따라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말로만 듣던 ‘남한산성’이 머리에 그려졌다.
군 영창이 남한산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남한산성은 ‘영창’을 의미했다.
장교로 임관하여 나름대로 노력하였다고 자부했는데
제대를 몇 개월 남겨놓고 부하의 월북으로 인해 영창을 가야한단 말인가?
제일 먼저 부모님이 떠올랐다.
기대가 컸을 부모님이 생각났고 여동생도 생각났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 보고를 하여야하나? 아니면 더 찾아보고 보고를 하여야 하나?’
결정을 못했다.
보고를 늦게해도 당연히 문책이지만 잘 알아보지도 않고 보고를 해도
온 부대에 비상이 걸리는 등 소동을 벌이게 된다.
마음의 갈등이 심할 때 내무반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찾았다는 것이다.
예전에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모르겠으나
막사에서 멀리 떨어져 헛간 같은 곳이 하나 있었고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헛간같은 곳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고 관리도 되지 않았다.
상부에서도 관심 없었고 내 소대에서 관리해야 되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인계인수 현황 기록에도 없었고 전임 소대장의 언급도 없었다.
전임 소대가 떠나가고
주위 지형에 익숙해지자 자연스레 눈에 띄었다.
단지 내 소대 막사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관리를 해야한다면 내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병사를 보는 순간 스스로에게 다짐했고
그렇게 지키려 노력했던 ‘구타 금지’가 깨져버렸다.
내무반장이 탄창 끼워진 총을 병사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이
구타 도중에도 보였다.
구타 후 병사에게 말했다.
‘며칠 동안 잠을 거의 못 잔 것을 안다.
그 상태에서 보초를 서느라고 힘든 것도 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온 부대가 처한 상태로
소대장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정히 졸립다면 재워줄테니 내무반으로 들어가서 자고
그렇지 않고 보초를 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총을 들고 초소로 돌아가라.
어느 것도 괜찮으니 본인이 선택을 해라.’
구타 때와는 달리 조용히 얘기했다.
그 병사는 초소로 돌아가길 원했고 탄창 끼워진 총은 내무반장이 돌려주었다.
선택권을 준 것은 그 병사를 쉬게해 주고픈 생각과 함께
구타를 당한 후의 마음 상태도 알아보고자 하였다.
돌아나올 때 앙갚음으로 뒤에서 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곤 북으로 도망가면 그만이다.
실제로 대대장이 북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고 무전병까지 데리고 월북했다.
내가 철책 지키기 얼마 전 옆 부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 야간 사격
출렁다리 위에 오래 있으면 어지러웠다.
게다가 넘실거리는 강물을 계속 내려보고 있자면 멀미도 났다.
야간에 켜놓은 라이트중 일부는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꺼졌다가
한참 후 저절로 켜졌다를 반복했다.
비가 온 당일 날은 수량이 많지 않으나
익일부터는 흙탕물에 수심이 깊어진다.
적이 그 때를 노려 침투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긴장을 한다.
가축도 떠내려 오고, 초가 지붕도 떠내려 오고,
덤불더미에 통나무가 엉켜서 떠내려 오기도 한다.
물체가 가까이 올 때마다 사격을 가했다.
‘떠내려 오는 물체 밑에 붙어서 수중침투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주간에는 식별이 가능해 사격을 자제하지만
야간에는 물체의 식별이 어려워 사격을 자주했다.
계곡을 타고 울리는 여운 긴 총소리를 들으면 섬뜩했다.
특히 첫 총성이 울릴 때 그랬다.
야간 총성은 침투를 아예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전에 침투를 당했던 취약 지역이었기에
재차 침투를 당하지 말아야한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았다.
제대 후에 신문을 보니
무장 간첩이 민통선 뒤에서 사살되었는데
침투로가 내가 지켰던 임진강이었다.
‘해당 소대장은 어떠한 처벌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내가 처벌 받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3. 경계 지역 교체
연대장의 검열이 있는 날이다.
연대장 찦차의 전조등은 백색이 아니고 노란색이다.
전방에서는 찦차가 나타나면 긴장하는데 노란 전조등이면 더욱 긴장한다.
연대장이 온다고 하면 바짝 긴장 한다.
각 초소에서는 현재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향하고 있다고
시시각각 이동 사항을 알려준다.
막상 왔을 때보다 오기 전의 준비 사항들이 더 힘들다.
