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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다녀온 백두산 기행문입니다>
이 산을 아십니까
(백두산)
이 산을 아십니까
신비 서린 장대한 산
한 치 흩어짐도
한 점 경박함도 없는
태고의 침묵을 먹음은 채
그저 묵묵히 눌러앉은
슬픔도 아픔도 즐거움도 노여움도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모두
그 너른 가슴에 안고 있는
널리 이롭게 할 배달의 얼이
예서 비롯된
민족의 영산 백두를
거기 가보고 싶었다
가장 높고 웅장한 우리민족의 영산, 동해물과 함께 목이 마르고 닳도록 불러온 이름 백두산, 거기 가보고 싶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회령도호부)에 부의 서쪽 7~8일이 걸리는 거리,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1천리에 뻗쳐있는 산, 그 꼭대기에 둘레 80리의 못이 있는데 남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속평강, 동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라 일렀다.
일찍이 조선후기(영조40년) 박종(朴琮)이 길이 험하고 멀 뿐 아니라 승냥이 호랑이 소굴도 있어 하잘것없는 선비로서는 감히 가볼 곳이 못 된다는 백두산에 행장도 준비되지 않고 아이가 병을 앓고 있어 모두가 만류하는데, 집안 근심이 없어지고 여장을 갖추려면 평생을 기다려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어 결단을 내려 경성군수 신상권(申尙權)을 따라 나섰다던 그 심경을 헤아림직 하다.
멀고 먼 백두산 길이 중국을 통해 열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갔지만 나는 우리 땅을 밟으며 오를 날이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꿈을 안고 그 숱한 날들을 기다려 왔다.
그러던 중 뚫렸던 금강산 길마저 막히고, 어쩌면 4~5년 내에 화산이 폭발할 낌새가 높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백두산에 오르려면 지금이 적기인 것 같다”는 아내의 추임새에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가끔 호젓한 산길을 같이 밟아온 벗(최세양 동인)과 함께 나섰다.
거인의 위엄
박종 일행이 1764년(조선영조 40년)음력 5월14일, 말을 몰고 출발하여 백두산을 12번이나 오른 전통성(全通成)의 안내를 받으며 왕복 1.322리 걸어 6월1일 돌아오기까지 열여드레가 걸렸다던 멀고 험한 길을, 우리는 중국 남방항공 쌍발기를 타고 2시간 25분 만에 이역 땅 연길(延吉:옌지)에 도착하여 1년이면 30번 이상을 오른다는 눈빛이 번득이는 늘씬한 몸매의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중국에서의 첫날밤은 일생 처음 백두산에 오른다는 들뜬 마음에서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2010년 6월 30일, 어쩌면 박종 선비가 올랐던 그 무렵일는지도 모른다.
07;30 백두산 등정의 길에 올랐다.
서울에선 800미터 대의 산인 북한 도봉이 그리도 우람해 보이더니 여기선 고도 1천 미터 대에 이르는 길인데도 전연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나 광활한 면적 때문인 듯하다.
1천 미터에서 2천 미터에 이르는 구간 역시 그냥 평평한 고원지대이다.
다만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빽빽한 원생림, 그 가운데 새하얀 살갗의 자작나무가 두드러지고, 용틀임을 한 노송이 아니라 하늘 높이 쭉 뻗어 올라 여인의 피부색을 닮아간다는 미인송(美人松)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그 속을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멧새, 눈에 뵈지 않아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산짐승 등 태고의 숨결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 뿐이다.
西坡(서파)란 서쪽언덕이란 뜻을 지닌 한자로 중국식 발음은 “씨퍼”인데 모든 표지판이 다 한국식 발음, 한글로 같이 쓰여 있는데 조선족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찾아오는 손님이 주로 한국인이어서 일까.
<백두산 서파, 1236개 돌계단을 올라가면 천지가 굽어보인다>
우리는 서파 산문에서부터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 주차장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운무에 가린 언덕이 아스라이 올려다 보인다. 가파른 1.236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천지가 내려다보인다는데 변화무쌍한 백두산의 날씨는 3대가 적선을 한 사람이 아니면 선뜻 얼굴을 내어놓지 않는다는 안내다.
건장해 뵈는 사람들이 계단 곳곳에 대나무 가마를 놓고 타고가라 호리는데, 옛날 종성 군수 조공(趙公)이 교자를 타고 절정까지 올랐다더니 그 전통이 이어짐인가 타고 오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돌계단 양 옆으로 앙증스런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군락을 이룬 야생화>
드디어 서쪽 언덕에 올라서니 구름 덮인 천지가 내려다보인다. 원래 용왕담(龍王潭)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턴가 천지(天池)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데 정말 하늘 못이 있다한들 이리 아름다울까.
