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 이해-45. 질문자들(enquirers)
이런 도전적인 분위기에서 그들 가운데 한 그룹은 18세에 이미 ‘더 인콰이어러’(The Enquirer)라고 불리는
진보적 잡지의 편집인이자 브라만인 크리슈나 모훈 바네르지(Krishna Nohun Banerjee) 가족의 집에 모여
소고기의 맛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 후 남은 고깃덩어리를 소고기라고 외치며 이웃 주택단지의 담 위로 던졌다.
이것은 정통파 힌두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그의 집은 어떤 사과로도 진정시킬 수 없는 성난 브라만 군중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가족들과 카스트로부터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를 정통 힌두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게 할 수 없었던 가족은 그를 추방해야 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그날 밤 집을 떠나 적대적인 군중으로부터의 위험을 피해야 했다.
바네르지와 그의 친구들은 광야에 있던 중에 여전히 정통 힌두 관념들에 대해 도발적이었고
자신들의 공격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의 사명은 힌두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더프는 그들을 찾아가 호의를 베풀고 유익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단순히 파괴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개혁가들에게 일부 적극적인 원칙들이 필요하고, 자신을 질문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원칙들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더프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만나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질문을 토론하기로 동의했다.
더프는 수개월에 걸쳐 40-60여명 정도의 그룹에 기독교의 증거들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강의마다 뜨거운 토론들이 이어졌다.
1832년 8월에서 1883년 4월 사이에 그들 중 4명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그 첫 번째 사람은 모헤쉬 춘더 고세(Mohesh Chunder Ghose)였다.
크리슈나 모훈 바네르지가 스스로 그의 뒤를 따라 세례를 받았다.
그는 존경받는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이자 뱅갈에서 가장 유명한 공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교의 목사가 되었던 고삐나트 난디(Gopinath Nandi)가 세례를 받았다.
이 모든 사람은 힌두대학의 학생들이었다.
네번째는 더프 학교 출신 젊은이 아눈도 춘더 모줌다르(Anundo Chunder Mozoomdar)였다.
교육을 받은 상층 카스트 젊은이 네 명의 개종은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다.
이는 기독교가 단지 무지한 자들과 최하층 카스트, 멸시받는 이들의 피난처만은 아니며,
영국식 교육의 결실이었던 세속주의에 대한 진지한 대안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늘어가는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들 사이에서 당면한 시급한 문제가 되었으며 생생한 토론이
말과 인쇄 매체 모두에서 진행되었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세례를 받게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각 주 주요 도시의 대학들마다 공공 교육부서들이 설립되어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보조금이 없는 기독교학교는 중등교육을 수행했고 자신의 정책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었다.
1832년 봄베이에서 교육에 관심을 가진 평신도 그룹의 지원으로 윌슨고등학교가 시작되었다.
마스라스에서는 존 앤드슨이 1837년에 마드라스 기독교대학과 그 부속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낙뿌르에서는 1844년에 스티븐 히슬롭에 의해 시작된 노블대학이 있었다.
마술리빠탐과 아그라의 성 요한대학이 이 기간에 설립되어 성장했다.
그 후에 많은 다른 학교 및 대학들이 뒤를 따랐다.
새로운 종류의 교육을 기독교적 가르침과 결합한 초기 영국학교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때때로 세례 받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 세례마다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시릴 퍼스의 <인도교회사>에서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