막사 주변의 환경 미화, 식당의 청소 상태, 병사의 복장 상태,
심지어 야간 근무자의 주간 취침 상태까지 확인하기 때문에
불침번이 일일이 깨워서 ‘모포를 똑바로 덮어라, 베개를 베고 자라,
삐뚜로 자지 마라.’ 등 사전 점검을 하여
연대장이 막상 들어 왔을 때는 자는 것이 아니라 자는 척을 한다.
연대장이 가고난 후에 편하게 잔다.
코를 고는 버릇이 있는 병사도 불침번이 깨워 놓는다.
연대장 찦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 했다.
연대장이 내리고 뒷자리서 대대장이 내렸다.
대대장 찦차는 무전병만이 탄채로 따라 왔다.
연대장이 대기하고 있던 중대장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보고가 중간에 막혔다.
연대장은 접의자에 앉은 채로 나에게 지시했다.
‘소대장이 보고해 봐.’
나는 전임 소대장에게 인계 받은 사항을 보고 했다.
보고중에 막힘이 없으면 되는 것이지
비무장 지대에 대전차 지뢰가 얼마나 묻혀있는 지 확인할 수 없고
대치하고 있는 적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전임 소대장이 인계한대로 외웠을 뿐이다.
연대장이 지휘봉으로 중대장의 배를 찌르면서 말했다.
‘거봐, 틀렸잖아 허위 보고잖아.’
연대장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 출신인가?’
‘ROTC 출신입니다.’
‘언제 제대하나?’
‘금년 6월 말입니다.’
6월 소리를 듣는 순간 연대장이 긴장하는 것처럼 나는 느꼈다.
6월이면 근무 기간이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연대장이 방문한 다음 날 수색소대와 경계 지역을 맞 바꾸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즉 수색소대가 맡았던 육지의 철책 지역을 내가 맡고
내가 경계했던 임진강과 주변 지역을 수색소대가 맡는 것이었다.
이로인해 철책에서의 인계인수를 또 한번 해야만 했다.
수색소대가 맡았던 철책의 길이는 내가 맡았던 지역보다 훨씬 짧았다.
각 부대에서 차출된 우수한 병사들로 구성된 수색소대에게
육지의 짧은 지역을 맡긴 것은 애초부터 잘못이었다.
내가 지킨 지역의 좌측은 사단이 다르고
우측은 타 부대에서 배속 받은 수색소대가 맡고 있었다.
나는 내가 속한 중대와 좌우 모두를 인접하지 못하고
나만이 홀로 떨어져 강을 포함하여 주변 지역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 것은 대대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중대장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경계가 힘든 지역 배치에 대한 불만이 중대장에게 돌아갈까 봐
미리 얘기해준 것이다.
대대에서는 나에게 강과 주변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간첩의 예상 침투로인데다가 경계 길이도 길어서 힘이 들었다.
타 소대가 맡은 철책의 길이는 짧았다.
교체하면서 양 소대간 구역 조정이 있었다.
수색소대는 강을 제외한 주변 지역이 줄어들었고
줄은 만큼을 내가 더 맡았다.
애초에 수색소대가 지켰던 지역보다는 늘어났지만
취약 지역인 강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스트레스는 줄었다.
이후 나는 강과 강 주변을 지키는 임무에서 벗어나
육지 철책을 지키게 되었다.
육지 철책을 맡은 후부터는 충분히 재울 수가 있었다.
4. 철책 앞이 안보여
야간에 철책 초소에서 소대 상황실로 연락이 왔다.
‘잘보이던 시야가 갑자기 1M 앞도 안보인다.’는 것이다.
초병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초소와 연결된 수화기를 들고 물었다.
‘앞이 안 보인다니 무슨 소리야?
다급하니까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또 물었다.
‘간첩이 철책 앞에 뭘 뿌렸나?’
‘그건 모르겠고 잘 보이던 시야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이 아프나?’
‘아픈 건 아닌데 안 보입니다.’
‘그럼 바로 전에는?’
‘바로 전에는 비무장지대가 어느 정도까지는 보였습니다.’
급히 몇 마디 주고 받고는 총을 들고 나갔다.
탄창 끼워진 총을 항상 옆에 두고 생활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총과 실탄만 있으면 든든하였다.
교육을 그렇게 받았었다.
초소에 도착했다.
비무장지대의 광경이 웬만큼은 보였다.
‘보이잖아?’
‘아까는 정말로 안 보였습니다.’
‘어떻게 안 보였나?’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잘보입니다.’
