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국물 부드러운 면발, 어머니의 추억이 새록새록
일 잘하는 사람은 먹는 것도 밝힌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사들은 자주가는 맛집 두어개 이상은 단골로 확보하고 있다. 이들 명사가 직접 소개하는 단골집의 맛, 그 내력과 맛에 얽힌 에피소드를 직접 들어본다. 편집자
멍석 위에 부모형제, 사촌형제들과 빙 둘러앉아 막 버무린 김치를 반찬삼아 훌훌 불어가며 먹던 1960년대 칼국수의 맛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여름이면 멍석 근처에 모기불 듬성듬성 피우고 바가지에 가득 담은 칼국수에, 살짝 데친 애호박 듬뿍 얹어 먹던 칼국수의 담백함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요즘 칼국수는 별식이지만 어린 시절 칼국수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식구가 많았던 우리집은 풍족하지 못한 살림 탓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국수를 단골메뉴로 이용했다. 보리고개 시점부터 가을까지 어머니의 손은 대가족의 고픈 배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늘 바빴다. 길고 두툼한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축구장처럼 넓게 밀어 이를 차곡차곡 접어 단 한치의 차이도 없이 “싹, 싹” 썰어 칼국수 면발을 만들던 솜씨는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막내 아들이던 내 바가지에는 간혹 국수보다 국물이 많았던 적이 있다. 이때마다 나는 투정을 부렸고 어머니는 나의 투정에 가슴 아파하셨다. 철없던 막내의 투정은 부엌에서 국물도 동나 드실 것이 없던 어머니가 그나마 가마솥에 붙어 있던 국수 가락에 뜨거운 물을 부어 헹구어 드시던 모습을 우연히 본 뒤 끝이 났다.
세월이 흘러 서울로 이사온 후 혹 먼길이라도 다녀오면 “막내 아범아, 좋아하는 칼국수 해주련” 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머니는 오래전 철없는 막내 아들을 멀리하고 세상을 등지셨다.
요즘 나는 격의없는 친구나 선배, 후배들과 점심약속을 종종 칼국수로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님을 대접하실 때 바삐 홍두깨를 밀어 국수를 만드시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칼국수를 유난히 좋아하는 입맛 덕에 전국적으로 이름난 칼국수집은 대충은 다 다녀봤다. 방송 중계 때문에 지방에 가면,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이 근처 칼국수 잘 하는 집 어딘가요” 하고 묻곤 한다.
서울에서 내가 자주 가는 단골집은 연희동 손칼국수집이다. 연희동 사러가쇼핑센터 근처에 있는 이 집을 다닌 지는 4년 정도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칼국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집인 성북동 칼국수집을 애용했었다.
연희동 손칼국수집이 단골이 된 이유는 밤새 우려낸 사골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 영양이 충분하고, 국수 위에 뿌려주는 맛깔스런 계란 지단과 부드러운 수육 때문이다. 한잔의 소주 안주로 선택한 수육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계란 지단은 어린 시절 소중한 손님이 오실 때나 구경할 수 있었던 달걀 부침을 얇게 썰어 멋을 내던 귀한 음식이었다. 물론 손님그릇에나 올라갔지만….
연희동 단골집에서 호기를 부리며 수육, 칼국수 곱배기를 시키는 내 모습 뒤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손길, 고향의 정취, 가난 등이 함께 한다. 그래도 손님을 내 단골집으로 초대해 대접한 식사가 한번도 실패한 적은 없었다. 모두 “육수로 우려낸 국물이 구수하다” “면발이 부드럽다” 혹은 “얼갈이 백김치와 겉절이김치가 정갈하다”고 칭찬을 하면 마치 어머니가 대접한 칼국수로 착각해 우쭐해지곤 한다.
점심식사 때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지만, 넓은 주차장에서 친절한 주차서비스를 받는 것도 연희동 손칼국수집을 찾는 즐거움 중 하나다. 신문선/축구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