바로 이 언덕에 중국과 조선을 가르는 5호 경계비가 서있고, 멀리 북동쪽 천문(天文)봉 기슭에 6호 경계비가 서있어 남서에서 북동으로 잇는 빗금이 국경선으로 말하자면 북서쪽이 중국의 장백산(長白山:창빠이싼)이요, 남동쪽은 북한의 백두산(白頭山)인 셈이다.
<백두산 천지, 멀리 천문봉이 바라다 보인다>
1712년 청나라 강희(康熙)황제가 목극등(穆克登) 등 신하를 보내 백두산의 경계를 확정토록 했다.
이때(숙종37년) 조선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의 천지를 반으로 나누어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건의에 따라 접반사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가 청나라 관리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정했다(산문기행 심경호 지음)던 그 선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있다.
조선 초기 20대의 남이(南怡)장군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뒤 장검을 빼어들고 올랐다는데 그때 만일 이 경계비가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하였을까?
천지속의 용왕이 요동을 치듯 구름이 크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파란 천지가 정겨운 얼굴을 내민다.
일찍이 지도를 그리기 위해 열일곱 번이나 백두산에 올랐다던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선생이 뗏목을 타고 들어가 실에 돌을 딸아 깊이를 쟀으되 최고수심이 1천30척이요, 낮은 데는 6~7백 척이라 하였으나(소설 대동여지도 정소성 지음),
<백두산 천지에서>
현장에 세워진 「長白山天池」란 현판에는 수면높이 2.189.1m, 남북길이 4.4km, 동서폭 3.73km, 수면둘레 13.17km, 가장 깊은 곳 373m, 평균수심 204m라 적혀있는데 아무래도 현대 장비를 동원한 측정이 정확하지 않으랴만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려는 우리조상들의 얼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5분이 체 못되어 구름은 다시 끼기 시작한다. 서둘러 주차장에 내려왔을 땐 언덕위엔 먹구름이 드리우고 빗방울이 내리더니 얼마 되지 않아 뜨거운 해가 또 솟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백두산의 이 날씨가 필부의 경박한 성격이라기보다 거인의 위엄처럼 느껴지는 건 어인 까닭일까.
백두 상상봉
우리가 머문 호텔은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진에 있는 장백산호림대하(長白山虎林大厦:창빠이싼후린따사)인데 북파산문에서 2킬로 떨어진 해발고도 1.100미터 지점이다.
저녁시간이 되자 가슴에 인공기 배지를 단 한복차림의 아가씨들이 나와 바라지를 하는데 삶은 달걀을 접시위에 구르지 않게 콕 찍어놓는다. 친구가 “콜럼부스 달걀이네” 하니 쌩긋 웃었다. 뒤따르던 내가 콜럼부스를 아는가 물었더니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 옆에 100위안이란 정가가 붙은 조화꽃다발이 놓여있었으나 사는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새벽 호텔 뒤 백두산자락 천고의 밀림위로 떠오르는 맑은 태양을 보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태양을 보며 사는 이곳 사람들, 그러나 그 표정은 그리 밝아 뵈지 않았다.
<원생밀림에서 솟아오르는 태양>
오늘은 북쪽 언덕을 오르는 날이다.
북파산문에서 표를 끊어 구내버스로 바꿔 타고 협곡 깊숙이 들어가는데 안개에 싸인 거대한 암봉들이 하늘을 가로 막는다. 바람 따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모습만으로도 거기가 산마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없이 모여드는 인파, 지루한 기다림 끝에 6인승 지프차에 오르자마자 그 가파르고 넓지 않은 산길을 쏜살같이 달려 올라간다.
수년을 매일 같이 수십 번씩 오르내리는 운전기사들의 숙달된 기술을 내 어찌 짐작하지 못하랴만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내 가슴에 철석철석 부딛치는 이름모를 여인의 감촉보다 여기 아주 묻히는 게 아닌가하는 공포로 간담이 얼어붙었다.
캄캄한 구름을 뚫고 오르던 지프차가 기상관측소 앞에 멎었을 때 구름도 걷히기 시작했다.
<천문봉에 운집한 인파>
바로 눈앞에 2.670미터의 천문봉(天文峰:탠원펑)이 언덕처럼 바라다 보이는데 능선을 기어오르는 수백 명의 인파가 마치 개미떼의 행렬 같은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 사람인 것이 한편 놀랍기도 했다. 나도 서둘러 오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히니 낯익은 천지가 떠올랐다.
어제 올랐던 서쪽 언덕이 보이고, 중국측 최고봉인 백운봉(白雲峰:빠이윤펑:2.691m)과 북한 측 장군봉(將軍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두산 상상봉인 장군봉>
백두산의 최고봉인 이 봉우리는 해방당시까지는 병사봉(兵使峰) 2.744미터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 2.750미터로 다시 측정되었다고 「한국의 산하」는 밝히고 있으나 지도상에는 2.749미터로 되어있었다. 병사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이니 서로 통하는 뜻 같기도 하다.