초병의 말대로 보이다가 안보이는 현상이 밤새 반복됐다.
동이 터오면서 원인을 알았다.
임진강에서 밤중에 농무가 피어오른 것이다.
강에서 피어 올라서 산등성을 따라 둥실 올라오는 것이었다.
수면 위 곳곳에서 피어올랐는데 그 농무가 사람을 둘러쌌을 때는
눈 앞의 광경이 갑자기 사라졌고 지나가면 다시 보였다.
지독히 농후한 안개 덩어리이기 때문에 점차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시야가 사라져버렸다.
이런 농무가 야간에 초소 앞을 지나갔으니
처음 겪어 본 초병들이 얼마나 놀랬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철책 곳곳에 ‘졸면 죽는다.’ 라는 문구가
해골 그림과 함께 걸려 있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곳인데.
전임 부대로부터 주의도 없었으며 상급 부대로부터
‘농무가 나타나는 계절이니 놀라지 마라.’는 전달도 없었다.
낮은 지대에 위치한 내 소대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높은 지대에서는 놀랐다는 말이 없었다.
5. 녹음 테잎 청취
철책에 근무하는 부대에도 비상이 걸린다.
비상이 걸리면 중대본부는 제일 높은 봉우리인 OP로 올라가고
나는 중대본부로 이동한다.
물론 병사들의 진지 위치도 바뀐다.
하루는 비상이 걸렸다.
중대장은 중대본부 요원들과 화기소대를 이끌고 OP로 이동했고
나는 중대본부로 이동을 했다.
비상이 걸리면 신속히 이동하여야하며 탄약 운반까지 완료되면
무전기를 통해 완료 되었다고 보고를 한다.
탄약은 BOX째 운반하는데 양이 상당히 많다.
히말라야 등정 때의 포터를 생각하면 된다.
메고, 들고, 이고 힘들게 올라간다.
완료 보고 후 비상 해제 시까지는 별다른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
철책 근무는 더욱 그렇다.
철책에서 경계 다음 상황은 교전인데 실탄까지 쏠수는 없는 것이다.
중대장 책상 위에 녹음기가 놓여있었다.
당시에 녹음기는 귀했다.
간부에게 지급되는 쿠폰을 모아 벼르어서 샀다.
당시의 유행가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 물레방아의 ‘순이생각’, 김태곤의 ‘망부석’등이었다.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었다.
들어보니 이상한 소리였다.
남녀가 관계중 내는 소리였다.
중대장 음성도 있었다.
상부에서 지시된 상황 변화는 없었고 계속 들었다.
외출 외박이 거의 없으니 중대장이 부부 관계를 녹음해 온 것이다.
규정상 선임하사 이상 간부들에게 한 달에 한 번은 외박을 내보내 주도록
되어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월급날에는 부인들이 남편의 얼굴도 못 본 채 철책 훨씬 뒤에 위치하고 있는
연대 경리과에서 월급만을 수령하여 갔다.
중대장은 철책 근무 1년 동안은 거의 부인을 못 볼 것이라는
굳은 각오를 하고 들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녹음 테잎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상 해제 연락이 왔다.
OP로 올라간 중대장은 화기소대와 함께 중대본부로 돌아오고
나는 다시 내 소대로 내려가면 된다.
본래 맡은 지역의 철책 경계 임무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돌아가기 전 녹음기의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걱정이 생겼다.
뒷면도 들었는데 어디서부터 들었는 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사실 뒷면은 계속 들으려고 뒤집은 것은 아니다.
음악이 듣고 싶었다.
녹음 테잎이라면 대개가 음악이고 일부가 영어였다.
원래대로 해 놓아야 되는데 어디가 처음인지를 몰랐다.
중대장은 왜 이런 테잎을 잘 간수헤 놓지 않고 녹음기에 꽂아 놓아서
남이 듣게 만드는가?
전에도 비상이 걸릴 때마다 내가 중대장실에 있었지만 녹음기에 테잎이 끼워져서 책상 위에 놓였던 적은 없었다.
소대장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무안할까?
나는 시간 계산을 하여 이쯤이라고 짐작되는 데서
‘되감기’를 멈추어 놓고 내려왔다.
그 후 내가 제대할 때까지 녹음 테잎에 관한 얘기는 서로 없었다.
듣지 말아야할 것을 듣게 되었지만 나는 중대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는 신혼에 30살의 씩씩한 대한민국 육군 대위였다.
6. 야간 폭발음 발생
하루는 야간에 조용하던 비무장지대 안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내 소대 앞은 아니었지만 내가 속한 중대 지역이었다.
이런 경우 경계병 모두는 긴장한다.
무전병을 데리고 중대본부로 올라갔다.
중대본부에서는 제논탐조등을 즉시 가동했다.
제논탐조등은 찦차 위에 대형 라이트가 설치되어 있는데
밝은 빛을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장비다.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필요한 곳을 비출 수 있다.
탐조등 옆에는 중대장과 화기소대장 그리고 내가 있었다.
비추고자 하는 지점을 지시하고자 옆에 있었지만 상당히 위험하였다.
적의 쪽에서 보면 불빛은 야간 사격의 타킷이 된다.
그날 상부에는 좌표만 불러주면 즉시 포 사격의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탐조등으로 비추어 봤지만 덤불이 우거지고 갈대가 무성하거나 잡목이 있고
이상 징후는 관찰되지 않았다.
더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탐조등 마저 연기를 내고는 더 이상 작동 되지 않았다.
중대장은 ‘이상 징후 발견 못했고 짐승이 지뢰를 밟았을 거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
실제로 ‘발목 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린 노루가 철책 앞에서 구슬피 울기도 한다.
7. 지뢰 지대로의 도망
하루는 야간에 막사 뒤 ‘지뢰지대’ 안으로 누군가가 쏜살같이 뛰어들어 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들어 간 다음에는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간첩 말고는 누가 ‘지뢰지대’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단 말인가?
M16을 장전 한 상태에서 크게 소리쳤다.
‘누군가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대로 갈긴다.’
당시 군에서는 연발로 사격한다는 소리를 줄여서 ‘갈긴다’고 하였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중대본부의 행정병이 급하게 내려왔다.
1소대 내무반장이 중대본부에서 중대장에게 맞다가 도망을 갔는데
아마도 이 곳으로 숨어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행정병이 말한 내용은 이랬다.
내 소대 소속의 내무반장이 야간 순찰을 돌고는 중대본부에 들렸다.
중대장이 내무반장한테 바둑을 두자고 했다.
바둑을 두던 도중 세가 불리하게 된 중대장이 한수 무르자고 했다.
내무반장은 받아주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다 화가 난 중대장이 바둑판을 엎고는 내무반장을 패기 시작했다.
괴퍅한 성미의 중대장을 잘 알고 있는 내무반장은 맞아서 반 죽음이 되느니
차라리 도망을 갔다.
비상도로로 뛰자니 잡힐 것 같고 아예 ‘지뢰지대’로 들어가 버렸다.
못 쫓아올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관목과 갈대가 우거지고 ‘지뢰지대’라는 표시가 되어있어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내무반장이 ‘지뢰지대’로 들어간 직후 중대장은 돌아가버렸다.
소리쳤다.
‘더 이상의 상황은 없을테니 나와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 후에 내무반장이 ‘지뢰지대’에서 나왔는데
들어간 곳이 아닌 훨씬 아래 쪽에서 나왔다.
중대본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 후 나는 소대원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 누구도 중대장과 바둑 두지 마라.’
8. 물 확보의 어려움
철책에서의 취사나 물은 소대 단위로 해결하는데
내가 맡은 1소대의 경우는 막사 뒤의 낮은 골에 수원이 있었다.
취사장은 물을 얻기 쉬운 곳에 위치한다.
내 소대가 있던 자리는 그래도 낮은 지역이라서 취사나 세면할 물이 있었다.
3소대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3소대의 막사 뒤는 산등성이고 골이 없었다.
철책 뒤에 골이 없으니 물은 철책 안 비무장지대의 낮은 곳에 샘을 파고
펌프로 끓어 올렸다.
물이 안나오면 철책문울 열고 들어가 펌프를 손봤다.
가뭄 시에는 모자라 취사용으로만 사용하고 세면은 못한다.
하루는 3소대 분대장이 야간 순찰을 돌다가 내 소대까지 왔다.
분대장은 세면장에 받아놓은 물을 보더니 기뻐 소리쳤다.
자기 소대는 물이 없어 여러 날째 세면을 못 했다는 것이다.
얼굴과 손이 까맣고 반질반질하였다.
얼굴과 발을 씼더니만
허리에 차고있던 수통에 물도 가득 채워 돌아갔다.
수통 물 하나면 양치, 발은 물론 머리까지 감는다고 했다.