불타는 강대나무란 우리가곡에 이른 “백두 상상봉”, 어떤 이는 “백두산 상봉”이라 불렀지만 그 봉우리가 바로 저 봉우리일까? 2천 미터 이상에는 수림이 없는 백두산, 더구나 붉고 검은 조면암과 현무암의 메마른 봉우리의 강대나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국어사전에는 없는 “강대나무”를 인터넷사전에는 “선채로 껍질이 벗겨져 말라죽은 나무”라 풀이 했는데, 나무는 죽어야 껍질이 벗겨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타고난 목숨 다 살고 죽은 나무라 하면 어떨까.
천지 남녘으로 우뚝 솟은 가보지 못하는 아직은 가볼 수 없는 늠름한 봉우리를 바라볼 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잡념일 뿐이다.
엄청 큰 새 한 마리가 서둘지 않고 날아와 뾰족한 바위위에 앉더니 미동도 없이 천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메모지에 수리 취자(鷲)와 까마귀 오자(烏)를 써서 경비원에게 보였더니 그는 후자에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나중에 가이드에게 확인한바독수리라 하였다.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날렵한 산제비들이 무리지어 곡예를 하듯 하늘을 나는데 살펴보니 날벌레를 낚아채는 모습이다.
천지의 북쪽 철벽(鐵壁)봉과 용문(龍文)봉 사이가 달문이다.
달문이란 곧 月門이라는데 천지에서 넘치는 물이 넘어가는 무너미라 한다. 이곳에서 넘친 물이 저 유명한 U자형 빙하대협곡의 장백폭포로 흘러내린다.
<장백폭포, 옥룡이 나는 것 같다하여 비룡폭포라고도 불린다>
장백폭포, 두 가닥 하얀 물줄기가 천지를 뒤흔드는 우렁찬 굉음을 지르며 68미터를 떨어져 그 아래 20미터의 웅덩이를 파 뒤집고는 스스로 기세를 누그러트려 온화한 얼굴로 흘러내린다.
그 떨어지는 모습이 날아가는 용 같다하여 비룡(飛龍)폭포라고도 부른다는 물줄기를 나는 그 아래 먼발치 바위에 걸터앉아 말을 잊고 바라보고 있을 때 실로 작은 힘이 내 가슴에 차오름을 느꼈다.
하늘도 땅도 구분되지 않은
태초의 잿빛 공간
속옷처럼 얇은 구름 한 겹
사르르 벗겨지는 순간
드러나던 매끈한 각선(脚線)
그 바위 샅 밑으로
천지를 개벽하듯 우렁찬 소리 지르며
쏟아지는 두 갈래 흰물줄기 이도백하(二道白河)
이 창대한 자연의 신비 앞에
찌든 희수(喜壽)의 허물 벗고 거듭나는
작은 나비 한 마리
마음은
벌써 높은 하늘을 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도문>
마음 같아서는 하루 남은 오늘도 또 백두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계획된 일정에 개인행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열들의 얼이 배인 땅을 둘러보기에 이르렀다.
연길 조양천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이 걸리는 도문(圖們:투먼)은 내 나이또래인 국경도시이다.
80년 전만하더라도 민가 100여 호에 못 미치던 작은 마을이 1933년 장춘과 또 1935년 모란과 철도가 이어지면서 고을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위만통치기에 일제는 영사분관과 헌병 분견대를 두기에 이르렀다.
특히 넓지 않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우리나라와의 교류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깊고 끈끈한 곳이었다.
<1920년 사철로 철치된 두만강 철교 :중앙>
고려조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영특하고 날쌘 도령 이성계가 두만강 기슭에 이르니 맞은 편 숲속에서 힘세고 사나운 퉁두란(佟豆蘭)이 나오며 다짜고짜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에 이도령이 맞받아 쏘니 두 화살이 공중에서 부딪쳐 강심으로 떨어졌다.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지라 이번에는 퉁두란이 살을 날려 물동이에 구멍을 내었다. 이를 본 이도령은 얼른 화살에 흙을 찍어 날려 그 구멍을 막았다. 이를 본 퉁두란이 읍을 하고 인사를 나누어 그들은 옛 친구처럼 손을 잡았다. 이로 인해 그 산을 귀인봉이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여진의 후예인 퉁두란이 이성계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므로 써 청해(靑海) 이 씨의 성을 하사받았으며 이성계의 휘하에서 믿음을 받으며 조선왕조 개국에 많은 공을 세운 것도 인연 아니랴.
전설어린 강둑에 올라서니 함경북도 종성군 상삼봉(上三峰)읍과 1920년 사철로 개통되었다는 철교 넘어 북한의 시가지와 산하가 눈 안에 들어온다.
전에는 더러 가까이 가보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절대 안 된다며 가이드의 주의가 지엄하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회령 종성 온성을 거쳐 혼춘에서 혼춘하(琿春河)와 합쳐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장장 547킬로의 굽이굽이에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그 강물 위에 대나무 뗏목을 띄우고 관광객 몇 명을 태우고 노 젓는 사공이 있었지만 우리가슴에 푸르게만 새겨진 두만강 물은 새카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두만강(豆滿江), 중국에서는 도문강(圖們江 :투먼쟝)이지만 어떨 땐 도망강(跳亡江)이라 한다고 가이드는 익살을 부렸지만 어딘지 내 가슴엔 애절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청산리 전적지>
잔뜩 찌푸린 날씨, 오늘은 고생을 좀 하시겠습니다 하는 가이드의 인사말에서 일기예보가 좋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청산리(靑山里:칭싼리) 전적지, 1년 365일 중에 360일은 안개에 덮혀있다는데 오늘도 짙은 안개 속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그 날의 영상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통쾌한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무기 인원 물자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독립군은 1920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을 예견하고 이동을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8월 하순 어랑촌(漁郞村)에 도착하여 이곳으로 이동한 안무의 국민회군 등과 연합하였으며,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로 이동하였다.
이에 일군 아즈마 소장은 야마다 토벌대와 무산 수비대로 하여금 김좌진 군을 포위하여 공격토록하고 자신은 주력부대를 출동하여 홍범도 연합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아침 9시, 청산리 백운평 베개봉 기슭을 찾아드는 일군 보병전위대 90명은 매복한 독립군의 총탄에 전멸되었다.
이튿날 오전은 어랑촌 북쪽 완루구 골짜기에서 홍범도 장군의 연합대와 격전을 벌렸는데 정찰척후정보를 들은 아군은 미리 배치한 저항선에서 싸우는 한 편 예비대는 삼림을 에돌아 양쪽을 공격하니 북완루구로 피하던 일군 한 부대는 독립군이 중앙 고지에 있어 일본군과 싸우는 줄 오인하고 거기에 맹사격을 가하니 그 부대는 400명이 전멸하였다(천리 두만강 연변 인민출판사 간)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통쾌하고 자랑스런 대첩(大捷) 아니랴.
<1년 365일 중 360일을 얼굴을 가린다는 청산리 전적지>
멀리 비암산(琵岩山:베얀싼)이 비구름에 싸인 채 바라다 보인다.
일제의 눈을 피하여 우리 독립투사들이 둘러앉아 뜻을 모으던 곳, 늙어가던 푸른 솔은 일제의 사약을 받아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중국정부가 일송정(一松亭)이라는 이름의 육각 정자를 짓고 소나무도 한그루 옮겨 심었다는데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어린 소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원할 뿐이다.
<대성중학교>
우리국민이 가장 애창하는 가곡 「선구자」, 거기 천년을 두고 흐른다던 한줄기 해란강(海蘭江:하이란쟝)은 이제 도심의 오염을 피할 수 없어서 일까. 노래를 부르며 가슴에 새기던 그런 감상이 눈엔 전연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그토록 그리던 해란강을 한 번 건넜다는데 의미가 있지 않으랴.
보신탕 삼계탕 냉면이 용정(龍井:룽징)의 3대 특식이라는데 우리는 냉면으로 허줄한 배를 채우고 대성중학교를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윤동주님의 시비가 반겨 맞는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시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이 시를 낭송하고 또 들어보기 어찌 한두 번이랴 만 「尹東柱 詩碑」라 새겨진 자연석을 머리에 이고 2단 검은 대리석 좌대위에 앉은 하얀 돌에 새겨진 서시에서 낭랑한 그의 육성이 울려나오는 듯하다.
1917년 12월 30일 용정시 명동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조국광복의 소망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든 그는 끝내 사상범이란 죄목으로 일제의 마수에 걸려 1945년2월16일 그토록 바라던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후쿠오카형무소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던 님, 뜻대로 하셨으니 이제 편히 쉬소서......
계획된 일정을 모두 마친 출발 전야의 만찬이다.
메마른 땅 간도에도 한국의 참이슬로 젖어 가는가 보다. 평소 지극히 애주하는 친구는 부푼 마음만큼이나 취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일찍 저녁을 마치고 버스 속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이 늦은 벌로 노래를 부르라 청했다.
거나해진 친구는 마이크를 잡고 사실 거나한 노래가 아니지만 「선구자」를 불렀다. 이에 서른 명에 이른 일행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목청을 돋워 따라 불렀다.
그 장중한 화음이 내 가슴에 메아리치며 서서히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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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여행기 감사합니다~~~~~~~~~