3소대와 같은 지역에 있는 ‘미군 관측소’는 목욕물까지도
헬기로 공수해 준다고 하였다.
부자 나라는 달랐다.
양말도 계속 신어 풀을 먹인 것처럼 뻣뻣하다.
무좀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잠잘 때는 냄새가 심하다.
9. 취사용 기름 운반.
내가 있던 철책 지역은 경사가 심했다.
비나 눈이 온 후는 낡은 유류 운반 트럭이 올라오지 못하고
낮은 지역 평지에다 취사용 기름을 내려놓고 간다.
연락을 받으면 병사 여러명이 내려가 200L 유류통을 굴려가지고 올라오는데
쉴 때는 드럼통 밑에 돌을 밭쳐 놓고 쉰다.
기껏 올려놓은 통이 굴러내려가면 헛수고다.
통이 어딘가에 부딪쳐 터져버리면 밥은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다룬다.
내 소대보다 훨씬 위에 위치하고 있던 소대는 아침부터 유류통을 굴려 올라가면
점심 때나 끝이 났고 병사들은 땀 범벅이 됐다.
항상 총을 소지해야 되기 때문에 총을 등에 메고 굴려 올라가는데
허리를 굽힐 때마다 방아쇠 뭉치가 등을 찔러 힘들어 한다.
10. 비올 때의 야간 순찰
비가 올 때는 교통호를 따라서 물이 흘러 내려간다.
교통호가 배수로 역할도 한다.
바닥에 물이 흐르니 순찰 돌기가 어렵다.
거기다가 진흙이 워커에 달라붙어 발이 무겁다.
흙 속에 빠진 발이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한번은 순찰 돌다가 미끄러져 자빠졌다.
철모는 흐르는 물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한참을 가서 주워왔는데
막사에 돌아와서 보니
젖은 군복은 물론 총까지 흙 범벅이 됐다.
11. 촛불 밑에서 일지 기록
전방에도 전기가 들어 온다.
하지만 자주 나간다.
특히 비오는 날에 전구가 흐려지기 시작하면 곧 정전 되는 줄 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에 전기까지 나가면 철책 주위는 암흑이다
철책에서도 감시가 용이하게 전등을 켜놓는다.
하지만 지휘관에 따라서는 전등을 못켜게 하기도 한다.
침투 간첩을 잡아야 하는데 환하면 안 온다는 것이다.
소대장실 내 책상 위에는 초가 양쪽으로 세워져 있다.
전기가 나갈 때는 촛불을 켠다.
순찰 일지도 촛불 밑에서 쓴다.
초를 켜놓으면 분위기는 좋다.
12. 벙커 내부의 눅눅함
지하 벙커인 막사 내부는 항상 눅눅하다.
우기에는 더 심하다.
출입문이 막사의 양쪽에 2개가 있으나 취침하는 병사를 위해 거의 닫아 놓는다.
빛이 들어오면 잠을 못잔다.
한쪽 출입문 옆에 위치하고 있는 소대장실에는
다리가 많은 벌레가 벽을 타고 기어다닌다.
잡아도 너무 많아 나중에는 그냥 두었다.
외출시 입으려고 걸어놓은 군복도 항상 눅눅하다.
하루는 걸어두었던 군복을 입고 외출했는데
나에게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했다.
13. 내무반 안에서의 총성
경계 근무가 끝나면 탄창과 수류탄은 반납 받아 탄약고에 보관한다.
어깨 위에 총을 하고 격발하여 총에 실탄이 장전되지 않았음도 확인한다.
격발 확인은 소대장이 하는 경우도 있고 선임하사 또는
내무반장이 하는 경우도 있다.
확인이 끝난 후는 총을 내무반 한쪽에 위치하고 있는
총기대에 거치 시켜 놓는다.
그래도 미심쩍어 거치된 총의 격발기를 차례로 당겨 본다.
하루는 낮에 내무반 안에서 총성이 울렸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취침하던 병사들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나도 소대장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내무반장이 거치된 총을 차례로 격발 확인하던 중
누군가의 총에서 총알이 발사된 것이다.
총알은 천정에 맞고 다른 곳으로 꺽였지만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다.
천장에 총탄 자국이 선명히 남았고
바닥에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물었다.
‘누구의 총에서 발사 됐나?’
내무반장이 머뭇 대답했다.
‘제 총입니다.’
어깨 위에 총을 하고 격발 확인시
교대자들 총만 확인하고 정작 본인의 총은 안한 것이다.
총기를 수입하려다 장전된 총알이 옆 동료의 몸을 관통했다는 얘기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봤다.
딱 한마디만을 했다.
‘조심해라.’
14. 강물 목욕
따뜻한 날에는 병사들을 데리고 강으로 간다.
임진강 물은 맑고 깨끗하다.
맑은 날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평온해질 수가 없다.
물살도 잔잔하다.
강에 도착하여 내무반장이 ‘목욕 준비 끝’이라는 보고를 하면
경례를 받음과 동시에 ‘실시’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무반장이 돌아서서 소대원들에게 ‘실시’라는 구호를 외치면
전 소대원들은 옷을 벗고 강물로 뛰어든다.
가슴 이상은 못 들어가게 한다.
사람들은 대개 물을 좋아한다.
처음엔 목욕보다 수영을 하는등 첨벙 첨벙 물을 튀기면서 난리가 난다.
젊은 청년들 몇 십명이 시커먼 것을 덜렁거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가관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분대장 4명과 소대장은 탄창 끼워진 총을 들고
사주경계를 선다.
분대장들은 나중에 목욕 기회를 따로 준다.
목욕 후는 따뜻한 햇살에 물기를 말린다.
산들 바람까지 불어오면 더욱 잘 마른다.
발바닥에 묻은 모래를 털고 막사로 돌아오는 병사들의 표정은 즐거워 보인다.
목욕 후 찡그리는 사람은 없다.
15. 예쁜 여자 인형
철책에서는 여자를 볼 수가 없다.
매일 동일 색 군복 입은 군인만 본다.
하루는 철책을 따라 이웃 중대의 후배 소대장을 찾아갔다.
후배 소대장실에서 인형을 봤다.
유리 상자 안에 예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었는데
머리 위에는 면사포같은 천이 씌워져 있었다.
성당에서 여자분들이 머리에 쓰는 것과 비슷했다.
비록 인형이지만 가슴이 설레였다.
참으로 예쁘게 느껴졌다.
‘아! 저 인형이 사람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동화 속 내용같은 상상도 해보았다.
철책에서는 드럼통에 묶인 천조각만 펄럭여도 가슴이 뛴다는 말이있다.
16. 꽁초 주워 피움
철책 근무에 들어간 직후부터 이틀에 한 갑씩 나오던 ‘화랑담배’가 지급되지 않고 돈으로 지급된 적이 있었다.
담배를 안 피우는 병사들에게는 사탕이 지급되었는데
그 것도 공평치 못하다는 불평에 모두 돈으로 지급되었다.
돈으로 사서 피우라는 것이었는데 철책에서는 살 곳이 없었다.
담배가 지급되지 않자 병사들에게 진귀한 현상이 벌어졌다.
모두 막사 주위 땅바닥만을 쳐다보고 다니다가
전임부대에서 누군가가 버린 꽁초를 하나라도 발견하면
환호성을 울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막사 주위에 있던 꽁초는 씨가 말랐다.
화장실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누렇게 진이 밴 꽁초를 찾느라 혈안이었다.
불 부치고 몇 모금 빨면 손이 뜨거워 더는 못 피워도 좋았다.
꽁초 몇 개를 모아서 반 개비를 만들어 피우는 소대원도 있었다.
지금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 때는 나도 똑같이 주워 피웠다.
부랑아나 거지가 따로 없었다.
17. 철책에서 막걸리 회식
철책 근무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힌 후부터는
‘이동PX’가 주기적으로 다니기 시작하였다.
군용 트럭의 짐칸에 선반을 만들고 물건들을 싣고 다녔다.
겉 모양은 냉동차와 비슷했다.
물론 운전도 군인이 했다.
노란 색깔의 차가 지붕에 스피커를 달고 ‘엘리제를 위하여’ 라는 음악을 틀면서 비상도로를 따라 각 소대에 들렸다.
음악 소리가 들리면 병사들은 마음이 들뜬다.
‘이동PX’가 오는 날이면 내무반장은 구입 품목들을 미리 신청받았다.
담배, 과자, 건전지 등이 주 구입 품목이었다.
포도주도 있었는데 소대원들이 선호했던 술은 막걸리였다.
‘이동PX’의 주인격인 중사는 싣고 다니는 물품들은 모두 팔아도
술만은 소대장의 싸인이 없으면 팔지를 않았다.
소대장의 책임하에 술을 먹이라는 부대의 방침에 따르는 것인데
내무반장은 ‘막걸리를 최소 몇 말은 사야지만 1인당 2잔씩 돌아간다.’고 우기고
나는 ‘1잔 반씩만 먹으면 되지 2잔씩은 과하다.’고 내무반장을 설득하곤 했다.
설득 후에는 막걸리의 양을 수정해서 사인해 주는데
막걸리를 큰 통에 옮겨 받을 때는 먹을 생각에 항상 싱글벙글하였다.
음악 소리가 울린지 한참 지나도 PX차가 도착 안하면 소대원들은 초조해 한다.
이런 경우는 타소대에 연락을 하여
‘차를 오래 잡아두지 말고 빨리 내려보내라.’고 재촉하는데
막걸리가 일찍 떨어질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이다.
별다른 구경 거리가 없는 철책에서는
차 안에 실린 물품들을 쳐다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잠을 안 자는 소대원들은 거의 나와서 목을 빼고 들여다 보았다.
구입한 막걸리의 양을 타소대와 비교해 보기도 한다.
‘타소대는 더 많이 구입했다.’고 내게도 들리게 말해서
심적 부담을 주기도 한다.
저녁 식사 때는 상황병과 초소 근무병을 제외하고는
전 소대원이 식당에 모이게 된다.
내무반장이 ‘회식 준비 끝’이라는 보고를 하면
소대장이 ‘실시’라는 명령을 하고 내무반장이 복창을 한다.
돌아서서 ‘실시’라고 명령을 내리면 식당에 모인 전원이 우렁찬 복창과 함께
대접에 미리 따라 놓았던 막걸리를 거의 동시에 들고 마시는데
회식은 언제나 즐겁다.
1대접을 먹고 또 반대접을 먹으면 철책에서의 회식은 바로 끝난다.
과자가 안주다.
18. 식사 거름의 반복
초저녁에 인원의 절반이 근무에 투입되고 나머지는 취침에 들어간다.
새벽 2시에 교대를 하는데 투입하는 병사나 철수하는 병사 모두에게
라면을 끓여준다.
나는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 심야 라면은 속을 버린다.
내 경우 밤새 순찰을 돌고 먼동이 튼 후에는 잠이 든다.
점심 먹을 때쯤 일어나 보면 언제 갖다 놓았는지
군대 식판에 전우신문 한 장 덮인 식사가
소대장 책상 위에서 싸늘히 식어 있다.
아침밥을 손도 못대고 잔 것이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잠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속이 더부룩하여 점심밥은 거른다.
식사 거름의 반복으로 인해 제대 후 직장 생활 할 때도
설사를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약으로 다스렸다.
소대원들도 야식 라면으로 인해 속을 많이 버렸다.
19. 제대 전 취직 걱정
제대를 앞두고는 취직이 걱정되었다.
후방에 있는 동기들은 취직이 되었다고 소식이 들렸다.
나는 언제 입사원서를 내보나?
외출 외박을 나갈수 없으니 증명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도 발급 받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사회생활을 시작할텐데
취직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였다.
20. 불 태운 신상명세서 두권
후임 소대장이 왔다.
합동근무를 하는 동안에 후임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대원들의 ‘신상명세서’도 넘겨 주었다.
나에게는 ‘신상명세서’가 3권 있었다.
한 권은 어느 소대에나 작성하여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신상명세서’이다.
즉 나이, 고향, 출신학교, 가족관계, 병력등이 기재되어있는 것이고
다른 두 권은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비밀스런 ‘신상명세서’였다.
폭음을 하는 병사 또는 행패를 부리는 병사와 면담 때 나눈 얘기를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제대를 한 병사들의 기록은 차례로 없애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꺼운 책으로 두권이나 되었다.
‘신상명세서’가 두 권 더 있다는 것까지는 후임 소대장에게 말해 주었지만
보여주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만의 하나 ‘걱정이 되어 주의 깊게 관찰한 병사’가 후임 소대장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 병사’일 지도 모른다.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시골에서 같은 마을 여동창과의 성경험까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군대 오기 하루 전 날 밤
‘불알친구에게 이끌려 사창가에 가서 동정을 버렸다.’는
얘기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날짜와 고향 친구의 이름, 사창가 위치까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얘기는 상하간에는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되며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아주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술 먹고 부하를 괴롭히거나 유난히 반항적인 소대원을 대상으로
모두가 잠든 사이에 불러서
편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파악하였다.
면담은 내게 주번사관이 돌아왔을 때를 주로 활용했으며
병사와 많은 대화를 나눈 소대장에 속하였다.
두 권의 ‘신상명세서’를 재래식 화장실 속에 버릴까 하다가
나중이라도 일부는 누군가에게 읽힐 수도 있으며
또한 취사병에게 태우라고 하려다가 그것도 읽힐까 봐 염려가 되어
제대 하루 전 날 일일이 손으로 찢어가면서 태웠다.
철책에서 불씨가 주위로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신상 파악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던 것은
타 소대장보다 지휘를 잘하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만의 하나 부하가 큰 사고를 일으켰을 경우에 대한 대비도 염두에 두었다.
사고는 발생했지만 소대장은 그 병사에 대해
평소 상당한 수준의 신상 파악까지 했으며
부득이 사고는 막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이기도 했다.
21. 자살 사고 발생
후배가 이끄는 옆 소대에서 소대원의 무장탈영이 있었다.
노력하는 소대장이었지만 조사를 받은 후부터는 의욕이 꺾였다.
부모의 부대 방문이 있은 후 사단 연락 장교로 전출을 갔다.
소대장이 바뀐 후에 사고가 또 발생했다.
병사가 자살을 했다.
동일 소대에서 사고가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나중에 조사된 바로는 철책 소대 병사를 수송부로 전출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고 그 병사는 수송부 고참들에게 첫 날부터 심하게 군기를 잡혔다.
겁이 난 병사는 말도 없이 먼저 근무했던 철책 소대로 돌아와 버렸다.
수송부에서는 병사가 사라지자 소동을 벌인 후에
인솔자가 와서 다시 데려갔는데 연대 연병장까지 따라가서는
그만 숨겨둔 실탄으로 자살하였다.
수송부보다 소대장이 조사를 많이 받았다.
자살할 때 쓰인 실탄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뀐 소대장도 지휘를 제대로 못하였다.
사고가 발생한 소대 내무반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흉가에 들어온 것 같았다.
병사들은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고
위계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소대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게디가 소대장이 수시로 불려다녔는데 무슨 지휘가 되었겠는가?
22. 소대원들과의 재회
제대 후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중 맹장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계속 누워있기도 갑갑하여 수술 이틀 후 퇴원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차 뒷자리에 드러누워서 왔다.
그 때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철책 근무를 끝내고 FEBA 지역에 있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가랴 싶어 아픈데도 불구하고 찾아 갔다.
너무 늦으면 소대원들도 거의 제대를 하여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반가웠지만 소대원들도 반가워하였다.
모르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제대한 후에 전입 온 병사들이었고
그 외는 철책에서 같이 생활했던 병사들이었다.
제대 후 사회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관의 훈시를 듣는 병사들이 부동자세에서 미동도 없는 것같아
신기해 보였다.
회사에서도 조회가 있지만 군인들 만큼의 부동자세는 아니었다.
군에 있었을 시는 눈에 익었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신기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고참병이 ‘회식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나를 위해 마련한 회식같아 거절하기가 어려웠지만
기침만 하여도 배가 당길 때라 함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관의 명령에 거의 복종하는 군인들이라 더는 권유를 못했지만
서운했을 것이다.
그 후 병가를 끝내고 회사 근무로 돌아왔어도 소대의 소식은 듣고 있었다.
그 중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철책 근무시 야간에 초소를 비우고 사라져서
나와 내무반장을 애타게 했던 병사가 죽었다는 것이다.
고참병의 지적에 항의하다가
내무반에서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한 번 맞았는데
‘아-’ 하는 짧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쓰러졌고
그 자리서 죽었다는 것이다.
때린 병사는 ‘남한산성’을 갔다고 했다.
내가 FEBA 지역 면회 갔을 때 회식을 마련해 주었던 병사였다.
반가워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참석 못하고 돌아설 때의
서운해 하던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죽은 병사나 영창을 간 병사를 생각할 때 모두 가슴이 아팠다.
그들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둘도 없이 소중한 자식들이지 않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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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다시 올립니다. 댓글 달아주신 이성근검우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대대장과 함께 월북한 무전병은 전북대 법대 동기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시기적으로 맞을 겁니다.
생생한 철책소대의 이야기를 들은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랫만에 저도 부대근무 추억을 아로이 새겨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전이나 저희때나 비슷한것도 있고 진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던 글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